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램>(Lamb, 2021). 인간 인지 기능의 필연적 오류를 콕 집어낸, 고도의 미니멀리즘 우화. 플롯은 단순한데 곱씹어보면 내용물의 깊이가 만만치는 않다.
이를테면 삐져나온 팩트 한 조각을 구실 삼아 상상에 상상을 더해 두른 우리의 울타리‘들’이, 실은 얼마나 조악한지에 관한 도식화. 진실을 품기보다 울타리 유지보수에만 집착해대니 남는 건 폭력, 그리고 믿음을 위한 믿음 따위의 악순환일 뿐인 것.
실제로 종교와 종교화된 인류의 이 많은 울타리 대부분은 자기 합리화라는 비이성적 재료를 덧대고 덧대 지탱해온 거 아니었나? 무엇을 위해? 영화 속 대사처럼 ‘해피니스’. 누구의? 오직 나만의 ‘해피니스’. 짝퉁이든 말든 ‘해피니스’.
그러므로 교훈(?). 선의를 덕지덕지 두른 가장 이기적인 동물로서의 사람 혹은 오지라퍼를 조심하세요. ⓒ erazerh
* 감독은 발디마르 요한손. 장편 데뷔작이라는데 왠지 <더 위치>와 <라이트하우스>를 만든 로버트 에거스가 20%,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20%, 라스 폰 트리에가 10% 정도 들어있는 느낌. 차기작에서 어떤 100%의 감독일지 드러날 것 같다. <램>에서 살짝 감지된 통찰력이, 얻어걸려 나온 게 아니기를.
선천적 혹은 후천적으로, 난 ‘선택받은 자의 세상 구하기’ 같은 영웅 서사에서는 흥미를 눈곱만큼도 느끼지 못한다. 재미는커녕 너무너무 시시해서 보다 보면 심신이 걷잡을 수 없이 가라앉고 무력해지는 기분.
그러니까 대개 ‘격이 다른 혈통, 남다른 능력 보유, 고난-고뇌-각성, 세이브 더 월드’ 따위의 이야기 수순인데, 이건 어디까지나 신화와 종교의 화술 아니던가. ‘츄즌 원’인 척하는 자를 겹겹이 둘러싸는 포장과 보존의 기술. 거짓 중에서도 가장 원형·원시적인 거짓. (진부해지니 그만 쓰도록 하자.)
뭐 이런 쓸데없는 얘길하는 이유는, 그래서 나한텐 <듄>이 드뇌 빌뇌브 영화를 통틀어 제일 또는 유일하게 시시했기 때문이다. 전작이 21세기 SF 최고 걸작이었거나 말거나 이번 건 몰입이 전혀 안 돼 끝까지 보는 것조차 인내가 필요했었다는 고백.
+ 같은 이유로 ‘선택받은 자 서사’에 균열이 제대로 날 때는 환장하는 편이다.
세상의 중심에서 끄트머리로 훅! 순간이동, 존재의 지위에 관한 아찔한 공허감을 창조해낸 빌뇌브의 전작 <블레이드 러너 2049>와, 신화를 홀딱 뒤집어 ‘선택받음’에 공포와 비극성을 입힌 <유전>은, 그래서 내겐 걸작 오브 걸작. 헤일 파이몬. ⓒ erazerh
(약스포) 우선 단점 1. 주인공 성기훈(이정재)의 양심에 규칙이 없다. 동네 후배 말마따나 오지랖은 넓고 머리는 나쁘고. 게임에서의 인간미 발현이나 최종 선행 또한 고뇌의 결과라기보단 그저 ‘삐져나온’ 느낌이다. 급조된, 무매력의 휴머니티. ‘희망’을 극의 또 다른 줄기로 삼고 싶은 건 알겠는데, 최소한의 ‘결’은 유지했어야.
단점 2. 영화든 드라마든 가장 중요한 건 결국 거짓말을 얼마나 그럴싸하게 잘하느냐다. <오징어 게임>은 각 게임의 규칙에 정성을 쏟았을지언정 그 안팎에 걸쳐진 서브플롯 –의사, 경찰, 형제, VIP 등– 을 매듭짓는 솜씨는 시답잖다. 이러면 거짓 보따리에 구멍이 나기 마련, 세계관의 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예상 그대로 다 맞아떨어지는 판에.
그럼에도 +장점. 장르적 즐거움과 삶의 실재적 비애가 성공적으로 접합됐다. 벼랑 끝 신세들 탓에 그때 그 시절 놀이를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비극성이 묻어 나오는데, 이게 생과 사가 걸린 극한에 걸쳐지니 스릴의 무게가 배가되는 셈.
이렇게 보면 6화 <깐부>는 시리즈 중 단연 압권이다. 사실상 승패가 눈에 보이므로 ‘누구’가 아니라 ‘어떻게’가 중요한 구슬 게임. 이때 비열함들 사이로 삶을 스스로 내려놓으려는 단호한 결단들이 머리를 들이미는데, 서스펜스 위로 페이소스가 내려앉는 느낌이랄까. 휴머니즘 따위는 아니고 삶의 본질적 서글픔 같은 게, 훅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놀이와 인생의 공통점, 여럿이었든 어쨌든 끝에는 철저히 혼자가 돼야 한다는 사실. 쓸쓸하구나. ⓒ erazerh
1. “가까운 가족이 죽지 않아야 할 상황인데 죽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어떤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과거 나홍진 감독은 영화 <곡성>(2016)을 만든 동기에 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요컨대 ‘왜 착한 사람이 불행한 일을 겪어야 하는가?’에 대한 추론 또는 상상.
2. 흔히들 한탄한다. 신은 대체 뭘 하고 있길래 선한 사람들의 억울함이 반복되냐고. <곡성>은 이 불가해를 이해하고자 비이성의 경로를 택한 영화다. 방법은 소거법. 첫 번째 세부 질문 ‘신은 있는가? 없는가’에서는 부재(不在)를 지우고 존재(存在)를 남긴다. 그렇게 이 영화에는 초월자가 ‘있’게 된다. 아무렴.
3. 두 번째 질문은 ‘그렇다면 신은 영향력을 행사했는가? 혹은 놀았는가’ 정도 되겠다. 다시 말하지만 나홍진은 지금 한 손엔 카메라, 다른 한 손엔 부적 비슷한 걸 쥐고 있다. 비이성이라는 어질어질 외길. 그렇게 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소거되고 ‘영향력을 충분히 행사했다’가 남는다.
4. 이제 신이 ①존재하고 ②액션도 취했는데 ‘세상은 왜 이 모양인가? 왜 착한 종구 가족이 몰살돼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필연이다. 이 지점에서, 선택 가능한 답지는 하나밖에 없지 않나요, 라며 나홍진이 고개를 홱 180도 돌려 관객을 본다.(물론 실제가 아니고 영화의 태도에 관한 은유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 신은, 그 신이 아니었습니다. 낄낄낄, 와타시와 와타시다, 나는 나다. <곡성>에서 넘버원 초월자의 정체는 ③재앙을 빚는 악(惡)이었던 것. ‘귀신’ 신(神)은 결코 직무를 유기한 적이 없다. 애석하게도.
악마를 보았다. <곡성>
5. 1선발 초월자라면 당연히 거룩하고 선하리라는 믿음은 <곡성>에서 구겨졌다. 그리고 5년, <랑종>(2021)이 그 세계관을 장착한 채 또 다른 극한으로 내달린다. 이번에도 초월적인 무언가는 모두가 멸망할 때까지 폭주한다.(나홍진의 날인) 게다가 한두 놈이 아닌 듯하다.
6. 이 귀‘신’들을 <엑소시스트>나 <컨저링> 같은 정통 오컬트 속 대립 구도, 이를테면 적그리스도로서의 대항마 계보 안에 넣기는 어렵다. 그들처럼 선(善)이 구축한 팽팽한 질서를 따고 들어와 균열을 내는 등의 목적성을 띠지 않으니까. 왜? 안 그래도 되므로. 미안하지만 <랑종>에는 그런 노력을 기울이게 만들 법한 절대 선, 시스템의 창조자, 친인류적 초월자 등 그게 무엇이든 비슷한 것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무당인 님도 끝내 털어놓지 않았나. 신내림을 받았지만 진짜로 신을 느낀 적은 없었다고.
7. <곡성>과 달리 <랑종>은 현혹되지 말기를 바라는 선한 성질의 기운마저 제거했다.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무당 몸을 빌린 수호신이든, 공포에 벌벌 떠는 인간들에게 가호를 내려줄 이는 없다. 좋은 초월자는 꼭꼭 숨었거나 모든 초월자는 나쁘거나. <곡성>이 신의 가면을 벗겨 그 악의(惡意)로 가득한 얼굴을 봤다면, <랑종>은 악의의 운동능력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괜히 모큐멘터리 형식을 취한 게 아니다.
8. 악의 증폭과 선이라 믿어진 것들의 부재. 억울함과 억울함이 쌓이고 쌓여 짓뭉개졌을 인간의 비극사, 까지 안 가도 포털 뉴스 사회면을 하루만 들여다보자. 현실 세계를 오컬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랑종>의 이 궤멸적 신화보다 어울리는 콘텐츠가 있겠나 싶다.
궤멸적 신화. <랑종>
9. 악마한테 이기든 지든, 선악 대칭 구조를 가진 주류 오컬트는 창조자나 창조자가 빛은 질서의 선의와 안전성을 여전히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반면 <더 위치>, <곡성>, <유전>, <랑종> 등 특정 힘에 압도되는 비대칭 호러들이 있다. 현혹되지 말자. 이 계보의 영화들은 지금 악에 들뜬 상태가 아니라, ‘악’밖에 남지 않은 실재를 도식화하고 있다. 이를테면 ‘구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0. 이 모든 영화적 상상은 불우하고 불공평한 세계를 납득하기 위한, 차라리 가장 합리적인 접근일지도 모르겠다. 비이성의 중심에서 외치는 이성. 그렇게 원형으로서의 신은 죽었다. 다만 그럴수록 더욱 절통한 어떤 현실들. 다시, 신이시여. ⓒ erazer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