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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과 안면이 있는 인물은 좀비화될 때 약간의 신파 타임을 허락받고는 하는데, 대개 오래지 않아 처형되며 수많은 좀비 단말마의 역사 안에 신속하게 편입된다.

 

영화 <언데드 다루는 법>은 이 신파 구간을 붙들고 길게 늘어뜨린다. '울컥' '뭉클' 유의 뜨거움은 없으며, '살아있는 시체 가족'과의 기쁜지 슬픈지 모를 재회와, 가구별로 주어진 단념의 단계들이 그 구간을 채운다.

 

동명의 원작 소설은 욘 A. 린드크비스트가 썼는데, 아시다시피 그는 호러-로맨스 걸작 <렛 미 인>의 원작자이기도. 그러고 보면 <언데드 다루는 법>은 타자화되기 이전의 괴물을 데려와 '전시' 대신 우리와 유사했던 것으로서 그 존재를 '눈높이에 둔다'는 점에서 <렛 미 잇>과 닮았다.

 

이 존재성은 좀비화가 주는 진짜 참혹함, 즉 시간의 불가역성을 아프게 감지케 한다. 영화의 리듬은 느리고 머뭇대다 빙글빙글 돌기까지 하는데, 그만큼 '헤어질 결심'이 발 딛기 힘겨운 도달점이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내 우주의 전부였던 사람을 잃었는데, 나아갈 이유가 있겠냐는. 그러니까 '이쯤에서 함께 멈춰버릴까?' 최종 숏의 머뭇거림에서 이 서글프고 스산한 고민이 묻어 나온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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