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이마주 게시판에서 '내 인생의 영화 30편'이란 글을 보고 재밌겠다 싶어 나름 고민 끝에 꼽아본 목록이다(30편까진 아니고, 베스트 10). 영화적으로 이들 작품보다 훨씬 빼어난 것도 후보에 있었지만, 기준이 '내 마음을 뒤흔든 정도'이다 보니 작품성 목록(?)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 물론 10편 또한 완성도로 따질 때 보통 레벨에서 논의될 영화들은 아니다만(가나다 순, 괄호 안은 감독).


도니 다코(리처드 켈리)

마더(봉준호)

멀홀랜드 드라이브(데이빗 린치)

베티 블루(장 자크 베넥스)

사랑의 추억(프랑수아 오종)

시(이창동)

씨클로(트란 안 홍)

엘리펀트(구스 반 산트)

엘 토포(알레한드로 조도르프스키)

증오(마티유 카소비츠)


이 중 단 한 편을 꼽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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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가? 방가!> 남의 쪽박 함부로 깨지 않는 세상이 진짜 유토피아.

<셔터 아일랜드> 미치는 게 차라리 당연한 미국, 남자. 인셉션보다 훨씬 낫다.

<시> 망각의 강 위로 기어이 피워 올린 꽃/시/얼굴. 가슴이 미어져, 이창동 최고작.

<시리어스 맨> 요란 떨지 않으면서 삶의 요란스러움을 주무르는 경지.

<예언자> 텅 빈 도화지에 아로새겨진 범죄 계보학. 조금 더 묵직했더라면.

<옥희의 영화> 결국은 닮아버릴 다름들, 그 사이에 서서. 홍상수의 신세계.

<킥 애스: 영웅의 탄생> 매끈하면서도 B무비 감성을 끝까지 밀고 가는 경우의 이상적인 예.

<하얀 리본> 가짜 죄의식이 진짜를 몰아내다. 이성을 가장한 미토스, 그 광기.

<하하하> 두 개의 숟가락, 하나의 찌개. 적어도 솔직은 했던 그 맛 그 여름.

<허트 로커> 풀 메탈 자켓과 지옥의 묵시록 사이의 어느 지점. 전쟁-기계 新 보고서.


이 중 올해의 한 편은, 단연 이창동의 <시>다. 미학적으로 정점에 달한 이 영화는 스토리텔링 면에서도 역대 가장 창조적이다. 요컨대 망각되고 있는 한 죽음이 또 다른 개인의 한정된 시간 안에서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 에 관한 이야기. 이 죽음은 영화 후반부 카메라-시선 숏을 통해 순간 ‘꽃’이 됐다 이내 증발하는데, 그야말로 영화적 마법의 경이로운 극단이 아닐 수 없다. 짜릿하고 격정적이고 먹먹하고 뭉클하다(같이 본 아내는 한참을 울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운 건 <파이란> 이후 처음이다). 이는 <400번의 구타>나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숏조차 미치지 못했던 영역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이 소녀의 얼굴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래도 이창동은 간격/리듬만으로 심금을 울리는 신공을 터득한 것 같다. <시>는 시 쓰기, 또는 이미지 그 자체다. ⓒ erazerh


2009년 영화 베스트 10

2008년 영화 베스트 10

2007년 영화 베스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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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의 노고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지만, 고백하건대 <인셉션>은 사실 좀 시시했다. 플롯을 주체적으로 주무르는 데 상당한 공을 들인 영화임에도, 뭐랄까, 가슴을 후벼파는 날카로운 무언가는 결여된 느낌. 정성일의 말을 빌리자면 '다른 영화보다 좋은 영화이지, 다른 영화와 차원이 다른 영화는 아닌' 셈이다.

이는 <인셉션>이 현실과 꿈의 관계를 '현실-잠재적 실재'의 층위가 아니라 '현실 ver1.0-현실 ver2.0'의 고리로 다루는 영화라는 점에서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요컨대 기대했던 '잠잠한 표면'과 '들끓는 내부'라는 실재적 접근 따위와 무관한, '기억-기억-기억'으로 이어지는 머릿속 회로도만 줄곧 들여다봐야 했으니까. 넘치도록 흐르던 긴장이 결국 러닝타임의 종료와 함께 휘발되는 성질의 것일 때의 아쉬움이란.

물론 이것은 '꿈을 소재로 한 영화'에 거는 내 기대에 <인셉션>이 부응하지 않는 종류의 작품이기 때문이지, <인셉션> 그 자체의 문제라 볼 수는 없다. 그러니까 데이빗 린치의 블록버스터 버전을 상상했다가 실망에까지 이른 것은 어디까지나 내 책임. 아무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견의 감독 목록에서 이제 크리스토퍼 놀란은 내려놔도 되지 않을까 싶다. ⓒ erazerh


# 별 다섯 개를 만점으로, <다크 나이트>는 내게 별 넷 정도의 영화다. 물론 그 중 별 셋은 히스 레저의 몫. 놀란이 창조한 지나치게 도식적인 후반부 구도는 별 -1개다.

# <인셉션>은 거의 '셔터 아일랜드2'처럼 느껴졌다. 디카프리오가 아니었어도 그랬을 거다. 나쁜 뜻은 아니다. 나는 <셔터 아일랜드>와 데니스 루헤인의 '살인자들의 섬'을 꽤나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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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영화 베스트 10 + 20자평. 국내 상영작(타임크라임 제외), 가나다 순.


<노잉> 지구를 포맷하고픈 욕구. 그 블록버스터식 수사.

<디스트릭트 9> 멀리 갈 것도 없다. 이 많은 용산‘들’.

<똥파리> 폭력은 결코 죽지 않는다. 가난이 죄가 되는 한.

<마더>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에게 바치는 제의(祭儀). 봉준호 최고작.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타란티노 가라사대, 영화 또는 영화관의 궁극. 황홀하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죽음에 대한 예의. 고로 삶에 대한 예의.

<불신지옥> 진짜 공포는 불신이 아닌 맹신에 깃드는 법. 무속 신앙의 성공적 귀환.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가족 판타지 해체 작업. 아들이 스타트, 아버지가 매조진다.

<차우> '질서 없음'이라는 질서의 구축. 낚였음에도 미워할 수 없다. 희한한 신공.

<타임크라임> 중년 남성의 욕망과 방황과 복귀에 관한 한, 가장 창조적인 내러티브.


이 중 올해의 영화 단 한 편으로는, <마더>를 꼽고 싶다. 봉준호는 확실히 변했다. 일단, 나는 ‘향숙이’라는 기표가 소비되던 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낱 농지거리로 둔갑시키고 실컷 킥킥대고 버려도 좋을 만큼 그 이름이 덜 비극적인 것이었나, 하는 문제(이때 <괴물>이 언급한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은 누구인가). 아울러 <괴물>을 가리켜 ‘정치 비판은 나오는데 정치적인 영화는 아니다.’라고 애써 우기던 역시나 둔해빠진 우리는, 후에 MB 정부 출범마저 이끌어냈지 아마.

기억하라는 주문(관객을 보는 눈)이 더 이상 필요할까. 그래서 <마더>일 수밖에 없는 거다. 죄 없는 종팔이를 세계 바깥으로 밀어낸 후, 아무도 기억하지 말기. 너무나도 잔혹하다면, 그게 당신 짓이었음을 기억하기. ⓒ erazerh


2008년 영화 베스트 10

2007년 영화 베스트 10

2006년 영화 베스트 10

2005년 영화 베스트 10


새해 福들 듬뿍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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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히 100번은 넘게 들은 것 같다. 그 중 열 번 정도 약간의 눈물을 흘렸고, 한 번은 아주 크게 울었다. <마더>의 엔딩신을 장식했던 트랙 ‘춤’은 그렇게 나를 정서적 과잉으로 밀어 넣었다. 이를테면 절망. 슬픈 듯 나른하거나 나른한 듯 슬프거나, 어떤 경우든 이 선율에서 얻어지는 결론은 절망이더라. 망각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추출한 주술적 사운드가 오히려 망각의 대상을 환기하라는 최면처럼 들린 탓이다.

도준 엄마는 어떨까. 시간이 저만치 흐른 후라면 진실을 게워냈음에 웃을 수 있을까. 머릿속에 켜켜이 들러붙은 죄책감들에 행여나 지금보다 더 미쳐 보이지는 않을까. 아, 물론 그 결과가 어떻든 간에 ‘돈과 빽에 따라 사람을 분류하는 유기체’로서의 세계는 끄떡없을 것이다. 그 안에 던져진 개인이야 늘 그랬듯 침묵하거나, 재수 없으면 폐기될 테고. 말할 것도 없겠지만, 태생이 비천할수록 후자의 가능성은 더 크다.

그러니까, 나는 진심으로 종팔이가 불쌍하다. 추악하고도 화창한 날, 그는 나를 대신해 거기에 있다. 이 영화, 이 음악, 잔혹하다. ⓒ erazerh


춤 (from 마더 O.S.T)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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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오프닝. 우리네 ‘국민엄마’가 아무런 말도 없이 외화면의 사운드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우스꽝스러운 느낌도 잠시, 이것 참 기괴하다. 이내 그녀의 시선이 카메라를 향하자 동작들은 하나의 질문이 된다. '자, 이 엄마는 왜 이러고 있을까요?'

(이하 스포일러)




이렇게 볼 수도 있겠다. 영화 <마더>는 ‘탤런트 김혜자’라는 기호가 ‘봉준호 월드’로 들어가 어떤 분화를 거치다 결국에는 또 다른 ‘김혜자’로 변환하는 구조라고. 그러니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가 존재한다. 하나는 봉준호 영화에 늘 등장해온 ‘부조리가 자연화된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도준 엄마 고유의 ‘어미-새끼’로서의 관계망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곳곳에서 충돌하던 두 세계가 말미에는 같은 결론으로 — 요컨대 진실을 부인(否認)하는 것으로 — 수렴된다는 점이다. 전자가 편의에 따라 ‘비정상'에게 혐의를 씌우는 관료주의적 오독을 일삼는다면(백광호와 강두 가족한테 그랬듯), 후자는 피로써 눈물로써 결국 그 오독에 침묵을 덧붙이는 꼴이다. 두 경우 다 지금의 서식 환경을 떠날 수 없다는 수구적 습성이 빚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반동이다.

진실에 관한 욕망 자체가 부재하다는 점에서 전자는 부숴야 할 ‘진부한 악(惡)’ 정도로 규정지어져 마땅하다. 반면 도준 엄마의 경우는 판단이 쉽지 않다. 그녀의 모든 행위가 타자 개입이 불가능한 내면적 심연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속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만이 이 엄마의 삶을 추동하는 유일한 근거인 셈이다. 아마도 도준의 망각이 시작됐을 때, 그녀는 그렇게 자신만의 심리적 영토로 달아나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도준의 존재 자체가 과거를 환기하는 지워지지 않을 ‘자국’인 탓에, 이 속죄는 결코 완성형이 될 수 없다. 평생을 두고두고 치러도 모자랄 죗값이 도준 엄마로 하여금 도준이 눈앞에 안 보이는 꼴을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밥을 먹이거나 옆에 뉘여 젖을 내줄 때만, 이 어미는 새끼에게 잘 속죄 중이라 스스로 자위할 수 있다. 이는 숭고한 사랑이기 이전에, 네가 없으면 내가 죽고 내가 없으면 네가 죽는다는, 차라리 짐승 같은 본능이다. 하기야 아비 없는 자식, 서방 없는 여자라고 깔보는 세상 앞에서, 어미가 취할 수 있는 태도가 그것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여자들이 묻혔던 곳, 현서가 괴물에게 먹혔던 바로 거기, 그 구멍 속 실재를 알게 된 봉준호 영화 유일의 생존자임에도 불구하고, 도준 엄마는 ‘어미’인 관계로 결코 진실을 뱉을 수 없다. 그곳에서 발가벗겨졌던 한 여고생의 삶과 죽음 따위는 그저 한마디 농담으로나 세상에 나돌 테다. 종팔과 고물상 노인 또한 마찬가지. 자본과 권력의 서열 맨 끝에 매달려있던 그들에게는, 아, 밥상을 차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엔딩 시퀀스. 관광버스 안에서 도준 엄마의 두 번째 춤사위가 펼쳐진다. 진실을 배반하고 사람을 죽였기에 치르는, 이를테면 망각을 위한 제의(祭儀).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라고 했던가. 기쁨이라면 모를까, 슬픔은, 특히나 비밀을 간직한 슬픔은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 이제 이 어미는 행복한 표정을 내건 채 속으로는 더 깊은 구덩이를 파내려 갈 것이다. 상징계와 그 이면을 달콤쌉싸래하게 오가던 봉준호의 세계가, 이제는 이토록 그윽하기까지 하다. 그는 김혜자를 괴물로 만듦과 동시에 자신도 괴물이 됐다. ⓒ erazerh



덧붙임


1. 진태는 어쩌면 도준의 또 다른 판본일지도 모르겠다. 도준이 농약 박카스를 먹지 않은 채 본래대로 자랐다면 진태처럼 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진태가 도준 엄마에게 막말을 하는 그 시퀀스가 조금은 더 선명해진다.

2. <마더>는 명백하게 <살인의 추억>의 백광호 모티브를 심화-확장한 것이다. 형사 세 명이 <살인의 추억>의 형사들과 같은 위치에서 같은 역할을 하는가 하면, 백광호가 철길 위에서 하던 동작을 그대로 반복하는 도준의 모습이 엄마 머리를 문뜩 스치기도 한다.

3. 도준 엄마가 종팔에게 “너 엄마 없어?”라고 물으며 흐느낄 때, 그때만큼은 그녀의 얼굴이 도준 엄마가 아닌 ‘김혜자’, 그러니까 우리네 엄마의 그것이 된다. 엄마 없는 장애인의 비극을 장애인의 엄마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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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묻혔던 곳, 현서가 괴물에게 먹혔던 바로 거기, 그 구멍 속 실재를 알게 된 봉준호 영화 유일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엄마'라서 진실을 뱉을 수 없다. 그래서 펼쳐 보이는, 실로 숨이 멎을 듯한 제의(祭儀). 봉준호는 그렇게 김혜자를 괴물로 만듦과 동시에 자신도 괴물이 됐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탓에, 이보다 긴 글은 쓸 수가 없구나.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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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가 궁금하고 또 기대되는 이유. 단도직입적으로, 봉준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봉준호인가.

봉준호 영화를 추동하는 핵심 모티브는 ‘실종’이다. 누군가 사라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플란다스의 개>의 개들과 <살인의 추억>의 여자들, 가깝게는 <괴물>의 현서가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잘 돌아가는 세계가 있다. 시위대를 치워버림으로써 깨끗함이 유지되는 거리, 여자들이 묻힌 땅 위를 흐르는 공장의 부지런한 기계음, 실체 없는 공포 덕에 굳어지는 도시의 암묵적 질서 따위. 요컨대 강제적인 봉합이 이뤄지고 곧바로 자기만족이 뒤따르는 꼴이다. 이 꼴들이 겹겹이 쌓인 상징계는, 얼마나 위선적인가. TV 속에서 토론을 펼쳤던 <지리멸렬>의 저 뻔뻔스러운 지식인들을 기억해보자. TV를 끄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늘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상징계에서는 필요에 따라 몇몇 삶이 수집되지 않기 마련이다. 봉준호 영화의 미덕은, 바로 파편으로 존재하는 그 삶들을 희비극의 형태로 복원한다는 데 있다. 이는 대책 없는 낙관이나 비관이 아니라 ‘환기’와 ‘각성’의 제스처다. 그래서 ‘짝퉁’들의 세계와 그 부조리가 일단 구조화 되고 나면, 우리는 송강호의 마지막 눈빛, <살인의 추억>과 <괴물>을 관통하는 그 서늘한 응시를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마더>. 봉준호 감독은 작년 이맘때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항상 중심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영화만 만들었다.”며, <마더>를 일컬어 “중심을 향해 들어가는 나의 첫 작업”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나는 이 말이 이번에는 외부가 아닌 내부를 일그러뜨릴 것이라는, 봉준호의 은밀한 선언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상징계의 붕괴를 누군가의 심리적 심연에서부터 진전시키는 것이 ‘중심을 향하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하겠다는 느낌에서다. 이제 그 <마더>가 마침내 공개됐다. 봉준호한테 히치콕이니, 알모도바르니 하는 수식어가 붙는 중이다. 정말로 봉준호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다정다감한 기호 —엄마— 를 들쑤셔 놓았을까. 확인해 봐야겠지만, 최소한 우리가 알던 ‘엄마’가 이 영화에 등장하지 않음은 명백하리라.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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