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장르는 고전적으로 악인에 의한 선인의 몰락과 그 이후의 수련과정, 그리고 악인을 향한 선인의 정당한 복수라는 서사구조를 지닌다. 여기서의 '수련'은 주인공의 성장, 곧 무술실력의 성장을 뜻하는데, 처단해야 할 악인이 존재하는 덕에, 발전해가는 육체적 능력은 필연적으로 '점점 더 정의로워짐'과 동일시되고는 한다. 복수의 허무함, 힘이 지배하는 세상을 한탄하는 영화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의와 복수에 같은 무게를 두는 것이 무협영화를 지배해온 핵심적 모티브임은 명백한 사실이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협을 넘은 무협의 창시자, 무협의 완전 작가 '호금전'을 잊을 수는 없겠다).

<무인 곽원갑>은 선인의 몰락 대신 강자의 자초된 몰락을, 육체의 수련 대신에는 마음의 수련을 담은 영화다. 따라서 폭력은 제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 해도 결코 추켜지지 않으며, 날카로움을 자랑한 채 휘두르고 다닌 칼날은 그 자신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가기 마련이다. 무술 동작들 자체나 승리의 기쁨에 결코 환호하지 않는 대신에 <무인 곽원갑>은 武에 담긴 정신적 가치에 기꺼이 경배를 바치려한다. 이는 영화인이기 이전에 무술인인 이연걸의 무협 은퇴작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소재가 아닌가.소림사에서부터 할리우드에 이르기까지 20년 넘게 종횡무진 활약하던 이연걸이, 굳게 쥐었던 주먹을 슬며시 풀고는 武에 대한 예의를 '영화적으로'차리는 셈이다. 그렇다. 이연걸은 그의 고향, 소림사로 결국에는 돌아오고야 말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전반부와 후반부 간 화법의 불일치에서 오는'불편함'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곽원갑은 과거를 뉘우치고 진정한 고수의 단계, 武에 관한 한 어떤 초월자적 경지로 접어들게 된다(영화 속에서 그것은 곧 '여유'라는 단어로 묘사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막바지 대결 시퀀스의 겹겹이 덧칠하는 듯한 설명은, 공들여 만들어온 완성된 캐릭터에 군더더기를 얹는 듯한 느낌을 준다. 주인공은한참 전에 경지에 올랐는데, 같은 이야기가 소모적으로 반복되는 격이다. 그것도 신파조와 계몽조가 뒤섞인 채.

바쁘게 농사일을 하다가도, 불어오는 바람에 몸과 마음을 평화롭게 맡길 수 있었던 그 여유. 그때 사실 곽원갑은 이미 진정한 고수가 되어있었을 터.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으로도 효과는 극에 달했던 그 화술을, <무인 곽원갑>이 끝까지 간직했더라면 어땠을까. ⓒ erazerh


참,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은 전부 고수였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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