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즘 어찌어찌해서 경제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냥 용어 '숙지'하는 건 그렇다 쳐도, 분석하고 나름대로의 시각을 제시해야 하는 부분에 가서는 허우적거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이래저래 경제는 어렵다.

2. 내일(13일) <내사랑 토람이>가 재방송된다. 그냥 왠지 울고 싶으신 분, 개 좋아하시는 분(식용 열외)은 챙겨보셔도 큰 후회는 없을 듯하다(오후 1시 50분).

3. <몽상가들>.. 개봉하긴 하는 건가.. 눈 빠지겠다.

4. 올시즌 처음 간 농구장(폰으로 찍어 사진이 좀 흐리멍텅하다). TG응원했는데 42점차로 대패했다(역대 타이). 거의 이렇다. 내가 응원하는 팀은 왠만해선 진다. 그것도 아주 어이없게.. 지난 한국시리즈 때도 그랬고, 심지어 야구장 알바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월드컵 때 응원안간게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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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적 재미를 살려가다가 스스로 장르적 함정에 함몰되는 영화.

<큐브>처럼 '왜 내가 여기에 있는거지?'로 시작, 잔혹하게 당한 희생자들과 형사의 추적을 보여주고, 그것과 갇힌 자들의 과거가 맞물려 점점 더 의문이 증폭되는 순간 .. 엉뚱한 지점에 가서는 '내가 범인이다! 놀랬냐?'를 외치는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나 <디 아더스>가 뛰어난 이유는 결말로 인해 영화 내내 이어지던 내러티브가 붕괴되고 또 다른 내러티브가 창조되는, 구성력의 치밀함 때문이다. 대사를 비롯, 플롯들은 마지막에 이르러 얼굴을 바꾼 채 숨기고 있던 또 다른 의미들을 쏟아낸다. 정확한 계산력, 혹은 심리전의 승리다(조금 다르지만 <야곱의 사다리>의 결말도 뛰어나다).

반면 <쏘우>의 결말은 매우 뜬금 없으며, 결말로 인해 뒤바뀌는 상대적 상황이 애초에 설정되지 않았으므로 놀라고 싶어도 놀랄 수가 없다. 범인의 동기 또한 어이 없는 수준이다. '유주얼 서스펙트의 범인은 절름발이다. 브루스 윌리스는 귀신이다. 쏘우의 범인은~?'이라며 매너없는 마케팅으로써 궁금증을 유발하려 들지만, 정작 남는 건 범인의 썰렁한 커밍아웃 뿐.

어이없는 카피에 속았다고 탄식하는 순간.. 결국 반전은 이루어진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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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너무 게으른 놈이다.

남들은 바쁜 시간 쪼개서 매일, 혹은 이틀에 한번이라도 포스팅하는데 난 왜 이리 게으를까... 별로 하는 일도 없는 놈이...

<그때 그사람들>을 본지 어언 삼일이 지났다. 리뷰를 쓰다보니 글이 너무 허접하다. 세상에 이렇게 허접한 글은 본 적이 없다. 영화도 별로고 글쓰기도 싫다.. ㅅㅂㄹ..

생각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한다. 어느덧 안정이 필요한 나이에 왔나보다. 무언가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생각도 왔다갔다하고 당연히 글은 쓰레기통으로 갈 수 밖에...

누가 날 졸라게 때려줬음 좋겠다(...정말 때리러 오진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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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그레이드 된 공공의 적, 업그레이드 되지 못한 통쾌함


전편 <공공의 적>이 ‘재미있었던’ 이유로는 개성 넘치는 조연들의 걸쭉한 욕지거리나 에피소드들 속 자잘한 유머 등을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캐릭터와 캐릭터 간 충돌, 선 굵은 남성적 대립 구도가 갖는 흡입력을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공공의 적>의 강철중 형사(설경구)는 <투캅스>시리즈에 등장한 안성기, 박중훈, 김보성의 얼굴을 동시에 지닌 캐릭터다. 부패에 적당히 빠져있지만 정작 불의라 생각되는 것은 참지 못하며 성격 제어와 조직 섭리에 익숙하지 않은 다혈질이다. 또한 그는 “형이 오늘은 기분이 괜찮거든?”이라는 멘트로 동네 깡패들에게 묵직한 주먹을 선사하는, 서민적 우직스러움에 근거한 반영웅의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분노가 조규환(이성재)을 내려칠 때, 세련미와 도시적 이미지로 치장된 근친살해범은 서민적 정서에 의해 통렬한 최후를 맞는 셈이다. 관객의 카타르시스는 강철중의 주먹 끝에서 그 정점에 다다르며 거기에서 <공공의 적>은 매력을 발산한다. 영화는 강철중과 마찬가지로 거칠고 투박하지만 관객이 대리만족할 수 있는 지점을 명확하게 제시할 줄 안다.

<공공의 적>은 마초적 남성들의 갖가지 허영이 난무하던 조폭영화 계보 옆에 서서는 그것에 종지부를 찍는 영화다. 지겹도록 동어반복되던 조폭의 잡설과, 결투라는 내러티브가 갖는 이분법적 구도를 뭉뚱그려 관객 보편의 심리에 통쾌하게 화답하는 것, 그것이 강우석 감독이 의도한 전략이었다.


강우석 감독은 <공공의 적2>를 통해서는 사회 전반적인, 보다 ‘공공의 적’에 걸맞은 캐릭터를 창조하고자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병패인 정경유착을 그 소재로 채택한다. 따라서 강철중은 좌충우돌 형사에서 말쑥한 정장을 빼입은 꽤 유능한 검사로 업그레이드되어 돌아온다.

1편과 마찬가지로 강철중이라는 캐릭터가 갖는 힘은 강렬하다. 그는 여전히 악랄함에 분노할 줄 알며 자신의 신념에 모든 것을 걸 만큼 용기 또한 간직하고 있다. 외부 압력에 흔들리는 조직에 “나쁜놈 잡지 못하는 검사가 무슨 소용이냐”며 소신론을 설파, 주변인들의 각성을 끌어내기도 한다.

전편의 강철중은 여기까지다. 2편의 강철중은 강력한 주먹을 내세우지도, 화려한 미사어구가 동반된 걸쭉한 욕을 구사하지도 않는다. 호화롭게 펼쳐지는 동창회에 가서 ‘삼겹살에 소주’를 그리워하며 소시민적 대사를 읊기는 하지만 대한민국 검사의 직업적 윤리관을 줄곧 입에 담고 정의사회 구현에 온 몸을 내던지는 그는 어디까지나 ‘검사’ 강철중이다.

물론 좀 더 커다란, 배후가 든든한 공공의 적 한상우(정준호)와 대면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깡패를 후박하게 어루만지고 조규환에게 무자비한 주먹을 선사하던 형사 강철중과는 달리 검사 강철중은 그리 속 시원한 결정타를 날려주지는 못한다.

이는 강우석 감독은 대리만족보다는 수년간 뉴스를 장식해온 보다 강력한 공공의 적, 정경유착의 비리를 법이라는 이름으로 접근하는 데 주목하기 때문이다. 나사 몇 개 빠진 듯한 동네 형사의 좌충우돌 활약상 대신 국민이 바라마지 않는 소신 있는 검사 강철중,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이 전면에 등장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전략인 셈이다.


영화는 1편과 마찬가지로 그리 매끈하지는 못하다. 플롯의 개연성과 응집력은 떨어지며, 평면적이고 전형적인 캐릭터들과 그들의 관습적인 대사가 태연하게 화면을 수놓는다. 전편이 마치 잡초에서 생명력을 발견하듯 그 세련되지 못함을, 작위적인 인물 설정을 관객의 분노를 결집하는 에너지로 사용했다면 <공공의 적2>는 정제되지 못한 플롯들을 주로 ‘바람직한 검사상’을 제시하는 차원에서 활용한다.

따라서 길에 담배꽁초 버리지 말라고 웃으며 충고하는 환경미화원 할아버지를 차로 받는 것도 모자라 “천하면 분수라도 알아야지, 영감”이라며 패륜적 멘트마저 남겨 놓는, 그 천인공노할 면상에 사정없는 펀치를 날려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애초에 요원한 것이 된다. <공공의 적2>는 전편처럼 강력한 직격탄 한방은 날리지 못하지만 어쨌든 ‘이 시대 대중이 원하는 검사’를 그려내는 데는 성공한다.

만약 극장문을 나서면서도 개운한 기분을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기대했던 통쾌한 한방 대신 저열한 거대자본 시스템을 앞에 두고도 껍데기만 벗기고 마는, 밋밋한 마무리를 구경하고 온 탓일 것이다. 영화보다도 몇 배는 시시한 현실 속 검사님들의 초라한 활약상이 슬쩍 오버랩될 때 느껴지는 씁쓸함은 그 다음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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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역사가에게 맡기고, 민생안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께서 얼마전 드러난 한일협정의 실체를 놓고 변명이라고 해댄 말이다. 물론 일부는 맞는 얘기다. 역사가는 어디까지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니까. 하지만 적어도... 최소한... 대한민국에서만큼은 역사가에게만 그 짐을 맡긴 채 마음 편하게 노닐고 있을 틈이 없다.

어디 한번 둘러보자. 굴욕적인 슬픈 과거, 힘없는 자들이 고스란히 떠맡았던 恨의 울분이 담보되었던 한일야합. 그 중심에 있었던 JP는 "뭐 지나간 일가지고 그러나. 때가 되면 말할 것"이라며 여전히 벽에 똥칠하는 소리나 해대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언제 얘기하겠다는 건지, 자신의 나이는 새기고 다니는지 궁금하다. 한쪽에서는 미친 손녀를 둔 가련한 前대통령 전대가리가 "29만원 밖에 없어요."라고 뇌까리며 유유자적 골프를 즐기고 있다. 그것도 그가 학살한 영혼들의 분노가 채 가시지 않은 이 땅덩어리 위에서 말이다. 피가 거꾸로 솟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잘못된 점을 되짚어 보겠다는 의지는 경제 제일주의에 가로 막혀 그 활로를 상실하고 있다.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예전일 신경 쓸 여지가 어디 있느냐는 논리다. 첫 단추 잘못 낀 수준이 아닌, 아예 옷을 뒤집어 입은 채 출발했던 뒤틀린 역사가 현재진행 중인 셈이다. 옷 똑바로 입으라고 충고하는 사람들을 더러운 총과 펜으로 난도질해대던 무리들은 여전히 경제와 국익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뒤에 숨어 그 썩은 숨을 이어가는 실정이다. 그들의 머릿속에 서민의 고통을 헤아릴 만한 뇌가 들어 있을 리는 만무하다. 국민의 분노가 편가르기 전략틀 안에서 요리조리 끼워 맞춰지는 도구로 전락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박정희의 망령은 아직도 광화문에 새겨져 웃음 짓고, 국가보안법은 반박할 가치도 없는 이분법의 잣대로 존재 당위성을 부여받는다.

비극의 주최자들이 반성은커녕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고 '역사는 역사가에게'라며 과오를 단순명쾌하게 비껴 나가는 것이 현실이다. 이 즈음되면 "적들의 심장에 피의 불벼락을 내리자"라는, 10년 동안 잊고 살았던 노래의 한 구절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래도 이 정도라도 살게 된 게 누구 덕이냐?'라는 진부한 반문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뼛속까지 가난뱅이로 살아온지라 그 혜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알지도 못하거니와 누군가의 피와 희생을 대가로 쌓아온 富라면 그 덕을 누릴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 게다가 그 곪아 터진 환부를 꿰매느라 정신없는 지금이 아닌가.

우리는 근현대사가 남긴 숙제를 여전히 풀지 못하고 있다. 지난 100년의 역사는 분명 역사책 속에서 밑줄 그어지고 끝날 만한 성격의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사실의 일부만이 교과서 속 계보학으로, 연대기표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 틈에 숨어있는 진실을 위해 가능한 한 다양한 시각으로, 다양한 면면에서, 다양한 형태로 과거를 더듬어야 한다. 시간을 되돌려 작아서 들리지 않았던, 또는 의도적으로 듣지 않았던 그 목소리, 순간들 하나하나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 지나쳐온 시간, 그리고 그 안에 갇혀버린 공간들이 영화, 연극, 문학, 역사학 등 보다 다양한 분야를 통해 재현되기를 바란다. 그것들이 한국 현대사를 고통스럽게 관통해온 영혼들을 위한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한다.

옷을 바로 입고자하는 용기가 진실로 필요한 때다. 눈물은 나눠서 흘릴수록 덜 슬프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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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룡이 대중적인 인지도를 구가한 반면, 주성치는 마니아가 아니고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기가 막힌, 가혹한 상상력의 극단을 스크린에 투영해왔다. 그것도 매우 태연하고 뻔뻔한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과장과 막무가내의 패러디, 자기학대가 뒤섞인 그만의 독특한 농담은 일명 주성치사단을 형성하며 90년대 홍콩영화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쿵푸 허슬>은 보다 보편적인 웃음을 표방한 영화다. 솔직히 영화를 보기 전에는 걱정이 조금 앞섰다. 주성치 고유의 색깔이 많이 사라진 건 아닐까... 하지만 그것은 기우임이 곧 드러났다. 극단적인 뻔뻔함은 모습을 감췄지만, 그래도 주성치는 주성치였다.

패러디는 유쾌하고 캐릭터들은 개성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 서로 절묘하게 호흡한다. 테크놀로지는 <소림축구>에 이어 상상력에 생명을 불어 넣으며 그 임무를 200% 수행한다. 예전처럼 과잉으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농담들은 여전히 폭발적이다. 그리고 그 모든 플롯은 주성치라는 희극지왕의 이름 아래 하나의 정점으로 달려간다. 그래서 관객은 즐거워진다.

나는 "그 영화 재미있냐?"라는 질문을 그다지 반기는 입장은 아니지만, 이 영화에 대해서 만큼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쿵푸 허슬>은 정말 재미있는 영화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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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 스펙터클과 드라마의 전략적 결합


홍콩영화의 기나긴 침체에도 불구하고 세계시장 안에서 자신의 역영을 꾸준히 지켜내던 성룡이 다시 한번 돌아왔다. 홍콩영화가 무차별적 자기복제로 황금기의 위력을 서서히 잃어가던 그 때에도 성룡은 고유한 영화 스타일을 흔들림 없이 고수, 개성 넘치는 목록으로 필모그래피를 장식해온 배우다.

분명히 장르영화를 표방하지만 그의 영화는 성룡표로 따로 불리울 만큼 개성 넘치는 활용들로 가득하다. 성룡은 휴머니즘과 권선징악의 기치 아래 기발한 세트 안에서 벌어지는 위험천만하면서도 재기발랄한 아크로바틱 쿵푸를 트레이드마크 삼아 코믹액션에 관한한 독보적인 지위를 획득해왔다.


재치 넘치는 액션과 코미디의 적절한 교차점을 달리던 성룡은 95년 <홍번구>로 박스오피스 1위를 점령하며 할리우드에 성공적으로 입성하게 된다. 이 후에는 피부색이 다른 파트너로 버디무비의 효과를 노리거나 테크놀로지와 쿵푸를 결합하는 등 보다 다양한 세계 지향적 전략들을 잇달아 선보인다. 그 과정에서 성룡은 역시 세계적 영화인이라는 찬사와 관습적 내러티브나 테크놀로지의 영향력에 가려 진부해졌다는 평가를 번갈아가며 들어왔다.

성룡은 간헐적으로 잃어버렸던 자신의 색채를 <뉴 폴리스 스토리>에서 재확인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장르와의 결합마저 기획한다. 그 작업에 가장 성룡적인 시리즈 ‘폴리스 스토리’가 표방되었음은 당연한 전략.

전작 <80일간의 세계일주>라는 다국적 프로젝트에서 슬랩스틱과 캐릭터의 물량공세에 의존하는 바람에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 성룡은, <뉴 폴리스 스토리>에서는 스케일 큰 액션에 어느새 쉰에 들어선 나이를 보조하려는 듯 드라마적 요소를 결합, 영화폭의 확장을 꾀한다. 또한 자신을 보좌할 역할로 사정봉, 오언조 등 차세대 배우들을 끌어들이고 온라인 게임, 익스트림 스포츠 같은 젊음 지향적 코드를 도입하면서 화려함의 배가를 노리기도 한다.


<천장지구>의 진목승 감독과 함께 작업한 <뉴 폴리스 스토리>는 기본적으로는 복수의 내러티브로 구성된다. 성룡은 다시 한번 잘나가는 모범경찰로 돌아오지만 전작들과 달리 이번에는 결코 코믹하고 순탄한 여정을 밟지 못한다.

진국영(성룡)은 두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린 은행강도 5인조를 체포하기 위해 그들의 아지트로 잠입하지만, 부하들은 전멸당하고 자신은 ‘Time to play'를 외치며 범죄와 게임을 동일시하는 5인조의 놀잇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 사건에 대한 죄책감과 비탄에 잠겨 술로 1년을 허비해온 진국영은 새로운 파트너 정소봉(사정봉)의 도움과 약혼녀 가이(양채니)와의 대면을 통해 절망에서 조금씩 깨어난다. 5인조의 정체를 조금씩 알아가는 가운데 진국영은 그들과 다시금 마주할 용기를 서서히 찾아간다.

부하를 모두 잃어버린 슬픔과 고통 때문에 술에 절고 길에 토악질하며 쓰러지는 ‘고뇌하는 성룡’은, 조금 작위적이긴 하지만, 그의 나약한 내면을 오랜만에 엿볼 수 있는 드라마적 장치다. 그는 방한 후 가졌던 기자회견에서 “관객들이 우는 모습에서 보다 큰 성취감을 느낀다”며 앞으로도 내면연기에 적잖은 정성을 기울일 것임을 고백하기도 했다.

성룡의 진지함을 중심에 배치한 영화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황지강 감독과 호흡을 맞춘 93년 작품 <중안조>에서 성룡의 표정은 진지함을 넘어 슬픔, 비장, 분노로 가득하다. 홍콩, 대만, 중국을 뒤흔든 왕일비 사건을 영화로 담은 <중안조>는 분노한 성룡과 타락한 경찰의 대치구도 안에 하드 보일드적 문법을 삽입, 홍콩의 어두운 자화상을 거칠게 투영해냈다. 성룡은 <중안조>를 통해 배우로서의 필요조건을 충분히 갖추었음을 이미 증명한 셈이다.


<뉴 폴리스 스토리>의 성룡도 연기 자체로는 나무랄 데 없는 활약을 펼친다. 특유의 장난기 다분한 웃음은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과도한 엄숙에 빠지지도 않는 감정조절은 그를 ‘액션뿐인 배우’의 목록에서 지워낼 만한 효과는 분명히 나타낸다.

다만 감정의 분위기가 서로 다른, 각종 에피소드들이 뚜렷한 호흡을 찾지 못한 채 여기저기서 균열된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는 플롯의 허점 때문에 성룡의 감정선 또한 거친 호흡으로 연결된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드라마트루기 상의 약점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뉴 폴리스 스토리>는 성룡표 오락영화로서 꽤 만족할 만한 볼거리로 채워져 있다. 성룡은 홍콩 컨벤션 센터 벽면을 따라 수직하강하거나 묘기 같은 오타바이 추격전을 펼치며 나이에 맞지 않게 여전히 아찔한 스펙터클에 관한한 정점에 서있음을 과시한다.

이 같은 볼거리에는 CG로부터 창조된 스타일리쉬한 화려함에서 찾기 힘든, 사람이 액션의 중심에 자리 잡을 때 만끽할 수 있는 아날로그적 긴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성룡은 악랄하고 막되먹은 5인조에게마저 회개할 시간을 부여해준다. 이 인위적 감동 유발 장치를 휴머니즘의 연장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역시 성룡표를 볼 때만 가질 수 있는 너그러움 때문일 것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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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난 TV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흑과 백으로만 구성된 답답한 공간과 평면TV보다도 더 평면스러운 인물들, 그리고 그 안에서 신물나도록 이어지는 동어반복의 잡설이 싫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속좁음 때문에 정말 좋은 드라마를 못보고 지나친 적도 꽤나 있을 거라 짐작된다.


아무튼, 드라마적 감수성이라고는 애당초 잃어버리고 사는 나에게도 여전히 감정선이 남아있음을 깨우쳐준 드라마 한 편이 있으니, 바로 어제 방송된 특집극 <내사랑 토람이>가 그것이다. 눈물을 바가지로 쏟으면서도 잔잔히 웃을 수 있는, 슬픔이 복받치되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아! 이 얼마만에 느껴보는 페이소스의 압박이던가. 뭘 보고 이렇게 울어본 건 스무 살 때 <제8요일>을 본 이 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내사랑 토람이>는 한 시각장애인과 그 안내견에 관한 이야기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던 전숙연씨(하희라씨)가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고 실의에 빠져 방황하다가, 안내견 토람이를 만나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 가족 내, 외의 갈등과 더불어 섬세하게 그려진다. 갑작스러운 장애에 대한 고통, 주변의 곱지 못한 시선 등으로 다뤄지던 초중반의 이야기는 전숙연씨가 어느 정도 자립을 일궈낸 이 후부터 토람이의 애절한 죽음으로 다가간다.

그렇다. <내사랑 토람이>는 눈물짜내기의 전형적인 내러티브를 고스란히 답습한다. 언뜻 보면 매우 평범하다.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내사랑 토람이>는 그 잔잔함의 대중성을 무기삼아 '보편'이라는 법칙 밑에서 실종되고 있는, '차이'를 바라보고 소통하는 기본예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를 비롯해)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정상'이라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 논리에 따라 신체, 정신적 장애인은 '장애'라는 이름표를 붙잡은 채 차별받고 동정 받고, 혹은 무시 받으며 시스템에 속하지 못하는 '비정상'이라는 지위를 부여받아야 한다. 차이의 관계는 어느 순간 우열을 매기는 힘의 도구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이는 비단 '장애'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닐 것이다.

'이성'이라는 개념 속에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는 뜻은 점점 실종되어 간다. '이성'이 단지 '비이성' 위에 군림한 채 안도하고 자위하며 수직상승적 욕구를 발현하는 데만 힘쓰는 자들의 입에 걸릴 때 그것은 종종 '폭력'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성적 사고를 해야할 직책에 있는 작자들 대다수가 스스로 우월하다는 미친 착각에 빠져 진정한 이성을 상실해버리고 있다는 얘기는 두말하면 입아픈 이 땅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다시 돌아와서, <내사랑 토람이>는 차이는 단지 불편함의 차이일 뿐이라고 역설한다. 그 차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같은 위치에서 눈높이를 맞출 때에 비로소 허물은 사라지고 소통의 단계로 접어들 수 있다고 드라마는 정말 '애절하게' 호소한다. 가족이란 바로 그 소통이 최초로 이루어져야 하는 집단이다. 그 구성원이 장애를 가지든, 개가 되든 감정이 통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가족드라마, 영화란 정형화된 구성원의 시시콜콜한 지위찾기, 사랑쟁취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차이는 차이일 뿐이다. 이 드라마가 얼어붙은 이 땅 위에 인간에 대한(혹은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일깨울 수 있는 작은 출발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나부터 시작해야겠지만 말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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