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 선하고 구조적으로 훌륭한 영화인 건 알겠는데, 개인적으로 마음을 툭 건드리는 포인트는 못 찾겠다.
T보다 F를 선호한다는 건 아니고, 시네마라기보다는 잘 조립된 기계 속을 매끈하게 통과해낸 생산물 느낌? 방점이 그 기계, 즉 이미지와 사운드 간 '불협화음의 협화음'이라는 메커니즘에 찍힌달까. 물론 메커니즘 제작 자체가 몹시 창의적이고 정교한 작업이었음은 감지되지만, 지나치게 콘셉트적인 영화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진부한 악'의 이미지화, 성공적.
그렇다 보니 <존 오브 인터레스트>보다는, 이 영화 대체 왜 이러나 왜 이딴 식으로 찍었나 심드렁하다가, 최종 시퀀스에 이르러 그때까지의 내 경솔함에 치를 떨었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사울의 아들>(2016)이 더 좋다. 영화적 표현의 어나더 경지를 실감케 한, 지옥을 겉도는 얼굴-몸의 존재 이유.
두 영화 모두 중요한 배경의 어떤 소거를 다루고 있는데,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보이지 않는 척'의 구도화라면 <사울의 아들>은 '진짜로 눈먼 상태'의 중심을 파고드는 집착이랄까. 말장난 같긴 하지만 <사울의 아들>이 내민 생지옥의 모양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다는 얘기. ⓒ erazerh
건조하고 서늘한 팩트들이 가장 중요한 진실 하나를 빙 둘러싼 구조의 영화. 가운데 있는 그 메인 이벤트성 팩트가 감춰진 탓에 모든 게 객관적인 동시에 그 무엇도 객관적이지 않게 된다. '사실'과 '사실이겠지'의, 어쩌면 어마어마한 간극.
이렇다 보니 아들과 아버지의 후반부 그 시네마틱한 장면조차 잠시 먹먹하다 말고 의심으로 차갑게 물든다. 감성의 영역으로 막 넘어가려는 관객을, 되레 목덜미를 붙들고 이성의 자리에 주저앉히는 느낌. 상반된 두 에너지가 전에 없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이 신(scene), 혹은 이 신을 창조한 앞선 숏들과 숏들의 배치는 그야말로 압권.
영화가 남긴 최종 명제가 확 와닿는 취향 쪽은 아니라 개인적 걸작 반열에는 (아직) 올리지 않았지만, 형식상 완전무결하고 놀랍도록 지적인 영화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 erazerh
배우 변희봉이 빚어낸 많은 명장면이 있겠지만, 가장 먼저 기억나는 건 <플란다스의 개>에서 '보일러 김씨' 썰을 풀던 지하실 씬이다. 특정 장르로 규정지을 수 없는, 혹은 그 어떤 장르라도 될 수 있는, 그로테스크와 코미디를 한 번에 담은 얼굴로, "보일라 돈다잉, 보일라 돌아불제잉"
배우의 얼굴을 하나의 행성처럼 포착해낸 봉준호 감독의 연출도 좋았지만, 분명 그걸 가능케 한 건 의뭉스러운 음영을 만들 줄 아는 변희봉의 표정, 그리고 목소리였다.
이후 이와 조금이나마 비슷한 느낌의 숏은 <라이트하우스>(2019)에서 윌렘 데포를 통해서나 만날 수 있게 되는데, 그조차 변희봉만 못한 게 사실이다. ⓒ erazerh
<기생충>을 포함해 '계급'을 소재로 삼은 영화 중 어느 것도 끌로드 샤브롤의 <의식>(La Ceremonie, 1995)에는 근처도 못 가고 있다는 게 내 생각.
그러니까 어느 수준이냐면, <의식>은 일단 계급구조를 끊임없이 드러내되 그 안에 감정을 집어넣지 않는다. 약자·여성·연대 따위의 유행어 같은 키워드가 들어설 공간 자체가 없다. 세상은 물론 불합리하지만 이 영화에서 불합리는 위에서 아래로만이 아니라 역으로, 또는 옆에서도 스멀스멀 흐른다. 그러다 보니 두 여성의 전복적 행위에 가치가 매겨지지 않으며 사건은 말 그대로 '돌출'된다. 관객 입장에서는 사건을 예측하거나 사후에 원인을 지목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포착 가능한 건 잠재된 악의, 얄팍한 명분, 세계 곳곳의 불안한 공기 정도. 즉, 설.명.할 수 없음. 그런데 이 '설명 못 할 불쾌함'만큼 역으로 세상을 명쾌하게 드러낼 수 있는 표현이 또 있을까.
이렇듯 <의식>은 계급을 다루되 '계급의 수직성 부각'이나 '공감 유도' 같은 기존 틀을 아득히 넘어 섦으로써, 오히려 본질에 대한 큰 그림을 꿈꾼다. 걸작이 걸작인 이유. 30년이 다 된 영화지만 여전히 가장 새롭다. ⓒ erazerh
'내가 영화인지 영화가 나인지' 모르겠을 최종 시퀀스도 좋았지만, 중간에 소동극을 바라보며 잔잔하게 웃는 듯 우는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의 얼굴 클로즈업이 가장 마음에 든다.
난장판의 유니크함 때문인지 몰라도 불현듯 영원한 건 없다는 걸 깨달아버린, 시간의 지연을 바라는 현재의 얼굴이자, 먼길 떠나기 전 요란했던 그 시절을 한번 들러본, 아마도 생의 마지막 시점에서 온 미래의 얼굴. 무엇이든 '간직'을 꿈꾼다는 점에서 이때 콘래드의 눈은 카메라라는 '감정-기계'와 같은 역할을 한다.
삶의 찰나성에 관한 이토록 따뜻하고 쓸쓸한 관조라니. 최근 본 적 없는 시네마틱한 숏, 아름답다. ⓒ erazerh
추석 연휴 때는 차례를 지내고 절식을 만들어 먹고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덕담을 주고받는 등 명절 본연의 일들 외에, 다른 즐길 거리도 많습니다. 나들이, 여행, 집에서 휴식, OTT 즐기기 등등. 여기에 영화관을 찾는 것도 주요 일정이 될 수 있을 텐데요.
볼거리가 워낙 늘어난 만큼 예전 같지는 않아도, 업계에서 추석은 여전히 중요한 개봉 시기로 꼽힙니다. 그렇다면 추석 때는 어떤 영화들이 개봉했고 또 어떤 작품을 많이 봤을까요? 지난 10년간 추석 시즌 개봉작들의 매출 순위를 통해 추석 영화관 트렌드를 살펴봤습니다.
※ 추석 연휴 2주 전~추석 주간 국내 개봉작 대상(2012~2021). 매출액은 해당 영화의 개봉 기간 매출 전체의 합. 자료 출처: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영화진흥위원회 운영)
지난 10년을 통틀어 추석 시즌 영화 중 매출액 1위를 찍은 작품은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입니다. 2012년 9월 극장가를 휩쓴 <광해>는 배우 이병헌이 광활한 연기 스펙트럼을 제대로 선보인 영화로도 꼽히는데요. 관객을 1,232만 명이나 불러모은 <광해>의 매출은 889억 원에 달합니다.
추석 영화 중 매출액 2위를 차지한 작품은 웰메이드 역사극 <관상>(매출 660억 원), 3위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김지운 감독의 액션 스릴러 시대극 <밀정>(613억 원)이었습니다. 최종 관객수는 각각 913만 명과 750만 명.
이어 563억 원의 매출로 4위에 오른 영화는 범죄 액션물 <범죄도시>였는데요. 올해 최대 흥행작인 <범죄도시2> 또한 이 1편이 구축한 캐릭터들과 화끈한 액션이 인기 비결이었을 만큼, <범죄도시>는 액션 시리즈물로서 성공적인 서막을 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위는 영조와 사도세자를 재조명한 사극 <사도>가 차지. 488억 원의 매출을 올린 바 있습니다. 역시 역사물인 <안시성>이 고구려 안시성 전투를 담아내며 추석 개봉작 중 매출액 6번째 자리를 꿰찼습니다.
이쯤 되니 추석 흥행 트렌드가 슬쩍 보이는 것 같은데요. 순위를 조금 더 들여다볼까요?
매출 랭킹 7위와 8위는 다시 한 번 정통 액션영화들의 차지. <킹스맨>의 속편 <킹스맨: 골든 서클>이 우리나라 관객 매출 410억 원, <나쁜 녀석들: 더 무비>가 매출 396억 원으로 7·8위에 올랐는데요. 9위로 집계된 화투-액션(?) 드라마 장르의 <타짜-신의 손>까지 묶으면, 전작·원작이 있는 화끈한 오락물이라는 공통점을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어 10위 자리는 돌고 돌아 역사극입니다.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을 다룬 황동혁 감독의 <남한산성>이 그 주인공. 312억 원의 매출을 거뒀지요. 하지만 보기 드문 '명작 사극'이라는 평가와는 별개로 관객은 385만 명만 들어 손익분기점(500만 명 추정)을 넘지는 못했습니다.
단, 절치부심했을 황동혁 감독은 4년 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을 연출하며 감독으로서 명성을 드높이게 됩니다.
지난 10년간 추석 시즌 개봉작들을 매출 순위로 살펴봤습니다. 키워드가 눈에 보이는데요. 가장 선명한 건 '역사극' 혹은 '시대극'이라는 장르. 근대사를 다룬 <밀정>을 포함해 10개 작품 중 6개가 해당됩니다. 추석 하면 사극, 사극 하면 추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실제로 10년간 추석 외 다른 기간 개봉한 사극&시대물 중 남한산성보다 매출액이 상위인 영화는 <명량>, <암살>, <해적: 바다로 간 산적>, <군함도>, <덕혜옹주>, <봉오동 전투>, <군도: 민란의 시대> 7편에 불과합니다. 6편(추석) vs 7편(비추석), 역사 장르의 영화가 추석 즈음에 개봉도 많이 하고 관객도 많이들 찾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장르 공식 및 관습에 충실한 권선징악 유의 '액션영화' 역시 추석 영화관 트렌드의 한 줄기. 10편 중 3편이 여기에 속했지요.(넓게는 '밀정'과 '안시성' 포함 5편) 이밖에 전작·원작의 성공에 힘입은 '후속작'들이 눈에 띈다는 점, 사극에 방점이 있다 보니 '한국영화'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합니다.
이들 키워드의 바탕으로는 명절이라는 시기 자체에 한국영화, 한국 역사에 이끌리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 아울러 남은 연휴를 편히 즐기고 싶은 마음에 보기 무난한 검증된 오락물로 향하는 관객이 많다는 것 정도를 들 수 있겠지요.
올해는 어떨까요? 추석 명절을 겨냥한 역사극은 없지만, 9월 7일에 개봉하는 <공조2: 인터내셔날>은 속편 액션(+코미디)이라는 추석 트렌드에 걸맞아 관심이 가는데요. 관객도 이에 호응해줄지, 지켜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