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룡이 대중적인 인지도를 구가한 반면, 주성치는 마니아가 아니고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기가 막힌, 가혹한 상상력의 극단을 스크린에 투영해왔다. 그것도 매우 태연하고 뻔뻔한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과장과 막무가내의 패러디, 자기학대가 뒤섞인 그만의 독특한 농담은 일명 주성치사단을 형성하며 90년대 홍콩영화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쿵푸 허슬>은 보다 보편적인 웃음을 표방한 영화다. 솔직히 영화를 보기 전에는 걱정이 조금 앞섰다. 주성치 고유의 색깔이 많이 사라진 건 아닐까... 하지만 그것은 기우임이 곧 드러났다. 극단적인 뻔뻔함은 모습을 감췄지만, 그래도 주성치는 주성치였다.

패러디는 유쾌하고 캐릭터들은 개성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 서로 절묘하게 호흡한다. 테크놀로지는 <소림축구>에 이어 상상력에 생명을 불어 넣으며 그 임무를 200% 수행한다. 예전처럼 과잉으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농담들은 여전히 폭발적이다. 그리고 그 모든 플롯은 주성치라는 희극지왕의 이름 아래 하나의 정점으로 달려간다. 그래서 관객은 즐거워진다.

나는 "그 영화 재미있냐?"라는 질문을 그다지 반기는 입장은 아니지만, 이 영화에 대해서 만큼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쿵푸 허슬>은 정말 재미있는 영화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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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 스펙터클과 드라마의 전략적 결합


홍콩영화의 기나긴 침체에도 불구하고 세계시장 안에서 자신의 역영을 꾸준히 지켜내던 성룡이 다시 한번 돌아왔다. 홍콩영화가 무차별적 자기복제로 황금기의 위력을 서서히 잃어가던 그 때에도 성룡은 고유한 영화 스타일을 흔들림 없이 고수, 개성 넘치는 목록으로 필모그래피를 장식해온 배우다.

분명히 장르영화를 표방하지만 그의 영화는 성룡표로 따로 불리울 만큼 개성 넘치는 활용들로 가득하다. 성룡은 휴머니즘과 권선징악의 기치 아래 기발한 세트 안에서 벌어지는 위험천만하면서도 재기발랄한 아크로바틱 쿵푸를 트레이드마크 삼아 코믹액션에 관한한 독보적인 지위를 획득해왔다.


재치 넘치는 액션과 코미디의 적절한 교차점을 달리던 성룡은 95년 <홍번구>로 박스오피스 1위를 점령하며 할리우드에 성공적으로 입성하게 된다. 이 후에는 피부색이 다른 파트너로 버디무비의 효과를 노리거나 테크놀로지와 쿵푸를 결합하는 등 보다 다양한 세계 지향적 전략들을 잇달아 선보인다. 그 과정에서 성룡은 역시 세계적 영화인이라는 찬사와 관습적 내러티브나 테크놀로지의 영향력에 가려 진부해졌다는 평가를 번갈아가며 들어왔다.

성룡은 간헐적으로 잃어버렸던 자신의 색채를 <뉴 폴리스 스토리>에서 재확인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장르와의 결합마저 기획한다. 그 작업에 가장 성룡적인 시리즈 ‘폴리스 스토리’가 표방되었음은 당연한 전략.

전작 <80일간의 세계일주>라는 다국적 프로젝트에서 슬랩스틱과 캐릭터의 물량공세에 의존하는 바람에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 성룡은, <뉴 폴리스 스토리>에서는 스케일 큰 액션에 어느새 쉰에 들어선 나이를 보조하려는 듯 드라마적 요소를 결합, 영화폭의 확장을 꾀한다. 또한 자신을 보좌할 역할로 사정봉, 오언조 등 차세대 배우들을 끌어들이고 온라인 게임, 익스트림 스포츠 같은 젊음 지향적 코드를 도입하면서 화려함의 배가를 노리기도 한다.


<천장지구>의 진목승 감독과 함께 작업한 <뉴 폴리스 스토리>는 기본적으로는 복수의 내러티브로 구성된다. 성룡은 다시 한번 잘나가는 모범경찰로 돌아오지만 전작들과 달리 이번에는 결코 코믹하고 순탄한 여정을 밟지 못한다.

진국영(성룡)은 두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린 은행강도 5인조를 체포하기 위해 그들의 아지트로 잠입하지만, 부하들은 전멸당하고 자신은 ‘Time to play'를 외치며 범죄와 게임을 동일시하는 5인조의 놀잇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 사건에 대한 죄책감과 비탄에 잠겨 술로 1년을 허비해온 진국영은 새로운 파트너 정소봉(사정봉)의 도움과 약혼녀 가이(양채니)와의 대면을 통해 절망에서 조금씩 깨어난다. 5인조의 정체를 조금씩 알아가는 가운데 진국영은 그들과 다시금 마주할 용기를 서서히 찾아간다.

부하를 모두 잃어버린 슬픔과 고통 때문에 술에 절고 길에 토악질하며 쓰러지는 ‘고뇌하는 성룡’은, 조금 작위적이긴 하지만, 그의 나약한 내면을 오랜만에 엿볼 수 있는 드라마적 장치다. 그는 방한 후 가졌던 기자회견에서 “관객들이 우는 모습에서 보다 큰 성취감을 느낀다”며 앞으로도 내면연기에 적잖은 정성을 기울일 것임을 고백하기도 했다.

성룡의 진지함을 중심에 배치한 영화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황지강 감독과 호흡을 맞춘 93년 작품 <중안조>에서 성룡의 표정은 진지함을 넘어 슬픔, 비장, 분노로 가득하다. 홍콩, 대만, 중국을 뒤흔든 왕일비 사건을 영화로 담은 <중안조>는 분노한 성룡과 타락한 경찰의 대치구도 안에 하드 보일드적 문법을 삽입, 홍콩의 어두운 자화상을 거칠게 투영해냈다. 성룡은 <중안조>를 통해 배우로서의 필요조건을 충분히 갖추었음을 이미 증명한 셈이다.


<뉴 폴리스 스토리>의 성룡도 연기 자체로는 나무랄 데 없는 활약을 펼친다. 특유의 장난기 다분한 웃음은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과도한 엄숙에 빠지지도 않는 감정조절은 그를 ‘액션뿐인 배우’의 목록에서 지워낼 만한 효과는 분명히 나타낸다.

다만 감정의 분위기가 서로 다른, 각종 에피소드들이 뚜렷한 호흡을 찾지 못한 채 여기저기서 균열된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는 플롯의 허점 때문에 성룡의 감정선 또한 거친 호흡으로 연결된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드라마트루기 상의 약점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뉴 폴리스 스토리>는 성룡표 오락영화로서 꽤 만족할 만한 볼거리로 채워져 있다. 성룡은 홍콩 컨벤션 센터 벽면을 따라 수직하강하거나 묘기 같은 오타바이 추격전을 펼치며 나이에 맞지 않게 여전히 아찔한 스펙터클에 관한한 정점에 서있음을 과시한다.

이 같은 볼거리에는 CG로부터 창조된 스타일리쉬한 화려함에서 찾기 힘든, 사람이 액션의 중심에 자리 잡을 때 만끽할 수 있는 아날로그적 긴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성룡은 악랄하고 막되먹은 5인조에게마저 회개할 시간을 부여해준다. 이 인위적 감동 유발 장치를 휴머니즘의 연장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역시 성룡표를 볼 때만 가질 수 있는 너그러움 때문일 것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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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어려움, 그리고 가능성에 관해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가정, 학교, 직장 등 사회적 틀 안에서 타인과 관계 맺는 일은 삶의 가장 중요한 영역 중 하나로 인식된다. 하지만 어떤 다른 것이 그 관계의 주된 목적으로 자리 잡을 때, 인간 자체와의 소통은 종종 이해타산이라는 복잡한 현실 밑으로 가라앉기도 한다.


영화 <룩앳미(Comme Une Image)>는 인간관계의 미묘한 어긋남을 섬세하게 관찰함으로써 평범해 보이는 일상 뒤에 감추어진, 소통이 부재한 현대의 인간 군상들을 묘사하고 고발한다. <타인의 취향>으로 잘 알려진 아녜스 자우이 감독은 그 빈 자리로 권력이 들어왔을 때 생기는 작은 에피소드들을 고전 음악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담담하고 절제된 시선으로 풀어낸다.

뚱뚱한 몸매가 불만인 롤리타는 사람들이 유명한 작가인 아버지에게 접근하려고 자신을 이용한다며 볼맨 소리를 한다. 그녀의 아버지 에티엔은 유명한 지성인이지만 정작 주변 사람들을 배려할 줄은 모른다. 다른 사람 기분이야 어떻든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내뱉는 독설가이며, 딸의 목소리가 녹음된 노래 테이프는 꼭 들어달라는 그녀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포장조차 뜯지 않는다.

더구나 롤리타가 유일하게 진실할 거라 믿었던 음악 선생님 실비아마저 무명작가인 남편 피에르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롤리타의 음악 수업을 맡고 있는 상황이다. 피에르는 억지로 먹는 토끼 고기를 맛있다며 자신의 출세를 위해 에티엔의 비유 맞추기에 급급할 뿐이다.

영화는 한 부녀와 그들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이 그려내는 일상적 부조리를 통해 권력을 축으로 하는 관계 맺음은 결국 타인에게 상처를 입힐 뿐이라고 역설한다. 아네스 자우이 감독은 이 같은 주제를 끌어내고 인물 간의 작은 갈등들을 부각시키기 위해 ‘시종일관 오가지만 결국은 소통되지 않는 대화’로서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대화는 영화 속에서 인간 자체에 대한 관심이 이해관계의 주변에 위치할 뿐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이다. 영화 내내 대화가 이어지지만 이것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대화는 독백이 될 뿐, 서로를 이해하는 수단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에티엔이 아예 듣지 않거나 대충 둘러대는 순간 롤리타의 고민과 부탁은 언어의 역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각각의 이해관계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그들의 동거 공간, 의사소통을 위한 대화는 단절되며 가족, 친지라는 인간적 유대는 세속적 이해 판단 아래 허울 좋은 명목으로 예속되고 만다. 인간 본연에 대한 접근을 전제하지 않은 이 같은 관계들은 균열될 조짐을 조금씩 보이다가, 롤리타의 공연을 에티엔이 아예 보지도 않은 그 날 밤에 이르러 결국 상처와 눈물을 통해 표면으로 드러나고야 만다.

이렇듯 영화 <룩앳미>는 우리가 늘 접하는 인간관계라는 고리가 정작 인간으로 연결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불협화음을 아이러니한 대화와 세밀하게 포착되는 감정의 흐름 안에 차분하게 담아낸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돋보이게 해주는 것은 슈베르트,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클래식 선율과, 대화가 어긋나면서 빚어지는 유머 등의 극적 플롯을 적절하게 활용,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현실 묘사를 부드럽게 조율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녜스 자우이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는 인간적 유대를 잃어버린 그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따뜻한 시선 또한 잊지 않는다. 에티엔은 롤리타가 울음을 터뜨리고 나서야 아버지로서의 대화를 시도하며, 그제서야 실비아는(감독 자신이 연기한) 참고 있던 불만을 에티엔에게 표출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감독은 롤리타를 그녀 자체로 대해준 유일한 인물 세바스티앙에게서 그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는 길거리에 쓰러진 자신에게 옷을 덮어준 롤리타의 따스함을 잊지 않으며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녀 곁을 맴돈다.


롤리타가 자신의 오해를 깨닫고 다시 한번 세바스티앙에게 옷을 덮어주는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는 인간이 진정으로 소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관심, 그리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화임을 차분하게 전달한다.

롤리타가 부른 'An Die Musik'이 집 안에 울려퍼질 때, 방에 하나하나 불이 켜진다. 허공에 맴돌지 않고 공간에 울리는 목소리, 내면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활용하라는 실비아의 가르침처럼 롤리타의 노랫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아녜스 자우이 감독은 인간과 인간이 소통하기 위한 대화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롤리타의 맑은 목소리로 화답한다.

<룩앳미>는 여전히 백인 중산층 가정의 행복함이 주된 관심사인 할리우드의 가족영화와는 다른 지점에 있는 영화다. (영화 속 인간 군상들 위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화려하고 재미있는 가족영화가 극장가를 수놓는 요즈음, 조용한 영화 한 편으로 가족과 친구, 동료와의 관계를 천천히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룩앳미>는 추운 겨울 속 따뜻한 당신을 발견할 수 있는 작은 선물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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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몽상가들 (The Dreamers / I Sognatori, 2003)
감독 :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출연 : 마이클 피트, 에바 그린, 루이스 가렐, 로빈 레누치

원래 오늘 개봉 예정이었지만 2월로 밀린 듯하다. 각종 영화제에서 이미 선보이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볼거라 굳게 마음먹고 있었는데... 아쉽다. <시티 오브 갓>도 위태위태하다.


영화는 시네마테크 관장이던 앙리 랑글루와가 정부의 부당한 간섭에 의해 해고되고, 사람들이 서서히 거리로 나오는 그 때를 회고하면서 시작한다. 어떻게 동시대 패러다임과 마주할 것인지에 대해 혼란스러워 했던<혁명전야>를 거쳐, 베르톨루치 감독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68년이 남긴 허무와 가치전복의 상처를 기이한 섹스라는 장치 안으로 밀어 넣으며 '성의 정치학'에 관한한 첫 목록에 등장해야 할 감독으로 인식되어 왔다.

환갑이 넘은 그는 <몽상가들>에서 68년의 정체성으로 다시 한번 돌아간다. 영화는 거리를 자세하게 관찰하거나 역사를 하나하나 기록하지 않는다. 베루톨루치는 아직 성장하지 못한 아이들이 서로 소통하는 과정, 그리고 그 관계들이 그려내는 미묘한 감수성의 떨림을 가지고서 당시의 미숙하지만 순수했던 열정을 추억하고 있다.(또는 그랬다고 믿고 있다)

권력은 그야말로 거리에 있었고 영화와 섹스를 말하는 것이 곧 혁명과 자유를 상징하던 그 시절. 이미 성장해버린 육체와 여전히 자궁 안에 있는 정신이 혼융된, 완전하지 않기에 기괴함에도 순수했던 성적 유희는 금기의 체계를 깨는 것이 존재로 다가가는 또 다른 방법일 수도 있다는 베르톨루치의 수평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영화로써 세상과 소통하고, 또 삶과 대화 그 자체가 누벨바그 영화같은 세 아이들의 몽상은 결국 베루톨루치의 몽상이자 자위의 회고담이 아닐까.

감독의 거억이 과잉된 자의식으로 함몰되지만 않았다면, <몽상가들>은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솔직하고 가장 재치있는 '역사 기록법'으로 회자될 수 있을 것이다.


밑에 포스터는 너무 에로틱하고 불순한 상상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심의에서 반려되었다고 한다. 행여나 국민에게 건전하지 못한 정서가 심어질까봐 사춘기 초기의 철없는 상상력까지 동원해대는 심의위원님들의 지랄에경의를 표한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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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이 기억해야 할 남자배우


2년 전 <결혼은 미칫진이다>를 보면서 나는, ‘그냥 그런 탤런트 한 명이 또 영화로 흘러왔겠지’라고 대충 선을 그어버렸던 나의 선입견이 얼마나 오만불손한지를 깨달아야 했다. <결혼은 미친짓이다>에서 감우성은 결혼제도로의 귀속을 위선이라 규정짓지만 그로 인해 겪어야 하는 현실적 괴리 안에서는 완전히 자유롭지도 못한, 준영이라는 인물로 등장했다.


감우성은 드라마에서 보이던 세련된 도시적 이미지를 준영 안에 투영하는 한편, 결혼과 섹스에 대해 여전히 혼란스러운 현대인의 표정 또한 영화가 요구하는 대로 적절하게 담아냈다. 11년 드라마 경험은 절대로 ‘그냥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올 한 해 스크린을 채워온 많은 스타들 중에서 2004년이 기억해야 할 단 한 명의 남자배우를 꼽아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 편에서 남긴 아우라는 넘지 못했지만 여전히 건재를 과시한 최민식과 송강호, 기록적인 숫자의 관객과 대면한 설경구, 장동건, 그리고 <주홍글씨>로 돌아온 한석규 등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저마다 내공을 십분 발휘했으니 말이다.

이 출중한 연기자들 가운데 굳이 감우성이라는 이름으로 지면을 꾸리는 이유는 그가 열연한 이미지에서 자신의 어두운 내면과 마주하는 동시대 누군가의 얼굴과, 제대로 기억되지 않는 어떤 사건을 되짚어보라고 말하는 고통에 찬 시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 내면의 그늘은 감우성의 표정과 대사, 몸짓을 통해 두 영화 속에 매우 적절하게 녹아든다.

감우성은 올해 <거미숲>과 <알포인트>, 두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거미숲>에서는 일상적 삶에서 살인사건으로 묘하게 얽히는 강민 PD 역할을, <알포인트>에서는 알포인트가 자아내는 공포 앞에서 무기력하게 함몰되어가는 최태인 중위라는 인물을 그려냈다.


<거미숲>, 분열된 두 자아

송일곤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거미숲>은 관객이 편하도록 차근차근 설명하는 영화가 아니다. <거미숲>은 도망쳐왔던 기억으로 회귀해 기어코 소통을 시도하려는 한 인간의 어떤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 처음에는 살인자의 실체를 추적하는 관습적 내러티브의 문법으로 시작하지만 그것도 잠깐, 영화는 인과관계나 시간의 흐름과는 거리를 두며 마치 꿈속을 유영할 때나 만날 듯한 모호한 이미지로써 기억의 파편들을 얽어낸다. 

그리고 그 주체는 강민의 분열된 자아들이다. 망각의 흔적과, 죄책감이 빚어낸 갖가지 환영들을 경험한 후, 두 자아는 분열의 근원지인 거미숲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서로를 마주보기에 이른다. 영화의 마지막, 단절되었던 기억과 고통스럽게 대면하는 순간, <거미숲>은 강민의 영혼에 삶을 지속하라는 의지를 불어넣으며 구원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강민은 에우리디케를 잃은 오르페우스이자 괴로운 과거와 공존함으로써 불안할 수밖에 없는 동시대의 ‘누군가’이기도 하다. 강민은 감우성의 몽롱한 눈빛을 통해 자신과 그 누군가에게 비로소 나직하게 입을 연다. 숲으로 가야 한다고.

<거미숲>은 송일곤을 재발견하는 영화인 동시에 감우성을 배우로서 확실하게 인지시키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배우는 작품이 전달하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전문직업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감독과 직접 토론해가며 강민의 분열된 이미지 속으로 자신을 지속적으로 투영시킨 감우성의 노력이 <거미숲>을 뛰어난 영화로 만든 이유 중 하나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알포인트>, 과거 또는 현재의 얼굴

<알포인트>가 평단과 관객에게서 공통적으로 호평을 받은 이유는 안전한 전략에만 안위한 채 사다코의 망령으로부터 조금도 나아갈 의도가 없었던 올해의 공포물 속에서 <알포인트>만이 유일하게 장르를 활용할 줄 아는 영화기 때문이다. 공수창 감독은 미화되기에 급급했던 베트남을 악몽으로 환원시켜 호러의 장르로 집어넣고 나아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딜레마적 상황에 회의의 시선을 남기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알포인트는 역사의 어긋남이 만들어낸 원귀, 그 원귀가 만들어낸 또 다른 한(恨)들이 그물망의 형태로 똬리를 틀고 있는, 들어왔으되 나갈 수는 없는 폐쇄적 공간이다. 그 중심에 자리한 최태인 중위는 베트남 안에서는 가해자로, 공포로서의 낯선 타자 앞에서는 피해자로 존재한다. 그리고 명분 없는 전쟁이 알포인트에 공포를 가져왔음이 명백해질 때, 최태인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운명을 동시에 겪어야 하는, 어딘가로 내몰렸던(또는 내몰리고 있는) 익숙한 청년의 얼굴이 된다.


감우성은 이 영화에서 공포와 광기, 절망 등 다양한 내면의 스펙트럼을 표출하며 이국땅에서 낯설 수밖에 없는, 그래서 무기력하고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표정을 담아낸다. <알포인트>는 “인간의 심리를 드러낼 수 있는 내면연기가 하고 싶다.”란 감우성의 말을 울림으로 만들어준 영화로도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거미숲>의 강민과 <알포인트>의 최태인은 과거로 회귀한다는 설정에 있어 닮은 인물이다. 강민은 불완전한 주체 안에서 비틀거리듯 조각난 기억을 끼워 맞추며, 최태인은 역사가 남겨놓은 보이지 않는 잔존물에서 허우적거린다. 차이라면 전자가 구원의 희망에 도달하는 반면 후자는 어디에서도 탈출구를 찾지 못한다는 점이다. 감우성은 그 두 인물의 내면을 통해 깊숙한 곳에 꼭꼭 감추어 두고 있었던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끌어내고야 만다.


배우로서 거듭나기, 또 다른 음색을 찾아서

영화라는 메커니즘이 스크린을 통해 관객 앞으로 가기까지가 얼마나 힘든 여정인지 감우성은 두 영화가 겪은 쉽지 않은 행보를 통해 몸소 터득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 남자의 머릿속에 얽힌 기억과 환상이라는 그리 친근하지 않은 소재를 역시 전혀 친절하지 않은 플롯으로 구성한 <거미숲>은 개봉날짜를 잡는데 애를 먹었을 뿐만 아니라 스크린에 모습을 나타낸 것도 잠시, 소리 소문 없이 쓸쓸하게 퇴장하고 말았다.

<알포인트>는 흥행에서 대중적 성공은 거두지만 촬영일정의 반복적인 수정과 <지옥의 묵시록> 못지않았던 캄보디아 로케이션의 어려움 등 태생적 수난에 몇 번이나 부딪혔고, 감우성은 마치 자신이 한 영화의 탄생을 위해 진통을 감내하려는 듯 간 수치가 죽음 일보 직전까지 올라가는 육체적 한계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는 <거미숲> 촬영 당시, 강민의 뇌수술에 보다 현실감을 주고자 머리의 반을 밀자고 직접 제안했으며 살해 장면을 찍을 때는 자신의 목소리로 표현 수위에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알포인트>에서 관등성명을 대라고 고함치는 장면은 그의 끈질긴 고집이 지켜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 한 편 찍는데 힘들지 않은 배우가 어디 있겠냐마는 감우성이 결코 쉽지 않게, 나름대로의 고민을 가지고 연기에 몰입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지난 주 한해를 결산하는 영화제들이 이어졌지만 그 곳에 감우성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거미숲>과 <알포인트> 역시 몇몇 후보 목록에서 간간히 눈에 띄었을 뿐 별다른 주목은 받지 못했다. 물론 영화제 수상여부가 영화나 배우를 가늠하는 절대적 가치가 될 수는 없다.

약간은 쌀쌀한 지금, 정작 필요한 것은 비단 정신·육체적 고통을 감내한 감우성의 ‘배우되기’나 <거미숲>과 <알포인트>가 현실과 대면하고자 시도했던 치열한 작업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영화들이 공존하고 회자될 수 있을만한, 다양한 목소리의 수렴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

<알포인트>의 공수창 감독은 감우성을 일컬어 “약간의 튜닝 차이에 따라 음색이 미세하게 달라지는 악기 같은 배우"라고 했다. 감우성이 다음 영화로 <간큰 가족>이라는 코미디 장르를 선택했다는 소식이 들리는 요즈음, 그가 코미디에서는 어떤 새로운 음색을 선사할지, 그리고 언제인가 다시 들려줄 심연의 음색은 어떤 얼굴을 그려낼지 자못 궁금해진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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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시티 오브 갓 (Cidade De Deus / City Of God, 2002) 
감독 :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출연 : 마테우스 나스터갈, 세우 호르제


정말 보고 싶던 영화였는데... 운좋게 종로영화제에서 발견...

<증오> 이 후 가장 힘있는 영화라 생각한다. <증오>가 세 녀석의 그 대상조차 찾지 못하는 '증오'를 통해 폭염처럼 답답한 세상풍경을 그려냈다면, <시티 오브 갓>은 어떻게 폭력이 '변두리'라는 공간을 지배하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내러티브는 경쾌하고 등장인물들은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지만, 사실상 영화는 매우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마지막에 나오는 호러영화 문법-아직 끝나지 않았다-은 어떤 호러의 그것보다도 찜찜한 여운을 남겨준다.

'시티 오브 갓'의 아이들은 탈출할 수 있을까...?
그들의 표정은...

목이 떨어져 나가야 하는 운명에 봉착한, 한 마리 닭의 눈동자처럼.. 불안하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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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효과] 현실을 재구성하다  (4) 2004.11.13
[21그램] 삶과 죽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다  (5) 2004.11.08
잃어버린 기억 속으로 들어가다

누구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기억은 각각 에피소드가 되어, 지나온 시간들을 채워 넣고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낸다. 가끔씩 기억의 한 조각을 끌어내고서 그 때 이렇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낄 때가 있다.

자신의 삶에 백 퍼센트 만족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다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이 현실의 불만족스러운 부분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 돌아갈 수는 없으되 머릿속에는 남아있는 기억의 파편들 때문이다.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내는 이 같은 욕망에서 출발하는 영화가 바로 <나비효과(The Butterfly Effect)>다. ‘나비효과’는 중국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에서 허리케인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이론으로, 작은 변화라도 나중에는 커다란 결과를 불러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를 바꾼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J. 마키에 그러버와 에릭 브레스가 공동 각본, 감독한 영화 <나비효과>는, 한 청년이 현재 삶의 잘못된 부분을 바꾸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기억들에 관여하는 이야기를 줄기로 한다. 시, 공간을 초월하는 여정인 셈이다.

<백 투 더 퓨처>에서부터 <레트로엑티브>, 약간 틀리지만 <사랑의 블랙홀>까지 어떤 목적을 위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시간의 흐름에 인위적으로 개입한다는 내용은 꽤나 익숙하면서도 흥미를 주는 소재다.

<나비효과>가 과거로 되돌아가기 위해 설정한 도구가 타임머신과 같은 과학적 기구가 아닌 일기장(혹은 영상물), 즉, 기억의 흔적이라는 점은 위의 다른 영화들과 선을 그을 수 있는 부분이다.

어린 시절의 에반(에쉬튼 커처)은 일기장에 하루하루의 기억을 기록해 놓는다. 어떤 충격적인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순간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병을 앓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된 에반은 자신의 일기를 통해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음을 발견하고 어릴 때 짝사랑했던 캘리(에이미 스마트)의 운명을 바꾸고자 비어있는 시간으로 자신을 돌려보내기 시작한다.


어릴 적 기억하지 못했던 그 텅 빈 시간은 어른인 에반이 돌아와 직접 관여할 수 있는, 또는 이미 관여했던 틈이 된다. <나비효과>는 에반이 과거의 시, 공간으로 들어와 새롭게 개입함으로써 현재의 모습들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에피소드처럼 나열한다. 하지만 뜻하는 바와 달리 캘리와 다른 친구들, 그리고 자신의 삶 등 모든 부분에 균형잡힌 행복을 가져오기가 쉽지만은 않다.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는 긴장감

처음으로 과거를 바꿀 때, 그러니까 에반과 캘리가 아동 포르노를 찍어야 했던 순간을 바로 잡고 현실을 재구성할 때만 해도 영화는 긴박한 흐름을 간직한다. 하지만 바뀐 현실이 다른 불행을 낳고 또 다시 일기장을 찾아 기억을 더듬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면서 에반의 절박함은 긴장의 끈을 놓아버린다.

어린 시절 하나의 경험만으로 네 사람의 삶과 성격이 송두리째 바뀐다는 설정은 후반부에 다다르면서 운명의 재배치가 필연적이라 설득하던 초반의 감을 조금씩 상실한다. 나비효과 이론을 감안하더라도, 개개인 스스로 자신의 삶을 충분히 꾸려나갈 수 있다는 여지에 대해서 영화는 지나치게 침묵한다.


무엇보다도 <나비효과>가 창녀와 대학생, 살인자와 대학생 등 삶을 제한된 이분법의 신분 구조 안에서만 설명, 기억으로부터 상상되는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포함하지 못한 채 과거 개입이라는 흥미 있는 장치를 에반의 선택을 강요하는 극단적 영역 안에서만 활용하는 점은 아쉽다.

에반의 선택은 결국 ‘사랑하는 이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는 관습적 테마를 ‘또 다시’ 불러온다. 그럭저럭 맛은 있을지 몰라도 새로운 것은 없다.

<나비효과>는 다른 엔딩을 가진 두 가지 버전으로 제작되었다. 감독판은 극장판이 버리지 못한 로맨스의 여운에서 약간 비켜나 또 다른 범주로 결말을 끌어낸다. 그렇다고 지금 말한 아쉬운 부분이 모두 채워지진 않지만, 어찌되었든 감독판을 스크린에서 만나지 못하는 현실은 조금 안타깝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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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려내는, ‘슬픈 욕망들’의 교차점


우리 모두는 삶이라 불리는 제한된 시간 속에 있다.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몫에 집중하느라 모르는 사람의 삶에까지 일일이 관심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여기,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삶(또는 죽음)에 잠시나마 주목하게 해줄 ‘드라마’ 한 편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들려준다. 벌새 한 마리, 초코바 하나, 5센트 동전 다섯 개, 사람이 죽을 때 빠져나가는 그 무게들이 모두 21그램이라고. 21그램은 과연 어느 정도의 무게일까?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21그램(21Grams)>은 다소 독특한 화법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연하게 발생한 교통사고. 아무런 관계없이 살아가던 세 사람은 이 사건으로 인해 서로 얽히고 원치 않았던 고통이 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다. 영화는 이 아픔들, 그리고 거기에서 빠져 나오고자 몸부림치는 ‘슬픈 욕망들’의 교차점을 그려내며,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영혼'의 무게를 저울질해본다.


누군가와의 ‘관계’는 아픔을 수반한다

<21그램>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의 사고로 여러 가지 상황이 생겨나고 또 이 상황들은 세 사람의 인간관계에 변화를 가져온다. 슬픔과 상처로 가득한 내면은 위로하려는 마음, 위로 받으려는 마음, 또는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 등을 거치면서 스스로를 치유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관계가 생성되거나 기존의 관계가 깨어진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상실해버린(혹은 그 상실로 소중한 것을 얻은) 이들은 결국 또 다른 이들에게 상실을 남긴 채, 그 슬픔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누군가와 소통하며 산다. 이 관계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낳기도 하지만 결국 인간은 그 고통마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으로 끌어들인다. 어쩌면 <21그램>은 슬픔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에서 비롯하는 필연적인 고통을 말하려는 지도 모르겠다.


편집 -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

<21그램>에서 가장 관심거리가 되는 부분은 역시 편집이다. 시간 흐름에 어긋나는 신(scene)들이 배치되면서 영화의 초반, 사건 전개를 따라잡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신과 신을 시간 역순으로 배치하고 나중에 가서야 그 모든 인과관계를 바로 잡는 <메멘토>에 비하면, 이 영화의 시간 배열은 그나마 머리가 덜 아픈 편이다.

<21그램>의 독특한 편집은 관객과 ‘퍼즐’을 해보자고 내놓은 것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편집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툭툭 던져졌던 신들은 중반 즈음해서, 관계의 변화와 이에 따른 갈등의 전개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데 도움을 준다. 영화 초반, 시간 흐름을 방해하던 그 장면들이, 각자의 고통이 어디서 교차하고 어떻게 귀결될 지에 대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관객은 한 장면이 전개될 때 그 과거는 물론, 미래까지 감지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 신마다 나타나는, 감정의 섬세한 흐름이 보다 더 강조된다. 감독은 시간 순서에 따른 원인, 결과가 아닌, 운명의 무게에 짓눌린 인간이 감정을 폭발하고 흐느끼는, 그 순간순간에 벌어지는 관계를 조합함으로써 극을 이끌어 나간다.

<21그램>에서 시간은 쪼개지지만 그 조각난 시간 사이에 있는 삶의 모습은 면밀하게 연결되어 인과관계의 틀을 완성해낸다. 시간 순서가 아니라 감정의 굴곡들이 영화를 전개하는 것이다.

이 같은 편집의 효과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배우의 연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숀 펜, 베니치오 델 토로, 나오미 왓츠 등 모든 배우가 삶과 죽음 앞에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감정을 완벽하게 재현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거쳐 <21그램>에 이른 나오미 왓츠는, 배우로서 최고의 전성기에 접어든 듯 훌륭한 연기를 선보인다. 앞서 말한 두 배우는 물론 말할 것도 없다.


질문을 남기다

영화 <21그램>은 탄탄한 드라마트루기와 이를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편집 등 감독과 배우의 역량이 잘 조화된 작품이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새롭고도 흡입력 있는 플롯으로 삶이라는 무대가 그려내는 갖가지 감정의 분출을 밀도 있게 집어낸다.

21그램이 오가는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여정이 빚어내는 다양한 관계와 감정에 관한 이야기 <21그램>. 영화는 분명 시간, 공간적으로 허구지만 <21그램>의 디제시스는 우리가 현실에서 느끼는 아픔들을 그대로 담아낸다.

싫든 좋든 우리는 삶과 죽음이라는 절대명제 앞에 던져진 존재다. 결국은 끝나야 할, 인생이라는 시간과 공간. 그 안에서 우리가 얻는 것과 잃는 것, 그리고 우리가 지키려고 애쓰는 ‘영혼’이라는 것에 대해 <21그램>은 ‘생각’해볼 것을 권유한다.

21그램이라는 무게는 가벼울 수도, 무거울 수도 있다. 21그램이 무거워진다면, 그것은 아마도 매우 슬픈 순간이 될 것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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