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잠시만 주변 풍경으로 눈과 귀를 돌려 주의를 기울여보자. 각종 사물과 소리가 여기저기서 깨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지는 않는가. 당신 또는 나의 ‘지금 여기’에 있는 것들, 이를테면 하늘과 땅, 그리고 그 둘을 이을 듯 큰 키를 위압적으로 자랑하는 건물들, 건물들 구석구석을 누비는 하지만 방향을 좇기에 난감할 정도로 얽히고설킨 전깃줄과, 전깃줄 아래를 오가는 다양한 표정의 얼굴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 사이로 분주하게 흘러나오는 도시의 소리 같은 것. 무엇을 보고 듣고 또 느끼는지는 각자 다를 테지만, 보이고 들리는 크고 작은 것들로 세상이 이미 꽉 차있음은 명백해 보인다. 하기야 지구라는 땅덩이 자체가, 만물과 만물 사이를 오가는 무수한 감각 반응들이 한데 뭉쳐진 덩어리 아니겠는가.

우리 주변 곳곳에는 그렇게, 셀 수 없이 다양한 형태의 감각/지각 가능 대상들이 놓여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한 가지 사실은, 또 다른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려는 사람들로 극장은 여전히 붐빈다는 점이다. 소비를 유혹하는 메커니즘으로서의 멀티플렉스를 감안하더라도, 영화라는 것의 매력이 ‘아직까지는’ 그 유혹의 기본축일 터. 도대체 영화가 뭐길래! 우리를 그토록 끌어당기는가. 우리는 영화 안에서 무엇을 ‘보는가.’


영화 한 편은 일단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실재 세계에서 건져낸 가상의 세계다. 여기서 ‘가상’이라 함은 영화 속 시공간이 우리가 속한 현실과 닮았으되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님을, ‘세계’라 함은 그 시공간이 여러 가지 플롯으로 엮여 물리적인 처음과 끝을 지닌 하나의 덩어리가 됨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를 직사각의 평면 틀에 재생되는, 유사-현실의 이미지 체계라 일단 정의 내릴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화의 매력이 그저 ‘현실과 닮았거나 다르거나’ 하는 차원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실재 세계에서 건져낸 가상의 세계’라는 문구에서 남은 부분, 그러니까 ‘실재 세계에서 건져낸’이야말로, 영화의 정체에 관한 한 이곳에 등장하는 모든 언어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영화적 시공간을 건지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해당 영화의 존재 이유에 의해 진행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재 세계에서 건져진 영화 이미지들은 곧 ‘이 영화가 왜 하필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영화 스스로의 대답들인 셈이다(영화의 윤리적 태도가 드러나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세상 곳곳에 수없이 놓인 유․무형의 감각/지각 가능 대상들 중 무엇으로써 영화를 메울지 결정하는 것. 그 과정은 ‘대상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의 증명을 위한 것이 되기도 하겠지만, 대상들에 깃든 문제적인 ‘틈’을 찾기 위한 고민을 동반하기도 한다. 전자와 달리 후자의 경우 그 결과로서의 영화 이미지는 단지 유사-현실 체계로만 부를 수 없는, 현실에 대해 다른 시선을 지닌 무언가가 된다.

그 시선이 가리키는 곳은 두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볼 필요가 있는 대상, 그래서 ‘지금 여기서’ 다시금 써봄직한 현실이다. 카메라가 부조리나 모호함을 끄집어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담아야 할지 고민하며 지켜보던 현실 속 시공간을, 그 노력의 산물인 이미지가 다시금 바라보는 것이다. 진짜 현실 옆에 나란히 앉아 진짜를 향해 웃고 울고 화낼 줄 아는 영화는, 바로 그렇게 해서 등장한다. 예컨대 언어와 체제로 정착된 모든 질서를 빗겨가는 조도로프스키의 탐구적 이미지나, 상징계 바깥을 살아가는 사람들 또는 그들의 규정되지 않은 삶을 긍정하는 봉준호의 희비극 같은, 사유-현실 체계로서의 영화들. 우리가 속한 ‘지금 여기’에 보내는, 어떤 간곡한 ‘신호’ 같은 것들.


‘영화를 보다’라는 행위는 네모난 틀 안에 재생되는 이미지와 단지 맞닥뜨렸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어떤 사람과 사물, 그리고 그 사이로 흐르는 심상들과 조우한다. 그것들은 모두 영화의 윤리적인 태도가 선택하고 기록하고 구성한, 현실로부터의 상상이나 흔적이다. 현실에서 무언가를 건져내고 그 건져낸 것들을 현실에서 재생해야 하는 운명을, 영화는 타고난 셈이다. 이미지가 빛에 몸을 맡긴 채 세상을 향해 흐르는 현장은, 따라서 프레임 안과 밖이 대화를 나누도록 초대된 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대화를 엿보고 엿들을 수 있다는 쾌감! 그 은밀한 쾌감이야말로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거니와 영화를 본다는 것의 본질일 테다. 실재와는 조금 다른 곳에 서서, 다른 눈을 가지고, 다른 각도와 초점으로 세상과 마주하고픈 욕망이 그 덕에 충족되니 말이다. 그 욕망 때문에 우리는 지긋지긋한 현실로부터 탈출할 수 있으며, 때로는 지긋지긋한 현실과 다시 대면하기도 해야 한다. 어느 쪽이든 (극장을 나온 지 한참이 지난 후) 현실의 감각/지각 대상들 사이로 문득문득 지나가는 영화 이미지를 만나는 것은 반가운 경험이다. 프레임 안팎을 오가며 세상을 풍부하게 해준 그 대화가 여전히 내 귓가에 맴돌고 있음을 확인케 되니 말이다. 지극히 사적인 경험이지만, 그 자체로 충분히 즐겁지 아니한가. ⓒ erazerh


반응형

'FRAM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워와 영화평론  (15) 2007.08.07
영화평을 쓴다는 것  (2) 2007.07.29
영화  (16) 2005.10.26
앙드레 바쟁과 [엘리펀트], 그리고 또 다른 질문  (6) 2004.12.09
과연 내가 영화 관련 글을 쓰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뭐, 물론 지금은 전혀 안 쓰고 있다ㅡ.ㅡ) 좀 더 구체적으로 자문해보면, ‘거대한데다 속도마저 갖춘 가공할 생산력이 이미 미덕으로 자리 잡은 채 소비를 숨 가쁘게 재촉하는 지금의 구조와, 조금만 둘러보면 내 글보다 몇 십 배는 뛰어난 글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영화평론가도 아닌 내가(즉, 영화평을 쓴다고 해서 돈을 받는 것도 아닌) 도대체 왜 영화와 관련한 글을 써야만 한다고 혼자서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일까?’ 정도가 되겠다.

우선 ‘영화’라는 매체를 살펴보자. 영화라는 허구는 간혹 불가능의 범주를 넘나들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세계라는 그물망 안에 모두 걸리기 마련이다.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설정들, 이를테면 SF나 호러, 스릴러 등의 장르에서 주로 나타나는 초현실, 초자연, 비과학적인 상황들 또한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만 본래 의도했던 판타지로서의 가치를 얻게 된다. 현실이라는 테두리는 ‘영화 속 사건이 실제로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라 ‘영화가 스크린 밖 세상을 과연 어떻게 끌어오거나 활용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보다 생산적인 담론을 허락한다.

영화는 결국 재현의 예술이다. 사실 그대로든 사실에서 조금 더 나아갔든 영화는 세계의 현상와 본질을, 그리고 인간과 역사를 나름의 상상력을 동원해 영화적 시공간으로 담아낸다. 빔 밴더스는 “영화가 사물의 존재를 구원할 수 있다.”고 했다. 허위와 가식이 뒤덮어 버린, 폭염처럼 답답한 세상 대신 어떤 가공된 사건(다른 예술도 마찬가지)에서 삶의 진실을 발견하는 것은 더 이상 어려운 일도, 놀라운 일도 아니다. 누군가가 거대한 자본놀음에 질식하지 않은 채 견디고 있다면, 10편의 쓰레기 영화를 기꺼이 참아내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삶의 진실을 소중하게 머금고 있는 단 한 편의 영화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이상향은 아득한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가 속한 세계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이 낯설고 답답한 시스템에 휩쓸려 내 존재는 결국 실종되고 말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시선이나 소외된 인간을 따뜻하게 품고자 하는 진심 어린 마음, 나아가 진실을 향한 열망은 소중하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런 느낌들을 주로 영화 안에서 찾고자 한다. 진실된 의도에서 만들어진 한 편의 영화는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지언정 나와 내가 속한 현실을 고민하게 만드니까. 고민들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도 싶다.

그래서 나는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싶다. 글을 쓰게 되면 그 작품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거나, 카메라가 끌어온 현실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매체에 기고하느냐.’, ‘글솜씨가 어느 정도인가.’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글 한 편을 정성껏 썼을 때, 비로소 내 것으로 다가온 소중한 영화 한편, 그것이다. ⓒ erazerh


반응형

'FRAM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워와 영화평론  (15) 2007.08.07
영화평을 쓴다는 것  (2) 2007.07.29
영화를 본다는 것  (2) 2007.07.09
앙드레 바쟁과 [엘리펀트], 그리고 또 다른 질문  (6) 2004.12.09
영화와 창조적으로 소통하기 위해서


바쟁의 영화이론

앙드레 바쟁은 19세기 실증주의의 영향 아래 있던 영화이론에 현상학과 심리학을 끌어들였다. 이것은 영화가 스크린 속에서 뿐만 아니라 프레임 바깥의 외부 세계와도 연관되어 존재함을 의미한다. 현실과 관객이라는 외부 영역과 능동적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민주적 개념이 영화로 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바쟁에게 있어 관객이란, 영화가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이미지를 경험에서 터득한 스스로의 주관으로 재구성하는 사람이다. 영화적 오브제는 관객의 머릿속을 지나면서 현실 속 이미지와 구별되고, 그 구별을 통해 관객은 영화의 또 다른 창조자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쟁은 관객의 심리가 민주적이고 주체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서 영화가 리얼리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조작된 영화들을 비판하며 소비에트 몽타주 미학을 그 일례로 들었다. 주관성이 개입된 조작의 이미지들은 관객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바쟁은 현실과 세계 그 자체가 가진 모호함을 그대로 전달하는 영화들-장 르느와르의 영화나 네오리얼리즘과 같은-을 옹호했다.

그는 리얼리즘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끌어왔다. 현실을 닮은 모호한 이미지들은 경험을 통해 체화해온 주관성을 가지고 관객이 창조적으로 지각하게 된다. 이 같은 절차는 관객에게 또 다른 체화의 과정으로 작용한다. 영화는 관객에게 있어서 지각할 수 있는 어떤 경험이 되는 것이다.

현상학은 그 경험을, 세계와 타인들 속에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는 경이로움이라고 말한다. 결국 바쟁에 따르면, 관객이 체화된 주관으로서 재구성하고 세상과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 놓는 영화가 좋은 영화인 셈이다. ‘창조적인 다큐멘터리’의 작가로서 로버트 플래허티를 높게 평가한 이유다.


대표적인 ‘앙드레 바쟁적’ 영화 <엘리펀트>

집안에 거대한 코끼리가 들어앉았다. 어떻게 하긴 해야겠는데 손쓰기가 쉽지 않은 상황, 결국 어쩔 수 없이 코끼리와 함께 살며 그 상황에 점점 익숙해진다. 구스 반 산트는 미국의 고등학교를 서양우화에 나오는 코끼리에 비유한다.

영화 <엘리펀트>는 ‘어쩔 수 없는 코끼리’인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충격의 16분을, 감정이입을 최대한 자제한 채 그야말로 ‘관조적’으로 뒤쫓는다. 현실을 자의적으로 구성하지 않은 채 당시의 일상적 풍경을 있는 그대로 펼쳐낸다는 점에서 <엘리펀트>는 앙드레 바쟁이 말한 좋은 영화에 가깝다.


영화 속 아이들은 특별하지 않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에 대해 고민하며 눈물 흘리는가 하면 학교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사진 찍는 것이 낙인 녀석도 있다. 다이어트 중독에 걸린 세 명의 치어리더나 외모로 인해 고통 받는 여자아이 등 모두가 쉽게 볼 수 있는, 고등학생의 그저 그런 모습이다.

심지어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알렉스와 에릭조차 평범한 아이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왕따를 당하고, 게임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며, 히틀러의 영상을 보기는 하지만 영화는 이런 상황을 살인의 동기로 단정 짓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누구나 총을 살 수 있는 환경 역시 하나의 단서일 뿐 원인은 아니다.

어디에서나 만나고 겪을 수 있는 이 아이들의 일상은 ‘추악하고도 화창한 어느 날’에 일그러진다. 그 균열의 순간을 담기 위해 구스 반 산트는 사실적이고 건조한 문법을 선택한다. 비극과 그 직전의 ‘아무렇지도 않음’에 대한 관찰은 필연적으로 관객의 시선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평범한 생활을 담담하게 담은 숏들은, 절제된 카메라와 어우러진 채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을 하나하나 교차하고 반복한다. <엘리제를 위하여>와 <월광 소나타>의 슬픈 연주는, 롱테이크로 끌어보지만 결국은 비극 앞에 멈춰 서야만 하는 아이들에 대한 애도이자 관객이 감정을 소통할 수 있는 입구가 된다.

구스 반 산트는 시간과 공간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하나하나 훑어보면서 그 모든 것들이 일상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왜 비극이 발생했는가?’라는 물음은 프레임 밖에 남겨둔 채 말이다. 앙드레 바쟁이 <엘리펀트>를 일컬어 진정한 ‘창조적 다큐멘터리’라고 극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같은 콜럼바인 고교 사건을 다루었지만 마이클 무어가 미국에 내재하는 폭력성을 주관적인 분석으로 따져 묻는 반면, 구스 반 산트는 그저 아이들을 차분히 응시한다. <볼링 포 콜럼바인>이 잘 짜여진 논설문 또는 거꾸로 읽는 미국사라면, <엘리펀트>는 그 풍경에 대한 한 편의 ‘시화(詩畵)’를 연상시킨다. 앙드레 바쟁의 시각으로 본다면, 주관이 개입할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 놓은 <엘리펀트>가 영화적으로 더 뛰어난 화법을 가지는 것이다.



영화를 창조적으로 재구성 한다는 것

지나친 이상주의자로서 바쟁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바쟁 이 후 등장한 다양한 테크닉은 롱테이크와 딥포커스, 롱 숏만이 영화기법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서로 다른 형식을 가진 영화들이 공존하는 지금에 봤을 때, 리얼리즘이 드러나는 정도만으로 관객의 참여 가능성을 단정했던 바쟁의 이론은 무리가 따른다. ‘또 다른 창조’의 권한을 리얼리즘만으로 미리 재단해서는 다원화가 정착된 지금의 영화 풍토를 아우를 수 없기 때문이다.

바쟁이 말한 민주적 재구성자로서의 관객은, 주관적 참여가 가능함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필연적으로, 영화를 규정하고 선택할 권리마저 손에 쥐게 되었다. 관객이 가진 다양한 기호와 시선의 영역이 영화를 창조적이고 능동적으로 해석한다는 행위에 선행되거나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의 창조적 재구성이라는 화두는 결과적으로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가 보다는, ‘어떤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영화가 세상을 들여다보는 예술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바쟁이 열어 놓은 영화와 관객의 소통 가능성을 여전히 전제로 삼아야 한다.

다시 <엘리펀트>로 돌아와 보자. 이 영화를 바쟁에 따라 좋은 영화라 규정하든지, 스스로 판단하든지 그것은 자유다. 하지만 만약 ‘관객의 역할’에 동의한다면, 능동적으로 영화를 완성하고 싶다면 해야할 일은 분명해진다. 바로 <엘리펀트>가 남겨 놓은 그 빈 공간으로 들어가 <엘리펀트>를 만든 현실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해보는 것이다. ⓒ erazerh


반응형

'FRAM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워와 영화평론  (15) 2007.08.07
영화평을 쓴다는 것  (2) 2007.07.29
영화를 본다는 것  (2) 2007.07.09
영화  (16) 2005.10.26

+ Recent posts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