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어려움, 그리고 가능성에 관해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가정, 학교, 직장 등 사회적 틀 안에서 타인과 관계 맺는 일은 삶의 가장 중요한 영역 중 하나로 인식된다. 하지만 어떤 다른 것이 그 관계의 주된 목적으로 자리 잡을 때, 인간 자체와의 소통은 종종 이해타산이라는 복잡한 현실 밑으로 가라앉기도 한다.


영화 <룩앳미(Comme Une Image)>는 인간관계의 미묘한 어긋남을 섬세하게 관찰함으로써 평범해 보이는 일상 뒤에 감추어진, 소통이 부재한 현대의 인간 군상들을 묘사하고 고발한다. <타인의 취향>으로 잘 알려진 아녜스 자우이 감독은 그 빈 자리로 권력이 들어왔을 때 생기는 작은 에피소드들을 고전 음악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담담하고 절제된 시선으로 풀어낸다.

뚱뚱한 몸매가 불만인 롤리타는 사람들이 유명한 작가인 아버지에게 접근하려고 자신을 이용한다며 볼맨 소리를 한다. 그녀의 아버지 에티엔은 유명한 지성인이지만 정작 주변 사람들을 배려할 줄은 모른다. 다른 사람 기분이야 어떻든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내뱉는 독설가이며, 딸의 목소리가 녹음된 노래 테이프는 꼭 들어달라는 그녀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포장조차 뜯지 않는다.

더구나 롤리타가 유일하게 진실할 거라 믿었던 음악 선생님 실비아마저 무명작가인 남편 피에르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롤리타의 음악 수업을 맡고 있는 상황이다. 피에르는 억지로 먹는 토끼 고기를 맛있다며 자신의 출세를 위해 에티엔의 비유 맞추기에 급급할 뿐이다.

영화는 한 부녀와 그들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이 그려내는 일상적 부조리를 통해 권력을 축으로 하는 관계 맺음은 결국 타인에게 상처를 입힐 뿐이라고 역설한다. 아네스 자우이 감독은 이 같은 주제를 끌어내고 인물 간의 작은 갈등들을 부각시키기 위해 ‘시종일관 오가지만 결국은 소통되지 않는 대화’로서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대화는 영화 속에서 인간 자체에 대한 관심이 이해관계의 주변에 위치할 뿐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이다. 영화 내내 대화가 이어지지만 이것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대화는 독백이 될 뿐, 서로를 이해하는 수단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에티엔이 아예 듣지 않거나 대충 둘러대는 순간 롤리타의 고민과 부탁은 언어의 역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각각의 이해관계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그들의 동거 공간, 의사소통을 위한 대화는 단절되며 가족, 친지라는 인간적 유대는 세속적 이해 판단 아래 허울 좋은 명목으로 예속되고 만다. 인간 본연에 대한 접근을 전제하지 않은 이 같은 관계들은 균열될 조짐을 조금씩 보이다가, 롤리타의 공연을 에티엔이 아예 보지도 않은 그 날 밤에 이르러 결국 상처와 눈물을 통해 표면으로 드러나고야 만다.

이렇듯 영화 <룩앳미>는 우리가 늘 접하는 인간관계라는 고리가 정작 인간으로 연결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불협화음을 아이러니한 대화와 세밀하게 포착되는 감정의 흐름 안에 차분하게 담아낸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돋보이게 해주는 것은 슈베르트,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클래식 선율과, 대화가 어긋나면서 빚어지는 유머 등의 극적 플롯을 적절하게 활용,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현실 묘사를 부드럽게 조율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녜스 자우이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는 인간적 유대를 잃어버린 그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따뜻한 시선 또한 잊지 않는다. 에티엔은 롤리타가 울음을 터뜨리고 나서야 아버지로서의 대화를 시도하며, 그제서야 실비아는(감독 자신이 연기한) 참고 있던 불만을 에티엔에게 표출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감독은 롤리타를 그녀 자체로 대해준 유일한 인물 세바스티앙에게서 그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는 길거리에 쓰러진 자신에게 옷을 덮어준 롤리타의 따스함을 잊지 않으며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녀 곁을 맴돈다.


롤리타가 자신의 오해를 깨닫고 다시 한번 세바스티앙에게 옷을 덮어주는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는 인간이 진정으로 소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관심, 그리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화임을 차분하게 전달한다.

롤리타가 부른 'An Die Musik'이 집 안에 울려퍼질 때, 방에 하나하나 불이 켜진다. 허공에 맴돌지 않고 공간에 울리는 목소리, 내면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활용하라는 실비아의 가르침처럼 롤리타의 노랫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아녜스 자우이 감독은 인간과 인간이 소통하기 위한 대화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롤리타의 맑은 목소리로 화답한다.

<룩앳미>는 여전히 백인 중산층 가정의 행복함이 주된 관심사인 할리우드의 가족영화와는 다른 지점에 있는 영화다. (영화 속 인간 군상들 위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화려하고 재미있는 가족영화가 극장가를 수놓는 요즈음, 조용한 영화 한 편으로 가족과 친구, 동료와의 관계를 천천히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룩앳미>는 추운 겨울 속 따뜻한 당신을 발견할 수 있는 작은 선물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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