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으며, 또 슬펐던, 2008년도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008 영화 베스트 10을 꼽고 20자평도 곁들여 봤습니다(국내 상영작, 가나다 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세상만사 어차피 욕망과 욕망의 충돌. 가장 무서운 건 이성적인 척하는 비이성.


<다크 나이트> 희대의 캐릭터 탄생. 웃으면서 울고 파괴하면서 창조한다.


<렛 미 인> 소년은 어떻게 소녀를 위해 살인을 하게 됐는가. 일종의 프리퀄. 최소한 순수하지는 않다.


<미스트>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법. 공포의 진짜 창조자는 늘 인간.


<스위니 토드> 모든 걸 잃어버린 한 남자, 모두가 죽어야 끝날 노래를 부르다.


<스턱> 간결하고도 명쾌한, 인간 먹이 피라미드의 작동 원리.


<영화는 영화다> 현실을 무대로 살인을 연기하는 기괴한 엔딩 시퀀스는 압권!


<월-E> 2008년 스페이스 ‘러브 오디세이’


<이스턴 프라미스> 유아적인 자들이 젠체할 때 나타나는 비극. 인류의 여전한 오류.


<클로버필드>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이름의 롤러코스터. 공포보다는 현기증.



이 중 올해의 영화 단 한 편을 꼽아보라면 <이스턴 프라미스>로 하겠습니다. 전작 <폭력의 역사>가 아버지의 액션에 더 이상 열광할 수 없는 이유였다면, <이스턴 프라미스>는 그 액션이 어떻게 작동하고 또 유전되는지에 관한 탐구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남자들의 계보’에서 누군가가 웃음의 코드를 주구장창 우려내는 동안, 크로넨버그는 이런 작품을 결국 내놓고 말았습니다. 뭐, 다른 영화들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어떻게 소비시킬 것인가’와 ‘어떻게 읽힐 것인가’라는, 고민의 차이겠죠.


한편, 저의 2008년 최악의 영화는 <고사: 피의 중간고사>와 <울학교 이티> 정도입니다. 문제 제기를 해놓고는 결국 엉뚱한 짓만 해대는, 제가 가장 싫어하는 유의 영화들이거든요. 감당할 생각이 없다면, 애초에 그 지점으로 영화를 끌어다 놓지 않는 게 마땅하다고 봅니다. ⓒ erazerh



2007년 영화 베스트 10

2006년 영화 베스트 10

2005년 영화 베스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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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내부의 수직적인 질서가 굳건해야 한다고, 종종 믿긴다. 이 믿음이 강하게 작용할수록 구성원 간 소통이 일방향 일색으로 흐를 가능성은 더 크다. 창조적 사고 따위를 주고받는 것이 흥미로울 리 만무하다. 적자생존. 논의할 줄 아는 사람은 떠나고, 명령을 전달하거나 수행하는 데 충실한 기계적인 개체만이 남겠지.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을 그 안에서 찾는 것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될 테고.

이 즈음 되면, 갈 길을 잃은 채 제 몸집만 불리고 있는 욕망 덩어리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시스템은 이 난폭한 녀석을 낳았지만, 방관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자식을 부정하는 순간 어미도 무너지니까. 그래서 동원되는 것이 '은폐'이고 '위장'이다. 시스템은 굳게 믿는다. 그것만이 메스를 대지 않고도 내 몸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공포의 재생산'은 그 중 가장 효과적이고 유서 깊은 정책이다. 임의의 울타리를 치고 그 바깥 존재들에 '공포'라는 혐의를 씌움으로써, 현재 시스템의 필연성을 역설하는 식이다. 욕망이 선(善)의 실현을 위한 정신으로 포장되고, '다름'이 '우열'로 치환되는 일은 그렇게 해서 벌어진다. 시스템의 생존기는, 종종 이토록 악랄하다.

요컨대 울타리는 늘 임의로 쳐지기 마련이다. 내가 그 바깥에 있는지 안에 있는지 헤아리는 것은 일종의 코미디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내 위치가 아니라 태도다. 이를테면 울타리의 폭력성을 감지하려는, 그래서 시스템의 불투명성을 늘 의심할 줄 아는 태도. 미국의 국가적 폭력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가에 관한 다큐멘터리 <택시 투 더 다크 사이드>는 바로 그 태도의 일환이다. 많은 부조리한 시스템들이 미 국방 시스템을 표본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꽤나 의미심장하다. 울타리에 동의하고 그 안에 속하는 데 만족하는 자체로 당신은 괴물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는 의미. ⓒ erazerh


덧, 대한민국의 비극. 그 같은 시도가 불온할 뿐만 아니라 피곤하다고까지 믿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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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영화관에 관한 나의 기억은 다섯 살 즈음부터 시작됐다. 아버지는 지인이 운영하던 읍내 유일의 극장에 나를 자주 데려가셨는데, 어느 시점부터 극장 출입은 물론 진득이 앉아 감상하기를 나 혼자서도 잘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지금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혹성로봇 썬더A]를 족히 열 번은 넘게 봤다는 것 정도. '날아라 썬더A ♬' 어쩌고 하는 주제가를 입에 물고 다닌 것 같기도 하다.

그로부터 27년. 극장이 있던 자리에 버스터미널이 들어선 것도 이제는 오래전 얘기가 돼버렸다. 그렇지만 다섯 살 아이를 품어주던 어둠의 공간과 그곳을 떠돌던 묘한 설렘의 공기를 나는 여전히 잊을 수 없다. 엄마 품까지는 아니더라도 포근했거든. 그래서 지금도 극장 대신 놓인 그 터미널에 가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떠올린다. 극장 입구에 걸려있던 빨간 커튼, 싸구려일 것만 같은 그 천, 시큰한 냄새.

허우샤오시엔의 'The Electric Princess House'가 <그들 각자의 영화관>에서 특별하게 매력적인 이유는 그래서다. 요컨대 이 작품의 영화관 안에는 동시에 흐르는 두 개의 시간이 있다. 폐허가 된 영화관 내부가 지금 현재의 시간을 가리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크린 위를 흐르는 흑백영화는 그때 그 시절을 소환한다. 마찬가지로 나의 영화관(이름도 자그마치, 아카데미 극장이었다) 그 자체는 세월의 무게에 눌렸지만, 어렸을 적 만난 이미지의 어렴풋함에서 나는 나만의 영화관을 언제든 추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영화가 기억하는 그때 그 공기와 지금 여기와의 간극은 더 커진다. 나의 어린시절은 아주 멀리 떠나버린 걸까. 또 눈물이 나려한다. 어제 본 게 영화인지 꿈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던 시절, 내 아버지가 지금의 내 나이와 같던 그 시간은, 잘 있을까. 그리워라.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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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6세 소년이 있다. 그는 ‘파라노이드 파크’에 갔다가 그만 의도치 않게 한 사람을 죽음으로 밀어 넣고 만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이른바 사건 또는 사고. 이런 일들이 어떻게 주목의 대상으로 떠오르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나름의 논리를 간직한 이야기들이 사건을 서너 번 훑고는 확고부동한 기승전결을 내놓을 터. 아마도 그 대부분은 이번에도 별 다른 의심 없이 입을 모을 것이다. 소년은 정상적인 길에서 비껴간 불온한 영혼이었다고. 파라노이드 파크가 그런 아이들을 불러 모으는 일탈의 공간이라는 혐의를 덮어쓰게 될 것 또한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신속한 도출을 특징으로 하는 결론들은, 이처럼 내용면에서는 대개 진부하기 짝이 없다. 해당 현상 고유의 특성을 고려치 않은, 일종의 공식으로 굳어진 언어가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탓이다. 폭력에 연루된 10대에게 잔인한 영화나 게임 따위의 낡고 낡은 수식어가 무조건 따라붙고 있음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런 규격화된 시선으로는 현상의 표면을 훑고 더듬고 또 필요에 따라 베어낼 수 있을지언정, 그 안쪽까지 어떻게 하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저 깊은 곳, 조금 더 섬세한 눈길을 요하는 그곳은, 단지 하나의 공백이기 일쑤다.

영화 <파라노이드 파크>의 관심은 주류 미디어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그 지점을 향한다. 그곳에서 구스 반 산트는 ‘사람을 죽인 소년’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한 영혼’으로서의 알렉스와 마주한다. 범죄에 연루됐음을 공표하는 데 쓰이곤 하는 수사적 3인칭 대신, 알렉스의 내면을 진술의 주체 자리에 불러 앉힌 셈이다. 그래서 <파라노이드 파크>에서는 주류 미디어의 범위에 포착되지 않는 무언가를 만나는 게 가능해진다. 이를테면 사건의 내부로의 파장, 그리고 그것을 홀로 끌어안은 소년의 어떤 머뭇거림.


알렉스의 고립된 내면을 관객 앞으로 끌어내는 장치는 알렉스의 입이 아니라 역시나 ‘카메라’다. 구스 반 산트의 카메라는 현상으로부터 객관적인 상(像)을 추출하는 데는 여전히 관심이 없다. 최근의 몇몇 작품(특히 <라스트 데이즈>)과 마찬가지로, 그가 카메라에 담고자하는 것은 인물의 내적 갈등을 품은, 일종의 재구성된 외부 세계다. 내면의 흔들림이 투영된 낯선 세계상을 구상하고는 렌즈 앞에 놓인 사람과 사물들에서 그 느낌을 찾아내는 것. 따라서 <파라노이드 파크>의 카메라가 보이고 들리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데 무관심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무관심 덕에, 곳곳에 스며든 알렉스의 영혼이 카메라에 감지될 확률은 더 높아진다. 예컨대 엄마와 삼촌의 얼굴이 프레임 바깥으로 철저하게 밀려나고 여자친구와의 첫 섹스가 무감각하게 치러지는 이유는, 그곳을 둥둥 떠다니는 알렉스의 절대적인 고독만이 카메라의 유일한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파라노이드 파크>의 카메라는 피사체 자체보다는 거기에 이입됐을 알렉스의 심경을 포착하는 데 주력하는, 일종의 심리적 기계에 가깝다. 구스 반 산트는 이미 잘 알고 있었을 테다. 미디어의 언어가 다루지 않은 시공간을 이미지의 형태로 옮기는 데는, 감정을 읽을 줄 아는 이 영리한 기계만큼 유용한 게 없음을. 인과율의 적용이나 책임 규명이 없어도 좋을 알렉스만의 시공간, 사건의 내부적 층위는, 바로 그렇게 창조됐다.


물론 이는 알렉스에게 면죄부나 쥐어주고자 구축된 세계가 아니다. 구스 반 산트는 누군가를 재판하거나 끔찍한 결과 앞에 놓을 명백한 원인으로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시도를 이번에도 하지 않는다. 요컨대 그에게 여전히 중요한 것은 기승전결 구조 곳곳에 뚫린 ‘틈’이다. 현실에서 가공-유통되는 언어들로 포착 불가능한 어떤 세계가 그 틈 안에 놓여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나는 알렉스는 바로 구스 반 산트의 그 믿음이 찾아낸, 공식화되기 이전의 존재인 셈. 따라서 알렉스의 행보에서 서사의 진행이나 사건에 관한 예측 가능한 경로를 읽으려는 노력은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알렉스에게 실재란 오로지 죄책감과 불안과 고독이라는 제 안의 괴물일 뿐이며, 세상은 그 괴물에 빙의된 무능력한 공간 이상이 되지 못한다.

내면을 파고드는 사건의 후유증은 실제 삶을 압도할 만큼 이토록 강력하다. 알렉스가 현실적인 방향 감각을 잃고 자꾸만 머뭇거리는 것은, 그래서 필연에 가깝다. 하지만 갈 곳도 기댈 곳도 없는 이 필연적 절망에도 끄트머리란 있기 마련이다. 그 작은 숨구멍의 존재를 알렉스가 감지할 때, 지독한 머뭇거림 이후의 ‘무엇’은 비로소 찾아온다. 그러니까 죄 지었음을 스스로에게 고백하기. 그럼으로써 진짜 삶으로의 복귀를 감내할 만한 내적 토대를 갖추는 것. 요컨대 여기에 이르기까지 지체된 시간, 즉 알렉스의 모든 ‘내적 독백’이 현실에 편입될 날도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 구스 반 산트는 그렇게 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몇 안 되는 감독이다.

영화의 마지막, 프레임 바깥으로부터 알렉스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그를 외부로 끌어내는 첫 공식적인 호명일 터. 이에 알렉스는 스케이트보딩의 추억을 떠올리며 오지 않을 미래를 마음속에 담아둔다. 동시에 모든 동작을 멈추는 카메라. 알렉스의 뇌를 탐험하는 일은 여기서 끝난다. 그리고 다시 추악하고도 화창한 날. 알렉스는 잘 견디고 있을까.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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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자신이 인간임을 알고 있는 어느 주체의 외양인데, 모든 인간은 죽음을 면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얼굴은 자신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어느 주체의 외양이다. 우리가 얼굴 위에서 찾고 있는 것은 시간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간이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자크 오몽, [영화 속의 얼굴] 中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말은 아무리 들어도 슬프지 않다. '해는 서쪽으로 지더라.' 같은 말처럼 너무도 당연해 그저 무덤덤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종(種)의 입장이 아닌 '나'라는 1인칭의 차원에서 곱씹어 보자면, 죽음에 관한 이 진부한 선언은 꽤나 비극적으로 들리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죽는다.' 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 따위의 명제는, 당신이 그 누구건 간에 비껴갈 수 없는, 인생의 필수코스인 셈이다.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 주인공 앨빈 스트레이트(리차드 판스워스)의 처지는 꽤나 다급하다. 형의 집을 향한 그의 여정 자체는 한가롭기 그지없지만, 생전에 형을 만나야 하는 탓에 속마음은 하루하루 타들어가기 바쁘다(그의 나이 이른 셋, 게다가 몸도 성치 않다). 대체로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죽음에 관해 더 많이 생각해보기 마련인데, 스트레이트가 놓인 지점이 바로 그 비례곡선의 끝자락인 셈이다. 때문에 그는 그의 시간에 끝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무엇인지를 비교적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얼굴은 느긋함으로 가득하다가도 어느새 초조함으로 뒤덮여 버리고는 한다. 요컨대 스트레이트의 이 얼굴은 자신이 죽게 됨을 자각한 어느 주체의 외양임은 물론, 프레임 안팎으로 죽음을 일깨우는 산 경험의 클로즈업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너도 언젠가는 죽을 터. 그런데 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스트레이트가 바에 앉아 지난날의 과오를 고백하며 울먹이는 장면. 그의 얼굴에 패인 수많은 주름에서,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포착할 수 있는가. 이를테면 당신의 죽음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당신은 준비하고 있는가. 물론 이 질문들에 잘 대답했다고 해서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치는 그 모든 비극들이 덜 슬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 옆을 흐르는 시간에 관한 당신의 이해도는, 꽤 정확하게 측정되지 않겠는가. ⓒ erazerh




Rest in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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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도 다 가고 있군요. 섭섭하기도 해라. 그런 의미로, 올해 본 영화(114편이군요) 중 마음에 드는 걸로 10편 꼽아봤습니다(국내 개봉작, 순서는 가나다).


<기담> 유령을 만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실의 고통. 진짜 공포는 바로 이런 것.

<데쓰 프루프> '완벽한 것'의 붕괴를 훔쳐보는 쾌감. 물론 대가는 치르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만.

<라따뚜이> 이보다 더 훌륭한 가족영화를 찾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별빛 속으로> 진실이 없는 시대를 차라리 거짓으로 돌파하기. 그 시큰한 경험의, 마법 같은 전이.

<본 얼티메이텀> 디지털 공세를 헤쳐 나가는 아날로그적 동선. 진짜 적은 내부에 있나니.

<우아한 세계> 투덜거림 하나하나를 시대의 표정으로 녹여내는, 송강호의 얼굴-몸.

<인랜드 엠파이어> '영화를 본다는 것'에 관한 완전하게 새로운 경험. 일단은 뇌를 내려놓으시라.

<천년학> 恨에서 우려낸 소리와 그림.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거장의 예의.

<파라노이드 파크> 울지 않는 소년. 그 대신 카메라가 운다. 게다가 엘리엇 스미스!

<폭력의 역사> 아버지의 '액션'에 더 이상 열광할 수 없는 이유.


# 한편 저의 '2007년 최악의 영화'는 <미녀는 괴로워> 정도입니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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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카메라는 세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카메라는 부분을 연주하고 즉흥적으로 소리를 낼 수도 있고 직접 개입할 수도 있는 악기와 같다. 두 번째로 카메라는 복싱과 같다. 카메라로 힘껏 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카메라는 애무와 같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존재들과 사물들의 표면을 스쳐가는 작은 움직임들이기 때문이다.

(중략) 어렸을 적에 끈으로 단단하게 신발에 잘 묶어서 신는 나무 스케이트가 있었다. 내가 스케이트를 잘 타게 되었을 때, 스케이트를 타는 것은 스케이트가 발아래서 거의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카메라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나는 카메라를 그저 내버려둔다. 초점을 맞추는 데도 전보다 아주 많이 편안해져서, 한순간 이미지를 흐릿하게 내버려두고, 다음에 아주 부드럽게 다시 잡는다. 그러면 마치 카메라가 가벼워진 것처럼 느껴지게 되고,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카메라 위로 사물들의 리듬이 다가오게 된다."


- 요한 반 데르 코이켄, [시선의 모험] 中


좋은 영화의 기준 중 하나로, '허구와 현실 간 원활한 호흡'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프레임 안에서 바깥으로, 또는 바깥에서 안으로의 자유로운 운동성 같은 것. 여기서 프레임 안은 영화 이미지 자체를 말하며, 프레임 바깥은 우리가 극장 밖에서 만나는 실제 세계, 즉 카메라가 마주하고 있었을 그때 그 시공간을 뜻한다. 요컨대 관건은 시공간에 놓인 어떤 리듬, 육안으로 감지하기 힘든 사물들의 심상을 카메라가 포착해내느냐에 달려있다. 그것이 가능할 때만 영화의 안과 밖이 진정어린 대화를 나눌만 한 거리가 확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카메라를 일컬어 '살아있는 기계'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근래 내게 가장 와 닿았던 영화는 구스 반 산트의 <라스트 데이즈>와 프랑수아 오종의 <타임 투 리브>와 다르덴 형제의 <아들>이었다).

글, 이를테면 영화평도 다르지 않다. 영화 또는 영화가 건진 현실을 글의 맥락에 얼마나 잘 녹여내느냐 하는 것. 한 편의 영화를 현실의 어떤 지점에 관한 고유한 '신호'라고 해보자. '그 신호 체계에 대한 사려 깊은 이해와 더불어 해당 현실을 향한 글쓴이의 진심이 담긴 글' 정도를, 우리는 좋은 영화평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지식이 아니라 정성과 열정이다. 글을 쓰는 데 정성이나 열정만큼 강력한 에너지원이 없을 뿐더러 그것이 결여된 글은 읽는 이에게 고문이 되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뜬금없기는 하지만, 내가 비교적 최근에 쓴 몇몇 멍청한 글들에 그 정성과 열정이 빠져있음을 반성하기 위함이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글의 어떤 부분은 민망함을 넘어 다소 역겹기까지 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글도 마음에 안 든다. 거참.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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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다른 무엇이기 전에 영화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말이 아니라, 영화의 원초적 재미에 관한 이야기다. 말하자면 영화는, 직사각의 틀에 펼쳐지는 세계와, 나의, 은밀한 만남이다. 언제나 출발점은 거기에 있다. 바야흐로 영화를 스포츠처럼, 수출품처럼 대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시대. 영화 보기의 순수한 즐거움을 깨닫게 해주는 영화가,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EBS에서 다시 본 <커피와 담배>, <데드 맨>이 딱 그렇다는 이야기다. 짐 자무시 만세!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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