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초반, ‘백희혹은 배키로 불리는 소년이 같은 반 몇몇한테서 괴롭힘을 당한다. 그리고 다른 시점(時點), 누군가의 아버지가 아들의 과거 학교생활에 관해 수소문을 하고 있다. 무거운 낯빛으로 보아 아무래도 아들을 영영 잃어버린 듯 보인다. 그렇다면 이 아버지는 백희의 아버지일까? 녀석은 자살이라도 한 것이고? 의문도 잠시, 영화는 이즈음 백희의 이름이 희준이고 그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밝힌다. 곧이어 언급되는 기태라는 이름. 자살했으리라 짐작되는 아들은 기태, 희준을 괴롭히고 때리던 그 친구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년에 관한 낯익은 도식적 기표들이 있다. 성적비관, 왕따 등. 그런데 여기서는 친구들을 괴롭히던 이른바 싸움짱이 죽었다. 아마도 기표들은 나서기를 꺼릴 테다. 그것들에게 싸움짱은 자살을 하게 만드는 가해자이지 자살의 주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불우한 소년에 곧잘 붙는 기계적 수식어로 당최 설명되지 않는 상황, <파수꾼>(2011)의 문제의식은 여기에 있다. 이제 영화는 아이들이 어울려 놀던 한때로 돌아가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재가동한다. 플래시백은 단선적이지 않게 아버지의 현재 시제와 교차 편집되는데, 그렇다고 해도 이 미스터리 구조만으로 작품이 신선한 파격까지 돋우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나의 스타일이 됐을 만큼 이미 두루 쓰인 플롯이기 때문.

대신 <파수꾼>에는 그 익숙함을 상쇄하거나 도리어 활용하는 장치, 요컨대 일상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긴장의 내러티브가 있다. 윤성현 감독은 발단전개는 괄호 쳐둔 채 의도적으로 위기의 에피소드를 반복, 친구 간 충돌이라는 흐름을 잘게 쪼개고 그 각각에 시간을 할애한다. 충돌 하나하나는 우리가 미리 알고 있는 결과를 경유해 도착하므로 그 울림은 배가된다. 자질구레하다고 흘려보내졌을 법한 소년들의 치기가 <파수꾼>에서는 거대해지는 까닭이다. “너네 눈빛 주고받았잖아?” “눈빛은 주고받았는데 비웃은 건 아냐.”라는 기태와 재호의 (사소한) 대화 숏에는 프레임의 면을 찢을 듯한 어떤 불안감이 팽배하다. 느와르 영화 속 뒷거리처럼 어둡고 냉혹한데다, 터지기 일보직전의 결국 터지게 될 폭력이 기저에 흐르기 때문이리라.

기태가 묻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에 가장 친했던 친구 동윤이 답한다. “처음부터 너만 없었으면 돼.” 진심을 담은 의문이 비수로 돌아와 꽂히는 상황. 이에 관해 우리는 소년 간 충돌의 양상, 이를테면 불가능한 소통과 그에 따른 비극적 추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파수꾼>에서 소년들의 발화는 서로 맞물리지 못한 채 각기 헛돌기 일쑤다. 이 불연속에 진의는 입 안에서 미끄러지고 욕설이 그것을 대체, 오해와 갈등을 겹겹이 쌓는다. 희준을 때린 것과 관련해 동윤이 왜 그랬냐?”고 따져 묻자 기태는 네가 뭘 아냐?”라며 받아친다. 각기 다른 의미작용(signification). 동일한 라인 위를 따로 돈다는 점에서 일종의 꼬리잡기 놀이다. 잡지 않으면 잡히는 게임, 소년들은 그렇게 폭력-폭언으로 이어지는 악순환 궤도에 오른다. ‘잘못된 어딘가를 복기하고픈 기태의 마지막 소망은, 그러므로 조금 더 일찍 나왔어야 했다.

너만큼은 나한테 있어서 진짜.” “착각하지 마. 생각만 해도 역겨우니까.”라는 기태와 동윤의 대화에 이르러, 소년들은 사랑하므로 파괴하고 파괴당하는, 멜로드라마의 위악적 주인공으로까지 나아간다. 윤성현 감독은 기존 영화에서 장르적으로 소비되던 소위 노는 아이캐릭터를 폭력과 감성의 두 스펙트럼으로 분할, ‘여리고 민감한, 어린 마초라는 호응 불가능의 구절을 이미지로 구현하는 데 성공한다. 요컨대 소년한테서 발견한 소녀성(). 물론 기태, 희준, 동윤은 (존 그레이가 말한) ‘금성같은 곳에서 온 남자가 아니다. 따라서 이 성질은 사춘기 여자아이 고유의 것이라기보다 상징계적 구분과 위계를 위해 사용되는 부정형의 기표에 가깝다. 소년들의 감춰졌던 속살, 그들의 또 다른 결은 이처럼 허락받지 못한 실재가 됨에 따라 위태로이 작동한다. 사건의 원인을 추적하고 헤집으려 했던 우리는, 우리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며 단지 통감하는 데 급급할지도 모르겠다.

<파수꾼>의 도입부, 카메라는 무리지은 아이들을 흐릿한 초점으로 아무렇게나 프레임에 집어넣는다. 실패한 이미지는 마치 눈에 잘 들어오고, 이해하기 쉬우며, 놀랍지 않게 다듬어진 소년은 여기 없을 거라는 선언처럼 보인다. 마르틴 졸리의 말마따나 이미지는 실패하면 할수록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본질적인 눈먼 상태에 근접하기 때문이다. <파수꾼>은 이 눈멂이 추상화하는 장소, 이를테면 바람직하다고 제시되는 성장의 가이드라인 그 너머에 관한 환기다. 이는 프로파간다적 설파가 아니라 기태가 말한 설명 못 하는 것들로 수렴되는 문학적 현시를 통해 이뤄진다. 그래서일까. 홀든 콜필드만큼 세련되지 못했던, 기차가 다니지 않는 기찻길로만 통행했던 아이들이, 애잔하다.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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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만난 여자와 남자가 부부 연기를 펼친다는 상황 자체도 흥미롭지만, <사랑을 카피하다>의 진짜 재미는 그 역할극을 차츰 잠식해가는 두 사람의 감정선에 있다. 그것이 복사본으로서의 이 역할극을 실제 결혼생활의 단순 반복 그 이상의 무엇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오리지널리티를 신뢰하던 여자가 영화 후반 "제, 제, 제, 제, 제임스."라고 말을 더듬을 때, 그러니까 오롯이 복사본 안에서 잉태된 풋풋한 감정이 고개를 들 때, 이 역할극은 이미 그 자체로 삶의 한 조각이 된 셈이다. 즉, 고유한 시간성의 획득.

이 '원본-복사본'은 '현실-영화'의 관계와 몹시도 닮았다. 현실로부터 외양을 빌려 구축한 개연성 있는 허구를 우리는 영화라 부른다. 그리고 토대가 된 그 현실을 우리로 하여금 무려! 만지고 느끼게 해줄 때, 그 재기발랄한 이미지들은 곧잘 걸작이라 일컬어진다. 물론 영화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한 편의 영화로 세상에 조금이라도 '덜 속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지 아니할까.

돌아와서, <사랑을 카피하다>의 역할극은 원본 앞에 과연 어떤 판결을 내놓을까. 또 다른 원본이 써지기를 간절히 바랐던 줄리엣 비노쉬. 그녀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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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크라이스트(Antichrist)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진짜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같은 물음을 던지거나 답하려 들지는 않는다. 영화 속 갈등 또한 이성적인 틀로서의 시선/해법과 인간의 어두운 본성 간 어긋남에서 비롯된 것이지, 기독교적 요소의 개입 때문은 아니다. 다만 그와 그녀 간 파열음이 아담-이브 이야기의 히스테릭한 버전으로 전개될 뿐. 그러니까 신의 부재를 전제로 한, 인간 통제 불가능성에 관한 일종의 고해성사.

 

그렇더라도 기괴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미지가 불쾌해서가 아니라 사실 개인적으로는 불쾌하지도 않았지만 영화의 태도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인과관계가 있을 법한 지점에 내러티브 대신 추상적 언어상징이 느슨하게 들어앉은 탓에, 그와 그녀가 보이는 다양한 패턴의 행위가 광기라는 기표 안에 지나치게 뭉뚱그려지는 느낌이랄까. 예컨대 그녀 스스로 마녀가 되어가는 것에 대한 영화의 비판적 스탠스, 그 방향이 모호한 관계로 인간 본성 운운하는 게 관객한테는 최선의 반응이 되는 식이다. 이때 단지 관조할 뿐인 카메라는 부재한 신과 무엇이 다른가. 그저 잔혹한 멜로드라마 또는 라스 폰 트리에의 우울증 표출 정도로 치부하면 딱 좋겠지만 그래서는 이 작품, 지지하기가 어렵다.

 

이런 까닭에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유려한 이미지들에도 불구하고, 프레임으로서의 존재 이유/필연성에 관해서는 다소 의문이 생긴다. 물론 유기적인 과정을 통하지는 않았다 해도 순간순간 포착되는 몇몇 발화가 매혹적이기는 하다. 이를테면 에덴 동산은 여성을 어떻게 디자인했는가?’에 대한 답변 같은 것. 그러니까 그 수많은 이브들. 얼굴이 지워진, 아마도 이브. 여성 타자화는 이미 창세기 때 기획됐다는, 적그리스도적() 선언 말이다.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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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은 곧 상실의 축적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다 많이, 자주 잃어야 한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섭리지만 또한 두려운 변화이기도 하다. 내 삶의 핵심을 이루던 조각이 떨어져나가 생긴 공백들은 사실상 영영 메울 수 없는 까닭이다. 게다가 결국은 오고 말 마지막 상실, 나의 최후 역시 두렵기는 마찬가지. 죽음에의 상념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하 스포일러)

 

 


클린트 이스트우드한테도 죽음은 점점 더 무거운 것이 되어갔다. 악당들을 거침없이 처형하던 그때 그 터프가이를 훗날 늙은 무법자의 자리에 앉혀 회한에 묻히게 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용서받지 못한 자>). 폭력의 잔혹한 굴레에 환멸을 느끼지만 결국 과거의 핏빛 무대로 소환되어 버리는 ‘더티’ 윌리엄 머니. 하지만 악을 소탕하는 일은 내러티브를 정리하는 장르적 해결책으로 더는 기능하지 못한다. 죽고 죽이는 데 아름다운 구실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감독 이스트우드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와서 떠나보내는 자의 고통과 한탄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기에 이른다. 눈물 짜내는 공식을 읊지 않음에도 영화는 갖가지 정념으로 들끓는데, 프레임 내부에서 소화되지 않은 어떤 잉여의 비극성이 관객의 감정이입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울어 마땅한 사람이 울지조차 못하니 보는 이의 마음이 어찌 더 아프지 않을까. 마지막 숏인 이스트우드의 쓸쓸한 뒷모습은 절제가 영화를 어떻게 위대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좋은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그의 작품에는 늘 전보다 조금 더 짙고 묵직한 색채로서의 죽음, 그에 따른 깊은  울림이 있다. 누군가의 끝이란 적어도 이스트우드에게는 일회성 감정으로 소비될 소재가 아니라 어떤 이미지로 형상화해놓고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걸쭉한 무언가였던 셈이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내용과 별개로, <퍼펙트 월드>의 최종 숏이 그토록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이유는.

<히어애프터> 또한 ‘죽음’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영화다. 여기에는 세 종류의 죽음, 그리고 그것에 얽힌 사람들이 있다. 저세상으로 가는 문턱을 넘었다가 간신히 되살아나는 여자, 세상 유일한 벗과 다름없는 쌍둥이 형을 사고로 떠나보내는 소년, 그리고 죽은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탓에 산 사람의 고통․치부 역시 알아야 하는 한 남자. 영화는 이 세 명의 이야기를 교대로 보여주다 마지막에 한 데 모으고는 서로한테서 구원에 관련된 힌트 같은 것을 발견하게끔 한다. 교차편집 형식을 띠기는 하지만 시간을 뒤섞거나 사건을 꼬는 등의 잔재주는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는 죽음의 문턱 너머 일부만 비추다 다시 삶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데, 그로 인해 현실 속 혼란과 수습의 과정이 전작들보다 한층 도드라진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에서 만나는 죽음은 강렬한 여운을 빚어내는 한 방이 아니라 한결 무게가 덜어져야 할 슬픈 기억으로서의 기표다. 방점이 곧 이후의 삶 위에 찍히는 셈. 이에 맞게 엔딩 시퀀스는 처음 만나는 연인의 구도를 취하며 말줄임표, 열린 결말을 표방한다. 언뜻 해피엔딩으로의 진부한 박제처럼 보이는 마지막 숏이 실은 삶의 전환점, 이를테면 ‘해피-스타팅’이 되는 것이다.

이스트우드는 배우 은퇴작인 <그랜 토리노>에서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 바 있다. 희대의 총잡이가 총을 내려놓고 적진으로 걸어 들어갔음은 과거-현재에 대한 회한의 제스처이자 그 마침을 기원하는 일종의 ‘전시’다. 그는 그렇게 제 몸을 바쳐 폭력의 계보가 이어지지 않기를 갈망했다. 그리고 이제 그 이후가 말해졌다. 누군가의 끝이 더 이상 묵직한 최후, 평생을 돌아보며 한숨 쉬어야 할 부채가 되지 않기를 이스트우드는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히어애프터>에서 폭력의 부조리한 인과율과 별개의, 부지불식간에 일어나 삶에 개입하는 확률적 차원의 죽음을 본다. 결국은 어떻게 다시 삶에 복무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 불확실하고 위태로운 세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툭, 던져진 희망. 상실을 수없이 겪고 다뤘을 한 어른의, 곱씹어도 좋을 새 전언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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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의 노고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지만, 고백하건대 <인셉션>은 사실 좀 시시했다. 플롯을 주체적으로 주무르는 데 상당한 공을 들인 영화임에도, 뭐랄까, 가슴을 후벼파는 날카로운 무언가는 결여된 느낌. 정성일의 말을 빌리자면 '다른 영화보다 좋은 영화이지, 다른 영화와 차원이 다른 영화는 아닌' 셈이다.

이는 <인셉션>이 현실과 꿈의 관계를 '현실-잠재적 실재'의 층위가 아니라 '현실 ver1.0-현실 ver2.0'의 고리로 다루는 영화라는 점에서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요컨대 기대했던 '잠잠한 표면'과 '들끓는 내부'라는 실재적 접근 따위와 무관한, '기억-기억-기억'으로 이어지는 머릿속 회로도만 줄곧 들여다봐야 했으니까. 넘치도록 흐르던 긴장이 결국 러닝타임의 종료와 함께 휘발되는 성질의 것일 때의 아쉬움이란.

물론 이것은 '꿈을 소재로 한 영화'에 거는 내 기대에 <인셉션>이 부응하지 않는 종류의 작품이기 때문이지, <인셉션> 그 자체의 문제라 볼 수는 없다. 그러니까 데이빗 린치의 블록버스터 버전을 상상했다가 실망에까지 이른 것은 어디까지나 내 책임. 아무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견의 감독 목록에서 이제 크리스토퍼 놀란은 내려놔도 되지 않을까 싶다. ⓒ erazerh


# 별 다섯 개를 만점으로, <다크 나이트>는 내게 별 넷 정도의 영화다. 물론 그 중 별 셋은 히스 레저의 몫. 놀란이 창조한 지나치게 도식적인 후반부 구도는 별 -1개다.

# <인셉션>은 거의 '셔터 아일랜드2'처럼 느껴졌다. 디카프리오가 아니었어도 그랬을 거다. 나쁜 뜻은 아니다. 나는 <셔터 아일랜드>와 데니스 루헤인의 '살인자들의 섬'을 꽤나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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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히 100번은 넘게 들은 것 같다. 그 중 열 번 정도 약간의 눈물을 흘렸고, 한 번은 아주 크게 울었다. <마더>의 엔딩신을 장식했던 트랙 ‘춤’은 그렇게 나를 정서적 과잉으로 밀어 넣었다. 이를테면 절망. 슬픈 듯 나른하거나 나른한 듯 슬프거나, 어떤 경우든 이 선율에서 얻어지는 결론은 절망이더라. 망각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추출한 주술적 사운드가 오히려 망각의 대상을 환기하라는 최면처럼 들린 탓이다.

도준 엄마는 어떨까. 시간이 저만치 흐른 후라면 진실을 게워냈음에 웃을 수 있을까. 머릿속에 켜켜이 들러붙은 죄책감들에 행여나 지금보다 더 미쳐 보이지는 않을까. 아, 물론 그 결과가 어떻든 간에 ‘돈과 빽에 따라 사람을 분류하는 유기체’로서의 세계는 끄떡없을 것이다. 그 안에 던져진 개인이야 늘 그랬듯 침묵하거나, 재수 없으면 폐기될 테고. 말할 것도 없겠지만, 태생이 비천할수록 후자의 가능성은 더 크다.

그러니까, 나는 진심으로 종팔이가 불쌍하다. 추악하고도 화창한 날, 그는 나를 대신해 거기에 있다. 이 영화, 이 음악, 잔혹하다. ⓒ erazerh


춤 (from 마더 O.S.T)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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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오프닝. 우리네 ‘국민엄마’가 아무런 말도 없이 외화면의 사운드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우스꽝스러운 느낌도 잠시, 이것 참 기괴하다. 이내 그녀의 시선이 카메라를 향하자 동작들은 하나의 질문이 된다. '자, 이 엄마는 왜 이러고 있을까요?'

(이하 스포일러)




이렇게 볼 수도 있겠다. 영화 <마더>는 ‘탤런트 김혜자’라는 기호가 ‘봉준호 월드’로 들어가 어떤 분화를 거치다 결국에는 또 다른 ‘김혜자’로 변환하는 구조라고. 그러니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가 존재한다. 하나는 봉준호 영화에 늘 등장해온 ‘부조리가 자연화된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도준 엄마 고유의 ‘어미-새끼’로서의 관계망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곳곳에서 충돌하던 두 세계가 말미에는 같은 결론으로 — 요컨대 진실을 부인(否認)하는 것으로 — 수렴된다는 점이다. 전자가 편의에 따라 ‘비정상'에게 혐의를 씌우는 관료주의적 오독을 일삼는다면(백광호와 강두 가족한테 그랬듯), 후자는 피로써 눈물로써 결국 그 오독에 침묵을 덧붙이는 꼴이다. 두 경우 다 지금의 서식 환경을 떠날 수 없다는 수구적 습성이 빚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반동이다.

진실에 관한 욕망 자체가 부재하다는 점에서 전자는 부숴야 할 ‘진부한 악(惡)’ 정도로 규정지어져 마땅하다. 반면 도준 엄마의 경우는 판단이 쉽지 않다. 그녀의 모든 행위가 타자 개입이 불가능한 내면적 심연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속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만이 이 엄마의 삶을 추동하는 유일한 근거인 셈이다. 아마도 도준의 망각이 시작됐을 때, 그녀는 그렇게 자신만의 심리적 영토로 달아나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도준의 존재 자체가 과거를 환기하는 지워지지 않을 ‘자국’인 탓에, 이 속죄는 결코 완성형이 될 수 없다. 평생을 두고두고 치러도 모자랄 죗값이 도준 엄마로 하여금 도준이 눈앞에 안 보이는 꼴을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밥을 먹이거나 옆에 뉘여 젖을 내줄 때만, 이 어미는 새끼에게 잘 속죄 중이라 스스로 자위할 수 있다. 이는 숭고한 사랑이기 이전에, 네가 없으면 내가 죽고 내가 없으면 네가 죽는다는, 차라리 짐승 같은 본능이다. 하기야 아비 없는 자식, 서방 없는 여자라고 깔보는 세상 앞에서, 어미가 취할 수 있는 태도가 그것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여자들이 묻혔던 곳, 현서가 괴물에게 먹혔던 바로 거기, 그 구멍 속 실재를 알게 된 봉준호 영화 유일의 생존자임에도 불구하고, 도준 엄마는 ‘어미’인 관계로 결코 진실을 뱉을 수 없다. 그곳에서 발가벗겨졌던 한 여고생의 삶과 죽음 따위는 그저 한마디 농담으로나 세상에 나돌 테다. 종팔과 고물상 노인 또한 마찬가지. 자본과 권력의 서열 맨 끝에 매달려있던 그들에게는, 아, 밥상을 차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엔딩 시퀀스. 관광버스 안에서 도준 엄마의 두 번째 춤사위가 펼쳐진다. 진실을 배반하고 사람을 죽였기에 치르는, 이를테면 망각을 위한 제의(祭儀).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라고 했던가. 기쁨이라면 모를까, 슬픔은, 특히나 비밀을 간직한 슬픔은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 이제 이 어미는 행복한 표정을 내건 채 속으로는 더 깊은 구덩이를 파내려 갈 것이다. 상징계와 그 이면을 달콤쌉싸래하게 오가던 봉준호의 세계가, 이제는 이토록 그윽하기까지 하다. 그는 김혜자를 괴물로 만듦과 동시에 자신도 괴물이 됐다. ⓒ erazerh



덧붙임


1. 진태는 어쩌면 도준의 또 다른 판본일지도 모르겠다. 도준이 농약 박카스를 먹지 않은 채 본래대로 자랐다면 진태처럼 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진태가 도준 엄마에게 막말을 하는 그 시퀀스가 조금은 더 선명해진다.

2. <마더>는 명백하게 <살인의 추억>의 백광호 모티브를 심화-확장한 것이다. 형사 세 명이 <살인의 추억>의 형사들과 같은 위치에서 같은 역할을 하는가 하면, 백광호가 철길 위에서 하던 동작을 그대로 반복하는 도준의 모습이 엄마 머리를 문뜩 스치기도 한다.

3. 도준 엄마가 종팔에게 “너 엄마 없어?”라고 물으며 흐느낄 때, 그때만큼은 그녀의 얼굴이 도준 엄마가 아닌 ‘김혜자’, 그러니까 우리네 엄마의 그것이 된다. 엄마 없는 장애인의 비극을 장애인의 엄마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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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가 궁금하고 또 기대되는 이유. 단도직입적으로, 봉준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봉준호인가.

봉준호 영화를 추동하는 핵심 모티브는 ‘실종’이다. 누군가 사라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플란다스의 개>의 개들과 <살인의 추억>의 여자들, 가깝게는 <괴물>의 현서가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잘 돌아가는 세계가 있다. 시위대를 치워버림으로써 깨끗함이 유지되는 거리, 여자들이 묻힌 땅 위를 흐르는 공장의 부지런한 기계음, 실체 없는 공포 덕에 굳어지는 도시의 암묵적 질서 따위. 요컨대 강제적인 봉합이 이뤄지고 곧바로 자기만족이 뒤따르는 꼴이다. 이 꼴들이 겹겹이 쌓인 상징계는, 얼마나 위선적인가. TV 속에서 토론을 펼쳤던 <지리멸렬>의 저 뻔뻔스러운 지식인들을 기억해보자. TV를 끄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늘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상징계에서는 필요에 따라 몇몇 삶이 수집되지 않기 마련이다. 봉준호 영화의 미덕은, 바로 파편으로 존재하는 그 삶들을 희비극의 형태로 복원한다는 데 있다. 이는 대책 없는 낙관이나 비관이 아니라 ‘환기’와 ‘각성’의 제스처다. 그래서 ‘짝퉁’들의 세계와 그 부조리가 일단 구조화 되고 나면, 우리는 송강호의 마지막 눈빛, <살인의 추억>과 <괴물>을 관통하는 그 서늘한 응시를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마더>. 봉준호 감독은 작년 이맘때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항상 중심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영화만 만들었다.”며, <마더>를 일컬어 “중심을 향해 들어가는 나의 첫 작업”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나는 이 말이 이번에는 외부가 아닌 내부를 일그러뜨릴 것이라는, 봉준호의 은밀한 선언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상징계의 붕괴를 누군가의 심리적 심연에서부터 진전시키는 것이 ‘중심을 향하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하겠다는 느낌에서다. 이제 그 <마더>가 마침내 공개됐다. 봉준호한테 히치콕이니, 알모도바르니 하는 수식어가 붙는 중이다. 정말로 봉준호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다정다감한 기호 —엄마— 를 들쑤셔 놓았을까. 확인해 봐야겠지만, 최소한 우리가 알던 ‘엄마’가 이 영화에 등장하지 않음은 명백하리라.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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