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현의 이전 대사들과 궤를 달리하는 한마디. “언제는 귀엽다며, 이 씨발년아.”가 불쑥 튀어나왔을 때, 나는 적잖이 놀랐다. 영화가 이질적인 무엇으로 분화하기 시작했다는 선언과도 같은 그 대사가, 나아가 관객의 예정된 불평에 부치는 박찬욱의 변(辯)처럼 들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언제는 거장이라며, 이 관객님들아.’

나는 진심으로 궁금하다. 왜 박찬욱은 잘 나가던 내러티브를 작정하고 일그러뜨렸을까. 서로 다른 두 개(또는 세 개)의 박찬욱표 영화가 위태로이 엉겨 붙은 듯한 이 구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송강호는 한 인터뷰에서 이 불균질과 관련해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달리의 그림은 경직된 현실에 틈을 내고 그 틈을 통해 어떤 관념이 흐르도록 만들 뿐, 그 자체로 불균질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어찌됐든, 너무 기괴한 나머지 아름답기까지 한 몇몇 시퀀스에도 불구하고 ‘복수는 나의 것 > 올드보이 > 친절한 금자씨 > 박쥐’라는 느낌은 지우기가 어렵다. 불친절해서가 아니라 납득할 만한 ‘불친절의 당위성’을 아직 찾지 못한 탓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악취미’의 향연 따위를 원인으로 규정지을 수도 없는 노릇. 그것은 박찬욱에게서 이미 성취한 자의 과시욕을 읽어야 하는, 조금은 가슴 아픈 일이 될 테니. 설마 박찬욱이 <로스트 하이웨이>를 두고 본인이 했던 말, 즉 “자기 자신의 모티브들을 재탕 삼탕 우려먹는 안이함. 미완성 각본으로 폼만 잔뜩 잡는다.”를 몸소 실행했을까. 일단은, 조금 더 고민해보자. ⓒ erazerh


# 박찬욱의 영화 중 가장 사랑스러운 건, 누가 뭐래도 <삼인조>다. 그 아름다웠던 언어유희.


반응형
프레임의 '사이즈'를 들먹이며 "그래서 영화는 반드시 영화관에서 봐야 한다."고 침을 튀기는 주장이 나는 불편하다. 내 집 내 공간에 여유롭게 기댄 채 아내와 이야기도 나누고 맥주도 한 잔 하며 즐기는 영화는 극장에서 느낄 수 없는 독특한 멋을 선사해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프레임 사이즈는 해당 영화 고유의 산물이 아닌 '관람 환경'에 속할 뿐인지라, 그것을 영화 평가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을 수도 없지 않은가. 늘 그렇듯, 가장 중요한 것은 프레임에 구현된 영화의 '존재 이유'가 진정성을 띠고 있느냐는 점이며, 따라서 사이즈 같은 영화 밖 변수는 그 이후에 따져도 충분하다.

물론 영화관만의 매력은 분명히 존재한다. 어둠을 들썩이는 매혹적 이미지, 공간의 냄새, 조용한 북적거림, 또는 연인의 손을 잡았을 때의 찌릿함…. 그 아름다운 감각들을 떠올려 본다면, 사이즈나 사운드 같은 '규모-기술적 차원' 운운하는 건, 사실 좀 많이 촌스럽다. ⓒ erazerh


반응형

'FRAM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리, 숏의 태도, 워낭소리  (0) 2009.03.15
'진짜 영화' 그 지독스러운 아름다움  (0) 2009.01.14
나의 영화관  (2) 2008.08.03
스케이트와 카메라, 그리고 키보드  (6) 2007.10.04
수영장 물 속에서 숨을 참고 있는 소년. 점점 한계가 다가온다. 밖으로 나가고 싶기는 한데 그의 머리를 짓누르는 우악스러운 손이 그것을 허락할 리 없다. 평소 자신을 괴롭히던 녀석에게 본때를 보이기는 했지만, 그 대가로 목숨을 지불하게 생긴 것이다. 그때 마침 소녀가 나타난다. 그리고 몇 초나 지났을까. 소년을 괴롭히던 동작이 모두 멈추는 데는. 소년의 머리를 누르던 팔은, 녀석들의 목과 허리는,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이 사지절단식 살육 시퀀스는, 그러나 심심하다 싶을 정도로 간소하다. 사건 자체가 잔혹하거나 말거나 이미지와 사운드가 그것을 ‘전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유혈은커녕 외마디 비명조차 없다. 시체들은 그저 짧은 풀숏 안에 무심히 던져질 뿐인데, 그조차 서로를 맞이하는 소년-소녀의 묘한 미소 뒤편으로 밀려난다. 이런 식이다. <렛 미 인>에서는 죽이고 죽는 행위가, 이를테면 공포나 액션 카테고리에 추가될 만한 ‘스틸샷’ 정도로 소비되지 않는다. '소녀 뱀파이어'에서 상상될 법한 장르적 쾌감이 존재할 리 만무하다.

대신 여기에는 그럼으로써 도드라지는 어떤 ‘관계’가 있다. ‘너도 정상적인 십대는 아니구나.’라는 호기심에서 출발한, 소년-소녀의 은밀하되 공고한 결속. 그것도 불온하기 짝이 없는. 이는 확실히 다른 (공포) 영화들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성격의 연대(連帶)다. 시스템 바깥에 놓인 자들은 단지 ‘괴물’로 다뤄지기 십상인데다, 그것이 가장 흥미진진한 전개라고 곧잘 믿기기 때문이다.

<렛 미 인>은 그런 선정적인 제스처를 포기함으로써 타자화 되기 이전의 소년-소녀를 기어이 불러낸다. 어떤 ‘의미’를 끌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 주목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두 아이의 관계에 대한 영화 안팎의 모든 판단은 유보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녀석들이 달콤한 연애를 할지, 종속적인 계약에 머물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이 있기는 하다. ‘괴물’로 알려진 자들의 본연 또한, 더도 덜도 아닌, 그저 ‘생존하기’였다는 것. 조금 더 쓸쓸하게. ⓒ erazerh




반응형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노골적인 거짓말이지만, 그 자체로 나쁠 건 없다. 문제는 거짓이 완성되는 ‘경로’에 있다. 가난한 고아의 절절한 경험담이 자본 질서로의 화려한 편입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진짜 사연, 그러니까 ‘착한 빈민’과 ‘나쁜 빈민’이라는 대립항 말이다. 물론 영광스러운 신분 상승이 누구에게 돌아갈지는 이미 정해진 수순. 윤리적으로 올바르다면야 제 아무리 배고픈들 내일의 무엇이 두렵겠나 싶다.

선의의 개인과 그의 신화에 주목하는 드라마에서는 가난을 고착하는 구조 및 그 뼈대가 잘 드러나지 않기 마련이다.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꼭 그렇다. 여기에는 ‘불편함을 감수하라’ 유의 삐딱한 선동이 없다. 다만 묵묵히 작업 중임이 분명한 어떤 전지적 존재, 주인공을 따뜻한 햇살로 인도하리라 굳게 마음먹은 듯한 그 존재만이 감지될 뿐이다(그래서 영화가 택한 답은 D. It is written이다).

곳곳에 진실의 흔적을 뿌려놨다고 해서 그 흔적이 늘 세계의 본질로 기억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요컨대 태생부터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한 자들을, 이 영화는 진짜로 위로하고 있는가. 아니, 차라리 팝콘을 씹고 콜라를 마시자. 그러다 끝 무렵에 미소 머금은 눈물 한 방울을 ‘톡’ 떨어뜨리자. 훌훌 털고 일어나면, 아마도 그때 ‘슬럼독 밀리어네어식’ 위로는 완성되겠지. ⓒ erazerh


반응형

'얼마나 닮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실재 상(像)을 고스란히 담았다고 해서 그 이미지가 꼭 진리에 가까운 것은 아니다. 바꿔 말해, 명백한 가짜 형상들로 채워진 이미지에서도 진리를 향한 몸짓은 충분히 발견될 수 있다. 진리는 숏의 내용물이 아니라 숏의 '태도'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을 찍었나'보다는 '어떻게/왜 찍었나'라는 질문이 대개는 더 쓸모 있기 마련이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워낭소리>의 답이 진리 추구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워낭소리>에서 농촌과 노인과 늙은 소는 곧잘 정서적 공통분모로 묶이는데, 이 정서가 과연 대상들 본연의 흐름 속에 포착된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희노애락' 유의 이미 정형화된 감정적 모델을 먼저 채택한 후 거기에 대상들을 끼워 맞춘 듯한 몇 장면 때문이다. 이는 진리 탐구와는 무관한, 페이소스 추출 작업일 뿐이다. 연출했다는 사실 자체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카메라를 작동한 이상, 연출이 없을 수는 없다). 그냥, 진리에 다가가기란, 그런 노력을 발견하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이야기. ⓒ erazerh


반응형

'FRAME'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레임, 사이즈, 영화관  (4) 2009.04.28
'진짜 영화' 그 지독스러운 아름다움  (0) 2009.01.14
나의 영화관  (2) 2008.08.03
스케이트와 카메라, 그리고 키보드  (6) 2007.10.04


노인의 얼굴로 태어나서일까. 벤자민의 삶은 양로원에서 시작한다. 죽음이 일상인 그곳. 벤자민이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소멸’에 익숙해지는 것은 필연이다.

삶이란, 나이 먹음이란, 그런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점점 더 많이 목격해야 하는 것. 그러면서 내 죽음에 점점 더 가까이 가는 것. 그렇게 두려웠건만 피할 길은 ‘죽어도’ 없더라. 우리가 태어나던 그 순간에, 아마도 우리의 죽음 또한 세상에 함께 나왔으리라.

그런 점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거의 고무적이기까지 하다. 소멸의 불가피성을 어떤 선순환 체계의 원리인 양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영화적 태도 덕분이다. 데이빗 핀처의 최고작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죽음을 둘러싼 아픈 시간들을 달래주는 몇 장면은 무척 매혹적이었고,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니까 일찍이 ‘사랑하면서 살라!’는 이야기. 가슴 아플 수는 있어도, 땅을 치고 후회할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 ⓒ erazerh


반응형
한 번 볼 때와 두 번 이상 볼 때의 느낌이 크게 다른 영화가 종종 있다. 케이블에서 다시 만난 <미스트>가 꼭 그렇다. 뭐랄까. 슈퍼마켓에 갇힌 군상의 행태를 향했던 내 관심이 이번에는 그들이 거기 갇혔다는 상황 자체로 옮겨졌구나, 싶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얼마나 부조리한지에 관한 이 기가 막힌 플롯을 예전에는 왜 못 알아봤을까. 요컨대 여기에는 ‘사람 > 자연’이라는 공식의 완전한 ‘역전’이 있다. 이를테면 ‘사람 < 자연.’ 지구라는 공간을 참 오래도 점령해온 인간계가, 영화에서는 ‘안개를 동반한 어떤 세계’로 재현된 셈이다. 슈퍼마켓에 갇힌 사람들의 처지에서 인간계 바깥으로 밀려나버린 현실의 존재들이 감지되는 것은 그래서다. 마찬가지 이유로, 안개 너머로 들어가면 죽어야 하는 영화 속 설정과 인간 세상으로 넘어오면 죽어야 하는 영화 밖 현실은, 무척이나 닮았다.

한정된 공간을 수직적인 관념으로 나누는 일은 늘 누군가를 지워버리기 마련이다. 공간에 스민 권위가 공간의 물리적 크기는 물론 개체수마저 임의대로 결정짓기 때문이다. <미스트> 끝 무렵에 등장하는 거대한 생명체는, 아마도 인간 고유의 그 전지전능함이 영화적 상상력으로 나타난 것이리라. 동시에 녀석의 발밑에는 너무 놀라고 두려워 도망칠 엄두조차 못 내는 사람들이 놓이는데, 이로써 현실의 ‘위압적인 것’과 ‘초라한 것’에 관한 오롯한 상하반전 숏이 완성되는 셈이다. 말 그대로 ‘역지사지의 구도.’ <미스트>가 부조리한 실재를 경유하는 판타지임은 바로 이 숏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멧돼지가 나타났다고 호들갑을 떨거나 ‘도둑’ 고양이가 동네를 더럽힌다고 구시렁거리는 따위의 목소리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이 쉴 곳을, 먹을 것을, 줄기차게 빼앗은 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공간에 얽힌 힘의 불균형은, 이렇듯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데다 그로 인한 부작용이 인식조차 안 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나 끔찍하다. 더욱이 마치 지금까지는 안 그래온 양 이제는 제대로 힘써보자고 국가가 주도하는 판이다. 누군가 말한다. 산을 깎고 강을 통제하면 모두가 잘되는 ‘녹색성장’이 올 거라고. 동족마저 속이려는 이 삼류 말장난에 비하면, <미스트>의 괴물들은 차라리 자비롭기가 부처님 수준이다. 안타깝지만, 현실은 늘 영화보다 끔찍하다. ⓒ erazerh


반응형

장 뤽 고다르 “만약 현실이 아름답다면, 영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가 보고 싶다. ‘그냥 영화’ 말고, 그 지독스러운 아름다움에 온몸이 짜릿하니 뜨거워지는 영화. 스토리가 매력적이더라, 이미지가 보기에 참 좋더라, 같은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것들은, 이를테면 살갗을 기분 좋게 간질여주는 데 그칠 뿐이다. 초보자의 뜨뜻미지근한 애무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진짜 영화’는 내면 깊이 박힌 어떤 응어리를 찾아 건드린다. 날것의 자극. 그 느낌이 신경계를 타고 몸 구석구석으로 퍼질 때면, 생전 처음 맛보는 묘한 짜릿함에 영혼이라도 내주리라.


이 정도로 경이로운 느낌은 ‘감동’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와는 명백히 다르다. 저 깊은 곳의 응어리는 단지 마음을 움직이는 무엇만으로는 자극되지 않는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찾아 헤맨다. 진짜 ‘그 무엇’을 구하고자. 마침내 어떤 영화가 그 욕망에 정확히 호응했다면, 그것은 거기에서 ‘현실을 명쾌하게 꿰는 이미지’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세계가 현실이라는 진부한 장벽을 열고는 그 틈으로 마치 빛처럼 쭉 뻗어 나온 것이다. 유레카! ‘진짜 영화’의 발견. ‘영화-매체’라는 규격을 떨쳐낸 이미지는 그렇게 해서 내 머릿속을 활보한다. 다시 말하지만, 지독스럽게 아름답다.


이 마법 같은 경험은, 그러나 현실을 잠시나마 잊자는 판타지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현실로의 복귀를 전제로 하는 경유지에 가깝다. ‘진짜 영화’는 현실 너머의 가상현실로써 현실의 부조리한 구조를 도드라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 내용이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루는 영화의 그 태도가, 형식이, 고민이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셈이다. 그래서 가슴이 후련하게 뻥 뚫리는가 싶다가도, 이내 뭉클해진다. '진짜 영화'는 그렇게 고단한 영혼을 매만질 줄 안다.


어찌 보면 몹시도 이기적인데다 참 쓸 데도 없는 욕망이다. 그저 앉아서 보기만 하면 되는 주제에 바라는 것도 참 많다. 그것도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하지만 나는 ‘진짜 영화’를 향한 갈증이 어쩔 수 없는 수순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만들기라는 꿈을 실현하지 못한 자에게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결핍이, 그런 식의 갈구를 부추기는 탓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그 결핍이 유난히 기승을 부린다. 아마도 현실이 아름다워 영화가 사라지더라도, 영원할 녀석. ⓒ erazerh


반응형

'FRAME'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레임, 사이즈, 영화관  (4) 2009.04.28
진리, 숏의 태도, 워낭소리  (0) 2009.03.15
나의 영화관  (2) 2008.08.03
스케이트와 카메라, 그리고 키보드  (6) 2007.10.04

+ Recent posts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