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든 크로넨버그 감독의 ‘울 아빠 데이빗 크로넨버그임ㅋ’을 대놓고 표방하는 아빠 따라쟁이 영화. 단, 부친 작품과 비교하면 좀 민망한 수준.
데이빗 크로넨버그 영화는 뭐랄까, 극한으로 치달아가되 타당성을 잃지 않았다. 신체에 이질적 질감의 오브제들(TV, 게임기, 벌레, 쇠붙이 등등)을 접붙임으로써 ‘인간성’이라는 말랑말랑한 표피를 자연스럽게 떼 내는 식. 그렇게 벌거벗은 알맹이로서의 ‘광기’를 보다 보면, ‘인간 놈들이라면 저런 폭주 DNA는 하나식 품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고.
반면 아들 크로넨버그의 <포제서>는 넷플릭스 <블랙 미러> 에피소드들도 시시해 안 다룰 법한 ‘A+B’ 급의 뻔한 접붙임을, 다소곳이 선보인다. 상상력이 미약하니 인간 탐구의 깊이는 얕고, 붕 떠버린 피칠갑과 불행과 피칠갑만 내내 반복된다. 감독의 전작 <항생제>는 안 봤는데 굳이 찾아보진 않을 듯. ⓒ erazerh
이건 만듦새보다는 윤리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가 클리셰 범벅이라서도, 그 범벅에 개연성이란 소스가 빠졌기 때문도 아니라는 말이다. 대개의 영화들이 따지고 보면 그 모양인데, 불쾌할 것까지야.
문제는 ‘학대’를 다루는 방식이다. “도박중독 양부가 한눈파는 사이에 여아 사고사”는, 최근 뉴스 한 꼭지의 제목이 아니다. 이 양부는 <승리호>의 주인공 태호 씨 되겠다. 단, 현실세계와 달리 그는 어떤 손가락질도 받지 않는다. 열렬히 반성 중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명백한 방임으로 아이를 사망케 한 이 아동학대 가해자의 참회를 시종일관 ‘어여삐 여기사’ 측은지심을 과하게 발동해댄다. 그것도 모자라 끝에서는 죽은 아이 닮은꼴 소녀를 기어이 ‘무당’으로 만들어 가해 양부를 죄책감으로부터 영구 해방시키는 ‘굿’까지 해대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 토할 뻔했다.
시간은 확실히, 어떤 ‘훌륭한 지점’ 도달을 위한 소요(所要)의 개념보다는, 그때그때의 정서들로 채워진 나만의 데이터베이스일 때 관리가 더 수월하다. 이를테면 피리미드식이 아닌, 가지가 무성한 나무 같은 구조.
‘내 존재의 이유를 이해하는 제 1법칙’처럼 다소 뻔한 개념이긴 한데, 알아도 실천이 어렵거나 실천이 불가능해진 이들도 많은 게 사실. 받아들이는 입장이야 다 다르겠지만, 시간이란 놈의 구조를 이 정도로 섬세하게 그려내기가 쉽지 않은 것도 맞다. 친절은 질색이되 이런 느낌의 친절은 반갑다. 진부한 말이지만 ‘이야기의 힘’, 영화 <소울>.
사실 뭐, 이 구조로 이해하고 접근하는 게 죽어가는 시간을 견디는 (정신 제대로 박힌 것 중) 유일한 방법이기는 하다. 나뭇가지를 늘리고 잘게 쪼개 가능한 한 희열의 장면을 많이 간직하기. 그러니까 <소울>은, 인생은 아름다워 따위의 예찬이 아니라, ‘버티는 요령’을 말하는 중이다. ⓒerazerh
넷플릭스 오리지널 <퀸스 갬빗>. 배우 한 명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이라는 것의 거의 최대치를 끌어냈음에도, 끝내 ‘위 아 더 월드’ 서사가 내 취향은 아닌 걸로.
단, 에피소드3의 엔딩은 기록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겠다. 엄마를 깔보며 쏘아붙이다 그대로 돌려받고, 그러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무심한 척 엄마 손을 잡고는 BGM ‘The end of the world’와 역시 무심한 듯 따뜻할 역광의 꾸밈을 받는 숏. 들뜨지도 가라앉지도 않은 채 패배를 매만지는 이 숏에서, 베스 하먼의 세계관인 평면의 64칸은 마침내 훅, 부풀어 입체로서의 형상을 갖춘다.
‘잔혹’과 ‘순수’, ‘무규칙’과 ‘질서’, ‘야생’과 ‘문명’, 무엇이든, 세계를 두 겹으로 나누고 그 사이에 중간지대를 끼워 넣은 채 양측 간 ‘공명’의 가능성(또는 불가능성)을 시종일관 테스트해대는 영화.
단, 인물들은 심리적 토대가 거의 감지되지 않을 만큼 즉흥적으로 행동하는데, 그러다보니 ‘주체적 존재’이기보다는 감독이 상정한 판타지적 세계관, 그 안에 종속된 일종의 ‘말’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보랏빛 하늘 - 아름답되 위험천만한 농촌, 구수한 말투의 악, 스톡홀름과 롤리타 신드롬이 반반 깔린 정서, 이 정도면 이 바닥에서 꽤나 클리셰 아닌가. 그래서인지 핏방울 옆에 꽃잎을 그려 넣는 대목에선, (아마도 의도됐을) ‘이질적인 것들 간 조합에 따른 매혹성’ 대신 ‘예쁘게 그로테스크하지 아니한가?’ 따위의 자아도취부터 느껴진 게 사실.
코엔 브라더도 언급들 하는데 시체 나오고 무덤덤하면 맨날 코엔이래. 그 형제가 언제 이런 식으로 ‘자빠뜨리고’ 땡, 했나.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의아하지 않을 정도로 불확실성을 증폭시키는 ‘빌드업’과, 다짜고짜 ‘넘어졌는데 죽음ㅇㅇ’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거리감이 있다는 것만 재확인.
아무튼 만듦새까지 안 가도 ‘그로테스크 순정극’ 유의 새로운 듯 낡은 정서나, 인간의 선한 면을 찾겠다는 관성적 의지 탓에 애초에 내 취향&윤리적 기준에서 탈선. 쩝. ⓒ erazerh
영화 ‘부산행’과 시리즈물 ‘킹덤’, 최근의 ‘#살아있다’와 ‘반도’까지 한국산 좀비 콘텐츠도 그 면면이 다양해지고 있는데요. 별로다, 이걸로 모자라다, 더 많은 좀비가 필요해, 라는 이들을 위해 ‘놓쳐선 안 될 급’의 좀비영화 10편을 꼽아봤습니다. (※ 순서는 제작년도)
------- 1.데드 3부작 / 감독 조지 로메로 =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Night Of The Living Dead, 1968) ▲시체들의 새벽 (Dawn Of The Dead, 1978) ▲시체들의 날 (Day Of The Dead, 1985)
현대 좀비물의 공식과 관습을 정립한 좀비계의 바이블들. ‘시체들의 새벽’은 평론가 로저 애버트한테 “현존 공포영화 중 최고작”이란 평도 들었지요. 가족주의, 백인우월주의 등 당시 우월하다고 여겨진 가치들의 위선을 들춰내고 꼬집습니다. ‘살아있는 시체의 밤’의 블랙 코미디 버전인 바탈리언(1985), 재해석이 돋보이는 동명의 리메이크작(1990, 톰 사비니 감독)도 추천.
좀비계의 바이블들. <시체들의 새벽>
2. 좀비오 (Re-Animator, 1985) / 감독 스튜어트 고든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케 하는 설정에 메디컬 호러와 SF적 요소를 끼얹은 혼성 장르 공포물입니다. 잔혹하고 기괴한 이미지와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얽히는 데서 오는 부조화의 재미가 도드라집니다. 슬랩스틱 스플래터의 전설과도 같은 작품이지요.
부조화의 재미. <좀비오>
3. 데드 얼라이브 (Braindead / Dead Alive, 1992) / 감독 피터 잭슨
거장 피터 잭슨의 초기작으로, 기존 좀비물과 차별화된 전개를 통해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이를테면 좀비를 두려움이 아닌 ‘처리’의 대상으로 다루기. 조악한 면도 있지만 그마저 장점으로 승화시키며 최강의 슬랩스틱 스플래터로 자리 잡습니다. 단, 잔혹성의 강도가 매우 높은 편. 관람에 주의를 요합니다.
최강의 슬랩스틱 스플래터. <데드 얼라이브>
4. 레지던트 이블 (Resident Evil, 2002) / 감독 폴 앤더슨
호러게임 바이오하자드가 원작으로, 게임 기반 영화 중 최고작으로 꼽히곤 합니다. 거대한 음모를 파헤치는 탄탄한 스토리에 액션·공포·스릴 3박자가 잘 어우러진, 오락영화로서 완전체에 가깝다는 게 정설. ‘리즈 시절’ 밀라 요보비치의 매력은 덤입니다.
액션·공포·스릴의 3중주. <레지던트 이블>
5. 28일 후 (28 Days Later…, 2002) / 감독 대니 보일
‘달리는 좀비’란 설정을 본격 도입, 좀비 스펙터클에 역동성을 첨가했습니다. ‘좀비보다 더 무서운 건 인간’이란 관점에 가장 충실한 작품이기도 하지요. 좀비 창궐로 문명이 붕괴된 세계, 원시성을 되찾은 인간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좀비보다 더 무서운 건 인간. <28일 후>
6. 새벽의 저주 (Dawn Of The Dead, 2004) / 감독 잭 스나이더
앞서 소개한 ‘시체들의 새벽’을 21세기에 맞게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원작처럼 좀비에 둘러싸인 쇼핑센터를 무대로 갖가지 인간 군상을 담아냅니다. 공포와 서스펜스, 묵시록적 세계관을 잘 버무려 좀비 마니아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마니아들의 열렬한(!) 성원. <새벽의 저주>
7. 새벽의 황당한 저주 (Shaun Of The Dead, 2004) / 감독 에드가 라이트
조지 로메로의 3부작 등 다양한 호러물들을 패러디했습니다. 코미디를 기반으로 호러, 로맨스, 액션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지요. 21세기 최고의 좀비영화로도 불리고 있으며, 타란티노 감독이 꼽은 1992년 이후의 베스트 무비 20편에도 들었습니다.
21C 최고의 좀비물로 불리는 <새벽의 황당한 저주>
8. 알.이.씨 ([Rec], 2007) / 감독 하우메 발라게로, 파코 플라자
페이크 다큐멘터리와 좀비물의 장르적 특성이 안정적으로 호환된 사례. 흔들리는 카메라에 담긴 히스테릭한 현장감을 좀비영화 고유의 예측 불가능성으로 잘 이어가지요. 무엇보다 ‘공포’라는 기본 정서에 충실, 호러 팬들의 갈채를 끌어냈습니다.
페이크 다큐의 정점. <알.이.씨>
9. 좀비랜드 (Zombieland, 2009) / 감독 루벤 플레셔
역시 코미디를 큰 줄기로 좀비물의 관습을 계승하고 또 비틀며 자신만의 재기발랄한 영역을 구축합니다. 실제 본인으로 등장하는 빌 머레이의 능청스러운 연기도 관람 포인트. 엠마 스톤과 제시 아이젠버그의 초창기 매력도 만날 수 있습니다.
관습을 계승하고 또 비틀고. <좀비랜드>
10.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One Cut of the Dead, 2017) / 감독 우에다 신이치로
좀비영화인 듯 아닌 듯, 최근 몇 년 간 등장한 변주형 좀비물 중 단연 눈에 띕니다. ‘좀비영화를 찍는다’는 설정에서 시작, 예기치 못한 이야기가 겹겹이 더해지는데요. B무비 특유의 조악함을 전에 없던 방식으로 진화시킨 아이디어는,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변주형 좀비물류 ‘갑’.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이상 좀비를 좋아한다면 놓쳐선 안 될 영화 10편을 꼽아봤는데요. 현대인의 고립감과 생존욕을 최전선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해온 장르가 바로 이들 좀비영화, 중독적 재미가 없을 수 없겠지요?
코로나19의 초장기화로 부쩍 늘어난 듯한 고독감, 좀비영화로 달래보는 건 어떨까요? ⓒ erazerh
생각해보면, 우린 늘 ‘나 자신을 연기’한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일 때 (잘) 살아남을까’에 관해 매일매일 (오)답변을 내놓는 모양새. ‘HOW’들이 모여 외부에 비치는 나, 즉 ‘WHO’를 구성하는 셈인데, 그러다보니 본심을 오롯이 드러낼 수 있는 경우는 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뿐이랴.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떨어지고, 굴욕의 바닥을 뒹굴고, 머리를 쥐어뜯고, 이걸 반복하다, 어쩌다 한 번쯤 으르렁대겠지만 효과는 미미할 뿐이고. 돌아보니 구멍이 숭숭 뚫린 형편없는 이음새, 표면, 삶.
다만 표면이 매끈하지 않다고, 연결이 세련되지 못하다고 해서 지나온 구멍들만 들여다보며 주구장창 자책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싶다. 그냥 그런 걸, 너와 나의 ‘연기’는 애초에 오류투성이로서의 운명을 타고난 걸 어떡해. 태어날 때 레디 액션, 외쳤으면 죽을 때까지 원테이크. 인생에는 편집이 없다.
그러니까, 그 구질구질한 여정에 대한 다독임.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 erazer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