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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이 기억해야 할 남자배우


2년 전 <결혼은 미칫진이다>를 보면서 나는, ‘그냥 그런 탤런트 한 명이 또 영화로 흘러왔겠지’라고 대충 선을 그어버렸던 나의 선입견이 얼마나 오만불손한지를 깨달아야 했다. <결혼은 미친짓이다>에서 감우성은 결혼제도로의 귀속을 위선이라 규정짓지만 그로 인해 겪어야 하는 현실적 괴리 안에서는 완전히 자유롭지도 못한, 준영이라는 인물로 등장했다.


감우성은 드라마에서 보이던 세련된 도시적 이미지를 준영 안에 투영하는 한편, 결혼과 섹스에 대해 여전히 혼란스러운 현대인의 표정 또한 영화가 요구하는 대로 적절하게 담아냈다. 11년 드라마 경험은 절대로 ‘그냥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올 한 해 스크린을 채워온 많은 스타들 중에서 2004년이 기억해야 할 단 한 명의 남자배우를 꼽아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 편에서 남긴 아우라는 넘지 못했지만 여전히 건재를 과시한 최민식과 송강호, 기록적인 숫자의 관객과 대면한 설경구, 장동건, 그리고 <주홍글씨>로 돌아온 한석규 등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저마다 내공을 십분 발휘했으니 말이다.

이 출중한 연기자들 가운데 굳이 감우성이라는 이름으로 지면을 꾸리는 이유는 그가 열연한 이미지에서 자신의 어두운 내면과 마주하는 동시대 누군가의 얼굴과, 제대로 기억되지 않는 어떤 사건을 되짚어보라고 말하는 고통에 찬 시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 내면의 그늘은 감우성의 표정과 대사, 몸짓을 통해 두 영화 속에 매우 적절하게 녹아든다.

감우성은 올해 <거미숲>과 <알포인트>, 두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거미숲>에서는 일상적 삶에서 살인사건으로 묘하게 얽히는 강민 PD 역할을, <알포인트>에서는 알포인트가 자아내는 공포 앞에서 무기력하게 함몰되어가는 최태인 중위라는 인물을 그려냈다.


<거미숲>, 분열된 두 자아

송일곤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거미숲>은 관객이 편하도록 차근차근 설명하는 영화가 아니다. <거미숲>은 도망쳐왔던 기억으로 회귀해 기어코 소통을 시도하려는 한 인간의 어떤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 처음에는 살인자의 실체를 추적하는 관습적 내러티브의 문법으로 시작하지만 그것도 잠깐, 영화는 인과관계나 시간의 흐름과는 거리를 두며 마치 꿈속을 유영할 때나 만날 듯한 모호한 이미지로써 기억의 파편들을 얽어낸다. 

그리고 그 주체는 강민의 분열된 자아들이다. 망각의 흔적과, 죄책감이 빚어낸 갖가지 환영들을 경험한 후, 두 자아는 분열의 근원지인 거미숲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서로를 마주보기에 이른다. 영화의 마지막, 단절되었던 기억과 고통스럽게 대면하는 순간, <거미숲>은 강민의 영혼에 삶을 지속하라는 의지를 불어넣으며 구원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강민은 에우리디케를 잃은 오르페우스이자 괴로운 과거와 공존함으로써 불안할 수밖에 없는 동시대의 ‘누군가’이기도 하다. 강민은 감우성의 몽롱한 눈빛을 통해 자신과 그 누군가에게 비로소 나직하게 입을 연다. 숲으로 가야 한다고.

<거미숲>은 송일곤을 재발견하는 영화인 동시에 감우성을 배우로서 확실하게 인지시키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배우는 작품이 전달하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전문직업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감독과 직접 토론해가며 강민의 분열된 이미지 속으로 자신을 지속적으로 투영시킨 감우성의 노력이 <거미숲>을 뛰어난 영화로 만든 이유 중 하나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알포인트>, 과거 또는 현재의 얼굴

<알포인트>가 평단과 관객에게서 공통적으로 호평을 받은 이유는 안전한 전략에만 안위한 채 사다코의 망령으로부터 조금도 나아갈 의도가 없었던 올해의 공포물 속에서 <알포인트>만이 유일하게 장르를 활용할 줄 아는 영화기 때문이다. 공수창 감독은 미화되기에 급급했던 베트남을 악몽으로 환원시켜 호러의 장르로 집어넣고 나아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딜레마적 상황에 회의의 시선을 남기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알포인트는 역사의 어긋남이 만들어낸 원귀, 그 원귀가 만들어낸 또 다른 한(恨)들이 그물망의 형태로 똬리를 틀고 있는, 들어왔으되 나갈 수는 없는 폐쇄적 공간이다. 그 중심에 자리한 최태인 중위는 베트남 안에서는 가해자로, 공포로서의 낯선 타자 앞에서는 피해자로 존재한다. 그리고 명분 없는 전쟁이 알포인트에 공포를 가져왔음이 명백해질 때, 최태인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운명을 동시에 겪어야 하는, 어딘가로 내몰렸던(또는 내몰리고 있는) 익숙한 청년의 얼굴이 된다.


감우성은 이 영화에서 공포와 광기, 절망 등 다양한 내면의 스펙트럼을 표출하며 이국땅에서 낯설 수밖에 없는, 그래서 무기력하고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표정을 담아낸다. <알포인트>는 “인간의 심리를 드러낼 수 있는 내면연기가 하고 싶다.”란 감우성의 말을 울림으로 만들어준 영화로도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거미숲>의 강민과 <알포인트>의 최태인은 과거로 회귀한다는 설정에 있어 닮은 인물이다. 강민은 불완전한 주체 안에서 비틀거리듯 조각난 기억을 끼워 맞추며, 최태인은 역사가 남겨놓은 보이지 않는 잔존물에서 허우적거린다. 차이라면 전자가 구원의 희망에 도달하는 반면 후자는 어디에서도 탈출구를 찾지 못한다는 점이다. 감우성은 그 두 인물의 내면을 통해 깊숙한 곳에 꼭꼭 감추어 두고 있었던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끌어내고야 만다.


배우로서 거듭나기, 또 다른 음색을 찾아서

영화라는 메커니즘이 스크린을 통해 관객 앞으로 가기까지가 얼마나 힘든 여정인지 감우성은 두 영화가 겪은 쉽지 않은 행보를 통해 몸소 터득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 남자의 머릿속에 얽힌 기억과 환상이라는 그리 친근하지 않은 소재를 역시 전혀 친절하지 않은 플롯으로 구성한 <거미숲>은 개봉날짜를 잡는데 애를 먹었을 뿐만 아니라 스크린에 모습을 나타낸 것도 잠시, 소리 소문 없이 쓸쓸하게 퇴장하고 말았다.

<알포인트>는 흥행에서 대중적 성공은 거두지만 촬영일정의 반복적인 수정과 <지옥의 묵시록> 못지않았던 캄보디아 로케이션의 어려움 등 태생적 수난에 몇 번이나 부딪혔고, 감우성은 마치 자신이 한 영화의 탄생을 위해 진통을 감내하려는 듯 간 수치가 죽음 일보 직전까지 올라가는 육체적 한계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는 <거미숲> 촬영 당시, 강민의 뇌수술에 보다 현실감을 주고자 머리의 반을 밀자고 직접 제안했으며 살해 장면을 찍을 때는 자신의 목소리로 표현 수위에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알포인트>에서 관등성명을 대라고 고함치는 장면은 그의 끈질긴 고집이 지켜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 한 편 찍는데 힘들지 않은 배우가 어디 있겠냐마는 감우성이 결코 쉽지 않게, 나름대로의 고민을 가지고 연기에 몰입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지난 주 한해를 결산하는 영화제들이 이어졌지만 그 곳에 감우성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거미숲>과 <알포인트> 역시 몇몇 후보 목록에서 간간히 눈에 띄었을 뿐 별다른 주목은 받지 못했다. 물론 영화제 수상여부가 영화나 배우를 가늠하는 절대적 가치가 될 수는 없다.

약간은 쌀쌀한 지금, 정작 필요한 것은 비단 정신·육체적 고통을 감내한 감우성의 ‘배우되기’나 <거미숲>과 <알포인트>가 현실과 대면하고자 시도했던 치열한 작업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영화들이 공존하고 회자될 수 있을만한, 다양한 목소리의 수렴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

<알포인트>의 공수창 감독은 감우성을 일컬어 “약간의 튜닝 차이에 따라 음색이 미세하게 달라지는 악기 같은 배우"라고 했다. 감우성이 다음 영화로 <간큰 가족>이라는 코미디 장르를 선택했다는 소식이 들리는 요즈음, 그가 코미디에서는 어떤 새로운 음색을 선사할지, 그리고 언제인가 다시 들려줄 심연의 음색은 어떤 얼굴을 그려낼지 자못 궁금해진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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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창조적으로 소통하기 위해서


바쟁의 영화이론

앙드레 바쟁은 19세기 실증주의의 영향 아래 있던 영화이론에 현상학과 심리학을 끌어들였다. 이것은 영화가 스크린 속에서 뿐만 아니라 프레임 바깥의 외부 세계와도 연관되어 존재함을 의미한다. 현실과 관객이라는 외부 영역과 능동적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민주적 개념이 영화로 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바쟁에게 있어 관객이란, 영화가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이미지를 경험에서 터득한 스스로의 주관으로 재구성하는 사람이다. 영화적 오브제는 관객의 머릿속을 지나면서 현실 속 이미지와 구별되고, 그 구별을 통해 관객은 영화의 또 다른 창조자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쟁은 관객의 심리가 민주적이고 주체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서 영화가 리얼리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조작된 영화들을 비판하며 소비에트 몽타주 미학을 그 일례로 들었다. 주관성이 개입된 조작의 이미지들은 관객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바쟁은 현실과 세계 그 자체가 가진 모호함을 그대로 전달하는 영화들-장 르느와르의 영화나 네오리얼리즘과 같은-을 옹호했다.

그는 리얼리즘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끌어왔다. 현실을 닮은 모호한 이미지들은 경험을 통해 체화해온 주관성을 가지고 관객이 창조적으로 지각하게 된다. 이 같은 절차는 관객에게 또 다른 체화의 과정으로 작용한다. 영화는 관객에게 있어서 지각할 수 있는 어떤 경험이 되는 것이다.

현상학은 그 경험을, 세계와 타인들 속에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는 경이로움이라고 말한다. 결국 바쟁에 따르면, 관객이 체화된 주관으로서 재구성하고 세상과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 놓는 영화가 좋은 영화인 셈이다. ‘창조적인 다큐멘터리’의 작가로서 로버트 플래허티를 높게 평가한 이유다.


대표적인 ‘앙드레 바쟁적’ 영화 <엘리펀트>

집안에 거대한 코끼리가 들어앉았다. 어떻게 하긴 해야겠는데 손쓰기가 쉽지 않은 상황, 결국 어쩔 수 없이 코끼리와 함께 살며 그 상황에 점점 익숙해진다. 구스 반 산트는 미국의 고등학교를 서양우화에 나오는 코끼리에 비유한다.

영화 <엘리펀트>는 ‘어쩔 수 없는 코끼리’인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충격의 16분을, 감정이입을 최대한 자제한 채 그야말로 ‘관조적’으로 뒤쫓는다. 현실을 자의적으로 구성하지 않은 채 당시의 일상적 풍경을 있는 그대로 펼쳐낸다는 점에서 <엘리펀트>는 앙드레 바쟁이 말한 좋은 영화에 가깝다.


영화 속 아이들은 특별하지 않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에 대해 고민하며 눈물 흘리는가 하면 학교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사진 찍는 것이 낙인 녀석도 있다. 다이어트 중독에 걸린 세 명의 치어리더나 외모로 인해 고통 받는 여자아이 등 모두가 쉽게 볼 수 있는, 고등학생의 그저 그런 모습이다.

심지어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알렉스와 에릭조차 평범한 아이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왕따를 당하고, 게임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며, 히틀러의 영상을 보기는 하지만 영화는 이런 상황을 살인의 동기로 단정 짓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누구나 총을 살 수 있는 환경 역시 하나의 단서일 뿐 원인은 아니다.

어디에서나 만나고 겪을 수 있는 이 아이들의 일상은 ‘추악하고도 화창한 어느 날’에 일그러진다. 그 균열의 순간을 담기 위해 구스 반 산트는 사실적이고 건조한 문법을 선택한다. 비극과 그 직전의 ‘아무렇지도 않음’에 대한 관찰은 필연적으로 관객의 시선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평범한 생활을 담담하게 담은 숏들은, 절제된 카메라와 어우러진 채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을 하나하나 교차하고 반복한다. <엘리제를 위하여>와 <월광 소나타>의 슬픈 연주는, 롱테이크로 끌어보지만 결국은 비극 앞에 멈춰 서야만 하는 아이들에 대한 애도이자 관객이 감정을 소통할 수 있는 입구가 된다.

구스 반 산트는 시간과 공간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하나하나 훑어보면서 그 모든 것들이 일상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왜 비극이 발생했는가?’라는 물음은 프레임 밖에 남겨둔 채 말이다. 앙드레 바쟁이 <엘리펀트>를 일컬어 진정한 ‘창조적 다큐멘터리’라고 극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같은 콜럼바인 고교 사건을 다루었지만 마이클 무어가 미국에 내재하는 폭력성을 주관적인 분석으로 따져 묻는 반면, 구스 반 산트는 그저 아이들을 차분히 응시한다. <볼링 포 콜럼바인>이 잘 짜여진 논설문 또는 거꾸로 읽는 미국사라면, <엘리펀트>는 그 풍경에 대한 한 편의 ‘시화(詩畵)’를 연상시킨다. 앙드레 바쟁의 시각으로 본다면, 주관이 개입할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 놓은 <엘리펀트>가 영화적으로 더 뛰어난 화법을 가지는 것이다.



영화를 창조적으로 재구성 한다는 것

지나친 이상주의자로서 바쟁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바쟁 이 후 등장한 다양한 테크닉은 롱테이크와 딥포커스, 롱 숏만이 영화기법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서로 다른 형식을 가진 영화들이 공존하는 지금에 봤을 때, 리얼리즘이 드러나는 정도만으로 관객의 참여 가능성을 단정했던 바쟁의 이론은 무리가 따른다. ‘또 다른 창조’의 권한을 리얼리즘만으로 미리 재단해서는 다원화가 정착된 지금의 영화 풍토를 아우를 수 없기 때문이다.

바쟁이 말한 민주적 재구성자로서의 관객은, 주관적 참여가 가능함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필연적으로, 영화를 규정하고 선택할 권리마저 손에 쥐게 되었다. 관객이 가진 다양한 기호와 시선의 영역이 영화를 창조적이고 능동적으로 해석한다는 행위에 선행되거나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의 창조적 재구성이라는 화두는 결과적으로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가 보다는, ‘어떤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영화가 세상을 들여다보는 예술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바쟁이 열어 놓은 영화와 관객의 소통 가능성을 여전히 전제로 삼아야 한다.

다시 <엘리펀트>로 돌아와 보자. 이 영화를 바쟁에 따라 좋은 영화라 규정하든지, 스스로 판단하든지 그것은 자유다. 하지만 만약 ‘관객의 역할’에 동의한다면, 능동적으로 영화를 완성하고 싶다면 해야할 일은 분명해진다. 바로 <엘리펀트>가 남겨 놓은 그 빈 공간으로 들어가 <엘리펀트>를 만든 현실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해보는 것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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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시티 오브 갓 (Cidade De Deus / City Of God, 2002) 
감독 :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출연 : 마테우스 나스터갈, 세우 호르제


정말 보고 싶던 영화였는데... 운좋게 종로영화제에서 발견...

<증오> 이 후 가장 힘있는 영화라 생각한다. <증오>가 세 녀석의 그 대상조차 찾지 못하는 '증오'를 통해 폭염처럼 답답한 세상풍경을 그려냈다면, <시티 오브 갓>은 어떻게 폭력이 '변두리'라는 공간을 지배하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내러티브는 경쾌하고 등장인물들은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지만, 사실상 영화는 매우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마지막에 나오는 호러영화 문법-아직 끝나지 않았다-은 어떤 호러의 그것보다도 찜찜한 여운을 남겨준다.

'시티 오브 갓'의 아이들은 탈출할 수 있을까...?
그들의 표정은...

목이 떨어져 나가야 하는 운명에 봉착한, 한 마리 닭의 눈동자처럼.. 불안하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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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억 속으로 들어가다

누구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기억은 각각 에피소드가 되어, 지나온 시간들을 채워 넣고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낸다. 가끔씩 기억의 한 조각을 끌어내고서 그 때 이렇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낄 때가 있다.

자신의 삶에 백 퍼센트 만족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다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이 현실의 불만족스러운 부분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 돌아갈 수는 없으되 머릿속에는 남아있는 기억의 파편들 때문이다.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내는 이 같은 욕망에서 출발하는 영화가 바로 <나비효과(The Butterfly Effect)>다. ‘나비효과’는 중국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에서 허리케인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이론으로, 작은 변화라도 나중에는 커다란 결과를 불러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를 바꾼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J. 마키에 그러버와 에릭 브레스가 공동 각본, 감독한 영화 <나비효과>는, 한 청년이 현재 삶의 잘못된 부분을 바꾸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기억들에 관여하는 이야기를 줄기로 한다. 시, 공간을 초월하는 여정인 셈이다.

<백 투 더 퓨처>에서부터 <레트로엑티브>, 약간 틀리지만 <사랑의 블랙홀>까지 어떤 목적을 위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시간의 흐름에 인위적으로 개입한다는 내용은 꽤나 익숙하면서도 흥미를 주는 소재다.

<나비효과>가 과거로 되돌아가기 위해 설정한 도구가 타임머신과 같은 과학적 기구가 아닌 일기장(혹은 영상물), 즉, 기억의 흔적이라는 점은 위의 다른 영화들과 선을 그을 수 있는 부분이다.

어린 시절의 에반(에쉬튼 커처)은 일기장에 하루하루의 기억을 기록해 놓는다. 어떤 충격적인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순간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병을 앓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된 에반은 자신의 일기를 통해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음을 발견하고 어릴 때 짝사랑했던 캘리(에이미 스마트)의 운명을 바꾸고자 비어있는 시간으로 자신을 돌려보내기 시작한다.


어릴 적 기억하지 못했던 그 텅 빈 시간은 어른인 에반이 돌아와 직접 관여할 수 있는, 또는 이미 관여했던 틈이 된다. <나비효과>는 에반이 과거의 시, 공간으로 들어와 새롭게 개입함으로써 현재의 모습들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에피소드처럼 나열한다. 하지만 뜻하는 바와 달리 캘리와 다른 친구들, 그리고 자신의 삶 등 모든 부분에 균형잡힌 행복을 가져오기가 쉽지만은 않다.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는 긴장감

처음으로 과거를 바꿀 때, 그러니까 에반과 캘리가 아동 포르노를 찍어야 했던 순간을 바로 잡고 현실을 재구성할 때만 해도 영화는 긴박한 흐름을 간직한다. 하지만 바뀐 현실이 다른 불행을 낳고 또 다시 일기장을 찾아 기억을 더듬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면서 에반의 절박함은 긴장의 끈을 놓아버린다.

어린 시절 하나의 경험만으로 네 사람의 삶과 성격이 송두리째 바뀐다는 설정은 후반부에 다다르면서 운명의 재배치가 필연적이라 설득하던 초반의 감을 조금씩 상실한다. 나비효과 이론을 감안하더라도, 개개인 스스로 자신의 삶을 충분히 꾸려나갈 수 있다는 여지에 대해서 영화는 지나치게 침묵한다.


무엇보다도 <나비효과>가 창녀와 대학생, 살인자와 대학생 등 삶을 제한된 이분법의 신분 구조 안에서만 설명, 기억으로부터 상상되는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포함하지 못한 채 과거 개입이라는 흥미 있는 장치를 에반의 선택을 강요하는 극단적 영역 안에서만 활용하는 점은 아쉽다.

에반의 선택은 결국 ‘사랑하는 이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는 관습적 테마를 ‘또 다시’ 불러온다. 그럭저럭 맛은 있을지 몰라도 새로운 것은 없다.

<나비효과>는 다른 엔딩을 가진 두 가지 버전으로 제작되었다. 감독판은 극장판이 버리지 못한 로맨스의 여운에서 약간 비켜나 또 다른 범주로 결말을 끌어낸다. 그렇다고 지금 말한 아쉬운 부분이 모두 채워지진 않지만, 어찌되었든 감독판을 스크린에서 만나지 못하는 현실은 조금 안타깝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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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트 이블 2...

할 말 별로 없는 영화...

1편이 그립다...

그림은.. 잘 나온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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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려내는, ‘슬픈 욕망들’의 교차점


우리 모두는 삶이라 불리는 제한된 시간 속에 있다.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몫에 집중하느라 모르는 사람의 삶에까지 일일이 관심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여기,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삶(또는 죽음)에 잠시나마 주목하게 해줄 ‘드라마’ 한 편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들려준다. 벌새 한 마리, 초코바 하나, 5센트 동전 다섯 개, 사람이 죽을 때 빠져나가는 그 무게들이 모두 21그램이라고. 21그램은 과연 어느 정도의 무게일까?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21그램(21Grams)>은 다소 독특한 화법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연하게 발생한 교통사고. 아무런 관계없이 살아가던 세 사람은 이 사건으로 인해 서로 얽히고 원치 않았던 고통이 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다. 영화는 이 아픔들, 그리고 거기에서 빠져 나오고자 몸부림치는 ‘슬픈 욕망들’의 교차점을 그려내며,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영혼'의 무게를 저울질해본다.


누군가와의 ‘관계’는 아픔을 수반한다

<21그램>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의 사고로 여러 가지 상황이 생겨나고 또 이 상황들은 세 사람의 인간관계에 변화를 가져온다. 슬픔과 상처로 가득한 내면은 위로하려는 마음, 위로 받으려는 마음, 또는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 등을 거치면서 스스로를 치유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관계가 생성되거나 기존의 관계가 깨어진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상실해버린(혹은 그 상실로 소중한 것을 얻은) 이들은 결국 또 다른 이들에게 상실을 남긴 채, 그 슬픔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누군가와 소통하며 산다. 이 관계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낳기도 하지만 결국 인간은 그 고통마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으로 끌어들인다. 어쩌면 <21그램>은 슬픔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에서 비롯하는 필연적인 고통을 말하려는 지도 모르겠다.


편집 -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

<21그램>에서 가장 관심거리가 되는 부분은 역시 편집이다. 시간 흐름에 어긋나는 신(scene)들이 배치되면서 영화의 초반, 사건 전개를 따라잡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신과 신을 시간 역순으로 배치하고 나중에 가서야 그 모든 인과관계를 바로 잡는 <메멘토>에 비하면, 이 영화의 시간 배열은 그나마 머리가 덜 아픈 편이다.

<21그램>의 독특한 편집은 관객과 ‘퍼즐’을 해보자고 내놓은 것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편집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툭툭 던져졌던 신들은 중반 즈음해서, 관계의 변화와 이에 따른 갈등의 전개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데 도움을 준다. 영화 초반, 시간 흐름을 방해하던 그 장면들이, 각자의 고통이 어디서 교차하고 어떻게 귀결될 지에 대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관객은 한 장면이 전개될 때 그 과거는 물론, 미래까지 감지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 신마다 나타나는, 감정의 섬세한 흐름이 보다 더 강조된다. 감독은 시간 순서에 따른 원인, 결과가 아닌, 운명의 무게에 짓눌린 인간이 감정을 폭발하고 흐느끼는, 그 순간순간에 벌어지는 관계를 조합함으로써 극을 이끌어 나간다.

<21그램>에서 시간은 쪼개지지만 그 조각난 시간 사이에 있는 삶의 모습은 면밀하게 연결되어 인과관계의 틀을 완성해낸다. 시간 순서가 아니라 감정의 굴곡들이 영화를 전개하는 것이다.

이 같은 편집의 효과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배우의 연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숀 펜, 베니치오 델 토로, 나오미 왓츠 등 모든 배우가 삶과 죽음 앞에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감정을 완벽하게 재현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거쳐 <21그램>에 이른 나오미 왓츠는, 배우로서 최고의 전성기에 접어든 듯 훌륭한 연기를 선보인다. 앞서 말한 두 배우는 물론 말할 것도 없다.


질문을 남기다

영화 <21그램>은 탄탄한 드라마트루기와 이를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편집 등 감독과 배우의 역량이 잘 조화된 작품이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새롭고도 흡입력 있는 플롯으로 삶이라는 무대가 그려내는 갖가지 감정의 분출을 밀도 있게 집어낸다.

21그램이 오가는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여정이 빚어내는 다양한 관계와 감정에 관한 이야기 <21그램>. 영화는 분명 시간, 공간적으로 허구지만 <21그램>의 디제시스는 우리가 현실에서 느끼는 아픔들을 그대로 담아낸다.

싫든 좋든 우리는 삶과 죽음이라는 절대명제 앞에 던져진 존재다. 결국은 끝나야 할, 인생이라는 시간과 공간. 그 안에서 우리가 얻는 것과 잃는 것, 그리고 우리가 지키려고 애쓰는 ‘영혼’이라는 것에 대해 <21그램>은 ‘생각’해볼 것을 권유한다.

21그램이라는 무게는 가벼울 수도, 무거울 수도 있다. 21그램이 무거워진다면, 그것은 아마도 매우 슬픈 순간이 될 것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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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 반 산트 감독, 그의 최고 걸작을 만들다


집안에 거대한 코끼리가 들어앉았다. 어떻게 하긴 해야겠는데 손쓰기가 쉽지 않은 상황. 결국 어쩔 수 없이 코끼리와 함께 살며 그 상황에 점점 익숙해진다. 구스 반 산트는 미국의 고등학교를 서양우화에 나오는 코끼리에 비유한다.

영화 <엘리펀트(Elephant)>는 '어쩔 수 없는 코끼리'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충격의 16분을, 감정이입을 최대한 자제한 채 그야말로 '관조적'으로 뒤쫓는다.

영화 속 아이들은 특별하지 않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에 대해 고민하며 눈물 흘리는가 하면, 학교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사진 찍는 것이 낙인 녀석도 있다. 다이어트 중독에 걸린 세 명의 치어리더나 외모로 인해 고통 받는 여자아이 등 모두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고등학생들의 그렇고 그런 삶의 모습이다.

심지어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알렉스와 에릭조차 평범한 아이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왕따를 당하고, 게임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며, 히틀러의 영상을 보기는 하지만, 영화는 이런 상황을 살인의 동기로 단정 짓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누구나 총을 살 수 있는 환경 역시 하나의 ‘단서’이지 원인은 아니다.

영화는 비극과 그 직전의 ‘아무렇지도 않음’을 그저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나와 당신이 어디에서나 만나고 겪을 수 있는 이 아이들의 일상은 ‘추악하고도 화창한 어느 날’에 일그러진다.

같은 콜럼바인고교 사건을 다루었지만 마이클 무어와 구스 반 산트의 표현기법은 다르다. 마이클 무어가 미국에 내재하는 폭력성을 분석하고 따져 묻는 반면, 구스 반 산트는 그저 아이들을 차분히 응시한다. <볼링 포 콜럼바인>이 잘 짜여진 논설문 또는 거꾸로 읽는 미국사라면, <엘리펀트>는 건조체로 쓰여진 한 편의 시다.

숏들은 평범한 생활을 담담하게 담고, 절제된 카메라와 어우러져,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을 마치 ‘간직’하려는 듯이 각각의 시점에서 교차하고 반복된다. 구스 반 산트는 시간과 공간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하나하나 훑어보면서 그 모든 것들이 일상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야 했음에 주목한다. ‘왜 비극이 발생했는가?’라는 물음은 화면 밖에 남겨둔 채 말이다. 앙드레 바쟁이 살아있었다면 진정한 ‘창조적 다큐멘터리’라고 극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엘리제를 위하여'와 '월광 소나타'의 슬픈 연주는 롱테이크로 반복해보지만 결국은 비극 앞에 멈춰 서야만 하는 아이들에 대한 애도이자 관객이 감정을 소통할 수 있는 입구이다.

집안의 코끼리처럼 어쩌지 못한 채 함께 가야 할, 가끔은 터질 수도 있는 시한폭탄으로 자리 잡은 미국의 고등학교. 구스 반 산트는 한 학교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을 차분하면서도 슬픈 화법으로 재현함으로써, ‘아무렇지도 않게’ 시작된 그 광기의 순간을 고발하고 애도한다.

'월광소나타'가 그토록 슬프게 들리는 이유는, 미국의 코끼리 못지않은 어떤 무언가를 당신과 내가 짊어진 채 살아야 하는 비극 때문이 아닐까? 영화 안에서도 영화 밖에서도, 하늘은 여전히 추악하고 화창하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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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만남, 서로의 빈 공간을 들여다보다


남녀관계에 대한 물음은 문학, 연극, 회화 등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한 창작물들이 가장 꾸준하게 다루어온 소재 중 하나다. 영화도 예외는 아니어서 딱히 로맨스나 멜로가 아니더라도 이성관계를 영화의 축으로 삼는 설정은 매우 낯익은 일이다.

이는 아마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모든 인간관계의 중심에 자리 잡은, 가장 근원적으로 욕망되는 소통의 활로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그 모든 문화예술이 여전히 ‘사랑이 무엇인가’에 관해 계속해서 질문해오는 것은 남녀관계가 그만큼 정의내리기 어렵고 본질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증거가 아닐까.

9년 전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사랑에 관해 짧은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줬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는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의 짧지만 열정 가득했던 하룻밤의 만남을 통해, 20대가 가질 만한 삶과 사랑에 대한 개념들을 차근차근 모아 솔직담백한 대화 속에 담았다.

<비포 선라이즈>는 사랑, 인생, 죽음을 결코 무겁지 않게, 그렇다고 가볍지만도 않은 독특한 화법으로 풀어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결론나지 않았지만, 낯설음과 사랑, 절제와 본능 간 경계를 오가며 극중인물과 관객의 감정을 묘하게 엮어내는 대화의 미학은 여전히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다시 대화하다

그리고 9년이 지난 지금, 링클레이터는 <비포 선셋(Before Sunset)>을 가지고 다시 나타났다.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가 함께 각본에 참여했다니 <비포 선라이즈>가 남긴 여운이 관객만의 것은 아니었나 보다.

9년이라는 세월은 두 사람에게 변화를 가져왔다. 꿈 많던 청년 제시는 작가가 되었고 셀린은 환경단체에서 일하며 ‘실천’의 삶을 살고 있다. 9년 전 비엔나를 모티브로 쓴 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제시는 파리에서 아주 우연히(!) 셀린을 다시 만난다. 약간의 서먹함을 뒤로 한 채 그들은 두 번째 만남을 시작한다.

<비포 선셋>은 <비포 선라이즈>와 어떤 면에서는 닮았고 어떤 면에서는 다르다. 대화는 여전히 열정적으로 영화를 끌어 나간다. 대사 한마디 한마디는 서로가 부재했던 9년이라는 시, 공간을 약간이라도 채워넣고 싶은 소통의 욕구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이 대화들은 프레임 밖으로 나와 관객에게 함께 호흡할 것을 요구한다.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 지나온 삶의 여정, 사랑과 섹스에 이르기까지 토론과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제시와 셀린이 동시에 깨닫는 것은 9년 전 비엔나가 각자에게 남긴 상실감이다. 이 상실은 시간이 긁고 지나가면서 생긴 삶의 상처들과 뒤엉켜, 그들의 영혼이 서로의 그림자 안에서 맴돌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한 편의 그림같은

영화는 줄곧 제시와 셀린을 보여준다. 물론 예전처럼 순수하거나 꿈에 젖어있지는 않다. 아마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현실이 그들의 이상을 하나씩 집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롱테이크로 두 사람을 따라다니며 파리 이곳저곳을 보여주지만, 이 역시 예전의 비엔나처럼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하지만 평범하고 차분한, 오후 햇살이 따사로운 파리의 전경은 언제부터 흘렀을지 모를 세느강처럼 여전히 피토레스크(그림의 대상이 될 만큼 아름다움)로서 기능한다. 9년 전 추억을 마음 한구석에 접어둔 채 살아온 두 사람이, 과거를 회상하고 상처를 내보이며 서로의 시간을 포개는 순간, 그림은 어느덧 완성된다.

<비포 선셋>은 인상주의의 감성을 지닌 영화다. 삶의 한 순간을 붙잡고 그 시간과 공간의 감정을 그려내는 점도 그렇지만, 오후의 햇빛이 세느강과 셀린의 머리 위에 뿌리는 빛을 보노라면 <비포 선셋>의 프레임은 마치 모네의 작품처럼 느껴진다.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 사이의 간극은 제시와 셀린만이 가지는 시간이 아니다. 이는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기억이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때로는 추억으로 때로는 파편으로 채워온, 삶의 단면들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듯, <비포 선셋> 역시 사랑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 남녀사이에 어떤 답을 내리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을 전제로 하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링클레이터 또한 어떤 결론이나 철학을 내보일 생각은 없는 듯하다. 영화는 한적한 오후 마냥 그렇게 사랑, 인생, 세상을 이야기한다.

셀린의 ‘Let me sing you a waltz'를 듣고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제시. 은은한 미소가 입가에 퍼지고 나도 모르는 눈물이 살짝 맺힐 때, 비로소 영화는 최고의 맛을 선사한다. <비포 선셋>은 아주 적절한 시기에 우리 곁으로 돌아온, 제대로 된 ’속편‘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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