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의 '사이즈'를 들먹이며 "그래서 영화는 반드시 영화관에서 봐야 한다."고 침을 튀기는 주장이 나는 불편하다. 내 집 내 공간에 여유롭게 기댄 채 아내와 이야기도 나누고 맥주도 한 잔 하며 즐기는 영화는 극장에서 느낄 수 없는 독특한 멋을 선사해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프레임 사이즈는 해당 영화 고유의 산물이 아닌 '관람 환경'에 속할 뿐인지라, 그것을 영화 평가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을 수도 없지 않은가. 늘 그렇듯, 가장 중요한 것은 프레임에 구현된 영화의 '존재 이유'가 진정성을 띠고 있느냐는 점이며, 따라서 사이즈 같은 영화 밖 변수는 그 이후에 따져도 충분하다.

물론 영화관만의 매력은 분명히 존재한다. 어둠을 들썩이는 매혹적 이미지, 공간의 냄새, 조용한 북적거림, 또는 연인의 손을 잡았을 때의 찌릿함…. 그 아름다운 감각들을 떠올려 본다면, 사이즈나 사운드 같은 '규모-기술적 차원' 운운하는 건, 사실 좀 많이 촌스럽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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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닮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실재 상(像)을 고스란히 담았다고 해서 그 이미지가 꼭 진리에 가까운 것은 아니다. 바꿔 말해, 명백한 가짜 형상들로 채워진 이미지에서도 진리를 향한 몸짓은 충분히 발견될 수 있다. 진리는 숏의 내용물이 아니라 숏의 '태도'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을 찍었나'보다는 '어떻게/왜 찍었나'라는 질문이 대개는 더 쓸모 있기 마련이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워낭소리>의 답이 진리 추구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워낭소리>에서 농촌과 노인과 늙은 소는 곧잘 정서적 공통분모로 묶이는데, 이 정서가 과연 대상들 본연의 흐름 속에 포착된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희노애락' 유의 이미 정형화된 감정적 모델을 먼저 채택한 후 거기에 대상들을 끼워 맞춘 듯한 몇 장면 때문이다. 이는 진리 탐구와는 무관한, 페이소스 추출 작업일 뿐이다. 연출했다는 사실 자체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카메라를 작동한 이상, 연출이 없을 수는 없다). 그냥, 진리에 다가가기란, 그런 노력을 발견하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이야기.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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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 “만약 현실이 아름답다면, 영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가 보고 싶다. ‘그냥 영화’ 말고, 그 지독스러운 아름다움에 온몸이 짜릿하니 뜨거워지는 영화. 스토리가 매력적이더라, 이미지가 보기에 참 좋더라, 같은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것들은, 이를테면 살갗을 기분 좋게 간질여주는 데 그칠 뿐이다. 초보자의 뜨뜻미지근한 애무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진짜 영화’는 내면 깊이 박힌 어떤 응어리를 찾아 건드린다. 날것의 자극. 그 느낌이 신경계를 타고 몸 구석구석으로 퍼질 때면, 생전 처음 맛보는 묘한 짜릿함에 영혼이라도 내주리라.


이 정도로 경이로운 느낌은 ‘감동’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와는 명백히 다르다. 저 깊은 곳의 응어리는 단지 마음을 움직이는 무엇만으로는 자극되지 않는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찾아 헤맨다. 진짜 ‘그 무엇’을 구하고자. 마침내 어떤 영화가 그 욕망에 정확히 호응했다면, 그것은 거기에서 ‘현실을 명쾌하게 꿰는 이미지’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세계가 현실이라는 진부한 장벽을 열고는 그 틈으로 마치 빛처럼 쭉 뻗어 나온 것이다. 유레카! ‘진짜 영화’의 발견. ‘영화-매체’라는 규격을 떨쳐낸 이미지는 그렇게 해서 내 머릿속을 활보한다. 다시 말하지만, 지독스럽게 아름답다.


이 마법 같은 경험은, 그러나 현실을 잠시나마 잊자는 판타지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현실로의 복귀를 전제로 하는 경유지에 가깝다. ‘진짜 영화’는 현실 너머의 가상현실로써 현실의 부조리한 구조를 도드라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 내용이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루는 영화의 그 태도가, 형식이, 고민이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셈이다. 그래서 가슴이 후련하게 뻥 뚫리는가 싶다가도, 이내 뭉클해진다. '진짜 영화'는 그렇게 고단한 영혼을 매만질 줄 안다.


어찌 보면 몹시도 이기적인데다 참 쓸 데도 없는 욕망이다. 그저 앉아서 보기만 하면 되는 주제에 바라는 것도 참 많다. 그것도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하지만 나는 ‘진짜 영화’를 향한 갈증이 어쩔 수 없는 수순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만들기라는 꿈을 실현하지 못한 자에게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결핍이, 그런 식의 갈구를 부추기는 탓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그 결핍이 유난히 기승을 부린다. 아마도 현실이 아름다워 영화가 사라지더라도, 영원할 녀석.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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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영화관에 관한 나의 기억은 다섯 살 즈음부터 시작됐다. 아버지는 지인이 운영하던 읍내 유일의 극장에 나를 자주 데려가셨는데, 어느 시점부터 극장 출입은 물론 진득이 앉아 감상하기를 나 혼자서도 잘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지금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혹성로봇 썬더A]를 족히 열 번은 넘게 봤다는 것 정도. '날아라 썬더A ♬' 어쩌고 하는 주제가를 입에 물고 다닌 것 같기도 하다.

그로부터 27년. 극장이 있던 자리에 버스터미널이 들어선 것도 이제는 오래전 얘기가 돼버렸다. 그렇지만 다섯 살 아이를 품어주던 어둠의 공간과 그곳을 떠돌던 묘한 설렘의 공기를 나는 여전히 잊을 수 없다. 엄마 품까지는 아니더라도 포근했거든. 그래서 지금도 극장 대신 놓인 그 터미널에 가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떠올린다. 극장 입구에 걸려있던 빨간 커튼, 싸구려일 것만 같은 그 천, 시큰한 냄새.

허우샤오시엔의 'The Electric Princess House'가 <그들 각자의 영화관>에서 특별하게 매력적인 이유는 그래서다. 요컨대 이 작품의 영화관 안에는 동시에 흐르는 두 개의 시간이 있다. 폐허가 된 영화관 내부가 지금 현재의 시간을 가리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크린 위를 흐르는 흑백영화는 그때 그 시절을 소환한다. 마찬가지로 나의 영화관(이름도 자그마치, 아카데미 극장이었다) 그 자체는 세월의 무게에 눌렸지만, 어렸을 적 만난 이미지의 어렴풋함에서 나는 나만의 영화관을 언제든 추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영화가 기억하는 그때 그 공기와 지금 여기와의 간극은 더 커진다. 나의 어린시절은 아주 멀리 떠나버린 걸까. 또 눈물이 나려한다. 어제 본 게 영화인지 꿈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던 시절, 내 아버지가 지금의 내 나이와 같던 그 시간은, 잘 있을까. 그리워라.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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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카메라는 세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카메라는 부분을 연주하고 즉흥적으로 소리를 낼 수도 있고 직접 개입할 수도 있는 악기와 같다. 두 번째로 카메라는 복싱과 같다. 카메라로 힘껏 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카메라는 애무와 같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존재들과 사물들의 표면을 스쳐가는 작은 움직임들이기 때문이다.

(중략) 어렸을 적에 끈으로 단단하게 신발에 잘 묶어서 신는 나무 스케이트가 있었다. 내가 스케이트를 잘 타게 되었을 때, 스케이트를 타는 것은 스케이트가 발아래서 거의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카메라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나는 카메라를 그저 내버려둔다. 초점을 맞추는 데도 전보다 아주 많이 편안해져서, 한순간 이미지를 흐릿하게 내버려두고, 다음에 아주 부드럽게 다시 잡는다. 그러면 마치 카메라가 가벼워진 것처럼 느껴지게 되고,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카메라 위로 사물들의 리듬이 다가오게 된다."


- 요한 반 데르 코이켄, [시선의 모험] 中


좋은 영화의 기준 중 하나로, '허구와 현실 간 원활한 호흡'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프레임 안에서 바깥으로, 또는 바깥에서 안으로의 자유로운 운동성 같은 것. 여기서 프레임 안은 영화 이미지 자체를 말하며, 프레임 바깥은 우리가 극장 밖에서 만나는 실제 세계, 즉 카메라가 마주하고 있었을 그때 그 시공간을 뜻한다. 요컨대 관건은 시공간에 놓인 어떤 리듬, 육안으로 감지하기 힘든 사물들의 심상을 카메라가 포착해내느냐에 달려있다. 그것이 가능할 때만 영화의 안과 밖이 진정어린 대화를 나눌만 한 거리가 확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카메라를 일컬어 '살아있는 기계'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근래 내게 가장 와 닿았던 영화는 구스 반 산트의 <라스트 데이즈>와 프랑수아 오종의 <타임 투 리브>와 다르덴 형제의 <아들>이었다).

글, 이를테면 영화평도 다르지 않다. 영화 또는 영화가 건진 현실을 글의 맥락에 얼마나 잘 녹여내느냐 하는 것. 한 편의 영화를 현실의 어떤 지점에 관한 고유한 '신호'라고 해보자. '그 신호 체계에 대한 사려 깊은 이해와 더불어 해당 현실을 향한 글쓴이의 진심이 담긴 글' 정도를, 우리는 좋은 영화평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지식이 아니라 정성과 열정이다. 글을 쓰는 데 정성이나 열정만큼 강력한 에너지원이 없을 뿐더러 그것이 결여된 글은 읽는 이에게 고문이 되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뜬금없기는 하지만, 내가 비교적 최근에 쓴 몇몇 멍청한 글들에 그 정성과 열정이 빠져있음을 반성하기 위함이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글의 어떤 부분은 민망함을 넘어 다소 역겹기까지 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글도 마음에 안 든다. 거참.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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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다른 무엇이기 전에 영화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말이 아니라, 영화의 원초적 재미에 관한 이야기다. 말하자면 영화는, 직사각의 틀에 펼쳐지는 세계와, 나의, 은밀한 만남이다. 언제나 출발점은 거기에 있다. 바야흐로 영화를 스포츠처럼, 수출품처럼 대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시대. 영화 보기의 순수한 즐거움을 깨닫게 해주는 영화가,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EBS에서 다시 본 <커피와 담배>, <데드 맨>이 딱 그렇다는 이야기다. 짐 자무시 만세!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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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평론계' 나아가 '충무로'를 향한 비난의 화살은 영화 개봉 전부터 날아왔다. 시사회에 참석한 평론가나 기자의 비판 글이 올라오던 그때부터. 대개 영화의 짜임새를 문제 삼은 그 글들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뭇매를 맞았다. 반박의 논리는 "이 영화에서 그런 걸 바라는 당신이 이상한 사람"에서부터 시작해 "심 감독 열정의 반도 못 따라가는 네가 무슨 자격으로..."까지 이르렀다. 게다가 '이봐라, 디워를 비판한 평론가들이 다른 '형편없는' 영화들은 좋게 평가했다'를 주장하는, 다분히 비난을 의도한 조선일보스러운 짜깁기마저 떠돌아다녔다.

반면 디워를 긍정적으로 다룬 몇몇 글(결국은 심 감독의 열정과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는 내용)은 '개념글'이라는 수식어로 조명 받으며 널리 읽혀 바라마지 않는 평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영화에 긍정적인가 아닌가가 글쓴이의 됨됨이마저 좌지우지하는 상황. 이해불가.

비판적인 내용으로 써내려간 영화평론이라고 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점은 좋더라, 발전 가능성이 있더라'를 거기에 첨가해야 할 의무는 없다. 영화 주체의 그간 고생을 헤아리고 격려해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고. 그렇다고 디워를 비판한 글들이 소위 '예술영화를 평하는 기준'을 디워에 들이댈 만큼 야박한 융통성을 보인 것도 아니다. 앞서 언급한 뭇매 맞은 평들은 디워 스스로가 지향한 지점, 그러니까 '한국형 블록버스터(?)로서의 가치'에 영화를 끌어다 놓고 그것에 대해 논했다. 그 정도 자본을 들이고 그 정도 마케팅을 펼친 '거대한' 오락영화에 어느 정도의 만듦새를 요구하는 것은 평론가건 누구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또 사실 필요한 의문이고 지적이다. CG의 훌륭함으로 다른 부족한 요소들을 덮고 말고는 어디까지나 관객 개개인이 판단할 문제일 뿐, '그렇게 봐야 옳다'가 끼어들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런 논리들이 영화평론에까지 적용된 현 상황은 꽤나 우울하다. 대중의 기호나 시장 흐름에 적절히 맞추란 말, 그러니까 평론더러 죽으라는 말이, 아주 당연하게 오간다.

물론 한국 영화저널리즘에 헤아리기 쉽지 않을 정도로 많은 문제점이 놓인 건 분명하다. 평단과 관객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 또한 좁히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디워의 그것과 관련한 작금의 공세들은, 분명 핀트를 잘못 맞추고 있다. 영화평론은 대중과 보다 친해질 필요가 있을지언정, 대중의 입맛에 따라 다시 쓰여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 erazerh


# 사실 평단에 퍼붓는 이런 공세들은 그동안 영화언론에 쌓였던 불만이 그 자체로 표출됐다기 보다는, 한국사회의 '배타적 응집력'이 어떻게 생성되고 커 가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에 더 가깝다. '몰이해를 동반한 적 만들기'라는 이 빌어먹을 악습은 도대체 죽을 줄을 모른다. 정말 지독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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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영화평은 여기저기 곳곳에서 가장 자주 만날 수 있는 글 중 하나가 됐다. 영화전문지에서부터 개인 블로그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영화 관련 글이 차고 넘치는 시대. 하지만 그런 각양각색에도 불구하고 글이 촉발되는 시기에 관한 한, 모든 영화평은 같은 대답을 지닌다. 요컨대 영화평의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영화’인 것. 보다 정확한 시제로 말하자면 ‘완료된 영화’다. 쓰는 이의 입장에서 완료된 영화는, 촬영과 편집의 종료가 아니라 ‘보고 듣는 것’까지가 끝났음을 뜻할 터. 그러니까 모든 영화평은, 극장을 나선 누군가가 어떤 할 말을 쥐게 됐을 때 마침내 시작하는 것이다.

그 할말이 뱉어지는 곳은 어디까지나 극장 밖, 다름 아닌 현실이다. 현실에서 영화 이미지로,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여정. 그래서 나는 ‘현실을 향할 줄 아는’ 글을 좋은 영화평이라 생각한다(물론 그럴 여지를 영화 자체가 잠재한 경우에 한해서다. 비판이든지 옹호든지 그래야 가능하다). 현실을 향할 줄 안다는 말은, 영화를 경유해 도착한 실재 세계 속 어떤 지점과 관련해 영화평이 나름의 구조를 세울 수 있음을 뜻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구조를 세우다’가 정교한 조직체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와 나를 둘러싼 현실을 보다 잘 이해하고자 세계 구석구석을 탐색하고 더듬어보는 노력에 가깝다. 요컨대 영화평 쓰기는 영화가 건져낸 ‘지금 여기’를 ‘내가 어떻게 규정지을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내가 체계를 만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만든 체계의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는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말을 떠올려보자. 영화평을 쓰고 있는 당신. 당신은 지금 당신의 소중한 체계를 만드는 한 과정 중에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현실과 유사한 이미지를 통해 프레임 안과 밖의 대화를 유도하는 매체다. 유도된 그 대화는 극장 밖으로 나와 다양하게 변주되고 또 여러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말하자면 영화평은 그 흐름들을 포착하고 보존하는, 개인의 언어인 셈이다. 한 영화가 어떤 담론으로 나아갈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복합적인 텍스트성을 지닌다면, 즉 ‘살아있는 몸체’로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영화평의 사유 능력과 폭넓음에 대한 믿음이 애초에 전제됐기 때문일 것이다. 재생이 완료된 영화가 세상 밖에서도 살아 숨쉬기 위해서는, 영화를 둘러싼 개별 언어들의 그런 전방위 활약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영화평은, 영화의 완료에서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그 지점에서 영화가 꼭 멈춰야 하는 것은 아님을 환기시켜주는 일종의 각성제 같은 것이다. 이미지의 지속 가능성이 제한될 때 나타나는 부작용을 영화평은 (거의 유일하게) 빗겨갈 줄 안다. 상영이 끝남과 동시에 영화 이미지 또한 종료되는 것으로만 인식될 때, 그때 영화가 남길 수 있는 흔적은 사실상 몇몇 숫자들에 불과하다. 제작비와 관객 머릿수와 순수익, 혹은 영화나 배우의 뒷이야기 같은 것. 물론 영화가 산업의 틀 안에서 발생하고 소비된다는 점에서, 숫자들에 담긴 의미 역시 가벼이 넘겨볼 성질의 것은 아닐 테다. 영화에 따라서 그것들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나 척도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수치나 수식은 어디까지나 속도전의 양상에나 어울리는 지표다. 그 지표들이 지상목표가 되는 경우, 영화들이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현상은 꽤나 빈빈한 일이 된다. 소비를 촉진하는 시간 속에서는 영화자본이 내리는 판단이 영화의 등장과 퇴장에 대해 가장 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나쁠 이유는 없다. 문제는 그 속도 때문에 영화가 먹고사는 것과는 별개인 시공간으로 여겨질 때, 또한 그것이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때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아니더라도, ‘어떻게 먹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 영화는 여전히 고민하고 질문한다. 그 질문들을 극장 안에 그냥 남겨둘 참인가? 좋은 영화평을 쓰고 또 좋은 영화평을 찾아 읽고 싶은 욕망은 바로 그런 근심에서 출발한다. 영화평이야말로 영화의 지속시간을 무한대로 늘릴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인 반응이자, 사유의 통로를 지나온 대답이며, 그것의 보존과 공유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자, 지금 여기서 영화를 다시 써보자. 몇몇 영화는 당신이 꺼내고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놓여있을지도 모른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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