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4일, '2004: A FILM ODYSSEY'라는, 큐브릭이 알았으면 기분 나빴을 이름으로 이글루스 블로그를 시작했으니, 오늘로써 개장 1주년이 되는군요. 역시나 1주년 되신 지킬님이 아니었으면, 아예 모를뻔 했습니다.

총 포스트 수는 92개로 지난 1년간 상당히 게을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영화 관련 글 49개). 앞으로 영화리뷰를 좀더 자주 쓸 예정이니(말로만?) 관심 가지고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년간 이곳을 다녀가신 모든 분께 행운이 따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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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라 공주>는 복수로 시작해 복수로 끝나는 영화다. '복수'하면 빠질 수 없는 올 여름의 화제작 <친절한 금자씨>가 '과연 복수로써 상실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가, 속죄는 가능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영화인 반면, <오로라 공주>는 애초에 속죄는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염두에 둔 채 출발한다. 즉, 영화는 죽는 길 외에는 아무 것도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스스로의 죄의식에 비해 세상과 타인을 향한 증오가 너무나도 크기에, 정순정의 상실감이 복수로 연결되는 데는 일말의 주저도, 후회도 없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의 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정순정이 마지막에 죽이려고 남겨놓은 사람이 누구인지 보라.

한편으로는 연쇄살인의 희생자들이 의도적으로 어떤 결과를 예상하고 행동한 것은 아니기에, 죽을 죄를 지은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나올 법하다.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영화의 궁극적인 의도는 '그런 싸가지 없는 인간은 모조리 죽어야 한다.'에 있지 않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 집단적으로 상실한 이 사회, <오로라 공주>는 결국 그런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가혹한 폭력의 현장이 되고 있음을 복수극의 틀을 빌려 말하는 영화다. 따라서 정순정의 분노는 수많은 미필적 고의와 예의 없음과 무관심이 관철되는 이 속물들의 천지에 던지는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 이하 스포일러 있을 수 있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일상의 무덤덤한 규칙성은 매우 당연한 현상이지만, 그 당연함의 수준을 넘는 어떤 섬뜩한 이기주의를 만날 때면 참기 힘들다 못해 슬프기까지 한다. 쉽게 말해, 누군가가 발가벗겨진 채로 쓰레기매립지에 죽어있는 제 자식을 봐야하는 동안, 또 다른 누군가가 그저 화젯거리 하나 얻었다고 낄낄거리는 일이 가능하다면, 세상은 절대로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같은 무게로 슬퍼할 수는 없을지언정, 죽음에 대한 예의는 갖추고 살자. 그리고 평소 타인에 대한 예의를 망각하고 살던 자들은 오로라 공주를 조심할 것.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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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폭력의 땅에 동화되는가


폭력의 이미지는 영화 안에서 줄곧 재현되어 왔다. 현실에 깔린 구조적 모순을 은유하는 기재로, 인간의 억압된 분노가 표출되는 방법으로, 때로는 악을 응징하는 데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로 등장하며, 폭력은 영화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꾸준히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내왔다. ‘영화 속 폭력이 현실에서 범죄로 반영된다.’와 ‘영화는 현실에 만연한 폭력을 재현할 뿐이다.’ 등 영화 내 폭력에 관한 의견은 여전히 분분하지만, 폭력의 이미지가 어쨌든 한 작품을 이해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키워드로 기능할 수 있음은 명백해 보인다.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와 카티아 룬드가 감독한 <시티 오브 갓(Cidade De Deus)>은 폭력의 끔찍한 연쇄반응, 혹은 총과 마약이 어떻게 한 공간을 지배해 가는가에 관한 매우 직설적인 이야기다. 영화는 60, 70년대 리우 데 자네이루의 빈민촌 ‘시티 오브 갓’을 배경으로 한 파울로 린스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삼는다. 변두리라는 공간에 갇힌 아이들이라는 점에서 <시티 오브 갓>은 마티유 카소비츠 감독의 <증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증오>가 세 녀석의 그 대상조차 찾지 못하는 ‘증오’를 통해 폭염처럼 답답한 세상 풍경을 묘사했다면, <시티 오브 갓>은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소년들을 좇으며 분노의 대상을 애초에 잘못 선택하도록 길들이는, 변두리에 내재된 광기를 들여다본다. 탈출구가 없는 이 광기는 아이들의 몸과 마음에 그대로 전염된 채 끝 모를 순환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시티 오브 갓>은 스스로를 깨부수고 추락하는 소년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 도시에서는 ‘열심히 공부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충고하는 건실한 평화주의자가 복수의 칼을 가는 갱스터로 변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비리로 얼룩진 경찰은 ‘시티 오브 갓’에 산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 마약은 환각제가 아니라 마치 소금과도 같은 생활필수품일 뿐이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아이들끼리 죽이고 죽는 믿을 수 없는 풍경이 매일 반복되지만, 그 원인을 아는 사람도, 알려고 하는 사람도 이제는 없다.

카메라는 실존했던 인물들 각자의 시각에서 그곳을 바라보며, 도시의 변두리가 결국은 폭력과 마약의 신에게 점령당했음을 낱낱이 들추어낸다. 개인 차원에 소제목을 붙이고 에피소드를 전개하는 이러한 현장감 넘치는 화법은 아이들이 어떻게 폭력의 땅에 동화되고 파멸되어 가는지를 세밀하고도 역동적인 플롯으로 재현하는 데 성공한다. 이는 승자만을 바라보는 ‘경건한’ 역사들이 고의적으로 배제해온 숨은 진실을, 영화적으로 드러내는 데 매우 적절한 방법이다. 시간과 공간에 갇혀버린 아픔을 살아 꿈틀거리는 형태로 끌어내 관객의 눈앞에 펼쳐내는 것, 바로 영화 <시티 오브 갓>의 미덕이다. 때문에 빈민촌을 만들어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폭력의 실체가 극중에서 굳이 언급되지 않았어도, 관객은 상위에 자리 잡은 구조적 폭력을 비판할 만한 충분한 근거를 지닐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소외된 민중을 주체로 삼는다는 점에서 <시티 오브 갓>은 60년대 영화운동 ‘시네마노보‘의 계보 위에 놓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시네마노보는 군사정권의 개발전략에 따른 빈부격차, 그 굶주림과 불확실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으며 ‘새로운 브라질’을 갈망했던 정치적이고 실천적인 영화운동을 말한다. 비전문배우를 쓰고 실제 현장을 무대로 활용하는 등 기술적인 부분에서부터 소외된 사람들로 눈을 돌릴 줄 아는 정서까지, <시티 오브 갓>은 궁극적으로 시네마노보의 노선과 추구하는 바가 같은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시네마노보가 시도했던 이성적 접근법 외에 나름의 감정적 호소력도 갖추고 있다는 점, 그리고 경쾌한 삼바리듬을 동반한 채 장르영화로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에서는 <시티 오브 갓>이 보다 많은 대중과 소통 가능하도록 진화한 형태의 텍스트라 할 수 있겠다.

‘시티 오브 갓’은 ‘가만히 있어도 죽고, 도망가다가도 죽는’ 곳이다. 어떻게든 탈출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잘 보이지 않는다. 처음과 뒷부분에 나오는 닭 한 마리는 그래서 이 답답한 공간에 갇힌 아이들과 닮았다. 목이 곧 떨어져나가야 하는 운명, 살고 싶다. 도망쳐보지만 결국은 앞뒤의 사람들 틈에 갇히고 만다. 이제 어디로 탈출할 것인가. 죽일 것인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불가능해 보이지만) 날아볼 것인가.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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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내가 영화 관련 글을 쓰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뭐, 물론 지금은 전혀 안 쓰고 있다ㅡ.ㅡ) 좀 더 구체적으로 자문해보면, ‘거대한데다 속도마저 갖춘 가공할 생산력이 이미 미덕으로 자리 잡은 채 소비를 숨 가쁘게 재촉하는 지금의 구조와, 조금만 둘러보면 내 글보다 몇 십 배는 뛰어난 글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영화평론가도 아닌 내가(즉, 영화평을 쓴다고 해서 돈을 받는 것도 아닌) 도대체 왜 영화와 관련한 글을 써야만 한다고 혼자서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일까?’ 정도가 되겠다.

우선 ‘영화’라는 매체를 살펴보자. 영화라는 허구는 간혹 불가능의 범주를 넘나들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세계라는 그물망 안에 모두 걸리기 마련이다.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설정들, 이를테면 SF나 호러, 스릴러 등의 장르에서 주로 나타나는 초현실, 초자연, 비과학적인 상황들 또한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만 본래 의도했던 판타지로서의 가치를 얻게 된다. 현실이라는 테두리는 ‘영화 속 사건이 실제로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라 ‘영화가 스크린 밖 세상을 과연 어떻게 끌어오거나 활용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보다 생산적인 담론을 허락한다.

영화는 결국 재현의 예술이다. 사실 그대로든 사실에서 조금 더 나아갔든 영화는 세계의 현상와 본질을, 그리고 인간과 역사를 나름의 상상력을 동원해 영화적 시공간으로 담아낸다. 빔 밴더스는 “영화가 사물의 존재를 구원할 수 있다.”고 했다. 허위와 가식이 뒤덮어 버린, 폭염처럼 답답한 세상 대신 어떤 가공된 사건(다른 예술도 마찬가지)에서 삶의 진실을 발견하는 것은 더 이상 어려운 일도, 놀라운 일도 아니다. 누군가가 거대한 자본놀음에 질식하지 않은 채 견디고 있다면, 10편의 쓰레기 영화를 기꺼이 참아내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삶의 진실을 소중하게 머금고 있는 단 한 편의 영화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이상향은 아득한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가 속한 세계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이 낯설고 답답한 시스템에 휩쓸려 내 존재는 결국 실종되고 말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시선이나 소외된 인간을 따뜻하게 품고자 하는 진심 어린 마음, 나아가 진실을 향한 열망은 소중하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런 느낌들을 주로 영화 안에서 찾고자 한다. 진실된 의도에서 만들어진 한 편의 영화는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지언정 나와 내가 속한 현실을 고민하게 만드니까. 고민들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도 싶다.

그래서 나는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싶다. 글을 쓰게 되면 그 작품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거나, 카메라가 끌어온 현실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매체에 기고하느냐.’, ‘글솜씨가 어느 정도인가.’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글 한 편을 정성껏 썼을 때, 비로소 내 것으로 다가온 소중한 영화 한편, 그것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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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량의 행렬은 끊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울부짖는 순간에도 자동차들은 멈추지 않고 도로 위를 흐른다. 일상의 규칙들이 무덤덤한 건 매우 당연한 현상이지만, 가끔씩 무언지 모를 섬뜩함이 삶에 찌들어버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2. 돈이 있고 없음은 경제적 잣대의 역할을 뛰어 넘어 대부분의 사회관계를 결정짓는 데 핵심으로 기능한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 줍니다.'라는 광고문구가 먹히는 세상. 껍데기가 주인이 되는 사회. 진정 마네킹들의 진열장이다. 신체강탈자들이 단체로 침입 관광이라도 온 것일까.

3. 신은 죽었다. 니체가 죽여 버린 그 '신'이 아니라, 존재해야 마땅한 신이 지금 이곳에는 없다. 도시를 떠나버렸거나 혹은 직무유기 중이거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일식(L'Eclisse)>에 등장하는 풍경은 지금 이 도시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쓸쓸하고 고독한, 이제는 지루해져버린 풍경. 내면 역시 황량하기 짝이 없다. 사랑은 죽고 섹스는 벽에 걸린 그림처럼 건조하다. 사람이 붐비는 곳은 증권시장뿐. 돈의 흐름이 곧 인간의 흐름이 되는 세상이다. 자본神이 돌보시는 축복받은 도시들은 매우 시끄럽지만, 그래서 텅 비어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에, 페르낭 브로델을, 레이먼드 윌리엄스를, 홍세화를 지지한다. 신이 죽었다고 따라 죽을 수는 없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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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스타가 출연하고 유명한 감독이 연출을 맡았음에도 결과는 기대에 못 미치는 영화들이 있다. 아쉽게 <칠검>도 그 범위에 포함되고 말았다. 배우들이 사공이 되려한 건 아닌 것 같고, 아마도 서극 감독 스스로가 한 편의 영화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다 보니, 결과적으로 영화가 산으로 올라간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개인적으로, 서극 감독에게 많은 걸 바라지는 않는다. 그는 화려한 볼거리를 생산해내는 데는 능숙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이를테면 감정)을 형상화하거나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전개하는 등의 섬세한 기술과는 별로 친하지 않은 감독이기 때문이다.

<칠검>은 외형상 커다란 스케일을 자랑하기는 하지만, 인물의 감정과 갖가지 플롯들이 오밀조밀하게 연결되어야 하는 설정을 안고 있는 영화기도 하다. 하지만 난세에서 오는 슬픔, 상처, 칠검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 등 영화 스스로 설정해 놓은 주제는 결국 로맨스라는 서브플롯, 그리고 등장인물의 무모한 행동과 뜬금없는 대사들 아래로 잠수하거나 슬쩍 사라지고 만다. 감독은 그 긴 상영시간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멋만 잔뜩 부리는 진부하고 건조한 액션만 반복할 뿐이다. 좋은 주제의 강의가 있어 찾아갔는데, 강사가 주제와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만(그것도 재미없고, 앞뒤도 엉성한) 늘어놓고 강의 끝났다고 가라면 이와 비슷한 기분일까. <동사서독>과 닮았고(사막만), <7인의 사무라이>와도 닮았지만(7이라는 숫자만), <칠검>은 결국 두 영화는커녕, <황비홍>의 근처에도 못 미치는 매우 비싼 졸작이 되고 말았다. ⓒ erazerh

# '한국관객을 더 많이 끌어들이기 위해'를 말고는 도무지 존재의 이유를 떠올릴 수 없는 김소연. 그녀가 절벽에 서서 외쳤던 대사 '집~!'이 자꾸 떠오른다. 누가 이런 코믹 멘트를 생각해냈는지 심히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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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돼지가 도심에 나타났다가 죽임을 당했다. 고양이들은 도둑질을 했는지 어쨌는지 몸 여기저기에 못이 박혔다. 인간이 아닌 것들의 생명은 하찮고도 하찮다.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손가락 하나로 지나가는 개미를 눌러 죽일 수 있는 인간들. 그 위대함이란!

아.. 정말이지 인간이라 행복해요.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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