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현의 이전 대사들과 궤를 달리하는 한마디. “언제는 귀엽다며, 이 씨발년아.”가 불쑥 튀어나왔을 때, 나는 적잖이 놀랐다. 영화가 이질적인 무엇으로 분화하기 시작했다는 선언과도 같은 그 대사가, 나아가 관객의 예정된 불평에 부치는 박찬욱의 변(辯)처럼 들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언제는 거장이라며, 이 관객님들아.’

나는 진심으로 궁금하다. 왜 박찬욱은 잘 나가던 내러티브를 작정하고 일그러뜨렸을까. 서로 다른 두 개(또는 세 개)의 박찬욱표 영화가 위태로이 엉겨 붙은 듯한 이 구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송강호는 한 인터뷰에서 이 불균질과 관련해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달리의 그림은 경직된 현실에 틈을 내고 그 틈을 통해 어떤 관념이 흐르도록 만들 뿐, 그 자체로 불균질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어찌됐든, 너무 기괴한 나머지 아름답기까지 한 몇몇 시퀀스에도 불구하고 ‘복수는 나의 것 > 올드보이 > 친절한 금자씨 > 박쥐’라는 느낌은 지우기가 어렵다. 불친절해서가 아니라 납득할 만한 ‘불친절의 당위성’을 아직 찾지 못한 탓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악취미’의 향연 따위를 원인으로 규정지을 수도 없는 노릇. 그것은 박찬욱에게서 이미 성취한 자의 과시욕을 읽어야 하는, 조금은 가슴 아픈 일이 될 테니. 설마 박찬욱이 <로스트 하이웨이>를 두고 본인이 했던 말, 즉 “자기 자신의 모티브들을 재탕 삼탕 우려먹는 안이함. 미완성 각본으로 폼만 잔뜩 잡는다.”를 몸소 실행했을까. 일단은, 조금 더 고민해보자. ⓒ erazerh


# 박찬욱의 영화 중 가장 사랑스러운 건, 누가 뭐래도 <삼인조>다. 그 아름다웠던 언어유희.


반응형
수영장 물 속에서 숨을 참고 있는 소년. 점점 한계가 다가온다. 밖으로 나가고 싶기는 한데 그의 머리를 짓누르는 우악스러운 손이 그것을 허락할 리 없다. 평소 자신을 괴롭히던 녀석에게 본때를 보이기는 했지만, 그 대가로 목숨을 지불하게 생긴 것이다. 그때 마침 소녀가 나타난다. 그리고 몇 초나 지났을까. 소년을 괴롭히던 동작이 모두 멈추는 데는. 소년의 머리를 누르던 팔은, 녀석들의 목과 허리는,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이 사지절단식 살육 시퀀스는, 그러나 심심하다 싶을 정도로 간소하다. 사건 자체가 잔혹하거나 말거나 이미지와 사운드가 그것을 ‘전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유혈은커녕 외마디 비명조차 없다. 시체들은 그저 짧은 풀숏 안에 무심히 던져질 뿐인데, 그조차 서로를 맞이하는 소년-소녀의 묘한 미소 뒤편으로 밀려난다. 이런 식이다. <렛 미 인>에서는 죽이고 죽는 행위가, 이를테면 공포나 액션 카테고리에 추가될 만한 ‘스틸샷’ 정도로 소비되지 않는다. '소녀 뱀파이어'에서 상상될 법한 장르적 쾌감이 존재할 리 만무하다.

대신 여기에는 그럼으로써 도드라지는 어떤 ‘관계’가 있다. ‘너도 정상적인 십대는 아니구나.’라는 호기심에서 출발한, 소년-소녀의 은밀하되 공고한 결속. 그것도 불온하기 짝이 없는. 이는 확실히 다른 (공포) 영화들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성격의 연대(連帶)다. 시스템 바깥에 놓인 자들은 단지 ‘괴물’로 다뤄지기 십상인데다, 그것이 가장 흥미진진한 전개라고 곧잘 믿기기 때문이다.

<렛 미 인>은 그런 선정적인 제스처를 포기함으로써 타자화 되기 이전의 소년-소녀를 기어이 불러낸다. 어떤 ‘의미’를 끌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 주목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두 아이의 관계에 대한 영화 안팎의 모든 판단은 유보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녀석들이 달콤한 연애를 할지, 종속적인 계약에 머물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이 있기는 하다. ‘괴물’로 알려진 자들의 본연 또한, 더도 덜도 아닌, 그저 ‘생존하기’였다는 것. 조금 더 쓸쓸하게. ⓒ erazerh




반응형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노골적인 거짓말이지만, 그 자체로 나쁠 건 없다. 문제는 거짓이 완성되는 ‘경로’에 있다. 가난한 고아의 절절한 경험담이 자본 질서로의 화려한 편입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진짜 사연, 그러니까 ‘착한 빈민’과 ‘나쁜 빈민’이라는 대립항 말이다. 물론 영광스러운 신분 상승이 누구에게 돌아갈지는 이미 정해진 수순. 윤리적으로 올바르다면야 제 아무리 배고픈들 내일의 무엇이 두렵겠나 싶다.

선의의 개인과 그의 신화에 주목하는 드라마에서는 가난을 고착하는 구조 및 그 뼈대가 잘 드러나지 않기 마련이다.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꼭 그렇다. 여기에는 ‘불편함을 감수하라’ 유의 삐딱한 선동이 없다. 다만 묵묵히 작업 중임이 분명한 어떤 전지적 존재, 주인공을 따뜻한 햇살로 인도하리라 굳게 마음먹은 듯한 그 존재만이 감지될 뿐이다(그래서 영화가 택한 답은 D. It is written이다).

곳곳에 진실의 흔적을 뿌려놨다고 해서 그 흔적이 늘 세계의 본질로 기억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요컨대 태생부터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한 자들을, 이 영화는 진짜로 위로하고 있는가. 아니, 차라리 팝콘을 씹고 콜라를 마시자. 그러다 끝 무렵에 미소 머금은 눈물 한 방울을 ‘톡’ 떨어뜨리자. 훌훌 털고 일어나면, 아마도 그때 ‘슬럼독 밀리어네어식’ 위로는 완성되겠지. ⓒ erazerh


반응형


노인의 얼굴로 태어나서일까. 벤자민의 삶은 양로원에서 시작한다. 죽음이 일상인 그곳. 벤자민이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소멸’에 익숙해지는 것은 필연이다.

삶이란, 나이 먹음이란, 그런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점점 더 많이 목격해야 하는 것. 그러면서 내 죽음에 점점 더 가까이 가는 것. 그렇게 두려웠건만 피할 길은 ‘죽어도’ 없더라. 우리가 태어나던 그 순간에, 아마도 우리의 죽음 또한 세상에 함께 나왔으리라.

그런 점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거의 고무적이기까지 하다. 소멸의 불가피성을 어떤 선순환 체계의 원리인 양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영화적 태도 덕분이다. 데이빗 핀처의 최고작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죽음을 둘러싼 아픈 시간들을 달래주는 몇 장면은 무척 매혹적이었고,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니까 일찍이 ‘사랑하면서 살라!’는 이야기. 가슴 아플 수는 있어도, 땅을 치고 후회할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 ⓒ erazerh


반응형
한 번 볼 때와 두 번 이상 볼 때의 느낌이 크게 다른 영화가 종종 있다. 케이블에서 다시 만난 <미스트>가 꼭 그렇다. 뭐랄까. 슈퍼마켓에 갇힌 군상의 행태를 향했던 내 관심이 이번에는 그들이 거기 갇혔다는 상황 자체로 옮겨졌구나, 싶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얼마나 부조리한지에 관한 이 기가 막힌 플롯을 예전에는 왜 못 알아봤을까. 요컨대 여기에는 ‘사람 > 자연’이라는 공식의 완전한 ‘역전’이 있다. 이를테면 ‘사람 < 자연.’ 지구라는 공간을 참 오래도 점령해온 인간계가, 영화에서는 ‘안개를 동반한 어떤 세계’로 재현된 셈이다. 슈퍼마켓에 갇힌 사람들의 처지에서 인간계 바깥으로 밀려나버린 현실의 존재들이 감지되는 것은 그래서다. 마찬가지 이유로, 안개 너머로 들어가면 죽어야 하는 영화 속 설정과 인간 세상으로 넘어오면 죽어야 하는 영화 밖 현실은, 무척이나 닮았다.

한정된 공간을 수직적인 관념으로 나누는 일은 늘 누군가를 지워버리기 마련이다. 공간에 스민 권위가 공간의 물리적 크기는 물론 개체수마저 임의대로 결정짓기 때문이다. <미스트> 끝 무렵에 등장하는 거대한 생명체는, 아마도 인간 고유의 그 전지전능함이 영화적 상상력으로 나타난 것이리라. 동시에 녀석의 발밑에는 너무 놀라고 두려워 도망칠 엄두조차 못 내는 사람들이 놓이는데, 이로써 현실의 ‘위압적인 것’과 ‘초라한 것’에 관한 오롯한 상하반전 숏이 완성되는 셈이다. 말 그대로 ‘역지사지의 구도.’ <미스트>가 부조리한 실재를 경유하는 판타지임은 바로 이 숏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멧돼지가 나타났다고 호들갑을 떨거나 ‘도둑’ 고양이가 동네를 더럽힌다고 구시렁거리는 따위의 목소리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이 쉴 곳을, 먹을 것을, 줄기차게 빼앗은 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공간에 얽힌 힘의 불균형은, 이렇듯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데다 그로 인한 부작용이 인식조차 안 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나 끔찍하다. 더욱이 마치 지금까지는 안 그래온 양 이제는 제대로 힘써보자고 국가가 주도하는 판이다. 누군가 말한다. 산을 깎고 강을 통제하면 모두가 잘되는 ‘녹색성장’이 올 거라고. 동족마저 속이려는 이 삼류 말장난에 비하면, <미스트>의 괴물들은 차라리 자비롭기가 부처님 수준이다. 안타깝지만, 현실은 늘 영화보다 끔찍하다. ⓒ erazerh


반응형


거대한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내부의 수직적인 질서가 굳건해야 한다고, 종종 믿긴다. 이 믿음이 강하게 작용할수록 구성원 간 소통이 일방향 일색으로 흐를 가능성은 더 크다. 창조적 사고 따위를 주고받는 것이 흥미로울 리 만무하다. 적자생존. 논의할 줄 아는 사람은 떠나고, 명령을 전달하거나 수행하는 데 충실한 기계적인 개체만이 남겠지.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을 그 안에서 찾는 것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될 테고.

이 즈음 되면, 갈 길을 잃은 채 제 몸집만 불리고 있는 욕망 덩어리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시스템은 이 난폭한 녀석을 낳았지만, 방관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자식을 부정하는 순간 어미도 무너지니까. 그래서 동원되는 것이 '은폐'이고 '위장'이다. 시스템은 굳게 믿는다. 그것만이 메스를 대지 않고도 내 몸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공포의 재생산'은 그 중 가장 효과적이고 유서 깊은 정책이다. 임의의 울타리를 치고 그 바깥 존재들에 '공포'라는 혐의를 씌움으로써, 현재 시스템의 필연성을 역설하는 식이다. 욕망이 선(善)의 실현을 위한 정신으로 포장되고, '다름'이 '우열'로 치환되는 일은 그렇게 해서 벌어진다. 시스템의 생존기는, 종종 이토록 악랄하다.

요컨대 울타리는 늘 임의로 쳐지기 마련이다. 내가 그 바깥에 있는지 안에 있는지 헤아리는 것은 일종의 코미디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내 위치가 아니라 태도다. 이를테면 울타리의 폭력성을 감지하려는, 그래서 시스템의 불투명성을 늘 의심할 줄 아는 태도. 미국의 국가적 폭력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가에 관한 다큐멘터리 <택시 투 더 다크 사이드>는 바로 그 태도의 일환이다. 많은 부조리한 시스템들이 미 국방 시스템을 표본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꽤나 의미심장하다. 울타리에 동의하고 그 안에 속하는 데 만족하는 자체로 당신은 괴물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는 의미. ⓒ erazerh


덧, 대한민국의 비극. 그 같은 시도가 불온할 뿐만 아니라 피곤하다고까지 믿기는 것.


반응형
한 16세 소년이 있다. 그는 ‘파라노이드 파크’에 갔다가 그만 의도치 않게 한 사람을 죽음으로 밀어 넣고 만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이른바 사건 또는 사고. 이런 일들이 어떻게 주목의 대상으로 떠오르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나름의 논리를 간직한 이야기들이 사건을 서너 번 훑고는 확고부동한 기승전결을 내놓을 터. 아마도 그 대부분은 이번에도 별 다른 의심 없이 입을 모을 것이다. 소년은 정상적인 길에서 비껴간 불온한 영혼이었다고. 파라노이드 파크가 그런 아이들을 불러 모으는 일탈의 공간이라는 혐의를 덮어쓰게 될 것 또한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신속한 도출을 특징으로 하는 결론들은, 이처럼 내용면에서는 대개 진부하기 짝이 없다. 해당 현상 고유의 특성을 고려치 않은, 일종의 공식으로 굳어진 언어가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탓이다. 폭력에 연루된 10대에게 잔인한 영화나 게임 따위의 낡고 낡은 수식어가 무조건 따라붙고 있음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런 규격화된 시선으로는 현상의 표면을 훑고 더듬고 또 필요에 따라 베어낼 수 있을지언정, 그 안쪽까지 어떻게 하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저 깊은 곳, 조금 더 섬세한 눈길을 요하는 그곳은, 단지 하나의 공백이기 일쑤다.

영화 <파라노이드 파크>의 관심은 주류 미디어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그 지점을 향한다. 그곳에서 구스 반 산트는 ‘사람을 죽인 소년’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한 영혼’으로서의 알렉스와 마주한다. 범죄에 연루됐음을 공표하는 데 쓰이곤 하는 수사적 3인칭 대신, 알렉스의 내면을 진술의 주체 자리에 불러 앉힌 셈이다. 그래서 <파라노이드 파크>에서는 주류 미디어의 범위에 포착되지 않는 무언가를 만나는 게 가능해진다. 이를테면 사건의 내부로의 파장, 그리고 그것을 홀로 끌어안은 소년의 어떤 머뭇거림.


알렉스의 고립된 내면을 관객 앞으로 끌어내는 장치는 알렉스의 입이 아니라 역시나 ‘카메라’다. 구스 반 산트의 카메라는 현상으로부터 객관적인 상(像)을 추출하는 데는 여전히 관심이 없다. 최근의 몇몇 작품(특히 <라스트 데이즈>)과 마찬가지로, 그가 카메라에 담고자하는 것은 인물의 내적 갈등을 품은, 일종의 재구성된 외부 세계다. 내면의 흔들림이 투영된 낯선 세계상을 구상하고는 렌즈 앞에 놓인 사람과 사물들에서 그 느낌을 찾아내는 것. 따라서 <파라노이드 파크>의 카메라가 보이고 들리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데 무관심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무관심 덕에, 곳곳에 스며든 알렉스의 영혼이 카메라에 감지될 확률은 더 높아진다. 예컨대 엄마와 삼촌의 얼굴이 프레임 바깥으로 철저하게 밀려나고 여자친구와의 첫 섹스가 무감각하게 치러지는 이유는, 그곳을 둥둥 떠다니는 알렉스의 절대적인 고독만이 카메라의 유일한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파라노이드 파크>의 카메라는 피사체 자체보다는 거기에 이입됐을 알렉스의 심경을 포착하는 데 주력하는, 일종의 심리적 기계에 가깝다. 구스 반 산트는 이미 잘 알고 있었을 테다. 미디어의 언어가 다루지 않은 시공간을 이미지의 형태로 옮기는 데는, 감정을 읽을 줄 아는 이 영리한 기계만큼 유용한 게 없음을. 인과율의 적용이나 책임 규명이 없어도 좋을 알렉스만의 시공간, 사건의 내부적 층위는, 바로 그렇게 창조됐다.


물론 이는 알렉스에게 면죄부나 쥐어주고자 구축된 세계가 아니다. 구스 반 산트는 누군가를 재판하거나 끔찍한 결과 앞에 놓을 명백한 원인으로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시도를 이번에도 하지 않는다. 요컨대 그에게 여전히 중요한 것은 기승전결 구조 곳곳에 뚫린 ‘틈’이다. 현실에서 가공-유통되는 언어들로 포착 불가능한 어떤 세계가 그 틈 안에 놓여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나는 알렉스는 바로 구스 반 산트의 그 믿음이 찾아낸, 공식화되기 이전의 존재인 셈. 따라서 알렉스의 행보에서 서사의 진행이나 사건에 관한 예측 가능한 경로를 읽으려는 노력은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알렉스에게 실재란 오로지 죄책감과 불안과 고독이라는 제 안의 괴물일 뿐이며, 세상은 그 괴물에 빙의된 무능력한 공간 이상이 되지 못한다.

내면을 파고드는 사건의 후유증은 실제 삶을 압도할 만큼 이토록 강력하다. 알렉스가 현실적인 방향 감각을 잃고 자꾸만 머뭇거리는 것은, 그래서 필연에 가깝다. 하지만 갈 곳도 기댈 곳도 없는 이 필연적 절망에도 끄트머리란 있기 마련이다. 그 작은 숨구멍의 존재를 알렉스가 감지할 때, 지독한 머뭇거림 이후의 ‘무엇’은 비로소 찾아온다. 그러니까 죄 지었음을 스스로에게 고백하기. 그럼으로써 진짜 삶으로의 복귀를 감내할 만한 내적 토대를 갖추는 것. 요컨대 여기에 이르기까지 지체된 시간, 즉 알렉스의 모든 ‘내적 독백’이 현실에 편입될 날도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 구스 반 산트는 그렇게 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몇 안 되는 감독이다.

영화의 마지막, 프레임 바깥으로부터 알렉스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그를 외부로 끌어내는 첫 공식적인 호명일 터. 이에 알렉스는 스케이트보딩의 추억을 떠올리며 오지 않을 미래를 마음속에 담아둔다. 동시에 모든 동작을 멈추는 카메라. 알렉스의 뇌를 탐험하는 일은 여기서 끝난다. 그리고 다시 추악하고도 화창한 날. 알렉스는 잘 견디고 있을까. ⓒ erazerh


반응형
얼굴은 자신이 인간임을 알고 있는 어느 주체의 외양인데, 모든 인간은 죽음을 면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얼굴은 자신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어느 주체의 외양이다. 우리가 얼굴 위에서 찾고 있는 것은 시간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간이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자크 오몽, [영화 속의 얼굴] 中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말은 아무리 들어도 슬프지 않다. '해는 서쪽으로 지더라.' 같은 말처럼 너무도 당연해 그저 무덤덤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종(種)의 입장이 아닌 '나'라는 1인칭의 차원에서 곱씹어 보자면, 죽음에 관한 이 진부한 선언은 꽤나 비극적으로 들리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죽는다.' 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 따위의 명제는, 당신이 그 누구건 간에 비껴갈 수 없는, 인생의 필수코스인 셈이다.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 주인공 앨빈 스트레이트(리차드 판스워스)의 처지는 꽤나 다급하다. 형의 집을 향한 그의 여정 자체는 한가롭기 그지없지만, 생전에 형을 만나야 하는 탓에 속마음은 하루하루 타들어가기 바쁘다(그의 나이 이른 셋, 게다가 몸도 성치 않다). 대체로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죽음에 관해 더 많이 생각해보기 마련인데, 스트레이트가 놓인 지점이 바로 그 비례곡선의 끝자락인 셈이다. 때문에 그는 그의 시간에 끝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무엇인지를 비교적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얼굴은 느긋함으로 가득하다가도 어느새 초조함으로 뒤덮여 버리고는 한다. 요컨대 스트레이트의 이 얼굴은 자신이 죽게 됨을 자각한 어느 주체의 외양임은 물론, 프레임 안팎으로 죽음을 일깨우는 산 경험의 클로즈업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너도 언젠가는 죽을 터. 그런데 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스트레이트가 바에 앉아 지난날의 과오를 고백하며 울먹이는 장면. 그의 얼굴에 패인 수많은 주름에서,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포착할 수 있는가. 이를테면 당신의 죽음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당신은 준비하고 있는가. 물론 이 질문들에 잘 대답했다고 해서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치는 그 모든 비극들이 덜 슬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 옆을 흐르는 시간에 관한 당신의 이해도는, 꽤 정확하게 측정되지 않겠는가. ⓒ erazerh




Rest in peace.


반응형

+ Recent posts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