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날이 창창한 서른 한 살의 사진작가 로맹.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암이라는 당혹스러운 선고가 내려진다.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3개월 정도. 죽음이 손에 잡힐 듯한 거리까지 다가온 것이다. 갑작스러운 당혹감과 두려움, 그리고 자괴감에 로맹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으려 한다.

<타임 투 리브(Le Temps Qui Reste)>는 프랑수아 오종이 <사랑의 추억>에 이어 만든, ‘죽음’을 테마로 하는 두 번째 작품이다. 오종은 질서와 권력의 흐름에 순응하거나 혹은 거스르기 위한 방법으로서 선택되는 ‘욕망들’에 종종 주목해온 감독. 수단과 목적이 역전되거나 그 경계가 모호해질 무렵, 그의 영화 속 욕망들은 종종 인간을 파멸로 밀어 넣는 단계까지 발현되고는 한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동원한 뒤틀린 내러티브나 도발적이고 과격한 에로티시즘 덕에 ‘악동’이라는 별명 옆에는 ‘재능을 허비하는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기도 한다. 냉소와 위트를 격렬하게 오가며 기존 가치체계나 ‘관계 맺기’ 속 허위를 조롱해온 그를 떠올릴 때, <타임 투 리브>의 ‘얌전함’은 다소 의외일 수도 있다.

주인공 로맹의 죽음은 어떤 인위적인 개입이 없는 순수한 형태의 엔딩이다. 그래서 동성애자임에도 로맹의 병명은 굳이 ‘에이즈’가 아니라 ‘암’이다. 수직적인 질서체계를 과도한 욕망으로써 종단, 추락을 자초해온 오종의 기존 인물들과 달리, 로맹은 모든 욕망을 생의 저 주변부로 밀어내려고 한다. 프랑수아 오종은 그러한 관계 끊기가 진정한 관계 맺기의 출발이 됨을 암시하며, 그동안 자신이 이야기해온 주제와 결국은 같은 맥락의 주제를 또 다른 문장으로 읊조리고 있다. 전작들이 “욕망이 있는 곳에는 이미 힘의 관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미셸 푸코의 말에 충실했다면, <타임 투 리브>는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즉 욕망을 떠나보낼 때 인간은 자유로워진다.”고 말하는 영화인 셈이다. 관계를 끊음으로써 진정한 관계를 맺고, 무한한 고독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평온해지는 인간들.

죽음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으려던 로맹은, 결국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가 본질적으로는 낯선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영원한 침묵을 맞이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때문에 로맹은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데 동참하는가 하면, 문득문득 환기되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차분하게 조응하면서 기억을 ‘추억’으로 자리매김 시키기도 한다. 죽음과의 대면이 삶을 일깨운다는 역설, 마지막을 앞에 두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자가 어디 로맹뿐이겠는가. 사진작가인 그는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각인하고 싶은 듯 카메라로써 그들의 순간을 조용히 기록하기도 한다. 렌즈를 관통하는 그 아련한 시선이야말로 죽음을 앞둔 자가 취할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최선의 예의일 테다.

로맹의 짧은 여정이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오종의 씁쓸한 고백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할 나위 없이 화창한 하늘. 영원한 고독은 어쩌면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로맹은 처음 그곳으로 돌아가 다시금 그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걸까. <타임 투 리브>는 3개월 후일지 30년 후일지 모를 우리들의 죽음을 미리 따라가 보는, 짧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성찰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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