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구조가 너무 납작해 전체 형상을 더듬을 필요도 없겠네, 시대 배경이 과거긴 해도 요즘 영화 풍토에 이렇게 뻔뻔한 악이라니, 에이 시시하네, 라고 생각했다가 불현듯 지금 홍콩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떠올라버렸다. 뻔뻔함의 어떤 궁극에서 작동하는 힘, 악(惡). 그래 그거.

 

무릇 현실은 영화보다 무겁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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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감도 양심도 능력도 없는 인권무새하나 때문에 벌어지는 참극. 문제는 서사의 태도가 원시적 선악론에 머무르다 보니 이게 참극인지 뭔지, 원인이 뭐였는지를 영화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사실. 물론 만듦새 자체도 꽝. 이래저래 고구마 18개는 먹은 듯하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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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비의 ‘바이블’부터 재기발랄 ‘변주’까지

 

 

영화 ‘부산행’과 시리즈물 ‘킹덤’, 최근의 ‘#살아있다’와 ‘반도’까지 한국산 좀비 콘텐츠도 그 면면이 다양해지고 있는데요. 별로다, 이걸로 모자라다, 더 많은 좀비가 필요해, 라는 이들을 위해 ‘놓쳐선 안 될 급’의 좀비영화 10편을 꼽아봤습니다. (※ 순서는 제작년도)

 

-------
1. 데드 3부작 / 감독 조지 로메로 =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Night Of The Living Dead, 1968) ▲시체들의 새벽 (Dawn Of The Dead, 1978) ▲시체들의 날 (Day Of The Dead, 1985)

 

현대 좀비물의 공식과 관습을 정립한 좀비계의 바이블들. ‘시체들의 새벽’은 평론가 로저 애버트한테 “현존 공포영화 중 최고작”이란 평도 들었지요. 가족주의, 백인우월주의 등 당시 우월하다고 여겨진 가치들의 위선을 들춰내고 꼬집습니다. ‘살아있는 시체의 밤’의 블랙 코미디 버전인 바탈리언(1985), 재해석이 돋보이는 동명의 리메이크작(1990, 톰 사비니 감독)도 추천.

 

좀비계의 바이블들. <시체들의 새벽>

 

 

2. 좀비오 (Re-Animator, 1985) / 감독 스튜어트 고든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케 하는 설정에 메디컬 호러와 SF적 요소를 끼얹은 혼성 장르 공포물입니다. 잔혹하고 기괴한 이미지와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얽히는 데서 오는 부조화의 재미가 도드라집니다. 슬랩스틱 스플래터의 전설과도 같은 작품이지요.

 

부조화의 재미. <좀비오>

 

 

3. 데드 얼라이브 (Braindead / Dead Alive, 1992) / 감독 피터 잭슨

 

거장 피터 잭슨의 초기작으로, 기존 좀비물과 차별화된 전개를 통해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이를테면 좀비를 두려움이 아닌 ‘처리’의 대상으로 다루기. 조악한 면도 있지만 그마저 장점으로 승화시키며 최강의 슬랩스틱 스플래터로 자리 잡습니다. 단, 잔혹성의 강도가 매우 높은 편. 관람에 주의를 요합니다.

 

최강의 슬랩스틱 스플래터. <데드 얼라이브>

 

 

4. 레지던트 이블 (Resident Evil, 2002) / 감독 폴 앤더슨

 

호러게임 바이오하자드가 원작으로, 게임 기반 영화 중 최고작으로 꼽히곤 합니다. 거대한 음모를 파헤치는 탄탄한 스토리에 액션·공포·스릴 3박자가 잘 어우러진, 오락영화로서 완전체에 가깝다는 게 정설. ‘리즈 시절’ 밀라 요보비치의 매력은 덤입니다.

 

액션·공포·스릴의 3중주. <레지던트 이블>

 

 

5. 28일 후 (28 Days Later…, 2002) / 감독 대니 보일

 

‘달리는 좀비’란 설정을 본격 도입, 좀비 스펙터클에 역동성을 첨가했습니다. ‘좀비보다 더 무서운 건 인간’이란 관점에 가장 충실한 작품이기도 하지요. 좀비 창궐로 문명이 붕괴된 세계, 원시성을 되찾은 인간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좀비보다 더 무서운 건 인간. <28일 후>

 

 

6. 새벽의 저주 (Dawn Of The Dead, 2004) / 감독 잭 스나이더

 

앞서 소개한 ‘시체들의 새벽’을 21세기에 맞게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원작처럼 좀비에 둘러싸인 쇼핑센터를 무대로 갖가지 인간 군상을 담아냅니다. 공포와 서스펜스, 묵시록적 세계관을 잘 버무려 좀비 마니아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마니아들의 열렬한(!) 성원. <새벽의 저주>

 

 

7. 새벽의 황당한 저주 (Shaun Of The Dead, 2004) / 감독 에드가 라이트

 

조지 로메로의 3부작 등 다양한 호러물들을 패러디했습니다. 코미디를 기반으로 호러, 로맨스, 액션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지요. 21세기 최고의 좀비영화로도 불리고 있으며, 타란티노 감독이 꼽은 1992년 이후의 베스트 무비 20편에도 들었습니다.

 

21C 최고의 좀비물로 불리는 <새벽의 황당한 저주>

 

 

8. 알.이.씨 ([Rec], 2007) / 감독 하우메 발라게로, 파코 플라자

 

페이크 다큐멘터리와 좀비물의 장르적 특성이 안정적으로 호환된 사례. 흔들리는 카메라에 담긴 히스테릭한 현장감을 좀비영화 고유의 예측 불가능성으로 잘 이어가지요. 무엇보다 ‘공포’라는 기본 정서에 충실, 호러 팬들의 갈채를 끌어냈습니다.

 

페이크 다큐의 정점. <알.이.씨>

 

 

9. 좀비랜드 (Zombieland, 2009) / 감독 루벤 플레셔

 

역시 코미디를 큰 줄기로 좀비물의 관습을 계승하고 또 비틀며 자신만의 재기발랄한 영역을 구축합니다. 실제 본인으로 등장하는 빌 머레이의 능청스러운 연기도 관람 포인트. 엠마 스톤과 제시 아이젠버그의 초창기 매력도 만날 수 있습니다.

 

관습을 계승하고 또 비틀고. <좀비랜드>

 

 

10.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One Cut of the Dead, 2017) / 감독 우에다 신이치로

 

좀비영화인 듯 아닌 듯, 최근 몇 년 간 등장한 변주형 좀비물 중 단연 눈에 띕니다. ‘좀비영화를 찍는다’는 설정에서 시작, 예기치 못한 이야기가 겹겹이 더해지는데요. B무비 특유의 조악함을 전에 없던 방식으로 진화시킨 아이디어는,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변주형 좀비물류 ‘갑’.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이상 좀비를 좋아한다면 놓쳐선 안 될 영화 10편을 꼽아봤는데요. 현대인의 고립감과 생존욕을 최전선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해온 장르가 바로 이들 좀비영화, 중독적 재미가 없을 수 없겠지요?

코로나19의 초장기화로 부쩍 늘어난 듯한 고독감, 좀비영화로 달래보는 건 어떨까요? ⓒ erazerh

 

 

-------

* 이 글은 여기서도.

 

[카드뉴스]‘장르가 좀비’ 놓치면 후회할 올타임 좀비영화 10선

영화 ‘부산행’과 시리즈물 ‘킹덤’, 최근의 ‘#살아있다’와 ‘반도’까지 한국산 좀비 콘텐츠도 그 면면이 다양해지고 있는데요. 별로다, 이걸로 모자라다, 더 많은 좀비가 필요해, 라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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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우린 늘 ‘나 자신을 연기’한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일 때 (잘) 살아남을까’에 관해 매일매일 (오)답변을 내놓는 모양새. ‘HOW’들이 모여 외부에 비치는 나, 즉 ‘WHO’를 구성하는 셈인데, 그러다보니 본심을 오롯이 드러낼 수 있는 경우는 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뿐이랴.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떨어지고, 굴욕의 바닥을 뒹굴고, 머리를 쥐어뜯고, 이걸 반복하다, 어쩌다 한 번쯤 으르렁대겠지만 효과는 미미할 뿐이고. 돌아보니 구멍이 숭숭 뚫린 형편없는 이음새, 표면, 삶.

 

다만 표면이 매끈하지 않다고, 연결이 세련되지 못하다고 해서 지나온 구멍들만 들여다보며 주구장창 자책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싶다. 그냥 그런 걸, 너와 나의 ‘연기’는 애초에 오류투성이로서의 운명을 타고난 걸 어떡해. 태어날 때 레디 액션, 외쳤으면 죽을 때까지 원테이크. 인생에는 편집이 없다.

 

그러니까, 그 구질구질한 여정에 대한 다독임.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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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없는 롱숏-롱테이크가 이토록 불확실·불안·불온하나니, 요동치는 건 서사가 아닌 너와 나의 마음.

 

기계로서의 카메라를, 등장인물은 물론 관객 각각의 심리적 영토로까지 슉, 순간이동해내는 마법. ⓒ erazerh

 

 

* 이제야 챙겨본 미카엘 하네케의 2005년작. 나한테 더 와 닿는 건 사실 바로 앞선 <늑대의 시간>(2003)이긴. 아무튼 물리적 관찰자라는 카메라의 속성 자체를 변환시키는 데는, 미카엘 하네케만 한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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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러난 진실들을 쥐고서 최종 숏으로

 

 

※ 『최종 S의 비밀』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Sequence), 신(Scene), 숏(Shot)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에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

영화는 의 예술이다. 인물들은 카메라의 시선에 상시 붙들려 있지만, 짐짓 이를 모른 촬영 현장만이 세계의 오롯한 전부인 양 꾸며댄다. 어쩌면 누가 더 시치미를 잘 떼느냐는 시합. 그렇게 이 쌓이면, 한 편의 영화는 그 자체로 독립된 단일 체계, 즉 처음과 끝을 간직한 유사-현실 덩어리가 된다.

 

이 독립성과 완결성이야말로 건드려선 안 될, 이야기의 본질이 아닐까. 이야기는 외부에서 널리 보이고 읽히되 절대 간섭받거나 변경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훔쳐보고, (현실과) 겹쳐보고, (원본의 수정 없이) 이리저리 만지작거릴 거리가 이야기인 셈. 이때 관객의 자리는 프레임 바깥에 깔려있으며, 러닝 타임 내내 안으로 건너올 수 없다. 일반적으로는.

 

 

이 열릴 때가 있다. 배우가 카메라를 쳐다봄으로써 인물과 관객을 대면케 하는 것이다. 대개 훔쳐보기라는 근본 규칙을 깨야 할 만큼 간곡한, 어떤 신호를 프레임 바깥으로 내보내고 싶은 경우다. 그중에서도 <살인의 추억>(2003)의 최종 숏은 효력이 너무나도 강렬해 신호 보내기의 롤모델로 불리는 게 마땅할 정도.

 

송강호(박두만 역)는 이윽고 고개를 돌려, 파르르 떨며, 한쪽 눈을 살짝 찌그린 채, 카메라(관객)를 쏘아본다.정의사회 구현을 간판으로 내건 나라, 짝퉁으로서의 평화적 구조를 무대 삼은 범인. 거기서 비롯된 울분을 박두만의 마지막 얼굴에 응축해놓은 봉준호 감독은, “범인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오리라 생각해서이런 엔딩을 준비했다고 밝힌 바 있다.

 

봉준호라면, 이 펄럭거리는 숏이 스크린을 찢고 나와 진범을 휘감는 상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살인의 추억>의 최종 숏

 

 

, 한 번 열린 문은 닫을 수 없다. 관객을 바라봄으로써 영화와 실재 사이에 심리적이되 실질적인 다리 하나를 놓은 셈. 애초에 특정 사건을 직접 끌어안은 영화의 숙명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현실에서 영화로, 영화에서 다시 현실로. 그런데 이 현실에 천지개벽할 변화가 생겼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밝혀졌고, 애먼 사람 하나가 20년간 잡혀있었다.

 

10건으로 알려진 화성 연쇄살인사건’, 14차에 걸친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으로 공식 명명(201912)

 
윤 모 씨, 8차 사건 범인으로 검거돼 20년간 죄 없이 복역 후 2009년 가석방(현재 재심 진행 중)

 

이 정도라면 영화 역시 한 번은 새로 고침해봐야 하지 않을까. 현실에서 영화로, 인식의 다리를 다시 건너보자. 물론 이 시점에서 봐도 숏들의 배치와 호흡은 경이롭다만, 떼 내기 어려운 의문점이 자꾸만 들러붙는다. 최종 숏이 클로즈업한 얼굴, 그 신호 보내기라는 막중한 임무를, 과연 박두만이 짊어져도 되느냐는 것. 요컨대 자격에 관한 물음 말이다.

 

- 윤 씨, 불법 체포·감금 가혹행위 고문 훈련된 자백 녹음 등 강압 수사에 못 이겨 (8차 사건) 허위 자백
- 윤 씨를 범인으로 특정하는 데 결정적 증거였던 국과수 감정서가 허위로 조작된 사실 확인
- 경찰, 이밖에 양손이 줄넘기로 묶인 초등학생(8)의 시신을 발견하고도 숨겨 단순실종 처리형사계장과 형사 1명에 대해 사체은닉과 증거인멸 등 혐의 적용
- 화성 8차 사건 말고도 억울한 사연 '수두룩(연합뉴스. 201910)

 

비극의 백광호. <살인의 추억>

 

이토록 잔혹한 폭압과 위법은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박두만을 중심으로 충실히 재현됐다.(518일 재심 첫 공판에서 영화의 이 부분 일부가 상영됐다) 그는 손수 발자국을 찍어 증거를 생산했고, 이 타이밍이다 싶으면 고갯짓으로 조용구에게 (용의자를) 군홧발로 짓밟으라 지시했다. 그러면서도 무능과 조작으로 잘려나간상사와, 폭력의 증거로서 결국 다리가 잘려나간용구와 달리 영화 끝까지 살아남는다. 자연스럽게. 무능과 폭력에 한 다리씩 걸친, 한통속 혹은 중심임에도.

 

이는 영화가 박두만 안에 시대의 후진성과, 진범을 잡고자 하는 절절한 욕구를 동시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넉살부터 처절함까지 양 극단을 횡단할 줄 아는 송강호의 표정이 그걸 가능케 했음은 물론이다. ‘살이 불어터지도록종일 목욕탕에 들어앉아 남들의 그곳이나 보고 다닐 때, 강변에서 링거를 맞으며 지치고 고단한 ·외면을 풍경으로 드러낼 때, 유력 용의자(또는 영화를 보고 있을 범인)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며 냉소할 때, 우리는, 미흡했지만, 악의는 없는, 투박한 진심을 본다.

 

이건 아마도 당시 형사들의 갖가지 결을 두루 섭렵해야 하는, 극의 중심에 놓이도록 설계된 인물로서의 필연적 복합성일지도 모르겠다. 용구도 서태윤도 맡을 수 없는 자리. 그렇게 박두만은 후졌지만 호감은 가는, 이런저런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허용되는 캐릭터가 됐다. 물론 이 영화적 장치는 충분히 수용 가능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 숏에 이르러서는 이제껏 본 적 없는 깊이의 얼굴-응시마저 창조케 했다.

 

송강호의 내·외면. <살인의 추억>

 

 

이후로 한참이 흐른 2019, 31년간 은폐된 시신의 존재가 떠올랐다. 8살 아이의.

 

새로 고침 버튼을 누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껌뻑거림들. 진정하고 초점을 다시 잡아보자. 이제 후진 시스템과 후진 사람들 한결 더 도드라져 보인다. 재차 투박한 진심까지 가려면 전처럼 악의는 없는따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식어가 필요한데, 현실이 그걸 허락할 것 같지는 않다. ? 눈을 닦고 보니 그들의 목표는 진범 찾기가 아닌 자기 자리 보존이었으니. 악의가 없기는커녕 흘러넘칠 지경이다.

 

이렇게나 맹렬한 보신(保身)주의라니, 이러면 한나 아렌트의 저 유명한 진부한 악이상 가는 지위를 부여해드려야 마땅하다. 상상력이 모자란, 그저 시대의 부속품이 아닌, 이를테면 시스템의 설계자 같은.

 

물론 박두만은 특정 형사 한 명이라기보다는 형사들 면면의 집합체에 가깝다. 하지만 정육각형에 가까웠던 특성 중, 적어도 선의(善意)항목은 새로 드러난 사실들에 찔려 움푹 들어갔다고 봐야 한다. 동시에 최종 숏의 강렬함이 그 선의로 마감된 박두만의 캐릭터성에 크게 빚졌음을 상기해보자. 이제 나는 그에게 분노자로서의 지위가, 외화면을 쏘아볼 송신자의 자격이 더는 있다고 보지 않는다. 지금 그에게 어울리는 곳은 프레임 바깥, 응시를 받아야 할 자리, 즉 범인의 근처 어딘가일 뿐이다.

 

피해자들은…. <살인의 추억>

 

 

<살인의 추억>은 여전한 걸작이다. , 특정 사건과 동기화됐다는 영화적 특성상 현실과의 호흡을 위해 세포를 지속해서 열어두고 있을 뿐. 시대의 맥을 그토록 잘 짚었는데, 지금 보니 그 땅 위에 진범의 것 외에도 악랄함이 층층으로 쌓인 형국. 상상의 달인 봉준호도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앞으로 악행의 구조는 점점 더 디테일하게 드러날 것이다. , 딱 보면 감이 온다던 그들은, 공소시효가 소멸돼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 이춘재도 마찬가지. 밥도 잘 먹고 다니겠지. 말 그대로 살인의 추억.

 

하수구 안에는, 야산에는, 구겨져버린 여성들이 아직도 있다. 8살 아이를 포함한.

 

우리는 완전히 실패했다. erazerh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박두만에게는, 응시할 자격이 있었을까

[살인의 추억] 드러난 진실들을 쥐고서 최종 숏으로 | ※ 『최종 S의 비밀』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Sequence), 신(Scene), 숏(Shot)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에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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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랑해도 될까요? (그러세요). <경계선>

 

어떤 (line)’이 문제가 되는 건, 그 선의 존재가 비합리적이거나 반윤리적인 상황의 원인으로 작동할 때다. 예컨대 성씨가 두 글자인 애는 서류에서부터 거릅시다따위의, 태생부터 차별로 꽉 찬 임의의 울타리 같은.

 

다만 영화 <경계선>(2018)이 끌어들인 각종 경계들에, 그 원죄로서의 차별 기능이 잘 스며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악랄하지 않다는 말.

 

그러다 보니 영화의 태도가 자꾸만 명분 없는 도발처럼 느껴진다. 남성과 여성, 인간과 탈-인간, ()의 기표에 대한 일반 개념을 시도 때도 없이 찔러대는 게, 마치 이 영화, 가학자로서의 지위를 지향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네 머릿속 이미지, 그래 그거, 정말 그럴까? 고정관념 아니고?’의 반복. 이를테면 상식은 조작된 편견이라는, 편견.

 

흐름상 있는 경험 없는 경험 다 짜내며 그래 그랬구나로 화답해야 할 것 같다만, 대체 무엇을 위해? ‘그저 거기 놓인경계들을 이렇게 멱살 잡고넘나들면, 구체화되는 건 되레 경계선의 형태와 필요성이지 않겠나. 물론 주인공이 손수 긋는 단 하나의 선, 그 양심적 선택을 지지는 하겠지만 그걸 굳이 이런 식으로 어필할 이유는 없다 싶다. erazerh

 

근본을 갖춘, 필요한 선도 있다

 

PS. 왜 영화들이 자꾸만 소수자에게 또 다른 소수자와의 러브라인을 들이미는지 모르겠다. 그 외로움이 겨우 나랑 닮은 애랑 잠자리 몇 번 갖는다고 희석되는 성질의 것이었나? 무엇보다, 쓸쓸하면 몸도 마음도 그렇게 쉽게 허락한다고?

 

물론 그중 가장 너무했던 건 <경계선>도 뭐도 아닌, ‘어 너 장애인, 쟤 괴물, 레디 투 섹스? 스타트!’ 따위의 가학적 맥락으로 점철된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 되시겠다.

 

우리 사랑해도 될까요? (놉).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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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위대한 여정이었거나 말거나 그 무엇이었거나, 결론은 매한가지. 목표점은 비좁고, 사고는 딱딱해지고, 인간성은 늘 변질될 테다. 돌아가야 할 지점을 애초에 정해놓고 그쪽에만 그럴 만한 가치를 뿌려둔 덕.

 

하지만 큰 우주든 작은 우주든 맘먹고 의미를 부여해대면 거룩하지 않은 게 있겠나. 동시에, 그 우주들을 통틀어 무()를 벗어날 수 있는 건 단 하나라도 존재하는가.

 

인위적인, 가치의 중력 혹은 무중력. 그렇게, 잘나가다 내 취향에서 탈선.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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