해리 놀스 아자씨가 '2004년 해리의 10대 영화' 목록에서 <태극기~>를 1위에, <실미도>를 7위에 올려 놓으셨다. 이분 박찬욱에게 반한 이 후 한국영화에 상당히 매료된 듯하다. 경사다. 현대사의 아픔이라는 배경 안에서(오로지 배경) 진동하는 사람 냄새를 읽어낸 두 편의 한국영화가 놀스 아저씨의 감수성마저 흔들어 버린 것 같다.

아저씨는 '역대 최고의 전쟁영화, 스펙타클하면서도 형제의 이야기를 친근하게 잘 다룬 영화'라며 <태극기~>를 극찬하고 있다. <실미도>에 대해서는 '특공임무 영화의 최고 중 하나'라는 평가와 더불어 영화의 역사적 배경도 첨부해 놓았다.

세계적 영화평론가가 뽑은 목록이니 공신력도 있겠다 한국영화의 이름이 널리 퍼져간다며 쾌재를 부르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물론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나라의 역사를 살짝 들여다보는 입장에 서지 않은 나로서는, 놀스의 평에 동의할 생각이 전혀 없긴 하지만 말이다.

두 편의 영화가, 아집스러운 권력에 의해 힘 없는 자들이 고스란히 떠맡아야 했던 '恨'의 울분과 그 현장으로서의 우리 현대사를 '제대로 연관지으려 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 시각을 떨쳐버릴 수 없지만... 어쨌든 두 영화가 인간 보편적 정서를 측정하는데는 성공한 듯하다. 축하한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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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명화가 없어진단다. 대신 그 시간에 '겨울연가'가 재방된다고 하니 일본에서의 반응이 뜨겁긴 뜨거웠나 보다.

'겨울연가'가 정말 과거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과 잃어버린 감수성의 세계를 다시 한번 찾아다주는 이쁜 판타지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더라도..

40년간 지속되어온 대표적 안방극장이 폐지되어야 하는 이유가.. 그리고 성우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구수한 목소리를 들으며 살며시 잠들 수(ㅡㅡ) 있는 기회를 잃어버려야 하는 이유가 '겨울연가'라면 닝기리 조또를 다시 한번 외치지 않을 수 없겠다. 시청률.. 물론 중요하겠지. 어차피 이름만 공영방송이었으니까.

폐지반대 서명이라도 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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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어려움, 그리고 가능성에 관해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가정, 학교, 직장 등 사회적 틀 안에서 타인과 관계 맺는 일은 삶의 가장 중요한 영역 중 하나로 인식된다. 하지만 어떤 다른 것이 그 관계의 주된 목적으로 자리 잡을 때, 인간 자체와의 소통은 종종 이해타산이라는 복잡한 현실 밑으로 가라앉기도 한다.


영화 <룩앳미(Comme Une Image)>는 인간관계의 미묘한 어긋남을 섬세하게 관찰함으로써 평범해 보이는 일상 뒤에 감추어진, 소통이 부재한 현대의 인간 군상들을 묘사하고 고발한다. <타인의 취향>으로 잘 알려진 아녜스 자우이 감독은 그 빈 자리로 권력이 들어왔을 때 생기는 작은 에피소드들을 고전 음악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담담하고 절제된 시선으로 풀어낸다.

뚱뚱한 몸매가 불만인 롤리타는 사람들이 유명한 작가인 아버지에게 접근하려고 자신을 이용한다며 볼맨 소리를 한다. 그녀의 아버지 에티엔은 유명한 지성인이지만 정작 주변 사람들을 배려할 줄은 모른다. 다른 사람 기분이야 어떻든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내뱉는 독설가이며, 딸의 목소리가 녹음된 노래 테이프는 꼭 들어달라는 그녀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포장조차 뜯지 않는다.

더구나 롤리타가 유일하게 진실할 거라 믿었던 음악 선생님 실비아마저 무명작가인 남편 피에르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롤리타의 음악 수업을 맡고 있는 상황이다. 피에르는 억지로 먹는 토끼 고기를 맛있다며 자신의 출세를 위해 에티엔의 비유 맞추기에 급급할 뿐이다.

영화는 한 부녀와 그들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이 그려내는 일상적 부조리를 통해 권력을 축으로 하는 관계 맺음은 결국 타인에게 상처를 입힐 뿐이라고 역설한다. 아네스 자우이 감독은 이 같은 주제를 끌어내고 인물 간의 작은 갈등들을 부각시키기 위해 ‘시종일관 오가지만 결국은 소통되지 않는 대화’로서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대화는 영화 속에서 인간 자체에 대한 관심이 이해관계의 주변에 위치할 뿐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이다. 영화 내내 대화가 이어지지만 이것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대화는 독백이 될 뿐, 서로를 이해하는 수단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에티엔이 아예 듣지 않거나 대충 둘러대는 순간 롤리타의 고민과 부탁은 언어의 역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각각의 이해관계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그들의 동거 공간, 의사소통을 위한 대화는 단절되며 가족, 친지라는 인간적 유대는 세속적 이해 판단 아래 허울 좋은 명목으로 예속되고 만다. 인간 본연에 대한 접근을 전제하지 않은 이 같은 관계들은 균열될 조짐을 조금씩 보이다가, 롤리타의 공연을 에티엔이 아예 보지도 않은 그 날 밤에 이르러 결국 상처와 눈물을 통해 표면으로 드러나고야 만다.

이렇듯 영화 <룩앳미>는 우리가 늘 접하는 인간관계라는 고리가 정작 인간으로 연결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불협화음을 아이러니한 대화와 세밀하게 포착되는 감정의 흐름 안에 차분하게 담아낸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돋보이게 해주는 것은 슈베르트,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클래식 선율과, 대화가 어긋나면서 빚어지는 유머 등의 극적 플롯을 적절하게 활용,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현실 묘사를 부드럽게 조율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녜스 자우이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는 인간적 유대를 잃어버린 그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따뜻한 시선 또한 잊지 않는다. 에티엔은 롤리타가 울음을 터뜨리고 나서야 아버지로서의 대화를 시도하며, 그제서야 실비아는(감독 자신이 연기한) 참고 있던 불만을 에티엔에게 표출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감독은 롤리타를 그녀 자체로 대해준 유일한 인물 세바스티앙에게서 그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는 길거리에 쓰러진 자신에게 옷을 덮어준 롤리타의 따스함을 잊지 않으며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녀 곁을 맴돈다.


롤리타가 자신의 오해를 깨닫고 다시 한번 세바스티앙에게 옷을 덮어주는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는 인간이 진정으로 소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관심, 그리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화임을 차분하게 전달한다.

롤리타가 부른 'An Die Musik'이 집 안에 울려퍼질 때, 방에 하나하나 불이 켜진다. 허공에 맴돌지 않고 공간에 울리는 목소리, 내면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활용하라는 실비아의 가르침처럼 롤리타의 노랫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아녜스 자우이 감독은 인간과 인간이 소통하기 위한 대화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롤리타의 맑은 목소리로 화답한다.

<룩앳미>는 여전히 백인 중산층 가정의 행복함이 주된 관심사인 할리우드의 가족영화와는 다른 지점에 있는 영화다. (영화 속 인간 군상들 위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화려하고 재미있는 가족영화가 극장가를 수놓는 요즈음, 조용한 영화 한 편으로 가족과 친구, 동료와의 관계를 천천히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룩앳미>는 추운 겨울 속 따뜻한 당신을 발견할 수 있는 작은 선물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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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몽상가들 (The Dreamers / I Sognatori, 2003)
감독 :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출연 : 마이클 피트, 에바 그린, 루이스 가렐, 로빈 레누치

원래 오늘 개봉 예정이었지만 2월로 밀린 듯하다. 각종 영화제에서 이미 선보이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볼거라 굳게 마음먹고 있었는데... 아쉽다. <시티 오브 갓>도 위태위태하다.


영화는 시네마테크 관장이던 앙리 랑글루와가 정부의 부당한 간섭에 의해 해고되고, 사람들이 서서히 거리로 나오는 그 때를 회고하면서 시작한다. 어떻게 동시대 패러다임과 마주할 것인지에 대해 혼란스러워 했던<혁명전야>를 거쳐, 베르톨루치 감독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68년이 남긴 허무와 가치전복의 상처를 기이한 섹스라는 장치 안으로 밀어 넣으며 '성의 정치학'에 관한한 첫 목록에 등장해야 할 감독으로 인식되어 왔다.

환갑이 넘은 그는 <몽상가들>에서 68년의 정체성으로 다시 한번 돌아간다. 영화는 거리를 자세하게 관찰하거나 역사를 하나하나 기록하지 않는다. 베루톨루치는 아직 성장하지 못한 아이들이 서로 소통하는 과정, 그리고 그 관계들이 그려내는 미묘한 감수성의 떨림을 가지고서 당시의 미숙하지만 순수했던 열정을 추억하고 있다.(또는 그랬다고 믿고 있다)

권력은 그야말로 거리에 있었고 영화와 섹스를 말하는 것이 곧 혁명과 자유를 상징하던 그 시절. 이미 성장해버린 육체와 여전히 자궁 안에 있는 정신이 혼융된, 완전하지 않기에 기괴함에도 순수했던 성적 유희는 금기의 체계를 깨는 것이 존재로 다가가는 또 다른 방법일 수도 있다는 베르톨루치의 수평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영화로써 세상과 소통하고, 또 삶과 대화 그 자체가 누벨바그 영화같은 세 아이들의 몽상은 결국 베루톨루치의 몽상이자 자위의 회고담이 아닐까.

감독의 거억이 과잉된 자의식으로 함몰되지만 않았다면, <몽상가들>은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솔직하고 가장 재치있는 '역사 기록법'으로 회자될 수 있을 것이다.


밑에 포스터는 너무 에로틱하고 불순한 상상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심의에서 반려되었다고 한다. 행여나 국민에게 건전하지 못한 정서가 심어질까봐 사춘기 초기의 철없는 상상력까지 동원해대는 심의위원님들의 지랄에경의를 표한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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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라는 양분을 꾸역꾸역 쳐먹고 어느새 괴물이 되어버린 비옥한 영화풍토 속에서, 무더기로 떨어지는 맛깔스런 열매를 간식 삼아 주워 먹으며 대충 곁다리 걸치고 살것인가.

거대하게 뒤틀린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또는 원래 없을지도 모를) 태양을 마주하고자 밟히고 밟혀도 흙을 파먹을 지언정 생명의 줄은 놓지 않는 작은 벌레의 몸짓을 흉내낼 것인가.

현실은 자꾸 전자의 세계로 들어오라 유혹한다.
나는 뼈속까지 가난뱅이거든.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나같은 넘버쓰리에게는 이런 상념조차 '지랄떨고 자빠졌네.'라는 것.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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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이 기억해야 할 남자배우


2년 전 <결혼은 미칫진이다>를 보면서 나는, ‘그냥 그런 탤런트 한 명이 또 영화로 흘러왔겠지’라고 대충 선을 그어버렸던 나의 선입견이 얼마나 오만불손한지를 깨달아야 했다. <결혼은 미친짓이다>에서 감우성은 결혼제도로의 귀속을 위선이라 규정짓지만 그로 인해 겪어야 하는 현실적 괴리 안에서는 완전히 자유롭지도 못한, 준영이라는 인물로 등장했다.


감우성은 드라마에서 보이던 세련된 도시적 이미지를 준영 안에 투영하는 한편, 결혼과 섹스에 대해 여전히 혼란스러운 현대인의 표정 또한 영화가 요구하는 대로 적절하게 담아냈다. 11년 드라마 경험은 절대로 ‘그냥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올 한 해 스크린을 채워온 많은 스타들 중에서 2004년이 기억해야 할 단 한 명의 남자배우를 꼽아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 편에서 남긴 아우라는 넘지 못했지만 여전히 건재를 과시한 최민식과 송강호, 기록적인 숫자의 관객과 대면한 설경구, 장동건, 그리고 <주홍글씨>로 돌아온 한석규 등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저마다 내공을 십분 발휘했으니 말이다.

이 출중한 연기자들 가운데 굳이 감우성이라는 이름으로 지면을 꾸리는 이유는 그가 열연한 이미지에서 자신의 어두운 내면과 마주하는 동시대 누군가의 얼굴과, 제대로 기억되지 않는 어떤 사건을 되짚어보라고 말하는 고통에 찬 시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 내면의 그늘은 감우성의 표정과 대사, 몸짓을 통해 두 영화 속에 매우 적절하게 녹아든다.

감우성은 올해 <거미숲>과 <알포인트>, 두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거미숲>에서는 일상적 삶에서 살인사건으로 묘하게 얽히는 강민 PD 역할을, <알포인트>에서는 알포인트가 자아내는 공포 앞에서 무기력하게 함몰되어가는 최태인 중위라는 인물을 그려냈다.


<거미숲>, 분열된 두 자아

송일곤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거미숲>은 관객이 편하도록 차근차근 설명하는 영화가 아니다. <거미숲>은 도망쳐왔던 기억으로 회귀해 기어코 소통을 시도하려는 한 인간의 어떤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 처음에는 살인자의 실체를 추적하는 관습적 내러티브의 문법으로 시작하지만 그것도 잠깐, 영화는 인과관계나 시간의 흐름과는 거리를 두며 마치 꿈속을 유영할 때나 만날 듯한 모호한 이미지로써 기억의 파편들을 얽어낸다. 

그리고 그 주체는 강민의 분열된 자아들이다. 망각의 흔적과, 죄책감이 빚어낸 갖가지 환영들을 경험한 후, 두 자아는 분열의 근원지인 거미숲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서로를 마주보기에 이른다. 영화의 마지막, 단절되었던 기억과 고통스럽게 대면하는 순간, <거미숲>은 강민의 영혼에 삶을 지속하라는 의지를 불어넣으며 구원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강민은 에우리디케를 잃은 오르페우스이자 괴로운 과거와 공존함으로써 불안할 수밖에 없는 동시대의 ‘누군가’이기도 하다. 강민은 감우성의 몽롱한 눈빛을 통해 자신과 그 누군가에게 비로소 나직하게 입을 연다. 숲으로 가야 한다고.

<거미숲>은 송일곤을 재발견하는 영화인 동시에 감우성을 배우로서 확실하게 인지시키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배우는 작품이 전달하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전문직업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감독과 직접 토론해가며 강민의 분열된 이미지 속으로 자신을 지속적으로 투영시킨 감우성의 노력이 <거미숲>을 뛰어난 영화로 만든 이유 중 하나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알포인트>, 과거 또는 현재의 얼굴

<알포인트>가 평단과 관객에게서 공통적으로 호평을 받은 이유는 안전한 전략에만 안위한 채 사다코의 망령으로부터 조금도 나아갈 의도가 없었던 올해의 공포물 속에서 <알포인트>만이 유일하게 장르를 활용할 줄 아는 영화기 때문이다. 공수창 감독은 미화되기에 급급했던 베트남을 악몽으로 환원시켜 호러의 장르로 집어넣고 나아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딜레마적 상황에 회의의 시선을 남기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알포인트는 역사의 어긋남이 만들어낸 원귀, 그 원귀가 만들어낸 또 다른 한(恨)들이 그물망의 형태로 똬리를 틀고 있는, 들어왔으되 나갈 수는 없는 폐쇄적 공간이다. 그 중심에 자리한 최태인 중위는 베트남 안에서는 가해자로, 공포로서의 낯선 타자 앞에서는 피해자로 존재한다. 그리고 명분 없는 전쟁이 알포인트에 공포를 가져왔음이 명백해질 때, 최태인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운명을 동시에 겪어야 하는, 어딘가로 내몰렸던(또는 내몰리고 있는) 익숙한 청년의 얼굴이 된다.


감우성은 이 영화에서 공포와 광기, 절망 등 다양한 내면의 스펙트럼을 표출하며 이국땅에서 낯설 수밖에 없는, 그래서 무기력하고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표정을 담아낸다. <알포인트>는 “인간의 심리를 드러낼 수 있는 내면연기가 하고 싶다.”란 감우성의 말을 울림으로 만들어준 영화로도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거미숲>의 강민과 <알포인트>의 최태인은 과거로 회귀한다는 설정에 있어 닮은 인물이다. 강민은 불완전한 주체 안에서 비틀거리듯 조각난 기억을 끼워 맞추며, 최태인은 역사가 남겨놓은 보이지 않는 잔존물에서 허우적거린다. 차이라면 전자가 구원의 희망에 도달하는 반면 후자는 어디에서도 탈출구를 찾지 못한다는 점이다. 감우성은 그 두 인물의 내면을 통해 깊숙한 곳에 꼭꼭 감추어 두고 있었던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끌어내고야 만다.


배우로서 거듭나기, 또 다른 음색을 찾아서

영화라는 메커니즘이 스크린을 통해 관객 앞으로 가기까지가 얼마나 힘든 여정인지 감우성은 두 영화가 겪은 쉽지 않은 행보를 통해 몸소 터득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 남자의 머릿속에 얽힌 기억과 환상이라는 그리 친근하지 않은 소재를 역시 전혀 친절하지 않은 플롯으로 구성한 <거미숲>은 개봉날짜를 잡는데 애를 먹었을 뿐만 아니라 스크린에 모습을 나타낸 것도 잠시, 소리 소문 없이 쓸쓸하게 퇴장하고 말았다.

<알포인트>는 흥행에서 대중적 성공은 거두지만 촬영일정의 반복적인 수정과 <지옥의 묵시록> 못지않았던 캄보디아 로케이션의 어려움 등 태생적 수난에 몇 번이나 부딪혔고, 감우성은 마치 자신이 한 영화의 탄생을 위해 진통을 감내하려는 듯 간 수치가 죽음 일보 직전까지 올라가는 육체적 한계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는 <거미숲> 촬영 당시, 강민의 뇌수술에 보다 현실감을 주고자 머리의 반을 밀자고 직접 제안했으며 살해 장면을 찍을 때는 자신의 목소리로 표현 수위에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알포인트>에서 관등성명을 대라고 고함치는 장면은 그의 끈질긴 고집이 지켜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 한 편 찍는데 힘들지 않은 배우가 어디 있겠냐마는 감우성이 결코 쉽지 않게, 나름대로의 고민을 가지고 연기에 몰입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지난 주 한해를 결산하는 영화제들이 이어졌지만 그 곳에 감우성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거미숲>과 <알포인트> 역시 몇몇 후보 목록에서 간간히 눈에 띄었을 뿐 별다른 주목은 받지 못했다. 물론 영화제 수상여부가 영화나 배우를 가늠하는 절대적 가치가 될 수는 없다.

약간은 쌀쌀한 지금, 정작 필요한 것은 비단 정신·육체적 고통을 감내한 감우성의 ‘배우되기’나 <거미숲>과 <알포인트>가 현실과 대면하고자 시도했던 치열한 작업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영화들이 공존하고 회자될 수 있을만한, 다양한 목소리의 수렴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

<알포인트>의 공수창 감독은 감우성을 일컬어 “약간의 튜닝 차이에 따라 음색이 미세하게 달라지는 악기 같은 배우"라고 했다. 감우성이 다음 영화로 <간큰 가족>이라는 코미디 장르를 선택했다는 소식이 들리는 요즈음, 그가 코미디에서는 어떤 새로운 음색을 선사할지, 그리고 언제인가 다시 들려줄 심연의 음색은 어떤 얼굴을 그려낼지 자못 궁금해진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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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창조적으로 소통하기 위해서


바쟁의 영화이론

앙드레 바쟁은 19세기 실증주의의 영향 아래 있던 영화이론에 현상학과 심리학을 끌어들였다. 이것은 영화가 스크린 속에서 뿐만 아니라 프레임 바깥의 외부 세계와도 연관되어 존재함을 의미한다. 현실과 관객이라는 외부 영역과 능동적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민주적 개념이 영화로 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바쟁에게 있어 관객이란, 영화가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이미지를 경험에서 터득한 스스로의 주관으로 재구성하는 사람이다. 영화적 오브제는 관객의 머릿속을 지나면서 현실 속 이미지와 구별되고, 그 구별을 통해 관객은 영화의 또 다른 창조자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쟁은 관객의 심리가 민주적이고 주체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서 영화가 리얼리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조작된 영화들을 비판하며 소비에트 몽타주 미학을 그 일례로 들었다. 주관성이 개입된 조작의 이미지들은 관객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바쟁은 현실과 세계 그 자체가 가진 모호함을 그대로 전달하는 영화들-장 르느와르의 영화나 네오리얼리즘과 같은-을 옹호했다.

그는 리얼리즘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끌어왔다. 현실을 닮은 모호한 이미지들은 경험을 통해 체화해온 주관성을 가지고 관객이 창조적으로 지각하게 된다. 이 같은 절차는 관객에게 또 다른 체화의 과정으로 작용한다. 영화는 관객에게 있어서 지각할 수 있는 어떤 경험이 되는 것이다.

현상학은 그 경험을, 세계와 타인들 속에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는 경이로움이라고 말한다. 결국 바쟁에 따르면, 관객이 체화된 주관으로서 재구성하고 세상과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 놓는 영화가 좋은 영화인 셈이다. ‘창조적인 다큐멘터리’의 작가로서 로버트 플래허티를 높게 평가한 이유다.


대표적인 ‘앙드레 바쟁적’ 영화 <엘리펀트>

집안에 거대한 코끼리가 들어앉았다. 어떻게 하긴 해야겠는데 손쓰기가 쉽지 않은 상황, 결국 어쩔 수 없이 코끼리와 함께 살며 그 상황에 점점 익숙해진다. 구스 반 산트는 미국의 고등학교를 서양우화에 나오는 코끼리에 비유한다.

영화 <엘리펀트>는 ‘어쩔 수 없는 코끼리’인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충격의 16분을, 감정이입을 최대한 자제한 채 그야말로 ‘관조적’으로 뒤쫓는다. 현실을 자의적으로 구성하지 않은 채 당시의 일상적 풍경을 있는 그대로 펼쳐낸다는 점에서 <엘리펀트>는 앙드레 바쟁이 말한 좋은 영화에 가깝다.


영화 속 아이들은 특별하지 않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에 대해 고민하며 눈물 흘리는가 하면 학교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사진 찍는 것이 낙인 녀석도 있다. 다이어트 중독에 걸린 세 명의 치어리더나 외모로 인해 고통 받는 여자아이 등 모두가 쉽게 볼 수 있는, 고등학생의 그저 그런 모습이다.

심지어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알렉스와 에릭조차 평범한 아이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왕따를 당하고, 게임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며, 히틀러의 영상을 보기는 하지만 영화는 이런 상황을 살인의 동기로 단정 짓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누구나 총을 살 수 있는 환경 역시 하나의 단서일 뿐 원인은 아니다.

어디에서나 만나고 겪을 수 있는 이 아이들의 일상은 ‘추악하고도 화창한 어느 날’에 일그러진다. 그 균열의 순간을 담기 위해 구스 반 산트는 사실적이고 건조한 문법을 선택한다. 비극과 그 직전의 ‘아무렇지도 않음’에 대한 관찰은 필연적으로 관객의 시선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평범한 생활을 담담하게 담은 숏들은, 절제된 카메라와 어우러진 채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을 하나하나 교차하고 반복한다. <엘리제를 위하여>와 <월광 소나타>의 슬픈 연주는, 롱테이크로 끌어보지만 결국은 비극 앞에 멈춰 서야만 하는 아이들에 대한 애도이자 관객이 감정을 소통할 수 있는 입구가 된다.

구스 반 산트는 시간과 공간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하나하나 훑어보면서 그 모든 것들이 일상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왜 비극이 발생했는가?’라는 물음은 프레임 밖에 남겨둔 채 말이다. 앙드레 바쟁이 <엘리펀트>를 일컬어 진정한 ‘창조적 다큐멘터리’라고 극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같은 콜럼바인 고교 사건을 다루었지만 마이클 무어가 미국에 내재하는 폭력성을 주관적인 분석으로 따져 묻는 반면, 구스 반 산트는 그저 아이들을 차분히 응시한다. <볼링 포 콜럼바인>이 잘 짜여진 논설문 또는 거꾸로 읽는 미국사라면, <엘리펀트>는 그 풍경에 대한 한 편의 ‘시화(詩畵)’를 연상시킨다. 앙드레 바쟁의 시각으로 본다면, 주관이 개입할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 놓은 <엘리펀트>가 영화적으로 더 뛰어난 화법을 가지는 것이다.



영화를 창조적으로 재구성 한다는 것

지나친 이상주의자로서 바쟁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바쟁 이 후 등장한 다양한 테크닉은 롱테이크와 딥포커스, 롱 숏만이 영화기법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서로 다른 형식을 가진 영화들이 공존하는 지금에 봤을 때, 리얼리즘이 드러나는 정도만으로 관객의 참여 가능성을 단정했던 바쟁의 이론은 무리가 따른다. ‘또 다른 창조’의 권한을 리얼리즘만으로 미리 재단해서는 다원화가 정착된 지금의 영화 풍토를 아우를 수 없기 때문이다.

바쟁이 말한 민주적 재구성자로서의 관객은, 주관적 참여가 가능함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필연적으로, 영화를 규정하고 선택할 권리마저 손에 쥐게 되었다. 관객이 가진 다양한 기호와 시선의 영역이 영화를 창조적이고 능동적으로 해석한다는 행위에 선행되거나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의 창조적 재구성이라는 화두는 결과적으로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가 보다는, ‘어떤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영화가 세상을 들여다보는 예술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바쟁이 열어 놓은 영화와 관객의 소통 가능성을 여전히 전제로 삼아야 한다.

다시 <엘리펀트>로 돌아와 보자. 이 영화를 바쟁에 따라 좋은 영화라 규정하든지, 스스로 판단하든지 그것은 자유다. 하지만 만약 ‘관객의 역할’에 동의한다면, 능동적으로 영화를 완성하고 싶다면 해야할 일은 분명해진다. 바로 <엘리펀트>가 남겨 놓은 그 빈 공간으로 들어가 <엘리펀트>를 만든 현실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해보는 것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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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시티 오브 갓 (Cidade De Deus / City Of God, 2002) 
감독 :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출연 : 마테우스 나스터갈, 세우 호르제


정말 보고 싶던 영화였는데... 운좋게 종로영화제에서 발견...

<증오> 이 후 가장 힘있는 영화라 생각한다. <증오>가 세 녀석의 그 대상조차 찾지 못하는 '증오'를 통해 폭염처럼 답답한 세상풍경을 그려냈다면, <시티 오브 갓>은 어떻게 폭력이 '변두리'라는 공간을 지배하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내러티브는 경쾌하고 등장인물들은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지만, 사실상 영화는 매우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마지막에 나오는 호러영화 문법-아직 끝나지 않았다-은 어떤 호러의 그것보다도 찜찜한 여운을 남겨준다.

'시티 오브 갓'의 아이들은 탈출할 수 있을까...?
그들의 표정은...

목이 떨어져 나가야 하는 운명에 봉착한, 한 마리 닭의 눈동자처럼.. 불안하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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