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오프닝. 우리네 ‘국민엄마’가 아무런 말도 없이 외화면의 사운드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우스꽝스러운 느낌도 잠시, 이것 참 기괴하다. 이내 그녀의 시선이 카메라를 향하자 동작들은 하나의 질문이 된다. '자, 이 엄마는 왜 이러고 있을까요?'

(이하 스포일러)




이렇게 볼 수도 있겠다. 영화 <마더>는 ‘탤런트 김혜자’라는 기호가 ‘봉준호 월드’로 들어가 어떤 분화를 거치다 결국에는 또 다른 ‘김혜자’로 변환하는 구조라고. 그러니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가 존재한다. 하나는 봉준호 영화에 늘 등장해온 ‘부조리가 자연화된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도준 엄마 고유의 ‘어미-새끼’로서의 관계망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곳곳에서 충돌하던 두 세계가 말미에는 같은 결론으로 — 요컨대 진실을 부인(否認)하는 것으로 — 수렴된다는 점이다. 전자가 편의에 따라 ‘비정상'에게 혐의를 씌우는 관료주의적 오독을 일삼는다면(백광호와 강두 가족한테 그랬듯), 후자는 피로써 눈물로써 결국 그 오독에 침묵을 덧붙이는 꼴이다. 두 경우 다 지금의 서식 환경을 떠날 수 없다는 수구적 습성이 빚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반동이다.

진실에 관한 욕망 자체가 부재하다는 점에서 전자는 부숴야 할 ‘진부한 악(惡)’ 정도로 규정지어져 마땅하다. 반면 도준 엄마의 경우는 판단이 쉽지 않다. 그녀의 모든 행위가 타자 개입이 불가능한 내면적 심연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속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만이 이 엄마의 삶을 추동하는 유일한 근거인 셈이다. 아마도 도준의 망각이 시작됐을 때, 그녀는 그렇게 자신만의 심리적 영토로 달아나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도준의 존재 자체가 과거를 환기하는 지워지지 않을 ‘자국’인 탓에, 이 속죄는 결코 완성형이 될 수 없다. 평생을 두고두고 치러도 모자랄 죗값이 도준 엄마로 하여금 도준이 눈앞에 안 보이는 꼴을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밥을 먹이거나 옆에 뉘여 젖을 내줄 때만, 이 어미는 새끼에게 잘 속죄 중이라 스스로 자위할 수 있다. 이는 숭고한 사랑이기 이전에, 네가 없으면 내가 죽고 내가 없으면 네가 죽는다는, 차라리 짐승 같은 본능이다. 하기야 아비 없는 자식, 서방 없는 여자라고 깔보는 세상 앞에서, 어미가 취할 수 있는 태도가 그것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여자들이 묻혔던 곳, 현서가 괴물에게 먹혔던 바로 거기, 그 구멍 속 실재를 알게 된 봉준호 영화 유일의 생존자임에도 불구하고, 도준 엄마는 ‘어미’인 관계로 결코 진실을 뱉을 수 없다. 그곳에서 발가벗겨졌던 한 여고생의 삶과 죽음 따위는 그저 한마디 농담으로나 세상에 나돌 테다. 종팔과 고물상 노인 또한 마찬가지. 자본과 권력의 서열 맨 끝에 매달려있던 그들에게는, 아, 밥상을 차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엔딩 시퀀스. 관광버스 안에서 도준 엄마의 두 번째 춤사위가 펼쳐진다. 진실을 배반하고 사람을 죽였기에 치르는, 이를테면 망각을 위한 제의(祭儀).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라고 했던가. 기쁨이라면 모를까, 슬픔은, 특히나 비밀을 간직한 슬픔은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 이제 이 어미는 행복한 표정을 내건 채 속으로는 더 깊은 구덩이를 파내려 갈 것이다. 상징계와 그 이면을 달콤쌉싸래하게 오가던 봉준호의 세계가, 이제는 이토록 그윽하기까지 하다. 그는 김혜자를 괴물로 만듦과 동시에 자신도 괴물이 됐다. ⓒ erazerh



덧붙임


1. 진태는 어쩌면 도준의 또 다른 판본일지도 모르겠다. 도준이 농약 박카스를 먹지 않은 채 본래대로 자랐다면 진태처럼 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진태가 도준 엄마에게 막말을 하는 그 시퀀스가 조금은 더 선명해진다.

2. <마더>는 명백하게 <살인의 추억>의 백광호 모티브를 심화-확장한 것이다. 형사 세 명이 <살인의 추억>의 형사들과 같은 위치에서 같은 역할을 하는가 하면, 백광호가 철길 위에서 하던 동작을 그대로 반복하는 도준의 모습이 엄마 머리를 문뜩 스치기도 한다.

3. 도준 엄마가 종팔에게 “너 엄마 없어?”라고 물으며 흐느낄 때, 그때만큼은 그녀의 얼굴이 도준 엄마가 아닌 ‘김혜자’, 그러니까 우리네 엄마의 그것이 된다. 엄마 없는 장애인의 비극을 장애인의 엄마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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