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에 연산군을 규정짓던 수식어들(폭군, 호색한)은 영화 <왕의 남자>에서도 여전히 반복된다. 그러나 트라우마에 기인한 연산의 광기를 광대놀음의 위태로운 줄타기와 오버랩, 혹은 대조시키는 구조를 통해, 영화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지되는 내러티브를 줄곧 유지한다. 광대들과 연산, 장녹수, 그리고 중신들이 빚어내는 희비극의 교차는 궁중에 드리운 서늘한 기운과 적절하게 맞물리고, 그로 인해 마지막 줄타기는 더욱 위태롭고 더욱 슬프고 더욱 우아해진다.

그렇다. 아마도 연산은 한바탕 질펀하게 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처에 근거한 날 서린 놀이는 광기로 표출되기 마련, 결국 놀이는 파국을 부르고 여기저기에 피를 뿌린고 만다. 가부장제와 신분제의 정점에 자리한 궁중이라는 곳은 한낱 광대놀음 따위에서 뻗어진 수평성, 또는 동성애와 같은 '비정상적' 코드들을 수용할 만한 땅덩이가 절대로 아니다. 게다가 연산은 기생의 치마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퇴행적 증후군을 선보이는 등 스스로 모든 권위를 벗고 '미친놈'이 되는데 일말의 주저도 없는 사람이다. 그의 놀이는 권위라는 명분에 의해 숙청당할 운명을 애초에 가진 채 출발한 셈이다.

긴장의 밀도를 유지시키는 탄탄한 플롯들도 매력적이지만, <왕의 남자>에서 무엇보다 돋보이는 부분은 놀이판 자체(특히 줄타기)가 품은 강인한 흡입력이다. 영화에서의 스펙터클을 대략 '눈을 사로잡을 만한 무언가' 정도로 정의내릴 때, <왕의 남자>가 재현해낸 당시 서민들의 유희는 이미지로서 대단히 매혹적일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스펙터클한 광경이 된다(스펙터클은 결코 규모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장생과 공길의 관계는 다소 모호하고 미묘하지만, 크게 사랑의 범주에 속함은 분명한 듯하다. 땅 위에서 펼쳐지는 놀이판이 현실의 슬픔과 부조리를 해학으로 표출하는 일종의 예술이라면, 줄 위의 허공은 장생과 공길이 진정으로 교감하고 소통하는 유일한 공간이다. 거기에는 물론, 다음 세상에서는 꼭 한번 "제대로 맞추어보자."고 희망하는 주술적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라는 말 속에 담긴 어긋남은 그래서 웃기고, 슬프고, 오랜 여운을 남긴다. ⓒ erazerh

# 후반부 전개는 다소 아쉬운 편. 그리고 뭔가 더 질렀으면 어땠을까.
# 유해진은 정말 타고난 '광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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