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맑고 햇살은 따갑다. 가끔 속눈썹이 떨어지는 걸 제외하면 표면적으로는 어떠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붕 떠 있는 듯한 한 여자, 그리고 조각난 그녀의 기억들이 평범한 일상 위를 부유할 뿐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엄청난 투쟁이 진행중이다. 그녀는 매일 심연의 공포에 맞서 싸운다. 자꾸만 얼굴을 들이미는 괴물. 이제는 끝내고 싶다.

낯선 사람과 모텔로 향하는 그녀. 그리고는 흐느끼는 그를 자신의 품으로 감싸 안는다. 상처 입은 남성을 끌어안는 여성. 진부한 설정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놀랍게도! 남성이 만들어낸 모성 신화가 없다. 슬퍼할 수도 없는, 그래서 낯선 사람과의 낯선 동화를 통해서만 슬퍼할 수 있는 한 인간의 가련한 눈물이 흐를 뿐이다. 상처는 자기 자신의 고백과 마음 놓고 소통할 여유마저 앗아갔다.

매미소리가 머리를 어지럽힌다. 여기서 끝을 낼까? 끝을 내면 진정 끝나는 걸까? 매미소리가 멈춘 후 그녀는 거울 속 또 다른 자신과 마주한다. 그리고 운다. 그제야 서럽게 운다. 다시 적막이 흐르고. 그녀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싶어 한다. 그래서 허겁지겁 고양이를 불러본다. 그 때 어디선가 들리는 작은 목소리, "정혜씨". 잊었던 그 이름. 그녀의 이름은 정혜였다. 우리는 알 수 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야 정혜의 이야기는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을.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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