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난 TV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흑과 백으로만 구성된 답답한 공간과 평면TV보다도 더 평면스러운 인물들, 그리고 그 안에서 신물나도록 이어지는 동어반복의 잡설이 싫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속좁음 때문에 정말 좋은 드라마를 못보고 지나친 적도 꽤나 있을 거라 짐작된다.


아무튼, 드라마적 감수성이라고는 애당초 잃어버리고 사는 나에게도 여전히 감정선이 남아있음을 깨우쳐준 드라마 한 편이 있으니, 바로 어제 방송된 특집극 <내사랑 토람이>가 그것이다. 눈물을 바가지로 쏟으면서도 잔잔히 웃을 수 있는, 슬픔이 복받치되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아! 이 얼마만에 느껴보는 페이소스의 압박이던가. 뭘 보고 이렇게 울어본 건 스무 살 때 <제8요일>을 본 이 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내사랑 토람이>는 한 시각장애인과 그 안내견에 관한 이야기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던 전숙연씨(하희라씨)가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고 실의에 빠져 방황하다가, 안내견 토람이를 만나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 가족 내, 외의 갈등과 더불어 섬세하게 그려진다. 갑작스러운 장애에 대한 고통, 주변의 곱지 못한 시선 등으로 다뤄지던 초중반의 이야기는 전숙연씨가 어느 정도 자립을 일궈낸 이 후부터 토람이의 애절한 죽음으로 다가간다.

그렇다. <내사랑 토람이>는 눈물짜내기의 전형적인 내러티브를 고스란히 답습한다. 언뜻 보면 매우 평범하다.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내사랑 토람이>는 그 잔잔함의 대중성을 무기삼아 '보편'이라는 법칙 밑에서 실종되고 있는, '차이'를 바라보고 소통하는 기본예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를 비롯해)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정상'이라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 논리에 따라 신체, 정신적 장애인은 '장애'라는 이름표를 붙잡은 채 차별받고 동정 받고, 혹은 무시 받으며 시스템에 속하지 못하는 '비정상'이라는 지위를 부여받아야 한다. 차이의 관계는 어느 순간 우열을 매기는 힘의 도구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이는 비단 '장애'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닐 것이다.

'이성'이라는 개념 속에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는 뜻은 점점 실종되어 간다. '이성'이 단지 '비이성' 위에 군림한 채 안도하고 자위하며 수직상승적 욕구를 발현하는 데만 힘쓰는 자들의 입에 걸릴 때 그것은 종종 '폭력'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성적 사고를 해야할 직책에 있는 작자들 대다수가 스스로 우월하다는 미친 착각에 빠져 진정한 이성을 상실해버리고 있다는 얘기는 두말하면 입아픈 이 땅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다시 돌아와서, <내사랑 토람이>는 차이는 단지 불편함의 차이일 뿐이라고 역설한다. 그 차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같은 위치에서 눈높이를 맞출 때에 비로소 허물은 사라지고 소통의 단계로 접어들 수 있다고 드라마는 정말 '애절하게' 호소한다. 가족이란 바로 그 소통이 최초로 이루어져야 하는 집단이다. 그 구성원이 장애를 가지든, 개가 되든 감정이 통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가족드라마, 영화란 정형화된 구성원의 시시콜콜한 지위찾기, 사랑쟁취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차이는 차이일 뿐이다. 이 드라마가 얼어붙은 이 땅 위에 인간에 대한(혹은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일깨울 수 있는 작은 출발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나부터 시작해야겠지만 말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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