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창조적으로 소통하기 위해서


바쟁의 영화이론

앙드레 바쟁은 19세기 실증주의의 영향 아래 있던 영화이론에 현상학과 심리학을 끌어들였다. 이것은 영화가 스크린 속에서 뿐만 아니라 프레임 바깥의 외부 세계와도 연관되어 존재함을 의미한다. 현실과 관객이라는 외부 영역과 능동적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민주적 개념이 영화로 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바쟁에게 있어 관객이란, 영화가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이미지를 경험에서 터득한 스스로의 주관으로 재구성하는 사람이다. 영화적 오브제는 관객의 머릿속을 지나면서 현실 속 이미지와 구별되고, 그 구별을 통해 관객은 영화의 또 다른 창조자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쟁은 관객의 심리가 민주적이고 주체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서 영화가 리얼리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조작된 영화들을 비판하며 소비에트 몽타주 미학을 그 일례로 들었다. 주관성이 개입된 조작의 이미지들은 관객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바쟁은 현실과 세계 그 자체가 가진 모호함을 그대로 전달하는 영화들-장 르느와르의 영화나 네오리얼리즘과 같은-을 옹호했다.

그는 리얼리즘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끌어왔다. 현실을 닮은 모호한 이미지들은 경험을 통해 체화해온 주관성을 가지고 관객이 창조적으로 지각하게 된다. 이 같은 절차는 관객에게 또 다른 체화의 과정으로 작용한다. 영화는 관객에게 있어서 지각할 수 있는 어떤 경험이 되는 것이다.

현상학은 그 경험을, 세계와 타인들 속에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는 경이로움이라고 말한다. 결국 바쟁에 따르면, 관객이 체화된 주관으로서 재구성하고 세상과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 놓는 영화가 좋은 영화인 셈이다. ‘창조적인 다큐멘터리’의 작가로서 로버트 플래허티를 높게 평가한 이유다.


대표적인 ‘앙드레 바쟁적’ 영화 <엘리펀트>

집안에 거대한 코끼리가 들어앉았다. 어떻게 하긴 해야겠는데 손쓰기가 쉽지 않은 상황, 결국 어쩔 수 없이 코끼리와 함께 살며 그 상황에 점점 익숙해진다. 구스 반 산트는 미국의 고등학교를 서양우화에 나오는 코끼리에 비유한다.

영화 <엘리펀트>는 ‘어쩔 수 없는 코끼리’인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충격의 16분을, 감정이입을 최대한 자제한 채 그야말로 ‘관조적’으로 뒤쫓는다. 현실을 자의적으로 구성하지 않은 채 당시의 일상적 풍경을 있는 그대로 펼쳐낸다는 점에서 <엘리펀트>는 앙드레 바쟁이 말한 좋은 영화에 가깝다.


영화 속 아이들은 특별하지 않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에 대해 고민하며 눈물 흘리는가 하면 학교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사진 찍는 것이 낙인 녀석도 있다. 다이어트 중독에 걸린 세 명의 치어리더나 외모로 인해 고통 받는 여자아이 등 모두가 쉽게 볼 수 있는, 고등학생의 그저 그런 모습이다.

심지어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알렉스와 에릭조차 평범한 아이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왕따를 당하고, 게임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며, 히틀러의 영상을 보기는 하지만 영화는 이런 상황을 살인의 동기로 단정 짓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누구나 총을 살 수 있는 환경 역시 하나의 단서일 뿐 원인은 아니다.

어디에서나 만나고 겪을 수 있는 이 아이들의 일상은 ‘추악하고도 화창한 어느 날’에 일그러진다. 그 균열의 순간을 담기 위해 구스 반 산트는 사실적이고 건조한 문법을 선택한다. 비극과 그 직전의 ‘아무렇지도 않음’에 대한 관찰은 필연적으로 관객의 시선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평범한 생활을 담담하게 담은 숏들은, 절제된 카메라와 어우러진 채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을 하나하나 교차하고 반복한다. <엘리제를 위하여>와 <월광 소나타>의 슬픈 연주는, 롱테이크로 끌어보지만 결국은 비극 앞에 멈춰 서야만 하는 아이들에 대한 애도이자 관객이 감정을 소통할 수 있는 입구가 된다.

구스 반 산트는 시간과 공간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하나하나 훑어보면서 그 모든 것들이 일상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왜 비극이 발생했는가?’라는 물음은 프레임 밖에 남겨둔 채 말이다. 앙드레 바쟁이 <엘리펀트>를 일컬어 진정한 ‘창조적 다큐멘터리’라고 극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같은 콜럼바인 고교 사건을 다루었지만 마이클 무어가 미국에 내재하는 폭력성을 주관적인 분석으로 따져 묻는 반면, 구스 반 산트는 그저 아이들을 차분히 응시한다. <볼링 포 콜럼바인>이 잘 짜여진 논설문 또는 거꾸로 읽는 미국사라면, <엘리펀트>는 그 풍경에 대한 한 편의 ‘시화(詩畵)’를 연상시킨다. 앙드레 바쟁의 시각으로 본다면, 주관이 개입할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 놓은 <엘리펀트>가 영화적으로 더 뛰어난 화법을 가지는 것이다.



영화를 창조적으로 재구성 한다는 것

지나친 이상주의자로서 바쟁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바쟁 이 후 등장한 다양한 테크닉은 롱테이크와 딥포커스, 롱 숏만이 영화기법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서로 다른 형식을 가진 영화들이 공존하는 지금에 봤을 때, 리얼리즘이 드러나는 정도만으로 관객의 참여 가능성을 단정했던 바쟁의 이론은 무리가 따른다. ‘또 다른 창조’의 권한을 리얼리즘만으로 미리 재단해서는 다원화가 정착된 지금의 영화 풍토를 아우를 수 없기 때문이다.

바쟁이 말한 민주적 재구성자로서의 관객은, 주관적 참여가 가능함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필연적으로, 영화를 규정하고 선택할 권리마저 손에 쥐게 되었다. 관객이 가진 다양한 기호와 시선의 영역이 영화를 창조적이고 능동적으로 해석한다는 행위에 선행되거나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의 창조적 재구성이라는 화두는 결과적으로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가 보다는, ‘어떤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영화가 세상을 들여다보는 예술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바쟁이 열어 놓은 영화와 관객의 소통 가능성을 여전히 전제로 삼아야 한다.

다시 <엘리펀트>로 돌아와 보자. 이 영화를 바쟁에 따라 좋은 영화라 규정하든지, 스스로 판단하든지 그것은 자유다. 하지만 만약 ‘관객의 역할’에 동의한다면, 능동적으로 영화를 완성하고 싶다면 해야할 일은 분명해진다. 바로 <엘리펀트>가 남겨 놓은 그 빈 공간으로 들어가 <엘리펀트>를 만든 현실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해보는 것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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