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대사, 밈이 된 대사 하면 <신세계> <타짜> 등을 잘 떠올리는데, 실은 나온 지 좀 돼서 그렇지 <넘버 3>(1997)만한 게 또 없는 듯. 작품의 퀄이든 대사의 찰짐이든 한 수 위라고 생각. 그중 좀 길지만, 검사로 나온 최민식의 대사 하나.

 

"니들만이 깡패 새끼들 아냐. 뇌물 받는 새끼, 주는 새끼. 비자금 만드는 새끼들. 지 애비 빽 믿고 설쳐대는 애새끼들, 그 애새끼들을 믿고 설쳐대는 개새끼들. 하여튼 땀 흘려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 모든 개좆같은 새끼들. 그 새끼들이 진짜 깡패 새끼들이야."

 

 erazerh

 

반응형

 

건조하고 서늘한 팩트들이 가장 중요한 진실 하나를 빙 둘러싼 구조의 영화. 가운데 있는 그 메인 이벤트성 팩트가 감춰진 탓에 모든 게 객관적인 동시에 그 무엇도 객관적이지 않게 된다. '사실''사실이겠지', 어쩌면 어마어마한 간극.

 

이렇다 보니 아들과 아버지의 후반부 그 시네마틱한 장면조차 잠시 먹먹하다 말고 의심으로 차갑게 물든다. 감성의 영역으로 막 넘어가려는 관객을, 되레 목덜미를 붙들고 이성의 자리에 주저앉히는 느낌. 상반된 두 에너지가 전에 없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이 신(scene), 혹은 이 신을 창조한 앞선 숏들과 숏들의 배치는 그야말로 압권.

 

영화가 남긴 최종 명제가 확 와닿는 취향 쪽은 아니라 개인적 걸작 반열에는 (아직) 올리지 않았지만, 형식상 완전무결하고 놀랍도록 지적인 영화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 erazerh

 

반응형

 

배우 변희봉이 빚어낸 많은 명장면이 있겠지만, 가장 먼저 기억나는 건 <플란다스의 개>에서 '보일러 김씨' 썰을 풀던 지하실 씬이다. 특정 장르로 규정지을 수 없는, 혹은 그 어떤 장르라도 될 수 있는, 그로테스크와 코미디를 한 번에 담은 얼굴로, "보일라 돈다잉, 보일라 돌아불제잉"

 

배우의 얼굴을 하나의 행성처럼 포착해낸 봉준호 감독의 연출도 좋았지만, 분명 그걸 가능케 한 건 의뭉스러운 음영을 만들 줄 아는 변희봉의 표정, 그리고 목소리였다.

 

후 이와 조금이나마 비슷한 느낌의 숏은 <라이트하우스>(2019)에서 윌렘 데포를 통해서나 만날 수 있게 되는데, 그조차 변희봉만 못한 게 사실이다. ⓒ erazerh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반응형

 

<기생충>을 포함해 '계급'을 소재로 삼은 영화 중 어느 것도 끌로드 샤브롤의 <의식>(La Ceremonie, 1995)에는 근처도 못 가고 있다는 게 내 생각.

 

그러니까 어느 수준이냐면, <의식>은 일단 계급구조를 끊임없이 드러내되 그 안에 감정을 집어넣지 않는다. 약자·여성·연대 따위의 유행어 같은 키워드가 들어설 공간 자체가 없다. 세상은 물론 불합리하지만 이 영화에서 불합리는 위에서 아래로만이 아니라 역으로, 또는 옆에서도 스멀스멀 흐른다. 그러다 보니 두 여성의 전복적 행위에 가치가 매겨지지 않으며 사건은 말 그대로 '돌출'된다. 관객 입장에서는 사건을 예측하거나 사후에 원인을 지목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포착 가능한 건 잠재된 악의, 얄팍한 명분, 세계 곳곳의 불안한 공기 정도. , ..할 수 없음. 그런데 이 '설명 못 할 불쾌함'만큼 역으로 세상을 명쾌하게 드러낼 수 있는 표현이 또 있을까.

 

이렇듯 <의식>은 계급을 다루되 '계급의 수직성 부각'이나 '공감 유도' 같은 기존 틀을 아득히 넘어 섦으로써, 오히려 본질에 대한 큰 그림을 꿈꾼다. 걸작이 걸작인 이유. 30년이 다 된 영화지만 여전히 가장 새롭다. ⓒ erazerh

 

반응형

'내가 영화인지 영화가 나인지' 모르겠을 최종 시퀀스도 좋았지만, 중간에 소동극을 바라보며 잔잔하게 웃는 듯 우는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의 얼굴 클로즈업이 가장 마음에 든다.

 

난장판의 유니크함 때문인지 몰라도 불현듯 영원한 건 없다는 걸 깨달아버린, 시간의 지연을 바라는 현재의 얼굴이자, 먼길 떠나기 전 요란했던 그 시절을 한번 들러본, 아마도 생의 마지막 시점에서 온 미래의 얼굴. 무엇이든 '간직'을 꿈꾼다는 점에서 이때 콘래드의 눈은 카메라라는 '감정-기계'와 같은 역할을 한다.

 

삶의 찰나성에 관한 이토록 따뜻하고 쓸쓸한 관조라니. 최근 본 적 없는 시네마틱한 숏, 아름답다. ⓒ erazerh

 

 

반응형

 

추석 연휴 때는 차례를 지내고 절식을 만들어 먹고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덕담을 주고받는 등 명절 본연의 일들 외에, 다른 즐길 거리도 많습니다. 나들이, 여행, 집에서 휴식, OTT 즐기기 등등. 여기에 영화관을 찾는 것도 주요 일정이 될 수 있을 텐데요.

 

볼거리가 워낙 늘어난 만큼 예전 같지는 않아도, 업계에서 추석은 여전히 중요한 개봉 시기로 꼽힙니다. 그렇다면 추석 때는 어떤 영화들이 개봉했고 또 어떤 작품을 많이 봤을까요? 지난 10년간 추석 시즌 개봉작들의 매출 순위를 통해 추석 영화관 트렌드를 살펴봤습니다.

 

※ 추석 연휴 2주 전~추석 주간 국내 개봉작 대상(2012~2021). 매출액은 해당 영화의 개봉 기간 매출 전체의 합. 자료 출처: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영화진흥위원회 운영)

 

지난 10년을 통틀어 추석 시즌 영화 중 매출액 1위를 찍은 작품은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입니다. 2012년 9월 극장가를 휩쓴 <광해>는 배우 이병헌이 광활한 연기 스펙트럼을 제대로 선보인 영화로도 꼽히는데요. 관객을 1,232만 명이나 불러모은 <광해>의 매출은 889억 원에 달합니다.

 

추석 영화 중 매출액 2위를 차지한 작품은 웰메이드 역사극 <관상>(매출 660억 원), 3위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김지운 감독의 액션 스릴러 시대극 <밀정>(613억 원)이었습니다. 최종 관객수는 각각 913만 명과 750만 명.

 

 

이어 563억 원의 매출로 4위에 오른 영화는 범죄 액션물 <범죄도시>였는데요. 올해 최대 흥행작인 <범죄도시2> 또한 이 1편이 구축한 캐릭터들과 화끈한 액션이 인기 비결이었을 만큼, <범죄도시>는 액션 시리즈물로서 성공적인 서막을 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위는 영조와 사도세자를 재조명한 사극 <사도>가 차지. 488억 원의 매출을 올린 바 있습니다. 역시 역사물인 <안시성>이 고구려 안시성 전투를 담아내며 추석 개봉작 중 매출액 6번째 자리를 꿰찼습니다.

 

 

이쯤 되니 추석 흥행 트렌드가 슬쩍 보이는 것 같은데요. 순위를 조금 더 들여다볼까요?

 

매출 랭킹 7위와 8위는 다시 한 번 정통 액션영화들의 차지. <킹스맨>의 속편 <킹스맨: 골든 서클>이 우리나라 관객 매출 410억 원, <나쁜 녀석들: 더 무비>가 매출 396억 원으로 7·8위에 올랐는데요. 9위로 집계된 화투-액션(?) 드라마 장르의 <타짜-신의 손>까지 묶으면, 전작·원작이 있는 화끈한 오락물이라는 공통점을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어 10위 자리는 돌고 돌아 역사극입니다.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을 다룬 황동혁 감독의 <남한산성>이 그 주인공. 312억 원의 매출을 거뒀지요. 하지만 보기 드문 '명작 사극'이라는 평가와는 별개로 관객은 385만 명만 들어 손익분기점(500만 명 추정)을 넘지는 못했습니다.

 

단, 절치부심했을 황동혁 감독은 4년 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을 연출하며 감독으로서 명성을 드높이게 됩니다.

 

 

지난 10년간 추석 시즌 개봉작들을 매출 순위로 살펴봤습니다. 키워드가 눈에 보이는데요. 가장 선명한 건 '역사극' 혹은 '시대극'이라는 장르. 근대사를 다룬 <밀정>을 포함해 10개 작품 중 6개가 해당됩니다. 추석 하면 사극, 사극 하면 추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실제로 10년간 추석 외 다른 기간 개봉한 사극&시대물 중 남한산성보다 매출액이 상위인 영화는 <명량>, <암살>, <해적: 바다로 간 산적>, <군함도>, <덕혜옹주>, <봉오동 전투>, <군도: 민란의 시대> 7편에 불과합니다. 6편(추석) vs 7편(비추석), 역사 장르의 영화가 추석 즈음에 개봉도 많이 하고 관객도 많이들 찾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장르 공식 및 관습에 충실한 권선징악 유의 '액션영화' 역시 추석 영화관 트렌드의 한 줄기. 10편 중 3편이 여기에 속했지요.(넓게는 '밀정'과 '안시성' 포함 5편) 이밖에 전작·원작의 성공에 힘입은 '후속작'들이 눈에 띈다는 점, 사극에 방점이 있다 보니 '한국영화'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합니다.

 

이들 키워드의 바탕으로는 명절이라는 시기 자체에 한국영화, 한국 역사에 이끌리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 아울러 남은 연휴를 편히 즐기고 싶은 마음에 보기 무난한 검증된 오락물로 향하는 관객이 많다는 것 정도를 들 수 있겠지요.

 

 

올해는 어떨까요? 추석 명절을 겨냥한 역사극은 없지만, 9월 7일에 개봉하는 <공조2: 인터내셔날>은 속편 액션(+코미디)이라는 추석 트렌드에 걸맞아 관심이 가는데요. 관객도 이에 호응해줄지, 지켜봐야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추석 영화, 하면 어떤 작품이 떠오르나요? ⓒ erazerh

 

 

-------

* 이 글은 여기서도.

 

[이심쩐심] 추석 연휴 때 '돈 되는 영화'는 따로 있다?

[BY 뉴스웨이] 추석 연휴 때는 차례를 지내고 절식을 만들어 먹고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덕담을 주고받는...

m.post.naver.com

 

반응형

 

지난달 개봉한 첩보 액션 드라마 장르의 영화 '헌트'는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고르게 받았습니다. 흥행도 여전합니다.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하며 400만 관객을 눈앞에 둔 상황.(9.1 기준 391만 명)

 

그러면서 '헌트'로 감독 데뷔를 한 배우 이정재에게 또 한 번 스포트라이트가 몰리고 있는데요. 첫 작품에서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맘껏 뽐냈다는 평가. 연출 데뷔한 배우한테는 흔하지 않은 칭찬인데요.

 

그렇다면 이정재에 앞서 직접 영화를 찍은 배우는 누가 있을까요? 국내 배우-감독 사례를 정리했습니다.

 

첫 작품에서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맘껏 뽐냈다는 평가. 연출 데뷔한 배우한테는 흔하지 않은 칭찬인데요. 그렇다면 이정재에 앞서 직접 영화를 찍은 배우는 누가 있을까요? 국내 배우-감독 사례를 정리했습니다.

 

-------

 # 김윤석 / 연출작 미성년(2018)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이 ○○", "4885 너지" 등 찰진 대사&명연기로 잘 알려진 김윤석은 '미성년'으로 감독 데뷔를 했습니. 깔끔한 연출이란 호평들 가운데, 엔딩이 불쾌한 수준이었다는 평도 나왔지요.

 

 

# 하정우 / 연출작 롤러코스터(2013), 허삼관(2014)

 

선 굵은 캐릭터부터 섬세한 감정 표현이 요구되는 인물까지,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 하정우 역시 연출에 관심이 많습니다. 연기만큼 좋은 평가를 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영화 속 고유의 유머 감각은 인정받았습니다.

 

 

# 정진영 / 연출작 사라진 시간(2019)

 

90년대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작품에서 좋은 연기를 선보여온 배우 정진영은 2019'사라진 시간'으로 감독 데뷔를 했습니다. 불친절해도 너무 불친절한 영화 반응이 주를 이뤘지만, 신선한 시도라는 평도 있었습니다.

 

 

# 유지태 / 연출작 자전거 소년(2003), 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2005), 나도 모르게(2007), 마이 라띠마(2012)

 

배우 유지태는 감독으로 변신했다기보다는 '겸직'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많은 작품을 손수 찍었는데요. ·단편 영화가 다수로, 대중과의 소통보다는 본인의 작품 세계 구축에 포커스를 두는 모습입니다.

 

 

# 문소리 / 연출작 여배우(2014), 최고의 감독(2015), 여배우는 오늘도(2017)

 

생활 연기부터 강렬한 연기까지 고루 선보여온 배우 문소리. 감독으로는 '여성이란 성별로 영화판에서 살아가기' 자체를 스크린에 옮기는 데 관심이 많은 듯합니다.

 

 

# 방은진 / 연출작 연출작 파출부, 아니다(2004), 오로라 공주(2005), 진주는 공부중((2008), 용의자X(2012), 집으로 가는 길(2013), 메소드(2017)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1994)에서 영화배우로 첫선을 보인 방은진은, 여러 장·단편을 선보이며 웬만한 감독보다도 영화를 더 많이 만들었습니다. 이 중 '오로라 공주', '집으로 가는 길'은 수작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 또 누구?

 

이밖에 '장르만 로맨스'(2021)조은지, 옴니버스 영화 '언프레임드'(2021, OTT 왓챠)박정민·손석구·최희서·이제훈 배우 등도 감독직을 수행했습니다. 중견배우 박중훈 역시 2013년 영화 '톱스타'를 연출한 바 있지요.

 


 

영화감독이 된 영화배우들을 살펴봤습니다. 연기 경험을 바탕으로 연출까지 넘나드는 배우가 국내에도 점차 느는 추세. 머지않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특급 거장 '배우-감독'이 등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D

 

감독이 된 배우들, 어떤가요? 소개한 영화 중 여러분은 어떤 작품이 가장 마음에 (안) 들었나요? 아울러 국내 연기자 중 이 사람은 연출도 잘할 것 같은 영화배우, 누가 있을까요? ⓒ erazerh

 

 

-------

* 이 글은 여기서도.

 

'답답해서 내가 찍는다' 메가폰 직접 잡는 국내 배우들

[BY 뉴스웨이] 감독이 된 배우들, 어떤가요? 소개한 영화 중 여러분은 어떤 작품이 가장 마음에 (안) 들...

m.post.naver.com

 

반응형

- '미결' '결심'한 까닭에 관해

 

 

※ 영화 <헤어질 결심>의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

 

-------

시간은 결(決)의 축적이다. 한 사람의 시간 안에는 무수한 분별과 결정, 결단이 차곡차곡 쌓인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당장 오늘 끼니도 무엇으로 때울지 정해야 먹을 수 있다.

 

영화 매체로서의 물리적 시간, 즉 러닝 타임 또한 마찬가지다. 최종 결론 도출에 도움이 될 법한, 선택된 숏들이 상영시간 안에 빼곡히 들어찬다. 이 숏들이 영화라는 유기체 덩어리를 구성하면 영화는 체계 안에서 분류된다. 책꽂이에 꽂히듯 마이 추천 리스트에 정렬. 장르별, 키워드별, 감독별, 배우별 선호도 따위로.

 

영화 <헤어질 결심>이 분류될 자리는 거의 정해진 듯보였다. 남편이 죽은 여자(서래), 그 여자를 바라보는 형사-남자(해준), 훔쳐보기, 이끌림, 로맨스 또는 느와르의 어딘가겠지. 혹은 둘 다거나. 역시 팜므파탈, 파멸하는 형사, 박찬욱표 대사, 그러다, 어, 어? 마침내, 미결. 분류표를 걷어차고 안개 속으로 들어가 버린 역행.

 

역행하는 영화. <헤어질 결심>

 

미결의 주체는 서래다. 그녀는 훔쳐보기의 구도 안에 있고, 사람을 죽이고, 또 사람을 이용하지만 팜므파탈이라는 규격 안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는 반격의 멘트다. 그러면서 '독한 년'이 아니라 '몸이 꼿꼿한 사람'임을 알아챈 남자를 끌어안기까지 한다.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는 파격적인 고백처럼 들린다.

 

물론 이미 불쌍한 서래 씨는 여생을 감옥에서 보낼 생각이 없다. 도피. 어디로? 바닷가로. 바닷가는 영화에서 죽음을 장렬한 낭만으로 박제할 때 곧잘 찾아진다. <베니스에서의 죽음>, <노킹 온 헤븐스 도어>, <타임 투 리브>, 심지어 박찬욱 본인의 <박쥐>까지.

 

그리고 최종 신(scene)에 이르러 두 번째 미결, 그녀는 바다에 가서는 땅으로 파고든다. 시신을 전시하고 쓸쓸함을 과시하던 관습에 안녕을 고한다. 관객한테나 해준한테나, 위로의 객체가 아니라 수수께끼의 창조자로 남고 싶은 듯하다. 도주의 완성이자 불멸의 사랑의 형태로서, 횡과 종이 뒤엉킨 트릭. 그렇게 서래는 해준에게 좌표를 찍을 수 없는 점이 되고 만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알 중 하나일 수도 있고 그조차 아닐 수도 있는. 사랑이 어떻게 그래요. 사랑은 원래 그렇다. 설명 못 할 무언가. 미결사건의 완성.

 

사랑, 설명 못 할 무언가. <헤어질 결심>

 

서래는 이 전무후무한 증발로써 그녀가 감당해야 할 수식어들을 최소한 물리적으로는 따돌렸다. 살인 혐의와 행정상의 생사 증빙은 물론, 남편 잡아먹은 (중국)년 따위의 껍질도 벗어젖혔다. '시신' 딱지조차 달라붙지 않을 거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이 우주에서 사라지는 가장 완벽한 방법. 서래는 오직 해준이 살아있는 동안의 어떤 얼룩으로만 남게 됐다. 로맨틱하지 않은 절통의 로맨스가 이제 막 시작될 참이다.

 

이건 엄연한 변종이다. <헤어질 결심>은 훔쳐보기라는, 영화의 근원적 본질에 한 발을 담근 채 최첨단 관계 맺기 도구들을 경유, 각종 계보를 잇는 똘똘한 최적자인 척은 다하다가, 어느새 달아나버린다. 러닝 타임이 다됐는데 결론은커녕 말없이 안개만 흩뿌린 꼴. 하나의 유기체로 똘똘 뭉쳐가던 숏들은 뿔뿔이 흩어져 조금 전과는 다른 표정들을 짓고 있다. 자신을 물과 흙에 동시에 가둔 살인자의 사랑&실종극을 감당할 수 있겠냐는 듯. 이제 이 영화를 꽂아도 좋을 책꽂이나 분류표를 우리는 찾을 수 있을까. 글쎄, 본 적 없는 '걸작' 코너 정도면 괜찮으려나.

 

그러고 보면 <헤어질 결심>이라는 제목은, 영화를 보고 만드는 기존의 모든 습관과 헤어질 결심을 한, 박찬욱의 결별 선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미'결'이라는 '결'심. 마침내, 이질적인 무엇으로의 분화. 마침내.  erazerh

 

결국,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

 

 

※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헤어질 결심] 누가 무엇과 헤어지고 싶었길래

'미결'을 '결심'한 까닭에 관해 | ※ 영화 <헤어질 결심>의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라납니다. :) 시간은 결(決)의 축적이다. 한 사람의 시간 안에는 무수한 분별과 결정, 결단이 차곡차곡 쌓인다. 인

brunch.co.kr

 

반응형

+ Recent posts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