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는, 누구나 알지만 주인공만 모르는 호러 문법 ― 낯선 곳에 가면 죽는다 ― 에 관한, 꽤나 신선한 변주다. 이 영화에서의 낯선 곳은 '타락한' 젊은 세대를 질책하는 미친 아버지의 공간도, 불특정 다수에게 복수를 감행하는 돌연변이의 장소도 아니다. 익숙한 살인마 아이콘들을 대신해 <세브란스>의 낯선 공간을 점령한 주체는 이른바 '테러리스트'라 불리는 자들. 따라서 <세브란스>에 등장하는 '숲'은 장르적 관습으로서의 무대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올바름으로 위장한 실제 폭력이 그 양상을 드러냄직한 임의의 장소라고도 할 수 있다.

폭력의 합당성을 부르짖는 정치적 수사들 뒤에 거대자본의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음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내 폭력은 정당하다.'를 외칠 때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내 폭력도 정당하다.'는 동어반복의 메아리일 뿐. 이 오고가는 피의 메아리들을 앞에 두고도 기꺼이 웃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아마도 폭력의 과소비 덕에 소득을 창출하는 자, 이를테면 무기판매상 정도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닐 런지.

이런 현실을 고려할 때, <세브란스>가 세계적인 무기회사를 공포의 한 근원으로 삼은 것은 충분히 타당한 설정으로 보인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자며 마치 공익캠페인처럼 무기 광고를 늘어놓는 그들이지만, 정작 폭력의 연쇄가 끊이지 않기를 가장 바라는 것 또한 그들 몫일 테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에 강력한 정치적 사유를 요구하는 장치나, 무기회사와 폭력 사이의 고리를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담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브란스>는 원인 찾기보다는, 그 결과물로 나타날 법한 지독한 상황을 장르적 공간 안에서 마음껏 비틀고 부풀리는 데 관심을 두는 영화다. '그들을 테러리스트로 규정지을 수 있는가?' 혹은 '무기회사 직원들은 왜 희생당하는가?'와 같은 질문이 끼어들 틈은, 그래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 틈을 대신 메우는 것은, 워크숍에 참가했다가 언제 어떻게 목숨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 개인들과, 그들을 둘러싼 당황스러운 공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아이러니한 웃음들이다. <세브란스>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의 무게를 무리하게 짊어지지 않고, 다소 멀리서나마, 그 현실을 놀릴 줄 아는 재기발랄함 같은 것 말이다. ⓒ erazerh


# 물론 탄환의 소비만을 중시했을 뿐 발사된 탄환이 어디에 꽂힐지에는 무관심했던 사장님한테는, 응당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일종의 프롤로그 같은 <세브란스>의 첫 시퀀스가, 그 역할을 나름대로 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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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곳, 내 방 한쪽 벽에는 언제부터 거기에 존재했는지 모를 액자 하나가 걸려 있다. 검푸른 색채로 넓게 펼쳐진 우주공간과 그 구석구석을 누비는 사이좋은 나비 한 쌍, 그리고 위쪽으로 무수히 박힌 반짝거리는 작은 별들이 그려진 그림. 나비들은 어두운 공간에 놓여 있지만, 그들을 향해 꾸준히 내려오는 별빛 덕에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듯하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빛의 입자를 잔뜩 머금은 채 그 푸르름을 과시중인 날개가 있지 않은가. 둘이 함께하니 외롭지 않아 좋을 것이고, 노닐기 알맞은 조명이 비춰주니 지루할 틈도 없을 테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막 그림으로부터 어떤 강렬한 시선이 내게 건네지기 시작했다. 그림이 제 몸을 하나둘 액자 너머로 흘려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기체가 된 듯 내 방 곳곳으로 스며들어오는, 그림의 색깔과 형체들. 내 몸을 살짝 보듬은 별빛이 바닥으로 유유히 떨어지고, 춤추던 나비들은 속삭이듯 내게 말을 건네고는 이내 다시 자유로운 궤적을 그린다. 액자와 방 사이의 물리적 경계는 그렇게 지워졌다. 나는 지금, 그림이 쳐놓은 어떤 마법적 자장 안에 놓인 셈이다.

때마침 나비 한 마리가 내려와 내 어깨 위에 살며시 앉는다. 그러더니 이 녀석,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나도 따라 고개를 돌려 녀석을 쳐다보기로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나비의 얼굴이 어쩐지 낯익다. 녀석의 얼굴, 내 얼굴과 닮았다. 아니 얼굴만이 아닌 모든 부분이 나와 같지 않은가. 이 나비는 지금, 곧 나다. 그렇다면 내가 바로, 나비였던가. 앗! 눈이 떠진다. 방금 전의 마법 같은 공간이, 나비가, 별빛이, 스르르 사라진다. 벽에 걸린 그림은 묵묵함으로 일관한다. 나는 그저 낮잠을 즐기고 있었을 뿐이다. 모든 게 꿈이었나 보다. 그런데 등은 왜 이리 시근대는 거지. 날개라도 돋으려나. 풋. 하지만 꿈치고는, 너무도 선명한 꿈.

이상. <별빛 속으로>를 본 후 몹시도 ‘꾸고 싶어진’ 꿈.



이야기 속 이야기, 그리고 그 속이야기 속 이야기. 또 다시 그 속으로의 이야기. 그렇다. <별빛 속으로>는 명백히 중층의 액자구조로 이루어진 영화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액자 안 그림들(각 이야기들, 또는 꿈, 초현실)은 방 한쪽에 걸린 채 감상되기만을 기다리는 그런 종류의 그림이 아니라는 것. 대신에 <별빛 속으로>는 ‘감상되기’라는 경로를 거스르는 역동적 차원에서 그림들을 이해하려 한다. 자체적인 시선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깥으로 자유롭게 흩날릴 줄도 아는, 일종의 살아있는 존재로 말이다.

이를 통해 <별빛 속으로>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초현실과 현실 사이의 쌍방향적 소통 가능성이다. 물론 관건은 소통을 대하는 개인의 태도에 있다. 가상세계가 침투할 만한 공간을 내 안에 마련하면 할수록, 이른바 ‘꿈과의 대화’가 실현될 가능성은 더욱 커지는 셈이다. 초현실적 상상과의 부단한 만남이 삶 속에서 어떤 유연한 리듬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렇다면 내 몸에 ‘틈’을 열어두는 데 보다 관대해지자. <별빛 속으로>에서처럼, 꿈은 스며들만한 틈이 있는 곳을 향하기 마련이니까.

꿈과 나와의 은밀하되 즐거운 동거. 기적을 피워 올리기 위한 첫 단추는 거기서부터 꿰인다. 예컨대 죽음마저 함께한 사랑이야기가 한 남자의 잠재된 정념을 흔들어 깨우고, 그 깨워진 정념이 시와 사랑의 긍정적 역량을 믿게끔 해주며, 이 일련의 과정이 나아가 실재적 구원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별빛 속으로>의 마법들처럼 말이다. 자, 이제 이 모든 것을 ‘영화’라는 액자 안에 담아두게 된 당신에게 기적이 찾아올 차례다. 시멘트를 비집고 땅 위로 기어이 올라선 한 송이 꽃의 힘을, 당신이 믿는다면.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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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이라는 기억을 상실하다

제임스 본드에게는 해야 할 일이 언제나 ‘주어진다.’ 적의 음모를 파헤치고 끝장냄으로써 세계 질서의 올곧음을 증명하는 따위의 임무. 성공리에 일을 마친 본드는 어김없이 미녀와 유유자적을 즐기지만, 사실 그 순간 진정한 포만감을 느끼는 쪽은 따로 있다. 누군가의 핏더미가 당분간 공공의 안녕을 보장해줄 거라 굳게 믿는 자들, 즉 제임스 본드가 치르는 그 모든 전투의 실질적인 명령 주체들 말이다. 그들에게 평화란 우월한 힘을 바탕으로 한 대치 상황 자체이기 마련. ‘국가안보’ 따위의 수식어는 이항대립 구조에 정당성을 입히기 위해 동원되는 공공적 포장지에 가깝다.

요컨대 첩보원 제임스 본드는 그 욕망들이 꿈꿔낸 궁극의 인간병기, 나아가 일종의 로망이라 할 수 있다. ‘국가’라는 이름의 무게를 매력적인 백인남성이 짊어짐으로써, 실재할 법한 모든 위험요소가 활극의 재미 차원으로 환원되는 셈이다. 모르기는 해도 아름다운 본드걸과 기상천외한 첩보도구 못지않게, 국가가 부여한 007이라는 살인면허 또한 본드에게는 꽤나 자랑스러운 것이었을 테다.

그리고 이제 ‘본 시리즈’의 완결편 <본 얼티메이텀>이 여기에 도착했다. 제이슨 본. 이름과 마찬가지로, 애초에 부여받은 임무 역시 제임스 본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물. 하지만 우리는 그를 첩보/액션 현장에서의 ‘판타지스타’로 기억하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본은 기존 첩보영웅들과는 다른 동선을 갖도록 운명지어진, 일종의 변종이자 자성의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본 아이덴티티>가 플롯 첫머리에 ‘기억상실’을 심어둔 그때부터, 본의 총구가 영웅담을 지향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던 셈이다. 제이슨 본이 싸워야 하는 이유는 누군가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파괴했음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상기하자.


복합시점과 핸드 헬드, 그 두근거림


<본 얼티메이텀>에서 본은 마침내 그 기나긴 싸움을 끝낼 기회를 잡는다. 과거를 영원히 묻으려는 자들의 파상공세를 어떻게 뚫느냐가 관건. 보다 신속․정확해진 디지털망으로 무장한 그 공격들은, 마치 무수히 뿌려진 점들처럼 촘촘하며 또 긴밀하기까지 하다. 단 한번의 실수조차 본에게는 사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다 민첩하면서도 섬세한 움직임을 갖추지 않을 수 없는 노릇. 그러니까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본 얼티메이텀>은 ‘제이슨 본의 동선이 그를 죄여오는 점들 사이를 어떻게 헤쳐나가 목적지에 도달한 것인가’에 관한 영화라고.

점과 선. 이 1차원적 요소를 전율 가득한 입체로 탈바꿈시킨 공은 명백히 촬영과 편집의 몫이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본 슈프리머시>에 이어 이번에도 히치콕이 말한 정서적 참여의 원칙, 즉 “서스펜스는 관객이 위험을 알고 있을 때 발생한다.”를 연출의 토대로 삼은 듯하다. 예컨대 생사의 갈림길에서 긴박한 리듬을 타고 면밀히 엮이는, 쫓기는 자의 시점과 쫓는 자의 시점 같은 것. 다급하게 교차되는 이 복합시점은 헨드 헬드 숏의 두근거림과 맞물려서는, 관객을 순식간에 긴장과 불안의 중심으로 이동시키는 ‘마술적 효과’를 발휘하기에 이른다. 마치 차들이 내 앞뒤좌우로 씽씽 다니는 신호등 없는 사거리 한 가운데에 던져진 듯, 현기증 나는 전율로 빠져들게 되는 이유다. 긴장이 팽창해가는 과정 하나하나를 날 것 그대로 전달할 줄 아는 이 카메라 놀림과 치밀한 편집은, 또 하나의 고유한 ‘서스펜스 공식’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

영화 후반부. 제이슨 본은 그 모든 공격을 뚫고는 잃어버린 기억과 마침내 마주한다. 하지만 여기서 확인되는 감정은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허탈함이다.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도 했던 비극을 쉽사리 떨치기는 힘들 터. 그럼에도 본의 기나긴 싸움에서는 어떤 진정성 같은 것이 베어 나온다. 위선과 몰이해와 분노 따위가 맞물려 빚어내는 ‘적 만들기.’ 곳곳에 산재된 그 파괴력을 돌파해낸 힘의 근원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그의 태도와 그 태도를 담아낸 묵직한 일관성에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제이슨 본의 진짜 아이덴티티는 ‘과거의 나’를 만나면서부터가 아니라 기억을 잃은 그때부터 출현한 매순간의 ‘지금 여기의 나’를 통해 꾸준히 형성되어온 셈이다. 이것은 일종의 ‘성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영화가 끝났다고 해서 그의 성장이 멈추지는 않을 터, 앞으로 본에게 떨어질 지령들은 그래서 자못 흥미롭다. 이를테면 첫째, 죽인 사람들의 ‘이름도’ 기억할 것. 둘째, ‘본 아이덴티티’를 잊지 말 것.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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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喪失). “어떤 사람과 관계가 끊어지거나 헤어지게 됨. 또는 어떤 것이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짐.”


‘상실’은 도처에 널려있다. 처음이 있으면 끝도 반드시 있다는 우주 불변의 진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사라지는 것들의 출현은 필연이기 마련이다. 사람 사이에 있어 상실은 어떤 관계가 실제적으로 더 이상 지속되지 않게 됨을 뜻한다. 그러니까 ‘당신과 나’라는 고리가 ‘떠난 자와 남은 자’로 바뀌어버리는 것. 결코 유쾌하지 않은 이 경험은, 특히나 그 원인이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한 것일 때 보다 비극적이다. 죽음의 도래는 그 필연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관계를 기억 속에 봉인해버린다는 점에서 무자비하기 때문이다. 남은 자가 ‘영원한 상실’이라는 거역 불가한 명령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슬픔을 삼키는 것뿐이리라.

물론 죽음의 일방적 통보를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때도 있을 테다. 이를테면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닥친 불의의 죽음 같은 것. 삶의 불확실성이 최악의 상태로 표면화된 그런 경우, 극에 달한 고통과 절망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기 십상이다. 요컨대 어떤 상실은, 남은 자의 남은 생마저 송두리째 상실케 한다.

영화 <기담>은 그처럼 수용 불가한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기담>에서 인물들은 죽음이 내린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명령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명령 불복종은 떠난 자들을 ‘지금 여기’에 복원시키고픈 욕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불가능에서 가능을 찾으려는 눈물 서린 그 욕망은, 마침내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기에 이른다. 떠난 자의 귀환을 둘러싼, 말 그대로 ‘기이한 이야기.’

이처럼 <기담>은 상실이 남긴 쓰디쓴 흔적에 뿌리를 두는 영화다. 공포를 담되 단지 공포로만 수렴되지 않는 중층의 정서가 필요한 셈. <기담>이 나름대로 구축한 서스펜스적 요소는 아마도 그 정서들을 효과적으로 엮기 위한 고민의 산물일 테다. 결과적인 말이지만 그 고민이야말로 이런 장르의 영화에서 ‘흐름’을 장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실천적 지표가 아닐까 싶다.

사실 ‘다양한 감정의 충실한 전달’이라는 과제가 비단 <기담> 앞에만 놓였던 것은 아니다. 근래 한국 공포영화들이 주로 다뤘던 내러티브 ―원혼의 복수, 그 원인으로서의 아픈 과거 등― 또한 공포감을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만으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하지만 그들 영화 대부분은 개별 이미지의 표정을 동위의 디제시스 시공간 안에 녹여 넣는 데 실패하지 않았던가. 군데군데 놀람의 장치를 향한 지독한 집착 탓인지는 몰라도, 공포와 그 근원 사이의 감정적 거리는 한없이 멀어져갈 뿐이었다(이른바 뜬금없는 ‘사다코의 망령’은 이제 영화용어사전에 등재해도 좋을 판이다).

<기담>이 반가운 까닭은 그런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기담>은 상실의 아픔과 그 확산으로서의 공포 사이의 정서적 간격이 지극히 좁은 영화다. 간격이 좁다는 말은 서로 어긋날 수도 있는 감정들이 한 덩어리로 적절하게 묶여있음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공포를 상실의 무게에 짓눌린 검붉은 자국 같은 것으로, 상실을 공포의 전이를 부르는 악성종양 따위로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는 정도.

정서 간 이뤄지는 이런 무리 없는 전환은 <기담>이 ‘흐름’을 통제하는 데 능숙한 영화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기담>은 개별 숏들 자체로 무언가를 전달하기보다는, 숏들을 동일 선상에 놓고는 일종의 리듬에 맞춰 흘려보낸다. 그 리듬을 지정하는 명령은 놀랍게도 ‘정교한 서사를 구축하라’가 아니라 ‘과장된 묘사를 응용하라’이다. <기담>에서의 이미지들은 누군가가 ‘말을 하지 못했기에’ 존재한다. 소중한 사람을 불의에 잃어버린 고통은 모든 할 말조차 앗아가기 마련. <기담>은 타인과의 나눔이 불가능했을 최초의 상실감을 직접 언급하는 대신, 상실감이 초래한 파국의 세계를 다양한 악몽의 형태로 과장되게 묘사하는 쪽을 택한다.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과거의 심리적 고통이 절절히 피부에 와 닿는 이유는, 그 과장이 끊기는 부분, 그러니까 묘사와 묘사 사이에서 찾을 수 있다. 긴장과 이완을 오가며 공포를 증폭시키던 리듬은 어느 지점에 이르러 호흡을 멈추고는, 극도의 외로움이 몰고 온 구슬프고도 애잔한 리듬에 마침내 자리를 내어준다. 꿈에서 깨는 순간이자, 상실의 애통함이 현실에서 다시금 환기되는 지점이다. ‘쓸쓸하구나’라는 마지막 대사는, 꿈에서 깼을 때 읊조릴 수 있는, 아마도 유일한 말일 테다.

시대 자체가 ‘상실의 시대’인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삼고도 그것을 잘 활용하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 아쉽지만, 어쨌거나 순수 공포라는 관념에 상당히 근접했다는 점에서 <기담>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스크린에 ‘비정상’을 전시하고 놀래고 타자화하며 무섭다고 호들갑 떠는 영화들과 달리, <기담>은 상실이 낳은 비극의 입체화를 통해 평범한 일상에도 공포의 씨앗은 늘 잠재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삶과 죽음, 또는 기쁨과 슬픔 사이에 경계는 사실상 없으며, 확실한 것은 삶의 불확실성뿐이라는 역설. 무서움을 경유해 안타까움으로 접어들었던 <기담>이, 언제든 다시 무서운 얼굴로 돌아올 수 있는 이유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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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린치가 갈 데까지 간 것 같다. 아니 가고야 말았다. 그의 스타일은 이제 스타일을 넘어 어떤 이즘(ism)이 됐다. 영화 <인랜드 엠파이어>는 ‘린치 월드’라 불리던 모든 것들의 총체이자, 이질적인 무엇으로의 분화다.

<로스트 하이웨이>와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그렇듯, <인랜드 엠파이어> 역시 쪼개진 영혼과 흐트러진 사건들에 관한 영화다. 하지만 데이빗 린치는 내러티브에 ‘어떻게’ 균열을 낼 것인가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듯하다. <인랜드 엠파이어>에서 균열은 현실의 갈라진 틈으로서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접근 가능한 독립된 세계다. 따라서 카메라는 더 이상 현실의 벌어진 틈을 찾고 비집고 확장하는 데 쓰이지 않는다. 요컨대 데이빗 린치는 현실을 경유하지 않은 채 균열이라는 시공간 자체로 결국은 몸소 들어왔으며, 카메라는 그저 균열이 또 다른 균열과 만나고 충돌하고 또 융합하는 과정을 좇을 뿐이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몽롱하게, 대체적으로 자유롭게. 물론 여기에는 사건을 논리적으로 재배치할 만한 그 어떤 가능성과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불가해의 집합소 같았던 두 작품 <로스트 하이웨이>와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차라리 친절해 보이는 이유다.

<인랜드 엠파이어>는 해체된 것들을 해체된 플롯으로 엮은 매우 ‘어지러운’ 영화다. 꿈과 꿈이 꿈속에서 뭉쳐진 듯한, 마치 거대한 무의식 덩어리 같은 느낌. 그것이 무엇이든 어지럼증에 잠식당하기 싫다면 일단 뇌를 잠시 내려놓으시라. ‘본다는 것‘에 관한 이 완전하게 새로운 경험은, 그리 만만하지만은 않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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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햇살 한 자락이 한 남녀를 살짝 보듬고는 마당 구석진 곳에 유유히 떨어진다. 놀랍게도 그 별 볼 일 없는 곳에서 비밀스럽되 소중한 공연 하나가 펼쳐진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서로 어울릴 듯 말 듯, 작게 일렁이고 또 속삭이는, 풀들의 그림자. 영화 <밀양>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 숏은, 새로이 시작될 시간에 관한 징후이자 그 자체로 한 편의 아름다운 시다. 영화가 사물의 존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2. 하지만 이 훌륭한 숏에도 불구하고, 나는 <밀양> 자체에서는 별 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취향이 아니라고 해두자. 이창동의 최고작은 아직도 <초록물고기>, 전도연의 최고작은 여전히 <해피 엔드>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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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매력은 주인공 피터 파커가 '별 볼 일 없는 녀석'이라는 데 있다. 짝사랑 때문에 생긴 상처 따위 그저 혼자 아파하기만 할 뿐인 소심한 성격의 피터는, 게다가 밀린 방값에 늘 시달릴 정도로 재정상태도 열악하다. 피터의 변신은 그래서 더 극적인 효과를 낳는다. 스파이더맨이 된 피터가 드높은 건물 사이에서 그리는 아찔한 상승-하강 곡선은, 별 볼 일 없음으로부터 탈주를 꿈꾸는 또 다른 별 볼 일 없는 녀석들에게, 오감을 자극하는 스펙터클이 되어주고도 남는다.

스파이더맨의 능력 또한 히어로 치고는 평범한 수준이다. 수퍼맨처럼 하늘을 지배하지도, 배트맨처럼 자본으로 무장하지 못한 그는, 겨우(?) 거미줄에 몸을 맡긴 채 곡예를 펼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는 스파이더맨과 피터 사이, 또는 히어로로서의 길과 소시민적 행복으로의 길 사이에서 지리한 줄타기를 벌이는 그에게, 잘 어울리는 능력치이기도 하다. 2편에서의 전철 시퀀스. 제어할 수 없게 된 전동차를 스파이더맨이 100% 수동으로 기어코 멈춰 세운다. 덕분에 목숨을 건진 승객들은, 가면이 벗겨진 채 혼절해버린 스파이더맨-피터를 보고 술렁인다. "그냥 평범한 청년이잖아.", "내 아들보다도 어려." 그리고 그들은 피터를 데려가려는 닥터 옥토퍼스를 감히! 막아선다. 평범함과 비범함 사이에 놓인 여린 청년의 모습이, 사람들로 하여금 일상에 지쳐 잊고 지냈던 '용기들'을 꺼내도록 만든 것이다. 아마도 '히어로 같지 않은' 이 히어로가 멋져 보이는, 시리즈 통틀어 몇 안 되는 장면 중 하나가 아닐 런지.

<스파이더맨 3>의 문제점은 그런 스파이더맨이 세상의 중심으로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전작까지의 고민은 싹 잊은 것일까. 피터는 스파이더맨의 슈퍼스타화를 누리고 즐기는 경지에까지 (너무도 급작스럽게) 도달해버렸다. 영화 속 갈등은 더 이상 '우연히 얻게 된 힘'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나도 충분히 나쁠 수 있다'라고 항변하는 듯한, 피터의 이기적인 욕망이다. 하지만 피터 내면의 어두운 면을 다소 무리하게 작동시킨 탓일까. 그의 감정 변화는 새롭기 보다는 당황스럽다. 안 그래도 따로국밥 같던 각종 캐릭터 및 서브플롯은, 그런 '얼간이' 피터가 쥐락펴락하는 대로 휘둘려야 하는 관계로, 결국 개연성을 잃고는 그저 소모되는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너무 늦게 나타나 너무 빨리 가버리는 베놈. 피터와 굳이! 화해하는, '배트맨이 될 수도 있었던' 해리). 물론 후반부 화려한 태그매치 등은 다음 시리즈를 향한 기대를 품게도 해주지만, 안타깝게도 2편 감상 후 3편을 기다릴 때의 그 마음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 erazerh


# 피터는 '별 볼 일 없는 녀석'이기만 해도 충분했다. 굳이 '돌+아이'가 될 필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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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한 당신, 더 일해라’

영화 <우아한 세계>의 주인공 강인구(송강호)는 폭력과 배신과 약육강식의 현장 한 가운데를 살아가는 인물이다. 게다가 맡은 바 업무에 최선을 다한 대가(?)로, 그의 배는 누군가의 칼이 호시탐탐 노리는 먹잇감으로 전락해버린 상황. 위태와 권태 사이를 오가던 하루하루는 결국 사태를 눈덩이처럼 불려서는 강인구를 그 속으로 밀어 넣고야만다.

이기적인 욕망과 그에 따른 사투로 흘러가는 세계. 느와르가 곧잘 다루는 공식인 ‘파멸로 이르는 외길’은 <우아한 세계> 속 조폭 세상에도 그렇게 자리 잡고 있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강인구가 자꾸만 낭떠러지로 내몰리는 것이 장르적으로 타당한 수순인 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삶을 느와르의 외피만으로 뭉뚱그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강인구의 행보는 장르 특유의 음울한 포장이나 세계의 본질로서의 비극성 따위와는 별 상관없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다른 가장처럼 생계에 관한 고민으로 가득한 강인구는, 오직 ‘살림의 완성된 단계’를 향해 움직일 뿐이다.


이처럼 <우아한 세계>에는 조폭이라는 집단성과 생계라는 대중적 고민이 동시에 존재한다. 느와르의 흐름을 크게는 유지하면서, 그 흐름의 근원을 ‘잘 먹고 잘 살아야한다는’ 1차 집단적 강박에 두는 셈이다. 그 덕에 강인구를 둘러싼 상황이 장르적 평면성의 함정을 비껴나 보다 입체적인 형태로 부풀어질 수 있음은 물론이다. 상황이 입체적이라 함은 곧 강인구가 시달려야하는 고충들이 여러 겹임을 의미한다. 언제부터인가 강인구는 ‘내 가족과 함께 보다 좋은 집에서 보다 잘 먹는 것’이 ‘우아한 세계’라는 자본주의의 공식에 익숙해져왔을 것이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조폭으로서의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최선을 다해온 강인구. 그러나 우아한 세계의 구축을 향해 불철주야 뛴 결과로, 그는 우아함의 자격을 잃게 되고 또 다른 시련을 감내해야하는 처지에 놓이고 만다.

‘먹고 먹힘’으로 진행되는 조폭 세계는 이 땅에서 살기 위해 용쓰는 것 자체가 우아한 관점에서 볼 때 그다지 아름다운 형상은 아님을 (‘아름답다 아름다워’라는 반어법) 강조하는 수단일 터. 어디까지나 ‘럭셔리’를 지향하는 자본주의적 환상은 세상에 찌든 강인구라는 ‘사람’을 버리고는, 돈 버는 ‘기계’로서의 강인구를 그 빈자리에 앉히기에 이른다. 인간을 편의에 따라 분류하거나 도구로 치환하는 일이 가족 사이에서마저 벌어지는 풍경. 우아한 세계라는 판타지와 가족애라는 판타지는 그렇게 뒤엉키고, 한 남자의 사투는 그것들의 자양분으로 활용될 뿐이다. 영화를 관통하는 그 비정함은, 강인구에게 또는 우리에게, TV를 통해 오늘도 내일도 웃으며 말을 걸어올 테다. 열심히 일한 당신, 더 일하라고.


생활 누아르와 송강호라는 배우

영화 <우아한 세계>는 스스로를 ‘생활 느와르’라는 복합명사로 부른다. 사실 우리가 ‘생활’이라 부르는 단어 밑에는 꽤나 많은 사건과 그에 따른 다양한 감정들이 뒤섞여있다. 희극과 비극을 수시로 넘나들며 생성되는 변화무쌍한 표정들의, 무한한 조합. 우리네 일상생활의 본질은 바로 그 조합에 있지 않을까. 따라서 ‘생활 느와르’를 표방한 <우아한 세계>가 생활을 웃음과 슬픔이 오가는 폭넓은 이야기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물론 그 독특한 장르용어의 활용은 송강호라는 배우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송강호는 울면서 웃을 수 있는, 혹은 웃으면서 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왼발은 비극 오른발은 코미디, 그냥 걷는 리듬으로 찍었다”는 <괴물> 또한, 송강호의 그러한 이미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작품이 아니었을까.


사실 이미 여러 곳에서 언급됐듯이, 강인구라는 인물에서는 그간 송강호가 선보였던 캐릭터들의 흔적이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후반부 노 회장과 조우했을 때 횡설수설하는 모습은 “죽긴 죽었는데, 살았거든요?”라는 말하는 <괴물>의 박강두와 닮았고, 모든 상황이 뒤엉켜 벽에 부딪혀버렸음을 실감하는 표정은 <살인의 추억>에서의 박두만의 얼굴과 겹쳐진다. 또한 가차 없는 행동력과 안 풀림에도 무던히도 애쓰는 모습은 각각 <복수는 나의 것>과 <반칙왕>을 떠올리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무식하면서 용감하다는 점에서 강인구는 <넘버 3> 조필의 나이 든 버전이다.

이러한 필모그래피의 추억은 일견 배우 이미지의 동어반복으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강인구에 배인 송강호의 과거는 단지 나열되는 데서 그치지만은 않는다. <우아한 세계>에서의 송강호‘들’은 서로 충돌하고 또 한데 어우러지면서, 삶의 복잡다단한 리듬을 살아있는 표정으로 옮겨낼 줄 아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그 생생함이 스크린 안팎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순간, 송강호라는 배우는 피곤한 대한민국 서민의 ‘몸-얼굴’로 비로소 녹아들게 된다. 비록 오늘은 울더라도 내일은 웃고 싶은, 그래서 여전히 ‘생활’의 현장 한 가운데에 서있는 바로….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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