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욕망의 여정으로 보는 원초적 공포

 

 

※ 영화 <라이트하우스>의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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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에서 공포는 주로 어떻게오는가. 우선 어제와 다른 오늘, 익숙한 시공간에 금이 가고 그 틈으로 괴물 또는 괴이한 무언가가 스며들겠지. 가족과 친구들, 주인공의 미래가 그것들에 갉아 먹혀갈 때 공포영화는 그 상황과 괴물을 공포의 근원으로 삼을 터.

 

이때 공포감의 운동성은 의 움직임과 닮았다. 평온의 막을 베고 침투해서는 난도질, 그러다 훅, 관객의 영역까지 찌르는 모양새.

 

물론 이 물리적 흐름으로 설명되지 않는 영화들은 있다.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두 번째 장편 <라이트하우스>(2019)도 그중 하나. 이 영화에는 침입, 침투, 그 무엇이든 쳐들어와 헤집는 운동성이 없다. 일상과 비일상 간 대조도, 공포의 제작 및 전달자도 부재하다. 그럼에도 국내외 영화 소개 페이지들은 이 작품을 호러로 분류 중. 실제로 제법 무시무시하다. 공포 전달용 일반 회로가 장착되지는 않았지만 무섭다는 말, 이 공포감의 정체는 뭘까?

 

본 적 없는 판타지-호러. <라이트하우스>

 

 

# 욕망과 욕망의 오디세이아

 

흑백으로 촬영된 <라이트하우스>20세기 초반의 두 등대지기, ‘고참토마스 웨이크(윌렘 대포)신참에프라임 윈슬로(로버트 패틴슨)에 관한 이야기다. 에프라임은 등대 불빛을 교대로 관리하길 바라지만 토마스는 이를 완강히 거부한 채 불빛을 독차지한다. 두 남자, 억누름과 밀어올림. 무슨 일이 일어날까.

 

영화 중간의 짧은 숏 하나, 거꾸로 보이는 등대가 화면이 뒤집히면서 바로 선다. 이를테면 발기하는 페니스. 실제로 로버트 에거스는 여기다 진짜 페니스를 찍어 붙이려 했으나 무산됐다고 한다. 다시 ’, ‘남자임을 떠올리자. 그러니까 <라이트하우스>는 발기된 두 개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외부 침입보다는 서로 간 경합이 어울릴 듯하다.

 

욕망은 둘인데 탐할 수 있는 실체적 대상, 즉 등대 불빛은 하나인 상황. 영화는 주로 욕구불만인 에프라임의 의식 흐름을 좇는다. 훔쳐보기는 수순일까. 그는 등대 불빛 칸에서 토마스가 인어인지 거대 촉수인지 모를 무언가와 교미비슷한 것을 하는 걸 보고, 자신을 대입시키고, 분출하고, 분노한다. 이런 식이다. , 경험 없는 상상은 결핍을 키우기 마련. 욕망은 끝내 해소돼야 한다. 어떻게? 나를 가로막는 토마스를 없애서라도.

 

욕망 vs 욕망. <라이트하우스>

 

애초에 이럴 운명이기는 했다. 이 등대섬은 그러라고 장만된 무대 같다. 폭풍우는 멈출 기미가 없으며 교대팀의 배는 오지 않는다. 고립은, 공간 감각은 물론 시간 경과에 대한 인식마저 도려낸다. 며칠 혹은 몇 주가 흘렀는지 시간적 배경을 그들도 관객도 모를 지경. 게다가 각자 과거의 고백과 의심이 뒤섞여 두 사람의 정체성마저 뭉개졌다. 에프라임의 욕구 불만족과 토마스의 수호 의지만이, 이 우주를 통틀어 남은 유이한 키워드인 것 같다.

 

이때 토마스는 누구인가?’

 

토마스는 해독 불가한 모종의 구전 신화를 읊는 등 무언가에 홀린 듯하면서도, 일이 느리고 게으르다며 에프라임을 구박하고 말대꾸 시 급여를 안 주겠노라 협박까지 한다. 원시성과 현실성을 두루 갖춘 억압. 말은 안 통하는데 위협은 실재적이다. 익숙하지 않은가. 이를테면 누구나 한 번은 겪()을 폭압적 부모, 스승, 선배, 상사, 또는 그 비슷한 무엇들. 안타깝게도 이 토마스은 특정한 마법으로 소환된 게 아니라 그냥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다. 우리, 그리고 우리의 욕망이 그렇듯.

 

두 욕망의 역학관계상 나중 것에 의한 전복은 필연이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에프라임은 마침내 등대 불빛을 오롯이 향유한다. 결과는? 그는 불빛을 보며 쾌락인지 고통인지 모를 표정으로 산화하듯 절규하다가 밑으로 굴러 떨어진다. 아마도 죽겠지. 불빛의 정체와 그 순간의 감정은 영영 알 수 없게 됐다.

 

등대 불빛과의 조우. <라이트하우스>

 

 

# ‘현타(현실 자각 타임)’와 ‘죽음’, 언제나 참

 

결자해지의 의지일까. 로버트 에거스 감독은 여기다 최종 숏을 붙임으로써 이 등대 치정극의 장르는 규정 지어준다. 바로 눈 하나를 잃은 알몸의 에프라임이 바닷가에 널브러져 죽어 가면, 갈매기가 그의 내장을 뜯어먹는 숏. 이때의 에프라임은 제우스의 불을 훔쳐 인간한테 전해줬다가 날마다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게 된 프로메테우스와 노골적으로 닮았다. 이를테면 ‘신화’로 박제된 ‘소멸’의 엔딩. 왜? 에프라임이 욕망했기 때문에. 오르가즘은 태생적으로 증발하는 것 아니던가. 거 ‘현타’ 한번 오지다.

 

한걸음 더. 욕망의 카테고리 중 가장 큰 것은 의 지속, 즉 생()에의 의지다. 이렇게 보면 증발하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이요 기다리는 건 죽음이 된다. 선점자인 토마스도, 후발주자인 에프라임도 모두 죽었다. 쾌락이든 목숨이든 일단 점유한 자들은 길게 머무를 수 없다. <라이트하우스>에서 공포란, 곧 소멸할 쾌락을 좇도록 디자인된 우리의 방향성,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의 너머에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인 셈이다.

 

이 정도로 근원적인 공포감이 기존 호러영화들의 운동성을 짜잔, 두르기란 어렵다. 보다 날-공포인 만큼 그 성질에 대한 힌트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찾아야 한다. 날것, 태초그렇게 인류의 출현부터 먼 미래까지를 꿰어버린 영화로 가보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이 걸작 SF를 꺼내든 건 이 영화에 인류사를 유인원 시절부터 촉발시켜온 검은 돌기둥 모노리스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색이 입혀지기 전부터 우리 생을 운용했을, 절대적 배후 같은 물질. ‘증발소멸’, ‘죽음따위의 <라이트하우스>적 공포는 바로 이 영험한 유물에 새겨진 지침처럼 존재한다. 애초에 운동성을 띨 필요가 없었던 것. 가라사대, 침투하지 않아도 그저 기다리면 인간들이 도착하리니. 공포계에 짜라투스트라가 있다면 이렇게 말했을 거다.

 

<라이트하우스>의 최종 숏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모노리스’

 

 

# 이보다 선명한 미래는 없다

 

로버트 에거스는 장편 데뷔작 <더 위치>(2016)에서 마녀를 공포감의 근원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선택되는 모종의 출구로 다뤘다. 무서운 건 모든 걸 왜곡하는 렌즈, 즉 인식 불능에 빠진 맹신의 시대였다. 그리고 <라이트하우스>에서는 비율 1.19:1의 흑백 프레임에다 소멸론을 인류의 기원신화인 양 보존해놨다.

 

말로 옮기자면 인생은 고통이야, 몰랐어?’ 정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고? 욕망하고 살아가는 우리 앞에, ‘현타죽음보다 선명한 미래가 또 있을까? erazerh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현타’보다 선명한 미래는 없다

[라이트하우스] 욕망의 여정으로 보는 원초적 공포 | ※ 영화 <라이트하우스>의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 공포영화에서 공포는 주로 ‘어떻게’ 오는가. 우선 어제와 다른 오늘, 익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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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러난 진실들을 쥐고서 최종 숏으로

 

 

※ 『최종 S의 비밀』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Sequence), 신(Scene), 숏(Shot)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에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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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의 예술이다. 인물들은 카메라의 시선에 상시 붙들려 있지만, 짐짓 이를 모른 촬영 현장만이 세계의 오롯한 전부인 양 꾸며댄다. 어쩌면 누가 더 시치미를 잘 떼느냐는 시합. 그렇게 이 쌓이면, 한 편의 영화는 그 자체로 독립된 단일 체계, 즉 처음과 끝을 간직한 유사-현실 덩어리가 된다.

 

이 독립성과 완결성이야말로 건드려선 안 될, 이야기의 본질이 아닐까. 이야기는 외부에서 널리 보이고 읽히되 절대 간섭받거나 변경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훔쳐보고, (현실과) 겹쳐보고, (원본의 수정 없이) 이리저리 만지작거릴 거리가 이야기인 셈. 이때 관객의 자리는 프레임 바깥에 깔려있으며, 러닝 타임 내내 안으로 건너올 수 없다. 일반적으로는.

 

 

이 열릴 때가 있다. 배우가 카메라를 쳐다봄으로써 인물과 관객을 대면케 하는 것이다. 대개 훔쳐보기라는 근본 규칙을 깨야 할 만큼 간곡한, 어떤 신호를 프레임 바깥으로 내보내고 싶은 경우다. 그중에서도 <살인의 추억>(2003)의 최종 숏은 효력이 너무나도 강렬해 신호 보내기의 롤모델로 불리는 게 마땅할 정도.

 

송강호(박두만 역)는 이윽고 고개를 돌려, 파르르 떨며, 한쪽 눈을 살짝 찌그린 채, 카메라(관객)를 쏘아본다.정의사회 구현을 간판으로 내건 나라, 짝퉁으로서의 평화적 구조를 무대 삼은 범인. 거기서 비롯된 울분을 박두만의 마지막 얼굴에 응축해놓은 봉준호 감독은, “범인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오리라 생각해서이런 엔딩을 준비했다고 밝힌 바 있다.

 

봉준호라면, 이 펄럭거리는 숏이 스크린을 찢고 나와 진범을 휘감는 상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살인의 추억>의 최종 숏

 

 

, 한 번 열린 문은 닫을 수 없다. 관객을 바라봄으로써 영화와 실재 사이에 심리적이되 실질적인 다리 하나를 놓은 셈. 애초에 특정 사건을 직접 끌어안은 영화의 숙명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현실에서 영화로, 영화에서 다시 현실로. 그런데 이 현실에 천지개벽할 변화가 생겼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밝혀졌고, 애먼 사람 하나가 20년간 잡혀있었다.

 

10건으로 알려진 화성 연쇄살인사건’, 14차에 걸친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으로 공식 명명(201912)

 
윤 모 씨, 8차 사건 범인으로 검거돼 20년간 죄 없이 복역 후 2009년 가석방(현재 재심 진행 중)

 

이 정도라면 영화 역시 한 번은 새로 고침해봐야 하지 않을까. 현실에서 영화로, 인식의 다리를 다시 건너보자. 물론 이 시점에서 봐도 숏들의 배치와 호흡은 경이롭다만, 떼 내기 어려운 의문점이 자꾸만 들러붙는다. 최종 숏이 클로즈업한 얼굴, 그 신호 보내기라는 막중한 임무를, 과연 박두만이 짊어져도 되느냐는 것. 요컨대 자격에 관한 물음 말이다.

 

- 윤 씨, 불법 체포·감금 가혹행위 고문 훈련된 자백 녹음 등 강압 수사에 못 이겨 (8차 사건) 허위 자백
- 윤 씨를 범인으로 특정하는 데 결정적 증거였던 국과수 감정서가 허위로 조작된 사실 확인
- 경찰, 이밖에 양손이 줄넘기로 묶인 초등학생(8)의 시신을 발견하고도 숨겨 단순실종 처리형사계장과 형사 1명에 대해 사체은닉과 증거인멸 등 혐의 적용
- 화성 8차 사건 말고도 억울한 사연 '수두룩(연합뉴스. 201910)

 

비극의 백광호. <살인의 추억>

 

이토록 잔혹한 폭압과 위법은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박두만을 중심으로 충실히 재현됐다.(518일 재심 첫 공판에서 영화의 이 부분 일부가 상영됐다) 그는 손수 발자국을 찍어 증거를 생산했고, 이 타이밍이다 싶으면 고갯짓으로 조용구에게 (용의자를) 군홧발로 짓밟으라 지시했다. 그러면서도 무능과 조작으로 잘려나간상사와, 폭력의 증거로서 결국 다리가 잘려나간용구와 달리 영화 끝까지 살아남는다. 자연스럽게. 무능과 폭력에 한 다리씩 걸친, 한통속 혹은 중심임에도.

 

이는 영화가 박두만 안에 시대의 후진성과, 진범을 잡고자 하는 절절한 욕구를 동시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넉살부터 처절함까지 양 극단을 횡단할 줄 아는 송강호의 표정이 그걸 가능케 했음은 물론이다. ‘살이 불어터지도록종일 목욕탕에 들어앉아 남들의 그곳이나 보고 다닐 때, 강변에서 링거를 맞으며 지치고 고단한 ·외면을 풍경으로 드러낼 때, 유력 용의자(또는 영화를 보고 있을 범인)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며 냉소할 때, 우리는, 미흡했지만, 악의는 없는, 투박한 진심을 본다.

 

이건 아마도 당시 형사들의 갖가지 결을 두루 섭렵해야 하는, 극의 중심에 놓이도록 설계된 인물로서의 필연적 복합성일지도 모르겠다. 용구도 서태윤도 맡을 수 없는 자리. 그렇게 박두만은 후졌지만 호감은 가는, 이런저런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허용되는 캐릭터가 됐다. 물론 이 영화적 장치는 충분히 수용 가능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 숏에 이르러서는 이제껏 본 적 없는 깊이의 얼굴-응시마저 창조케 했다.

 

송강호의 내·외면. <살인의 추억>

 

 

이후로 한참이 흐른 2019, 31년간 은폐된 시신의 존재가 떠올랐다. 8살 아이의.

 

새로 고침 버튼을 누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껌뻑거림들. 진정하고 초점을 다시 잡아보자. 이제 후진 시스템과 후진 사람들 한결 더 도드라져 보인다. 재차 투박한 진심까지 가려면 전처럼 악의는 없는따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식어가 필요한데, 현실이 그걸 허락할 것 같지는 않다. ? 눈을 닦고 보니 그들의 목표는 진범 찾기가 아닌 자기 자리 보존이었으니. 악의가 없기는커녕 흘러넘칠 지경이다.

 

이렇게나 맹렬한 보신(保身)주의라니, 이러면 한나 아렌트의 저 유명한 진부한 악이상 가는 지위를 부여해드려야 마땅하다. 상상력이 모자란, 그저 시대의 부속품이 아닌, 이를테면 시스템의 설계자 같은.

 

물론 박두만은 특정 형사 한 명이라기보다는 형사들 면면의 집합체에 가깝다. 하지만 정육각형에 가까웠던 특성 중, 적어도 선의(善意)항목은 새로 드러난 사실들에 찔려 움푹 들어갔다고 봐야 한다. 동시에 최종 숏의 강렬함이 그 선의로 마감된 박두만의 캐릭터성에 크게 빚졌음을 상기해보자. 이제 나는 그에게 분노자로서의 지위가, 외화면을 쏘아볼 송신자의 자격이 더는 있다고 보지 않는다. 지금 그에게 어울리는 곳은 프레임 바깥, 응시를 받아야 할 자리, 즉 범인의 근처 어딘가일 뿐이다.

 

피해자들은…. <살인의 추억>

 

 

<살인의 추억>은 여전한 걸작이다. , 특정 사건과 동기화됐다는 영화적 특성상 현실과의 호흡을 위해 세포를 지속해서 열어두고 있을 뿐. 시대의 맥을 그토록 잘 짚었는데, 지금 보니 그 땅 위에 진범의 것 외에도 악랄함이 층층으로 쌓인 형국. 상상의 달인 봉준호도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앞으로 악행의 구조는 점점 더 디테일하게 드러날 것이다. , 딱 보면 감이 온다던 그들은, 공소시효가 소멸돼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 이춘재도 마찬가지. 밥도 잘 먹고 다니겠지. 말 그대로 살인의 추억.

 

하수구 안에는, 야산에는, 구겨져버린 여성들이 아직도 있다. 8살 아이를 포함한.

 

우리는 완전히 실패했다. erazerh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박두만에게는, 응시할 자격이 있었을까

[살인의 추억] 드러난 진실들을 쥐고서 최종 숏으로 | ※ 『최종 S의 비밀』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Sequence), 신(Scene), 숏(Shot)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에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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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 S의 비밀』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Sequence), 신(Scene), 숏(Shot)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에 <유전>과 <미드소마>의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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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굴을 통해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 - 자크 오몽

 

특히 공포의 전도체가 될 때, 얼굴은 유난히 도드라진다. 실제로 관객한테 공포(영화)는 스크린 속 얼굴들이 극단의 표정을 지을 때 완성되고는 한다. 깜짝 놀란, 고통에 찬, 절규하는, 비명의 얼굴. 한 세트로, 흉측한, 광기어린, 무섭게 일그러진, 악마성의 얼굴. 이 과정에서 창조적 솜씨가 빚어낸 얼굴들은 장르의 관습이 돼 지독히도 반복되는데, 대개는 진부하거나 한심한 복사본에 그치고 만다. 아마도 원본 속 얼굴의 맥락을 해석해내지 못한 채 단지 표정 흉내에 급급했기 때문이리라.

 

영화 <13일의 금요일>(2009)

 

그 와중에 여태껏 본 적 없는 얼굴이 등장했다. 아리 에스터 감독의 장편 데뷔작 <유전>(2017)의 마지막 숏. 피터는 말 그대로 넋이 나가버린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럴 만도 한 게 가족들이 악마의 굿판안에서 모두 잔혹하게 희생된 데다, 엄마(애나)는 방금 전 스스로 본인 신체를 훼손했고, 피터 자신의 정신과 육체는 이제 막 악마가 점령할 참이다. 미쳤거나 미치기 직전이거나.

 

그런데 잊지 말자. 이 빙의 행사는 (악마 측 입장에서는) 거룩한 의식이다. 혈통이라는 가족의 근원이 낳은 지옥도인 동시에, ()의 계보가 연속성을 획득하는 경축의 시간이다. 살육과 의전이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인 셈. 추종자들은 그들이 섬기는 악마 파이몬에게 지식이나 좋은 친구따위를 달라고 간청까지 한다. 악의 측면을 모른 체하거나, 악행을 덮어도 될 만큼 파이몬의 명성이 위대하다고 믿는 듯하다. 이때 파이몬은, 누구와 닮았나.

 

 

아리 에스터는 피터의 최종 얼굴을 담는 데 적잖은 러닝 타임을 쓴다. 이제 피터는 더 이상 놀라거나 부르짖지 않는다. 그는 압도된 채 무너져 내리며, 다만 악이 스며드는 시간을 얼굴에 새기는 중이다. 77초간 지속되는 이 숏에서 피터는 눈을 단 한 차례도 깜빡거리지 않는데, 생리현상이 불필요한 어떤 초월의 공간으로 넘어간 듯도 하다.

 

중세 서양 예술에서 얼굴이 주로 신()의 형상이었다고 할 때, -인간으로서 피터의 이 얼굴은 성스럽고 선량한 그 기표들과는 조금 다른 버전으로 보인다. 누군가에게 신성한 의식이()지만 그 개최를 위해 잔혹한 파괴, 그리고 현혹의 기술이 동원되지는 않았냐는 반문. 물론 고결하고 인자하고 번뇌를 짊어진 듯한 표정들은 그 이면을 가리는 데 부족함이 없었을 테다. 따라서 피터의 얼빠진 마지막 표정은 위장 작업이 완수되기 직전 단계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거룩함으로 가공되기 이전의 그 무엇, 이를테면 선택된 자 개인의 멸망에 관한 이미지.

 

전에 본 적 없는 이 얼굴은, 자신이 신인 줄 아는 악마를 맞이하고 있다.

 

<유전>의 최종 얼굴

 

여기 의식이 또 하나 있다. 호르가 마을의 하지제, 그 하이라이트로 9명의 제물이 불에 타는 중이다. 그중 곰 가죽 안에 갇혀 산 채로 타는 이는 대니의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이다. 말 그대로 환장의 카니발. 이 광경에 넋 놓고 울먹이던 대니가, 이윽고 웃는다. 너희들의 이 엔딩이 고소하다는 듯. 영화가 끝난다.

 

아리 에스터의 두 번째 영화 <미드소마>(2019)의 마지막 시퀀스에서도 학살과 의식은 동전의 양면인 양 들러붙어 있다. 이 기괴한 중첩을 떠안는 자, 이번에는 대니다. 그녀의 경우 혈연과의 단절은 이미 서사 초반 경험했고, 애인인 크리스티안과도 이별 중이다. 전자는 내부의 신경쇠약을 견디다 못 해 발 디딜 판 자체를 깨뜨렸고, 후자는 슬픔은커녕 이 괴이한 마을에 대한 의심조차 나누기 힘들 만큼 둔해빠졌다. 감정의 공유가 가능하다는 점에서만 보면 차라리 이 모계-토테미즘 사회가 나아 보일 정도다.

 

 

인류의 역사는 곧 분화의 역사다. 집단은 부피가 늘어나 갈라졌고 또 그 갈래별로 같은 과정을 겪었다. 최초의 단어가 진화 끝에 백과사전의 체계를 갖췄듯, 인간관계의 망은 넓이와 깊이를 더하고 더해 삶의 양식이 됐다. 어쩌면 인생이란 내가 속한 각 층위의 집단들에서 맡은 바 역할극을 잘해내기, 그 자체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교과서도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정의하지 않았나.

 

<미드소마>의 대니는 그 역할극에서 탈락했고 또 탈락하는 중이다. 이를테면 과거와 미래 가족 모두와 이별하기. 사회적 동물이 타자와 관계를 맺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대니를 자꾸만 미토스(mythos)의 영역으로 밀어 넣고, 그녀 또한 그 중력장에 적응해간다. 마치 비극을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이 끝내 종교로 빨려 들어가듯이.

 

<미드소마>의 호르가 마을. Join us?

 

다시 한 번, 대니가 이윽고 웃는다. 너희들의 이 엔딩이 고소하다는 듯. 낯선 마을에서 낯선 공포를 느낀 여성주인공이 되레 애인의 죽음을 선택하고 웃음까지 짓는 아마도 최초의 숏. 여태껏 본 적 없는 또 하나의 얼굴이다.

 

이곳 호르가 마을은 역할놀이가 필요치 않은 세계다. 동일한 믿음과 삶의 리듬 아래 단일 자아로 꿰어져 있기에 관계의 유지나 개선을 위한 어떤 증명이 요구되지 않는다. 대니의 마지막 웃음은 자신에게 울음만 남긴 그 증명의 기록물, 즉 인물들을 활활 태워버렸다는 안도인 셈이다. 따라서 이 웃음은, 비가역적이며 돌이킬 수 없다. 수 년 간 요동쳤을 그녀의 감정은, 그 진폭은, 이 순간부터 가지런하게 정렬된 하나의 선으로 수렴해갈 것이다. 대니는 백과사전 이전의 시간, 몇 가지 음절만 알면 되는 그곳으로 되돌아갔다.

 

 

사물은 그 자리에 있다. 왜 그것을 마음대로 조작하는가?” - 로베르토 로셀리니

 

로셀리니 감독의 말에 빗대어 보자면, 아리 에스터는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즉 실재하는 두려움의 요소를 관습적 표정 안에 억지로 끼워 넣는 데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전에 없던 얼굴들 피터의 흡수와 대니의 변환을 포착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물론 우리는 그 덕에 악의 진영이 갖춰지기 직전의 절망적 시간을 목격했고(유전), ‘맹신나 자신으로 살기가 양립할 수 없음을 지켜볼 수 있었다(미드소마). 무엇보다 대니의 얼굴에서는, 알면서도 가야 하는 퇴행 길에 관한 서글픈 섬뜩함마저 느낀다. 아마도 잠재적으로는 모든 사람한테 열려있을 그 뒷걸음의 문. ‘홈 스위트 홈에는, 사회 곳곳에는, 문손잡이를 돌리도록 만들, 나락으로 통하는 구멍이 너무 많다.

 

믿...?

 

<미드소마>의 최종 숏. 곧 ‘김치’

 

영화관 안과 밖의 공통점, <미드소마>나 현실이나 그토록 잔혹한 사건들은 대낮에() 일어난다는 것. 그럴 수밖에. 그들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걸 해대니까, 떳떳하니까. 신의 이름을 빌려 침략하고 신의 이름을 빌려 목숨을 뺏고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모두 신의 뜻 운운하는 이들은, 추종자는, 악마는, 악을 행하되 악의가 없다.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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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미드소마> 감독판이 이전 버전과 다른 점은 대니와 크리스티안 사이의 감정선 및 그 굴곡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것 정도. 그밖에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몇몇 대사들.

 

PS 2. <유전>의 최종 숏은 사실 77초간의 얼굴 숏이 아니라, 3초 동안 나무집 내부를 디오라마처럼 포착한 장면이다. Hail Pai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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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K가 눈(雪)을 맞는다. 죽어가면서. 어쩌면, 눈에 묻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먼저 <블레이드 러너>(1982)의 후반부, 전투용 리플리컨트 로이 배티는 릭 데커드와 싸움 도중 폐기 시간에 다다른다. 이윽고 데커드의 목숨을 구해주고는, ()를 맞으면서 말한다.

 

나는 너희가 상상도 못 할 것들을 봤어 () 이제 그 모든 순간들이 시간 속으로 사라지겠지. 빗속의 이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

 

시간이 내 기억 전부를 집어삼킬 거라는, 그래서 태초의 암흑으로 끌려 내려가야 한다는,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공포심의 고백. 훗날 데카르트적 코기토에 부합하는 주체는 우리 중 누구였을까, 로 회자될 이 명-유언을 끝으로 배티는 눈을 감는다. 그의 말대로 비는 눈물을 머금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이 있다면 아마도 그의 죄 또한 씻어냈겠지.

 

35년이 지나 등장한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드니 빌뇌브 감독은 마지막 신(scene)에서 전작의 비와 닮은 듯 다르게 눈을 흩뿌린다. 눈은, 거리별로 속성이 달라진다. 손에 직접 닿으면 차갑고 보드랍다는 촉감이, 프레임 바깥에 놓인 관찰자 입장에서는 고요하고 정갈한 어떤 낭만성이 느껴지는 식이다. 이 낭만성에는 심지어 포근하다는 초감각이 더해져, 설경(雪景)은 종종 비극의 당사자를 달래고 감싸고 덮어주는 역할을 부여받아왔다. (feat.별들의 고향)

 

그리고 다시 한 번주인공 K가 눈(雪)을 맞는다. 죽어가면서. 어쩌면, 눈에 묻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마지막 신

 

SF영화를 정의해보자. 과학 또는 테크놀로지가 구현한 미래, 혹은 그 미래와 연결된 현재에 대한 이야기, 시공간에 관한 그럴싸한 공상들의 집합체정도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은 대개 혈통이든 무엇이든 어떤 역량의 전수를 위해 선택된 자(chosen one), 어그러진 세계 질서를 복원하고자 비장한 전투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가장 최첨단의 영역에서 써내려가는 가장 원형적인 서사. SF영화야말로 신화의 적자(嫡子)인 셈이다.

 

물론 또 다른 버전들이 있다. 이들은 정의성전(聖戰)’, ‘복원같은 인류애적 키워드에 관심이 없다. 대신 인류의 출현부터 먼 미래까지를 형이상학적으로 꿰어 냉소하거나(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테크놀로지를 한 극단으로 밀어붙여 경고를 남기거나(터미네이터 1·2), 21세기로 넘어와서는, 지구의 파괴적 관성에 치를 떨어’(언더 더 스킨) 버렸다. 오지 않은 시간을 경유하다 보니 시스템이 무엇을 잃을지, 인류의 존재는 옳은지를 묻고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듯이.

 

이처럼 SF영화는 가장 원형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동시에, 한편에서는 문명의 본성을 향한 가장 날 선 접근이 돼왔다. <블레이드 러너>의 경우 로이 배티로 하여금 데커드를 죽이지 않고 끌어올리도록 함으로써 장르의 중력장을 찢고 그 날 세움의 영역으로 사뿐히 날아올랐다. 복제인간의 유언 한 구절은, 그렇게 영화사를 통틀어 제일 유명한 시가 됐다.

 

<블레이드 러너>의 후반부

 

속편인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줄거리는 그러나, 주인공은, 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정도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블레이드 러너이자 리플리컨트인 주인공 K는 서사를 이끌어가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서사에 이끌리며, 스토리상으로는 데커드를 찾기 위해 이용된다. 선택받은 자로서 무거운 책무를 모조리 짊어질 각오를 다졌건만, 함께 가는 척하던 서사 씨가 문뜩 걸음을 멈춘 채 그의 자격을 부정해버린 것이다.

 

“오 이런! (레이첼이 낳은, 선택된) 그 아이가 너라고 생각한 거야…?”

 

세상의 중심에서 순식간에 훅! 하고 끄트머리 어딘가로 끌려난 것 같은 아득함. 이때부터 영화를 지배하는 키워드는 다름 아닌 간극이 된다. 선택받은 구원자와 가짜 기억이 심어진 그저 순종형 리플리컨트간 아찔한 심리적·물리적 거리. 내 위치가 격변했는데 그간 느껴온 세상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일 리 만무하다. K는 이내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면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방법도 이유도 잘 떠오르지 않는, 어떤 공허로 가득 찬 세계를 감지했을 테다.

 

<블레이드 러너>가 인간과 비-인간 혹은 진짜와 가짜 사이의 경계선이 온당한지를 묻고 선의 형태를 블러처리했다면,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이렇듯 경계선을 잔혹하리만치 짙게 그어버린다. 세계의 모양을 담아내는 두 가지 방법. 후자의 경우, 즉 드니 빌뇌브 감독은 상상과 실재 사이의 골이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개체와 세계 간 구조의 도식화, 다시 말해 세계에 관한 개체의 이해력 증진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듯하다.

 

‘나’를 알아가기. <블레이드 러너 2049>

 

내 위엄을 찾을 곳은 우주가 아니다. 그것은 내 사고의 제어 기제에서 찾아져야 한다. () 우주는 공간을 온통 둘러싸서, 나를 원자 알갱이 하나 삼키듯 먹어버린다. 나는 생각함으로써 세상을 이해한다.” - 블레즈 파스칼, 팡세

 

모든 개체는 그 자체로 유일한 존재지만 우주를 펼치면 단지 무한한 점 중 하나일 뿐이라는 명제는, 언제나 참이다. 1인칭 주인공인 우리 모두한테 초라함의 문이 활짝 열려있는 구조. 태초부터 그랬다. 착각은 필연이다. 요컨대 이해란, 간극들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간극을 발견했을 때의 아찔함에서 시작돼야 하는 셈이다. 그 이해를 바탕으로, K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자는(데커드를 없애라는) 성전의 관성적 제안에 붙들리지 않았다. 당신이라면?

 

3D를 넘어 4D, 스펙터클을 다양한 감각으로 흡수해보라는 체험 지향적 시대거나 말거나 <블레이드 러너 2049>위대한 SF들의 길을 걷고 싶어 했고 또 걸었다. 과장하자면 인류와 문명을 적절한 각도의 비딱함으로 재단하는 단계를 넘어 우주를 이해하는 규칙 하나를 훔쳐 보여준 수준. 계보는 이렇게 새로 고침되며 이어지고 있다.

 

잠깐 꿈꾸는 건 괜찮잖아. <블레이드 러너 2049>

 

K라고 명명해준, 실은 그러도록 프로그래밍 된, K와 유일하게 소통해준, 실은 그러도록 프로그래밍 된, 증강현실 홀로그램 제품 조이는 영화 중간 말한다.

 

잠깐 꿈꾸는 건 괜찮잖아.”

 

잠깐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일까. 당신의 꿈은 언제 멈췄나. 내 꿈은 잘 있을까. 쓸쓸한 K에게 챙겨줄 건 뭐 없을까. 주섬주섬. 그렇게 드니 빌뇌브는 진짜눈을 선사한다. 선택된 자가 가짜눈을 만지는 그 시간에.

 

물론 희망은 개뿔. 그저 K가 만진 눈이 차갑고 따뜻하기를, 그를 덮은 눈이 포근하기를, 상상한다. erazerh

 

 

※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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