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영화평은 여기저기 곳곳에서 가장 자주 만날 수 있는 글 중 하나가 됐다. 영화전문지에서부터 개인 블로그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영화 관련 글이 차고 넘치는 시대. 하지만 그런 각양각색에도 불구하고 글이 촉발되는 시기에 관한 한, 모든 영화평은 같은 대답을 지닌다. 요컨대 영화평의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영화’인 것. 보다 정확한 시제로 말하자면 ‘완료된 영화’다. 쓰는 이의 입장에서 완료된 영화는, 촬영과 편집의 종료가 아니라 ‘보고 듣는 것’까지가 끝났음을 뜻할 터. 그러니까 모든 영화평은, 극장을 나선 누군가가 어떤 할 말을 쥐게 됐을 때 마침내 시작하는 것이다.

그 할말이 뱉어지는 곳은 어디까지나 극장 밖, 다름 아닌 현실이다. 현실에서 영화 이미지로,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여정. 그래서 나는 ‘현실을 향할 줄 아는’ 글을 좋은 영화평이라 생각한다(물론 그럴 여지를 영화 자체가 잠재한 경우에 한해서다. 비판이든지 옹호든지 그래야 가능하다). 현실을 향할 줄 안다는 말은, 영화를 경유해 도착한 실재 세계 속 어떤 지점과 관련해 영화평이 나름의 구조를 세울 수 있음을 뜻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구조를 세우다’가 정교한 조직체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와 나를 둘러싼 현실을 보다 잘 이해하고자 세계 구석구석을 탐색하고 더듬어보는 노력에 가깝다. 요컨대 영화평 쓰기는 영화가 건져낸 ‘지금 여기’를 ‘내가 어떻게 규정지을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내가 체계를 만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만든 체계의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는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말을 떠올려보자. 영화평을 쓰고 있는 당신. 당신은 지금 당신의 소중한 체계를 만드는 한 과정 중에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현실과 유사한 이미지를 통해 프레임 안과 밖의 대화를 유도하는 매체다. 유도된 그 대화는 극장 밖으로 나와 다양하게 변주되고 또 여러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말하자면 영화평은 그 흐름들을 포착하고 보존하는, 개인의 언어인 셈이다. 한 영화가 어떤 담론으로 나아갈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복합적인 텍스트성을 지닌다면, 즉 ‘살아있는 몸체’로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영화평의 사유 능력과 폭넓음에 대한 믿음이 애초에 전제됐기 때문일 것이다. 재생이 완료된 영화가 세상 밖에서도 살아 숨쉬기 위해서는, 영화를 둘러싼 개별 언어들의 그런 전방위 활약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영화평은, 영화의 완료에서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그 지점에서 영화가 꼭 멈춰야 하는 것은 아님을 환기시켜주는 일종의 각성제 같은 것이다. 이미지의 지속 가능성이 제한될 때 나타나는 부작용을 영화평은 (거의 유일하게) 빗겨갈 줄 안다. 상영이 끝남과 동시에 영화 이미지 또한 종료되는 것으로만 인식될 때, 그때 영화가 남길 수 있는 흔적은 사실상 몇몇 숫자들에 불과하다. 제작비와 관객 머릿수와 순수익, 혹은 영화나 배우의 뒷이야기 같은 것. 물론 영화가 산업의 틀 안에서 발생하고 소비된다는 점에서, 숫자들에 담긴 의미 역시 가벼이 넘겨볼 성질의 것은 아닐 테다. 영화에 따라서 그것들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나 척도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수치나 수식은 어디까지나 속도전의 양상에나 어울리는 지표다. 그 지표들이 지상목표가 되는 경우, 영화들이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현상은 꽤나 빈빈한 일이 된다. 소비를 촉진하는 시간 속에서는 영화자본이 내리는 판단이 영화의 등장과 퇴장에 대해 가장 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나쁠 이유는 없다. 문제는 그 속도 때문에 영화가 먹고사는 것과는 별개인 시공간으로 여겨질 때, 또한 그것이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때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아니더라도, ‘어떻게 먹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 영화는 여전히 고민하고 질문한다. 그 질문들을 극장 안에 그냥 남겨둘 참인가? 좋은 영화평을 쓰고 또 좋은 영화평을 찾아 읽고 싶은 욕망은 바로 그런 근심에서 출발한다. 영화평이야말로 영화의 지속시간을 무한대로 늘릴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인 반응이자, 사유의 통로를 지나온 대답이며, 그것의 보존과 공유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자, 지금 여기서 영화를 다시 써보자. 몇몇 영화는 당신이 꺼내고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놓여있을지도 모른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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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잠시만 주변 풍경으로 눈과 귀를 돌려 주의를 기울여보자. 각종 사물과 소리가 여기저기서 깨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지는 않는가. 당신 또는 나의 ‘지금 여기’에 있는 것들, 이를테면 하늘과 땅, 그리고 그 둘을 이을 듯 큰 키를 위압적으로 자랑하는 건물들, 건물들 구석구석을 누비는 하지만 방향을 좇기에 난감할 정도로 얽히고설킨 전깃줄과, 전깃줄 아래를 오가는 다양한 표정의 얼굴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 사이로 분주하게 흘러나오는 도시의 소리 같은 것. 무엇을 보고 듣고 또 느끼는지는 각자 다를 테지만, 보이고 들리는 크고 작은 것들로 세상이 이미 꽉 차있음은 명백해 보인다. 하기야 지구라는 땅덩이 자체가, 만물과 만물 사이를 오가는 무수한 감각 반응들이 한데 뭉쳐진 덩어리 아니겠는가.

우리 주변 곳곳에는 그렇게, 셀 수 없이 다양한 형태의 감각/지각 가능 대상들이 놓여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한 가지 사실은, 또 다른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려는 사람들로 극장은 여전히 붐빈다는 점이다. 소비를 유혹하는 메커니즘으로서의 멀티플렉스를 감안하더라도, 영화라는 것의 매력이 ‘아직까지는’ 그 유혹의 기본축일 터. 도대체 영화가 뭐길래! 우리를 그토록 끌어당기는가. 우리는 영화 안에서 무엇을 ‘보는가.’


영화 한 편은 일단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실재 세계에서 건져낸 가상의 세계다. 여기서 ‘가상’이라 함은 영화 속 시공간이 우리가 속한 현실과 닮았으되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님을, ‘세계’라 함은 그 시공간이 여러 가지 플롯으로 엮여 물리적인 처음과 끝을 지닌 하나의 덩어리가 됨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를 직사각의 평면 틀에 재생되는, 유사-현실의 이미지 체계라 일단 정의 내릴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화의 매력이 그저 ‘현실과 닮았거나 다르거나’ 하는 차원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실재 세계에서 건져낸 가상의 세계’라는 문구에서 남은 부분, 그러니까 ‘실재 세계에서 건져낸’이야말로, 영화의 정체에 관한 한 이곳에 등장하는 모든 언어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영화적 시공간을 건지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해당 영화의 존재 이유에 의해 진행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재 세계에서 건져진 영화 이미지들은 곧 ‘이 영화가 왜 하필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영화 스스로의 대답들인 셈이다(영화의 윤리적 태도가 드러나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세상 곳곳에 수없이 놓인 유․무형의 감각/지각 가능 대상들 중 무엇으로써 영화를 메울지 결정하는 것. 그 과정은 ‘대상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의 증명을 위한 것이 되기도 하겠지만, 대상들에 깃든 문제적인 ‘틈’을 찾기 위한 고민을 동반하기도 한다. 전자와 달리 후자의 경우 그 결과로서의 영화 이미지는 단지 유사-현실 체계로만 부를 수 없는, 현실에 대해 다른 시선을 지닌 무언가가 된다.

그 시선이 가리키는 곳은 두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볼 필요가 있는 대상, 그래서 ‘지금 여기서’ 다시금 써봄직한 현실이다. 카메라가 부조리나 모호함을 끄집어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담아야 할지 고민하며 지켜보던 현실 속 시공간을, 그 노력의 산물인 이미지가 다시금 바라보는 것이다. 진짜 현실 옆에 나란히 앉아 진짜를 향해 웃고 울고 화낼 줄 아는 영화는, 바로 그렇게 해서 등장한다. 예컨대 언어와 체제로 정착된 모든 질서를 빗겨가는 조도로프스키의 탐구적 이미지나, 상징계 바깥을 살아가는 사람들 또는 그들의 규정되지 않은 삶을 긍정하는 봉준호의 희비극 같은, 사유-현실 체계로서의 영화들. 우리가 속한 ‘지금 여기’에 보내는, 어떤 간곡한 ‘신호’ 같은 것들.


‘영화를 보다’라는 행위는 네모난 틀 안에 재생되는 이미지와 단지 맞닥뜨렸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어떤 사람과 사물, 그리고 그 사이로 흐르는 심상들과 조우한다. 그것들은 모두 영화의 윤리적인 태도가 선택하고 기록하고 구성한, 현실로부터의 상상이나 흔적이다. 현실에서 무언가를 건져내고 그 건져낸 것들을 현실에서 재생해야 하는 운명을, 영화는 타고난 셈이다. 이미지가 빛에 몸을 맡긴 채 세상을 향해 흐르는 현장은, 따라서 프레임 안과 밖이 대화를 나누도록 초대된 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대화를 엿보고 엿들을 수 있다는 쾌감! 그 은밀한 쾌감이야말로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거니와 영화를 본다는 것의 본질일 테다. 실재와는 조금 다른 곳에 서서, 다른 눈을 가지고, 다른 각도와 초점으로 세상과 마주하고픈 욕망이 그 덕에 충족되니 말이다. 그 욕망 때문에 우리는 지긋지긋한 현실로부터 탈출할 수 있으며, 때로는 지긋지긋한 현실과 다시 대면하기도 해야 한다. 어느 쪽이든 (극장을 나온 지 한참이 지난 후) 현실의 감각/지각 대상들 사이로 문득문득 지나가는 영화 이미지를 만나는 것은 반가운 경험이다. 프레임 안팎을 오가며 세상을 풍부하게 해준 그 대화가 여전히 내 귓가에 맴돌고 있음을 확인케 되니 말이다. 지극히 사적인 경험이지만, 그 자체로 충분히 즐겁지 아니한가.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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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은 군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영화를 가장 '적게' 본 해가 아닐까 싶네요. 베스트 10이 도저히 채워지지 않아 일단 9편을 꼽아봤습니다(국내 개봉작, 순위는 무작위). 남은 한 자리를 채울 만한 영화를 한 달 안에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1. 콘스탄트 가드너

2. 타임 투 리브

3. 괴물

4. 라스트 데이즈

5. 가족의 탄생

6. 천하장사 마돈나

7. 사이에서

8.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9. 폭력의 역사(개봉작은 아니지만, 일단...)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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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꿈꾸는 가족, 그리고 소통


사각의 링이 있다. 또한 스승과 제자가 있다. 뻔한 설정이다. 진부한 이야기가 그려지지 않는가. 밑바닥까지 떨어진 제자가 역시 좌절한 경험이 있는 스승을 만나 권투에 눈을 뜨고 인생도 배워나간다. 그리고 링에서 투혼을 불사른다. 물론 중간에 갈등, 실패도 간간히 섞여 있고. 적당한 감동의 스포츠 드라마 한 편이 나올 듯하다.

하지만 감독이 누군가에 따라 결과는 바뀌는 것.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저 그런 감동 일대기를 허락할 만큼 한가롭게 필모그래피를 채워온 사람이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삶의 본질을 고민해왔고 그 안에는 늘 그늘진 곳을 향한 시선이 들어있었다. 일흔 다섯에 접어든 노(老)감독은 평범한 재료에서도 인생의 진국을 걸쭉하게 뽑아낼 줄 안다.

그는 전작 <미스틱 리버>를 통해 불확실한 세상에 던져진, 소통하지 못하는 개인들을 그려냈다. 미처 꿰매지 못한 치명적 상처는 세월을 머금고 점점 곪아 영혼마저 잠식하는 법. 치유의 기능을 상실한 인간관계는 친구, 가족이라는 이름표만을 위태롭게 붙잡은 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미스틱 강과 더불어 유유히 흘러갔다. <미스틱 리버>가 그의 최고 걸작이라 불리는 것이 못마땅했을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2년이 채 안 되어 최고작을 다시 한번 갱신한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모호한 세계, 냉혹한 운명에 갇힌 영혼들에게 작은 해독제를 선사하는 영화다. 이를 위해 노감독은 그다지 새로운 소잿거리가 아닌 권투를 타인과 소통하는 데 서투른 자들을 교감시키기 위한 모티브로 활용한다. 링에 대한 열정과 공감대가 서로의 빈 자리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관계가 더욱 공고해지는 때는 그들이 온 정성을 쏟았던 링에 오르지 않는 시점에 이르러서다. 따라서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링에서 모든 것을 뿜어내는 <록키>류와 같은 출발선에 서지만 전혀 다른 지점을 지향하는 영화가 된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궁극적으로 내딛는 곳, 서로에게 빈 자리를 내주었던 영혼들이 꿈꾸는 곳은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다. 불확실한 세계를 견디게 해 줄 버팀목으로서 가족의 의미와 역할을 꾸준하게 탐구해온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번에는 유사 부녀 관계라는 내러티브를 활용, 그 고민을 이어간다.

그리고 그는 회한으로 가득한 눈빛을 지닌, 상처 입은 아버지 프랭키로 분한다. 프랭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가족과 단절되어 있다. 딸에게 꾸준히 쓰는 편지는 어김없이 반송되어 귀갓길에 쓸쓸함만 더할 뿐이다.


매기(힐러리 스웽크)의 가족들은 저열한 속물적 근성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의 인간관계에는 정작 인간에 대한 고려가 없다. 심지어 매기의 어머니는 상처 입은 혈육에게서조차 돈을 갈취할 궁리를 한다. 부재한 아버지를 향한 매기의 그리움은 가족과 정서적으로 교류하지 못하는 현실을 잊기 위한 자기최면일 뿐이다.

가족구조의 해체, 단절로 세상에 홀로 남겨진 프랭키와 매기는 권투라는 열정을 통해, 그리고 서로의 빈 자리를 안타깝게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연대를 맺어간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 고귀한 만남을 향한 예찬은 자연스레 진정한 가족의 정의, 사람 간 교감의 본질에 대한 해답으로 연결된다.

노감독은 인간을 연결시키는 첫 고리가 무엇이든간에 정신적 교감, 사람 자체를 읽으려는 노력이 관계의 핵심으로 자리 잡을 때 인생의 동반자로서 진정한 가족의 의미는 완성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삶이라는 치열한 무대에서 버틸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되는 것이다.

후반부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절제의 미학에 관한 한 최고의 경지로 내닫는다. 영화는 울부짖어야 마땅한 곳에 멈춰선 채 감정을 터뜨리지 않는다. 아니,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한다. 프랭키와 매기에게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 상처 받아 쓰러진 영혼들은 간신히 발견했던 소중한 만남을 영원히 기억하려 한다. 추억을 새기려는 간절한 마음은 운명의 비정함을 탓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두 사람을 연결해주는 보이지 않는 끈 ‘모쿠슈라’의 의미가 프랭키의 입에서 나직하게 새어나올 때, 매기가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을 지어보일 때, 그들의 연대는 드디어 깊은 울림에 도달한다. 절제되고 응축되었던 슬픈 감정이, 인간이 소통하면서 엮어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페이소스로 승화되는 기적적 순간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모든 것을 전달하는 데 아무런 수사도 쓰지 않는다.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이야기로 전달하는 법. 그는 정통 드라마의 묵직한 힘과 평범하지만 생명력 넘치는 캐릭터만으로 갖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지점, 슬픈 영혼들의 정신이 진정으로 소통하는 그곳으로 차분하게 달려간다. 물론 모건 프리먼의 삶을 관조할 줄 아는 내레이션과 힐러리 스웽크의 명연기에 그 공을 어느 정도 떼 주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카메라는 희미한 창문 너머로 프랭키를 비춘다. 그는 여전히 모호한 세상에 던져진 외롭고 쓸쓸한 노인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꿈꿀 수 있다.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씁쓸하게,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퍼펙트 월드’를 꿈꾼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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