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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애니메이션 <플로우>의 후반부 고래는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벨라 타르 감독)의 고래와 정확히 같은 구도에 놓인다. 관찰자의 시선도 동일, 단 관찰자의 심경은 결이 다르다. 벨라 타르가 고래의 동공 속에서 우주적 영겁을 봤다면, <플로우>는 그 눈에서 추억과 미래의 접합을 본다. 시간의 연속성에 경외심을 보내는 것이다.


정답은 없다. 개인적으로는 인간계에 무지와 폭력성 말고 남은 게 뭐가 있겠느냐는 듯한 자조, 문명을 언젠가 소멸할 '너절한 점'으로 만드는 벨라 타르식 거대한 냉소가 더 마음에 들지만, <플로우>의 '찬란함'을 빚어내는 세공술도 충분히 매혹적이다. 덕분에 고래와 새가 시네마틱한 순간을 선사 받았으니까. 그 오지 않을 미래(과거)들. 지나간 시간은 내 앞에 다시 도착하지 않으므로 비극적이며, 아름답다. ⓒ erazerh

 

 

 

 

영화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의 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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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과 안면이 있는 인물은 좀비화될 때 약간의 신파 타임을 허락받고는 하는데, 대개 오래지 않아 처형되며 수많은 좀비 단말마의 역사 안에 신속하게 편입된다.

 

영화 <언데드 다루는 법>은 이 신파 구간을 붙들고 길게 늘어뜨린다. '울컥' '뭉클' 유의 뜨거움은 없으며, '살아있는 시체 가족'과의 기쁜지 슬픈지 모를 재회와, 가구별로 주어진 단념의 단계들이 그 구간을 채운다.

 

동명의 원작 소설은 욘 A. 린드크비스트가 썼는데, 아시다시피 그는 호러-로맨스 걸작 <렛 미 인>의 원작자이기도. 그러고 보면 <언데드 다루는 법>은 타자화되기 이전의 괴물을 데려와 '전시' 대신 우리와 유사했던 것으로서 그 존재를 '눈높이에 둔다'는 점에서 <렛 미 잇>과 닮았다.

 

이 존재성은 좀비화가 주는 진짜 참혹함, 즉 시간의 불가역성을 아프게 감지케 한다. 영화의 리듬은 느리고 머뭇대다 빙글빙글 돌기까지 하는데, 그만큼 '헤어질 결심'이 발 딛기 힘겨운 도달점이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내 우주의 전부였던 사람을 잃었는데, 나아갈 이유가 있겠냐는. 그러니까 '이쯤에서 함께 멈춰버릴까?' 최종 숏의 머뭇거림에서 이 서글프고 스산한 고민이 묻어 나온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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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의 이면이든 현상의 뒤편이든 세계의 모든 표면 너머는, 아래에는, 뭔가가 있다. 규정할 수 없고, 앞뒤 좌우 없이 아무렇게나 붙었으며, 불온하고, 은밀하게, 세상을 이리저리 디자인하는 무엇. 기호화할 수 없지만 태초에 모든 기호의 바깥에 있었던 무엇.

 

이처럼 세계의 층위가 관찰자의 주관에 따라 무한히 분화될 수 있음을,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님'을 내게 가장 직관적으로 알려준 사람, 데이빗 린치(1946~2025). '환상'을 가장 잘 다룬 영화 마법사, 편히 영면하시길. ⓒ erazerh

 

 

"영화관에 들어가 불빛이 꺼지는 순간은 마술적인 느낌이 든다. 순간 사방이 조용해지고 커튼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아마 커튼은 붉은색이리라. 그러면 당신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 데이빗 린치의 빨간방

 

그가 비로소 커튼을 열고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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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서 파멸을 추출하는 데 재미 들린 다단계적 악의에 관한 영화. 새롭거나 정교하진 못해도, 불우하게 뒤틀린 정반대의 스위트홈들을 특유의 텁텁한 질감으로 성실히 감싸는 데는 성공.

마무리 솜씨도 썩 좋진 않았지만 카메라의 감정이나 전반적인 만듦새가 <더 위치>, <곡성>, <유전>, <랑종> 등 선악 대칭 없이 특정 힘에 압도되는, '비대칭 호러'의 계보를 잇는 데는 무리가 없어서 개인적으론 만족. ⓒ erazerh


(스포) 십자가를 목에 걸고 피를 뒤집어쓴 채 세상 성스러운 표정으로 "헤일, 사탄"을 외치는 숏은 '종교'의 바닥을 파 내려가 그 본질을 보고 그림으로 옮겨낸 듯, 정직하고 아름답다. 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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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가장 이율배반적인 속편.

 

우리에게 친숙한 '테러리스트 빌런' 조커의 탈을 결국 벗어버린, 연쇄 살인자이자 학대 피해자이자 (도달 불가능한) 스위트 홈을 꿈꿔본 미치광이 로맨티스트 아서 플렉. 찰나적 조커였던 그 남자의 처절한 고독에 부치는 쇼, 같은 영화.

 

그러니까, 이 조커는 그 조커가 아니었고, 대중은 광기 분출의 핑계로 삼을 또 다른 '입찢남'을 맞이할 것.  ⓒ erazerh

 

 

* 뮤지컬이어야 하는 당위성을 못 찾겠고, 아서를 포함한 인물들의 주파수가 너무 지지직거려 영화가 전작만큼 피부에 들러붙진 않는다.

 

 

<조커 1편 정신분석학적 비평>

 

[조커]에서 감지되는 위험성의 진짜 정체

🎬 『호불호의 사유』는 영화가 좋거나 싫은 사유(事由)를 비평적 사유(思惟)로써 전개합니다. :) 우선 # 몸, 춤 1. 영화 <조커>(2019)의 플롯은, 아서 플렉 입장에서는 '내 주파수'를 찾아가는 여정

contents.premiu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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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라스 폰 트리에의 <백치들>(1998)을 다시 봤는데, 전보다 뭐랄까. 슬펐다. 예전 감상 때 느낀 너무 팔딱거려 감독의 통제 범위마저 넘어버린 듯한(혹은 그렇게 보이려는) 전복적 에너지보다, 그 변칙을 부여잡고 결국 바닥을 뚫고 내려간, 카렌의 붕괴가 더 강렬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분명 비윤리적이지만 더는 윤리 따위 통용되지 않게 된 세계, 카렌의 퇴행은 탈주든 회피든 뭐라 불리든 유니크하다. 그녀는 '백치 그룹'에서 탈영토화 상태에 놓인 유일한 인물이며 백치 행동의 유일한 실천적 계승자다.

백치화를 거친 깊은 절망과 고독감은, 엔딩에서 괴기하게 '내뱉어'진다. '나'라는 외피를 기어이 벌려 비집고 나가려는, 가족 앞에서의 기묘한 서커스. 카렌은 고통에서 도주하고자 그렇게 수치심조차 들러붙지 않을 무중력의 세계를 향한다. 누구 것인지 모를 서글픔으로 엔딩이 꽉 찼다.

영화도, 나도, 나이를 먹었나 보다. ⓒ erazerh

 

 

 

* 지금 보니 '알면서도 퇴행'이란 면에서, 비슷한 방향성의 영화들로 <미드소마>와 <셔터 아일랜드>가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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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압적 가부장으로서의 아버지-남편, 그리고 그들의 시공간을 찢기를 갈망하는 레즈비언 커플. (예상대로) <러브 라이즈 블리딩>에는 '여성' + '연대'라는 유행어로서의 양대 키워드가 등장한다.

 

이 구도에서 女女는 대개 선이고 화면 바깥엔 응원군이 있기 마련인데, 영화는 이를 기다렸다는 듯, 커플의 교감을 정교하게 쌓아 올리기보다는 불행 전시와 공감 유도에 치중한다. 그러다 보니 응원석에 앉지 않은 관객한테는 그 사랑의 절절함이 와닿지 않는 게 사실.

 

후반부로 갈수록 사건과 사건 사이도 느슨해지는데, 최후의 거대 농담은 그 얼렁뚱땅들이 돌발적으로 뭉쳐진 '그저 이미지 덩어리'처럼 보인다. 개인적으로 발칙한 상상력을 위한 상상 같은 말장난, 아니 영상장난 이상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니까 '미러링 된 근육 호러 픽쳐 쇼' 따위의, 유희에 가까운 영화라는 게 내 결론. 여기에 델마나 루이스가 어딨나? '무턱대고 응원', 난 이번에도 정중하게 혹은 무례하게라도 사양하련다. ⓒ erazerh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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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 선하고 구조적으로 훌륭한 영화인 건 알겠는데, 개인적으로 마음을 툭 건드리는 포인트는 못 찾겠다.

 

T보다 F를 선호한다는 건 아니고, 시네마라기보다는 잘 조립된 기계 속을 매끈하게 통과해낸 생산물 느낌? 방점이 그 기계, 즉 이미지와 사운드 간 '불협화음의 협화음'이라는 메커니즘에 찍힌달까. 물론 메커니즘 제작 자체가 몹시 창의적이고 정교한 작업이었음은 감지되지만, 지나치게 콘셉트적인 영화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진부한 악'의 이미지화, 성공적.

 

그렇다 보니 <존 오브 인터레스트>보다는, 이 영화 대체 왜 이러나 왜 이딴 식으로 찍었나 심드렁하다가, 최종 시퀀스에 이르러 그때까지의 내 경솔함에 치를 떨었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사울의 아들>(2016)이 더 좋다. 영화적 표현의 어나더 경지를 실감케 한, 지옥을 겉도는 얼굴-몸의 존재 이유.

 

 

두 영화 모두 중요한 배경의 어떤 소거를 다루고 있는데, <존 오브 인터레스트>'보이지 않는 척'의 구도화라면 <사울의 아들>'진짜로 눈먼 상태'의 중심을 파고드는 집착이랄까. 말장난 같긴 하지만 <사울의 아들>이 내민 생지옥의 모양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다는 얘기.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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