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친절한 19금 이웃, 했어야 할(?) 섹스를 못 했을 뿐인데 히치콕과 데이빗 린치를 만나다 못 해, 심지어 조도로프스키까지 찰나지만 알현해버린다. 그럼에도 끝내 성사되지 못한 섹스. 영화, 대중문화란 그런 것. 닿을 수 없는 오르가즘, 영원할 결핍.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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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향한 근심 어린, 또는 근엄한 시선들에 부쳐

 

 

우선 # 몸,

 

1. 어쩌다 보니, 아서 입장에서는 내 주파수를 찾아가는 여정. 웃음에서 잡음, 즉 이질감을 걷어낼수록 세계 안에서는 어째 더 이질적인 무엇이 돼간다는 게 문제.

 

2. 이질화는 옹호는 아니더라도 보호는 된다. 영화는 클로즈업과 풀 숏을 오가며 아서의 신체 일부 혹은 전체를 화면 가득, 다각도로 채우는 데 정성을 다한다. 그럼으로써 그의 몸이 발산하는 광기의 추이 및 총량은 프레임에 지속적으로 동기화되는데, 그 기()가 너무 세다 보니 숏들은 거의 관객을 때릴 지경으로 운용된다.

 

3. ‘볼품없는 몸에서 아름다운 몸을 추출해낸 건 물론 카메라의 공()만은 아니다.(feat. 사람&사운드) 이를테면 호아킨 피닉스가 최적의 몸 선을 찾아 던져두면, 첼로 선율이 슬쩍 와서는 그 윤곽을 다시 한 번 매만지는 느낌.

 

4. 화장실 춤 신(scene)은 한데 엉겨 붙은 억압과 분노와 두려움 덩어리를 슬픈 희열 같은 것으로 변환시키는, 빛나는 영화적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이 정도의 혼돈에 이 정도의 아름다움을 치덕치덕 발라버리다니. 이 퇴폐미가 예술이 아니라면 지구상에 예술이라 부를 만한 건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고백컨대 <마더>(2009)의 관광버스 춤 이후 이토록 숨이 턱, 막히는 몸짓은 처음 만났다.

 

bathroom dance. <조커>

 

# 위험성이 감지되는 진짜 이유

 

1. 위험성에 관한 근심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앞서 말했듯 영화 <조커>(2019)는 조커화()권장은 않되 열렬히 전시는 한다. 내면 어딘가에 폭발물을 간직 중인 어른이나 청소년이 불쏘시개로 삼을 수 있겠다 싶다.

 

2. 다만 세상에는 유사 <조커>들이 너무 많다. 게다가 갖가지 형태로 갖가지 장소에 흩어져있다. 이를테면 뉴스 한 꼭지, 댓글 하나일 수도 있다. 유튜브가 추천한 한 편의 영상이 터뜨림의 구실이 될 수도 있겠다. 가족의 말 한 마디는 또 어떤가. 마음에 안 드는 노래 가사가 하필 그 자리에 놓일 수도. 그저 날씨가 흐려서, 또는 화창해서일 수도 있다. 물론 딱 하나가 아니거나, 뚜렷하게 집어내기 힘들 확률이 높다.

 

3. 그중 눈에 아주 잘 띄는 유형이 있으니 바로 영화다. 영화는 처음과 끝을 지닌 하나의 서사 덩어리로, 집힐 수 있도록저마다 근사한 제목까지 달고 있다. 제일 신속하게 가져다 쓸 수 있는, ‘비난의 화살의 공인된 출처인 셈이다.(자매품 게임 탓) 실제로 극악무도한 자 앞에 잔혹한 장면이 담긴 영화나 게임(중독)이 수식어로 붙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 풍습인 양 익숙하다.

 

4. (다른 맥락이 생략된) ‘장도리 신을 인상 깊게 봤다는 살인자 A따위의 기계적 주어들은, 옳은가.

 

5. 현대 사회에서 병리적인 요소들은 무수한 점처럼 많으며 매순간 각기 새롭게 얽히고설킨다.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마치 거대 큐브 같은 구조. 하지만 탓하기는 대개 이 큐브의 면면과 무관한 시간, 엉뚱한 장소의 것들로 향한다. 그게 손쉽고, 본질을 비켜갈 수 있으니까. 그렇게 사회가 (영화나 게임) 탓의 요령을 습득하면 할수록, 관련 데이터를 쌓으면 쌓을수록, 그 작업에 무뎌지면 질수록, 큐브의 생김새는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지고 말 것이다.

 

6. 영화 <조커>의 ‘진짜 위험성’은 여기에 있다. 아서의 무너짐 비슷한 걸 나도 겪은 것 같은데, 그래서 불온하되 쩌릿한 감각이 느껴지는데, 그러다 보니 어떤 이들한테는 폭력의 원인으로 지목하기에 딱 좋은 영화라는 것. 요컨대 큐브의 작동 원리, 즉 진짜 병리적인 것들의 정체가, 한결 더 뿌예질 아주 높은 확률 말이다. ⓒ erazerh

 

불온하고 쩌릿하다. <조커>

 

※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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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 S의 비밀』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Sequence), 신(Scene), 숏(Shot)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에 <유전>과 <미드소마>의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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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굴을 통해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 - 자크 오몽

 

특히 공포의 전도체가 될 때, 얼굴은 유난히 도드라진다. 실제로 관객한테 공포(영화)는 스크린 속 얼굴들이 극단의 표정을 지을 때 완성되고는 한다. 깜짝 놀란, 고통에 찬, 절규하는, 비명의 얼굴. 한 세트로, 흉측한, 광기어린, 무섭게 일그러진, 악마성의 얼굴. 이 과정에서 창조적 솜씨가 빚어낸 얼굴들은 장르의 관습이 돼 지독히도 반복되는데, 대개는 진부하거나 한심한 복사본에 그치고 만다. 아마도 원본 속 얼굴의 맥락을 해석해내지 못한 채 단지 표정 흉내에 급급했기 때문이리라.

 

영화 <13일의 금요일>(2009)

 

그 와중에 여태껏 본 적 없는 얼굴이 등장했다. 아리 에스터 감독의 장편 데뷔작 <유전>(2017)의 마지막 숏. 피터는 말 그대로 넋이 나가버린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럴 만도 한 게 가족들이 악마의 굿판안에서 모두 잔혹하게 희생된 데다, 엄마(애나)는 방금 전 스스로 본인 신체를 훼손했고, 피터 자신의 정신과 육체는 이제 막 악마가 점령할 참이다. 미쳤거나 미치기 직전이거나.

 

그런데 잊지 말자. 이 빙의 행사는 (악마 측 입장에서는) 거룩한 의식이다. 혈통이라는 가족의 근원이 낳은 지옥도인 동시에, ()의 계보가 연속성을 획득하는 경축의 시간이다. 살육과 의전이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인 셈. 추종자들은 그들이 섬기는 악마 파이몬에게 지식이나 좋은 친구따위를 달라고 간청까지 한다. 악의 측면을 모른 체하거나, 악행을 덮어도 될 만큼 파이몬의 명성이 위대하다고 믿는 듯하다. 이때 파이몬은, 누구와 닮았나.

 

 

아리 에스터는 피터의 최종 얼굴을 담는 데 적잖은 러닝 타임을 쓴다. 이제 피터는 더 이상 놀라거나 부르짖지 않는다. 그는 압도된 채 무너져 내리며, 다만 악이 스며드는 시간을 얼굴에 새기는 중이다. 77초간 지속되는 이 숏에서 피터는 눈을 단 한 차례도 깜빡거리지 않는데, 생리현상이 불필요한 어떤 초월의 공간으로 넘어간 듯도 하다.

 

중세 서양 예술에서 얼굴이 주로 신()의 형상이었다고 할 때, -인간으로서 피터의 이 얼굴은 성스럽고 선량한 그 기표들과는 조금 다른 버전으로 보인다. 누군가에게 신성한 의식이()지만 그 개최를 위해 잔혹한 파괴, 그리고 현혹의 기술이 동원되지는 않았냐는 반문. 물론 고결하고 인자하고 번뇌를 짊어진 듯한 표정들은 그 이면을 가리는 데 부족함이 없었을 테다. 따라서 피터의 얼빠진 마지막 표정은 위장 작업이 완수되기 직전 단계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거룩함으로 가공되기 이전의 그 무엇, 이를테면 선택된 자 개인의 멸망에 관한 이미지.

 

전에 본 적 없는 이 얼굴은, 자신이 신인 줄 아는 악마를 맞이하고 있다.

 

<유전>의 최종 얼굴

 

여기 의식이 또 하나 있다. 호르가 마을의 하지제, 그 하이라이트로 9명의 제물이 불에 타는 중이다. 그중 곰 가죽 안에 갇혀 산 채로 타는 이는 대니의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이다. 말 그대로 환장의 카니발. 이 광경에 넋 놓고 울먹이던 대니가, 이윽고 웃는다. 너희들의 이 엔딩이 고소하다는 듯. 영화가 끝난다.

 

아리 에스터의 두 번째 영화 <미드소마>(2019)의 마지막 시퀀스에서도 학살과 의식은 동전의 양면인 양 들러붙어 있다. 이 기괴한 중첩을 떠안는 자, 이번에는 대니다. 그녀의 경우 혈연과의 단절은 이미 서사 초반 경험했고, 애인인 크리스티안과도 이별 중이다. 전자는 내부의 신경쇠약을 견디다 못 해 발 디딜 판 자체를 깨뜨렸고, 후자는 슬픔은커녕 이 괴이한 마을에 대한 의심조차 나누기 힘들 만큼 둔해빠졌다. 감정의 공유가 가능하다는 점에서만 보면 차라리 이 모계-토테미즘 사회가 나아 보일 정도다.

 

 

인류의 역사는 곧 분화의 역사다. 집단은 부피가 늘어나 갈라졌고 또 그 갈래별로 같은 과정을 겪었다. 최초의 단어가 진화 끝에 백과사전의 체계를 갖췄듯, 인간관계의 망은 넓이와 깊이를 더하고 더해 삶의 양식이 됐다. 어쩌면 인생이란 내가 속한 각 층위의 집단들에서 맡은 바 역할극을 잘해내기, 그 자체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교과서도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정의하지 않았나.

 

<미드소마>의 대니는 그 역할극에서 탈락했고 또 탈락하는 중이다. 이를테면 과거와 미래 가족 모두와 이별하기. 사회적 동물이 타자와 관계를 맺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대니를 자꾸만 미토스(mythos)의 영역으로 밀어 넣고, 그녀 또한 그 중력장에 적응해간다. 마치 비극을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이 끝내 종교로 빨려 들어가듯이.

 

<미드소마>의 호르가 마을. Join us?

 

다시 한 번, 대니가 이윽고 웃는다. 너희들의 이 엔딩이 고소하다는 듯. 낯선 마을에서 낯선 공포를 느낀 여성주인공이 되레 애인의 죽음을 선택하고 웃음까지 짓는 아마도 최초의 숏. 여태껏 본 적 없는 또 하나의 얼굴이다.

 

이곳 호르가 마을은 역할놀이가 필요치 않은 세계다. 동일한 믿음과 삶의 리듬 아래 단일 자아로 꿰어져 있기에 관계의 유지나 개선을 위한 어떤 증명이 요구되지 않는다. 대니의 마지막 웃음은 자신에게 울음만 남긴 그 증명의 기록물, 즉 인물들을 활활 태워버렸다는 안도인 셈이다. 따라서 이 웃음은, 비가역적이며 돌이킬 수 없다. 수 년 간 요동쳤을 그녀의 감정은, 그 진폭은, 이 순간부터 가지런하게 정렬된 하나의 선으로 수렴해갈 것이다. 대니는 백과사전 이전의 시간, 몇 가지 음절만 알면 되는 그곳으로 되돌아갔다.

 

 

사물은 그 자리에 있다. 왜 그것을 마음대로 조작하는가?” - 로베르토 로셀리니

 

로셀리니 감독의 말에 빗대어 보자면, 아리 에스터는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즉 실재하는 두려움의 요소를 관습적 표정 안에 억지로 끼워 넣는 데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전에 없던 얼굴들 피터의 흡수와 대니의 변환을 포착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물론 우리는 그 덕에 악의 진영이 갖춰지기 직전의 절망적 시간을 목격했고(유전), ‘맹신나 자신으로 살기가 양립할 수 없음을 지켜볼 수 있었다(미드소마). 무엇보다 대니의 얼굴에서는, 알면서도 가야 하는 퇴행 길에 관한 서글픈 섬뜩함마저 느낀다. 아마도 잠재적으로는 모든 사람한테 열려있을 그 뒷걸음의 문. ‘홈 스위트 홈에는, 사회 곳곳에는, 문손잡이를 돌리도록 만들, 나락으로 통하는 구멍이 너무 많다.

 

믿...?

 

<미드소마>의 최종 숏. 곧 ‘김치’

 

영화관 안과 밖의 공통점, <미드소마>나 현실이나 그토록 잔혹한 사건들은 대낮에() 일어난다는 것. 그럴 수밖에. 그들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걸 해대니까, 떳떳하니까. 신의 이름을 빌려 침략하고 신의 이름을 빌려 목숨을 뺏고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모두 신의 뜻 운운하는 이들은, 추종자는, 악마는, 악을 행하되 악의가 없다.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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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미드소마> 감독판이 이전 버전과 다른 점은 대니와 크리스티안 사이의 감정선 및 그 굴곡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것 정도. 그밖에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몇몇 대사들.

 

PS 2. <유전>의 최종 숏은 사실 77초간의 얼굴 숏이 아니라, 3초 동안 나무집 내부를 디오라마처럼 포착한 장면이다. Hail Paimon.

 

 

※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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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 S의 비밀』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Sequence), 신(Scene), 숏(Shot)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에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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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K가 눈(雪)을 맞는다. 죽어가면서. 어쩌면, 눈에 묻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먼저 <블레이드 러너>(1982)의 후반부, 전투용 리플리컨트 로이 배티는 릭 데커드와 싸움 도중 폐기 시간에 다다른다. 이윽고 데커드의 목숨을 구해주고는, ()를 맞으면서 말한다.

 

나는 너희가 상상도 못 할 것들을 봤어 () 이제 그 모든 순간들이 시간 속으로 사라지겠지. 빗속의 이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

 

시간이 내 기억 전부를 집어삼킬 거라는, 그래서 태초의 암흑으로 끌려 내려가야 한다는,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공포심의 고백. 훗날 데카르트적 코기토에 부합하는 주체는 우리 중 누구였을까, 로 회자될 이 명-유언을 끝으로 배티는 눈을 감는다. 그의 말대로 비는 눈물을 머금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이 있다면 아마도 그의 죄 또한 씻어냈겠지.

 

35년이 지나 등장한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드니 빌뇌브 감독은 마지막 신(scene)에서 전작의 비와 닮은 듯 다르게 눈을 흩뿌린다. 눈은, 거리별로 속성이 달라진다. 손에 직접 닿으면 차갑고 보드랍다는 촉감이, 프레임 바깥에 놓인 관찰자 입장에서는 고요하고 정갈한 어떤 낭만성이 느껴지는 식이다. 이 낭만성에는 심지어 포근하다는 초감각이 더해져, 설경(雪景)은 종종 비극의 당사자를 달래고 감싸고 덮어주는 역할을 부여받아왔다. (feat.별들의 고향)

 

그리고 다시 한 번주인공 K가 눈(雪)을 맞는다. 죽어가면서. 어쩌면, 눈에 묻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마지막 신

 

SF영화를 정의해보자. 과학 또는 테크놀로지가 구현한 미래, 혹은 그 미래와 연결된 현재에 대한 이야기, 시공간에 관한 그럴싸한 공상들의 집합체정도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은 대개 혈통이든 무엇이든 어떤 역량의 전수를 위해 선택된 자(chosen one), 어그러진 세계 질서를 복원하고자 비장한 전투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가장 최첨단의 영역에서 써내려가는 가장 원형적인 서사. SF영화야말로 신화의 적자(嫡子)인 셈이다.

 

물론 또 다른 버전들이 있다. 이들은 정의성전(聖戰)’, ‘복원같은 인류애적 키워드에 관심이 없다. 대신 인류의 출현부터 먼 미래까지를 형이상학적으로 꿰어 냉소하거나(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테크놀로지를 한 극단으로 밀어붙여 경고를 남기거나(터미네이터 1·2), 21세기로 넘어와서는, 지구의 파괴적 관성에 치를 떨어’(언더 더 스킨) 버렸다. 오지 않은 시간을 경유하다 보니 시스템이 무엇을 잃을지, 인류의 존재는 옳은지를 묻고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듯이.

 

이처럼 SF영화는 가장 원형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동시에, 한편에서는 문명의 본성을 향한 가장 날 선 접근이 돼왔다. <블레이드 러너>의 경우 로이 배티로 하여금 데커드를 죽이지 않고 끌어올리도록 함으로써 장르의 중력장을 찢고 그 날 세움의 영역으로 사뿐히 날아올랐다. 복제인간의 유언 한 구절은, 그렇게 영화사를 통틀어 제일 유명한 시가 됐다.

 

<블레이드 러너>의 후반부

 

속편인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줄거리는 그러나, 주인공은, 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정도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블레이드 러너이자 리플리컨트인 주인공 K는 서사를 이끌어가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서사에 이끌리며, 스토리상으로는 데커드를 찾기 위해 이용된다. 선택받은 자로서 무거운 책무를 모조리 짊어질 각오를 다졌건만, 함께 가는 척하던 서사 씨가 문뜩 걸음을 멈춘 채 그의 자격을 부정해버린 것이다.

 

“오 이런! (레이첼이 낳은, 선택된) 그 아이가 너라고 생각한 거야…?”

 

세상의 중심에서 순식간에 훅! 하고 끄트머리 어딘가로 끌려난 것 같은 아득함. 이때부터 영화를 지배하는 키워드는 다름 아닌 간극이 된다. 선택받은 구원자와 가짜 기억이 심어진 그저 순종형 리플리컨트간 아찔한 심리적·물리적 거리. 내 위치가 격변했는데 그간 느껴온 세상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일 리 만무하다. K는 이내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면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방법도 이유도 잘 떠오르지 않는, 어떤 공허로 가득 찬 세계를 감지했을 테다.

 

<블레이드 러너>가 인간과 비-인간 혹은 진짜와 가짜 사이의 경계선이 온당한지를 묻고 선의 형태를 블러처리했다면,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이렇듯 경계선을 잔혹하리만치 짙게 그어버린다. 세계의 모양을 담아내는 두 가지 방법. 후자의 경우, 즉 드니 빌뇌브 감독은 상상과 실재 사이의 골이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개체와 세계 간 구조의 도식화, 다시 말해 세계에 관한 개체의 이해력 증진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듯하다.

 

‘나’를 알아가기. <블레이드 러너 2049>

 

내 위엄을 찾을 곳은 우주가 아니다. 그것은 내 사고의 제어 기제에서 찾아져야 한다. () 우주는 공간을 온통 둘러싸서, 나를 원자 알갱이 하나 삼키듯 먹어버린다. 나는 생각함으로써 세상을 이해한다.” - 블레즈 파스칼, 팡세

 

모든 개체는 그 자체로 유일한 존재지만 우주를 펼치면 단지 무한한 점 중 하나일 뿐이라는 명제는, 언제나 참이다. 1인칭 주인공인 우리 모두한테 초라함의 문이 활짝 열려있는 구조. 태초부터 그랬다. 착각은 필연이다. 요컨대 이해란, 간극들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간극을 발견했을 때의 아찔함에서 시작돼야 하는 셈이다. 그 이해를 바탕으로, K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자는(데커드를 없애라는) 성전의 관성적 제안에 붙들리지 않았다. 당신이라면?

 

3D를 넘어 4D, 스펙터클을 다양한 감각으로 흡수해보라는 체험 지향적 시대거나 말거나 <블레이드 러너 2049>위대한 SF들의 길을 걷고 싶어 했고 또 걸었다. 과장하자면 인류와 문명을 적절한 각도의 비딱함으로 재단하는 단계를 넘어 우주를 이해하는 규칙 하나를 훔쳐 보여준 수준. 계보는 이렇게 새로 고침되며 이어지고 있다.

 

잠깐 꿈꾸는 건 괜찮잖아. <블레이드 러너 2049>

 

K라고 명명해준, 실은 그러도록 프로그래밍 된, K와 유일하게 소통해준, 실은 그러도록 프로그래밍 된, 증강현실 홀로그램 제품 조이는 영화 중간 말한다.

 

잠깐 꿈꾸는 건 괜찮잖아.”

 

잠깐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일까. 당신의 꿈은 언제 멈췄나. 내 꿈은 잘 있을까. 쓸쓸한 K에게 챙겨줄 건 뭐 없을까. 주섬주섬. 그렇게 드니 빌뇌브는 진짜눈을 선사한다. 선택된 자가 가짜눈을 만지는 그 시간에.

 

물론 희망은 개뿔. 그저 K가 만진 눈이 차갑고 따뜻하기를, 그를 덮은 눈이 포근하기를, 상상한다. erazerh

 

 

※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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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흔들리는 비행기?)을 타고 온 듯한, ‘하얗고 빨간’ 모계-토테미즘 사회. 뒤집힌 지구 어디쯤인 것 같지만, 애초에 우주에 위아래가 있었나. 그러니까 그녀의 경우라서 성립되는 ‘더’ 혹은 ‘덜’ 지옥인 곳은 어디인가, 라는 선택지. ‘마음이 만져지길’ 원한다면 차라리 이쪽으로 미친 세계가 나을 수도.

 

<유전>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얼굴 표정을 위한 빌드업’ 같은 영화지만, <유전>과 달리 심장을 후려치는 불경스러운 매력은 만날 수 없었다. 단 기존 공식들(유전 - 선택받은 자, 미드소마 - 낯선 마을)을 가져오되 그 공식들의 일반적인 취지를 찢고 불온한 물음을 갖다 붙여버리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아리 에스터의 차기작은 여전히 기대된다. ⓒ erazerh

 

 

* 영화 속 문양들이 벽지 디자인으로 나와 준다면 참 좋을 듯. 대놓고 북유럽풍 끝판왕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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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영화의 매력은, 그 원천을 굳이 따지자면 인물들의 -지층적 행보에 있.

 

※ 이하 <기생충> 포함 봉준호 영화들의 스포일러

 

 

그 자유분방함이 가장 두드러지는 건 <괴물>(2006)이다. <괴물>에서 강두와 괴물은 장르적 기승전결과 무관한 때 맞닥뜨림은 물론, 행동 패턴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복지부동의 공권력보다 날래고 유려하다. 영화 속 공간을 부감숏으로 따라간다면 이 둘의 발걸음은 아마 무규칙한 점들로 찍힐 것이다.

 

즉 영화 속 세계가 제시한 질서에 순응역행도 않는, 요컨대 떠돎같은 것. 떠돎의 운동은 낡은 질서의 후진성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고 인물들을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황규덕 감독의 <별빛 속으로>(2007)에서 주인공 수영은 모두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느라 옴짝달싹 못 할 때 홀로 걸어 다니는 경험을 하는데, 그럼으로써 훗날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봉준호 영화에서는 이 떠돎이 부조리한 사회구조와 같은 리듬으로 호흡하지 않는 무덤덤함이 돼 그 구조를 민망한 것으로 만들고는 한다. <지리멸렬>(1994)에서 위선자 3인이 TV 안에서 토론을 펼치는데, 그중 한 명 때문에 곤란을 겪었음에도 신문배달원은 TV 화면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토론이 토론으로서 가치 판단될 자격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모양. 봉준호의 인물들은 그렇게, 세속적 위계에 붙들리지 않음으로써 위계의 조악함을 발가벗겨버리는 지위를 종종 누려왔다.

 

봉준호의 단편 명작. <지리멸렬>

 

<마더>(2009)에 이르러 봉준호 감독은 인물들의 이 기존 경로를 마침내 구부러뜨린다. 앞선 주인공들은 위선적인 구조에 발목 잡히면서도 제 삶의 리듬을 수정하지는 않았다. 불합리한 구조를 괘념치 않는 유체적 속성 덕에 그 좌충우돌 행보는 차라리 상식에 가까웠다. 그러던 게 <마더>에서 도준 엄마가 관료적 시스템이 내린 눈먼 결론에 마침내 피로써 눈물로써 동의해버린 것이다.

 

살인 - 엄마…없어?” - 오열.

 

진범을 찾는다며 전작들의 인물과 흡사한 궤적을 그리던 이 엄마는 그렇게 다른 길로 접어든 후 꼭꼭 숨어버린다. 가난을 잡아먹은 가난()에게는 어떻게 눈에 안 띄고 살 것이냐가 관. <마더>의 끝부분을 송강호의 눈같은 호소하는 시선 대신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덩어리진 음영이 장식하는 건, 필연과도 같았다.

 

서사적·미학적으로 완벽했던 <마더>의 엔딩 숏

 

이 같은 -지층적 행보가 실종된 것은 <설국열차>(2013) 때부터다. 인물들은 더 이상 떠돌지않았다. 영화 속 시스템에 순응또는 역행만 함으로써 운동성이 모종의 회로기판 안에 갇혀버린 형. 그래서 좌충우돌 질주는 해대지만 행보의 결 자체는 강자/약자의 논리 회로 위에 매끄럽게 정렬돼버린다. 시스템 안팎을 넘나들며 그 시스템이 얼마나 후졌는지를 전해오던 떠돎의 진동은, 이때부터 감지하기가 어려워졌다.

 

<기생충>(2019)에 이르러 이 회로로의 수렴은 한층 더 강화됐다. 무신경하게 TV를 끄던 인물들의 자리는 공짜 와이파이를 찾고 세상에 접속하며 뉴스를 챙겨보는 이들이 차지했다. 상승/하강의 권역 바깥에서 행동의 나래를 펼칠 사람들은 아닌 듯하다.

 

, 그럴 수도 있겠지.”

 

유쾌하지 못한 느낌이 스멀스멀 번진 건 가족들의 사고방식 및 행보에 어떤 생략이 감지될 때부터다. 그러니까 먹고 사는 게 힘들고 구질구질한 것바퀴벌레스러운 침투력과 뻔뻔함을 납득하고 체화하는 것사이에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었다는 문.

 

그래, 가난하네, 알겠는데, 그런데 이 가족은 왜 이러는데?

 

갑자기 분위기 연쇄사기꾼. <기생충>

 

그렇게 가난과 뻔뻔함이 점프 컷 수준으로 깨진 채 붙어있다 보니 반지하 창틀을 담은 숏들은, 마치 <버닝>(2018)의 햇빛 조각처럼, 어떤 편협한 시각에 잠식됐었다는 인상마저 남긴다. ‘여기서 매일매일 이런 프레임을 보고 살면 높은 확률로 뻔뻔함을 감당할 수 있게 되겠지’, ‘반지하서 이러고 살다 보면 부모고 자식이고 서로 듣는 데서 욕지거리도 할 듯’, ‘, 그러니 (나의) 코엔식 소동극을 위해 이제 트리거를 당겨봐따위의 잔향들.

 

그러니까 반지하방에서 실제로 그 프레임을 보며 눈 감고 떠본 적 없는 이가‘지층 살이 체험판’ 정도로 다소의 영감을 얻고는, 이를 (상 주는 사람들이 선호할 법한) 핏빛 소동극까지 적당히 끌고 간 게 다라는 결론, 말고 나는 무엇을 건질 수 있을까. 결국 캐릭터는 전형적이고 행보의 반경 또한 예측 가능한데 여기에 논리의 비약마저 작동된 모양. 이제 후진 건 세계의 부조리한 질서 같은 게 아니라 각자도생하는 인물들, 그 자체가 됐다.

 

영화를 구성하는 유니크한 입자로서의 인물들, 부조리한 틈 하나를 파고드는 날카롭고 불온한 상상력, 혹은 그 무엇이든 간에, 봉준호 고유의 것들의 3연속 실종. 이래서는 이제 나는설레기가 어렵다.

 

 

물론, 이 글은 계획에 없었다. erazerh

 

밥은 먹고 다니냐. <기생충>

 

 

* 무슨 말이 구구절절 이렇게나 많은지 모르겠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케이크 위에 놓인 딸기 하나만으로도 그 깊은 여운을 남겼던 감독이.

 

* vs , 뭐 이런 말들 나오는데 이미 <마더>에서 을과 을의 싸움(?)은 그 연유와 결과와 비극성에서 정점을 찍은 바 있다. <기생충>의 가족들은 을보다는 을질에 가깝다.

 

* 팬티를, 거기서?

 

 

※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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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Zombie)는 엊그제 등장한 최첨단 신식 문물이 아니다. 차라리 닳았다면 닳았을, 서브컬처계의 오랜 아이콘이자 레전드에 가깝다. 그래서 이런저런 변주도 진행 중인 거고.


그러니까 '한국형'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마라. 지역화는 낡고, 납작하고, 후진 연출의 변명이 될 수 없다. 게다가 좀비 다루기에 이만큼 최적화된 나라가 전 세계에 얼마나 된다고.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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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日常)이 일상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 일상에 소속돼 있기 때문이다. 스쳐지나가면서, 또는 그 안에 머무르면서, 그렇게 우리는 최소한 발 하나는 담근 모양새로 일상을 지탱하고 지탱하다 그 관성으로 대개는 지탱을 멈출 수 없는 지경에 놓인다. 지금은 이 지탱들이 수집되고 DB화되기까지 하는 시대다. 적막한 버스 안을 울리는 '환승입니다-환승입니다-학생입니다'와 같은, 내 경로와 위치와 소속에 관한 증명의 라임들. 이때 일상은 곧 시스템이 된다.

 

태도의 전환. 소속감을 잠시 벗어던지고 관찰자의 입장에서 느끼다 보면, 곧잘 이 일상의 시스템은 희극과 비극의 경계적인 장소가 되곤 한다. 출근시간의 지하철 개찰구를 부감숏으로 잡는다고 생각해보자. 쉴 세 없이 이어지는 삐비빅 소리와 거기에 맞춰 우르르 밀려 쏟아지는 남녀노소. 곧 죽을 줄 알면서 일터로 향하는 같은 표정의 실사판 SCV들, 피로(疲勞)의 톨게이트. 이 부감의 광경은 희극일까 비극일까.



단편영화 <Angst>는 이 같은 관찰자의 시선으로(만) 러닝타임 3분 40초를 모두 채운다. 카메라는 주차장, 건물의 외벽, 골목, 긴 복도, 다리 밑 등을 (때로는 훔쳐보는 듯한 위치에서, 때로는 그늘을 강조한 저노출로) 단지 가만히 서서 응시한다. 여기에 미세한 줌인이나 긴박하고 묵직한 사운드 등의 효과가 더해지며 영화 속 일상적 공간은 마치 시스템-배반적인 누군가에 의해 훑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우리는 그 공간들을 이런 식으로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영화 속 시선은 희비극의 차원을 넘어 점점 더 불온한 무엇이 되어간다. 우리 외에 살아있는 어떤 존재, 모종의 계략. 그러나 이 불안감이 사건 자체를 일으키지는 않으므로 <Angst>의 이미지들은 결국 설명 불가능한 흔적으로만 남게 된다. 이때 설명 불가능함에 들러붙어 이 흔적을 구체적 형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일상을 위협하는 실재들 ― 시스템 내부에 도사린 불안 요소든 시스템을 노리는 외부의 무엇이든, 일상을 순식간에 무력화하는 바로 그것들 ― 이다. 영화가 남긴 괄호를 채우는 건 늘 현실이 학습시킨 경험 아니었던가.

 

요컨대 일상이 불안한 이유는 첫째, 거기서 발 뺄 수 없음, 둘째, 일상의 행복을 덮을 만큼 일상의 피로함이 크다는 점, 셋째, 일상-시스템을 언제든 찢어버릴 수 있는 저 도사리는 실재들 때문인 셈이다. ⓒ erazerh


 experimental short film <Angst> by Dennis Didi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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