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이 기억해야 할 남자배우


2년 전 <결혼은 미칫진이다>를 보면서 나는, ‘그냥 그런 탤런트 한 명이 또 영화로 흘러왔겠지’라고 대충 선을 그어버렸던 나의 선입견이 얼마나 오만불손한지를 깨달아야 했다. <결혼은 미친짓이다>에서 감우성은 결혼제도로의 귀속을 위선이라 규정짓지만 그로 인해 겪어야 하는 현실적 괴리 안에서는 완전히 자유롭지도 못한, 준영이라는 인물로 등장했다.


감우성은 드라마에서 보이던 세련된 도시적 이미지를 준영 안에 투영하는 한편, 결혼과 섹스에 대해 여전히 혼란스러운 현대인의 표정 또한 영화가 요구하는 대로 적절하게 담아냈다. 11년 드라마 경험은 절대로 ‘그냥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올 한 해 스크린을 채워온 많은 스타들 중에서 2004년이 기억해야 할 단 한 명의 남자배우를 꼽아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 편에서 남긴 아우라는 넘지 못했지만 여전히 건재를 과시한 최민식과 송강호, 기록적인 숫자의 관객과 대면한 설경구, 장동건, 그리고 <주홍글씨>로 돌아온 한석규 등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저마다 내공을 십분 발휘했으니 말이다.

이 출중한 연기자들 가운데 굳이 감우성이라는 이름으로 지면을 꾸리는 이유는 그가 열연한 이미지에서 자신의 어두운 내면과 마주하는 동시대 누군가의 얼굴과, 제대로 기억되지 않는 어떤 사건을 되짚어보라고 말하는 고통에 찬 시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 내면의 그늘은 감우성의 표정과 대사, 몸짓을 통해 두 영화 속에 매우 적절하게 녹아든다.

감우성은 올해 <거미숲>과 <알포인트>, 두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거미숲>에서는 일상적 삶에서 살인사건으로 묘하게 얽히는 강민 PD 역할을, <알포인트>에서는 알포인트가 자아내는 공포 앞에서 무기력하게 함몰되어가는 최태인 중위라는 인물을 그려냈다.


<거미숲>, 분열된 두 자아

송일곤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거미숲>은 관객이 편하도록 차근차근 설명하는 영화가 아니다. <거미숲>은 도망쳐왔던 기억으로 회귀해 기어코 소통을 시도하려는 한 인간의 어떤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 처음에는 살인자의 실체를 추적하는 관습적 내러티브의 문법으로 시작하지만 그것도 잠깐, 영화는 인과관계나 시간의 흐름과는 거리를 두며 마치 꿈속을 유영할 때나 만날 듯한 모호한 이미지로써 기억의 파편들을 얽어낸다. 

그리고 그 주체는 강민의 분열된 자아들이다. 망각의 흔적과, 죄책감이 빚어낸 갖가지 환영들을 경험한 후, 두 자아는 분열의 근원지인 거미숲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서로를 마주보기에 이른다. 영화의 마지막, 단절되었던 기억과 고통스럽게 대면하는 순간, <거미숲>은 강민의 영혼에 삶을 지속하라는 의지를 불어넣으며 구원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강민은 에우리디케를 잃은 오르페우스이자 괴로운 과거와 공존함으로써 불안할 수밖에 없는 동시대의 ‘누군가’이기도 하다. 강민은 감우성의 몽롱한 눈빛을 통해 자신과 그 누군가에게 비로소 나직하게 입을 연다. 숲으로 가야 한다고.

<거미숲>은 송일곤을 재발견하는 영화인 동시에 감우성을 배우로서 확실하게 인지시키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배우는 작품이 전달하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전문직업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감독과 직접 토론해가며 강민의 분열된 이미지 속으로 자신을 지속적으로 투영시킨 감우성의 노력이 <거미숲>을 뛰어난 영화로 만든 이유 중 하나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알포인트>, 과거 또는 현재의 얼굴

<알포인트>가 평단과 관객에게서 공통적으로 호평을 받은 이유는 안전한 전략에만 안위한 채 사다코의 망령으로부터 조금도 나아갈 의도가 없었던 올해의 공포물 속에서 <알포인트>만이 유일하게 장르를 활용할 줄 아는 영화기 때문이다. 공수창 감독은 미화되기에 급급했던 베트남을 악몽으로 환원시켜 호러의 장르로 집어넣고 나아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딜레마적 상황에 회의의 시선을 남기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알포인트는 역사의 어긋남이 만들어낸 원귀, 그 원귀가 만들어낸 또 다른 한(恨)들이 그물망의 형태로 똬리를 틀고 있는, 들어왔으되 나갈 수는 없는 폐쇄적 공간이다. 그 중심에 자리한 최태인 중위는 베트남 안에서는 가해자로, 공포로서의 낯선 타자 앞에서는 피해자로 존재한다. 그리고 명분 없는 전쟁이 알포인트에 공포를 가져왔음이 명백해질 때, 최태인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운명을 동시에 겪어야 하는, 어딘가로 내몰렸던(또는 내몰리고 있는) 익숙한 청년의 얼굴이 된다.


감우성은 이 영화에서 공포와 광기, 절망 등 다양한 내면의 스펙트럼을 표출하며 이국땅에서 낯설 수밖에 없는, 그래서 무기력하고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표정을 담아낸다. <알포인트>는 “인간의 심리를 드러낼 수 있는 내면연기가 하고 싶다.”란 감우성의 말을 울림으로 만들어준 영화로도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거미숲>의 강민과 <알포인트>의 최태인은 과거로 회귀한다는 설정에 있어 닮은 인물이다. 강민은 불완전한 주체 안에서 비틀거리듯 조각난 기억을 끼워 맞추며, 최태인은 역사가 남겨놓은 보이지 않는 잔존물에서 허우적거린다. 차이라면 전자가 구원의 희망에 도달하는 반면 후자는 어디에서도 탈출구를 찾지 못한다는 점이다. 감우성은 그 두 인물의 내면을 통해 깊숙한 곳에 꼭꼭 감추어 두고 있었던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끌어내고야 만다.


배우로서 거듭나기, 또 다른 음색을 찾아서

영화라는 메커니즘이 스크린을 통해 관객 앞으로 가기까지가 얼마나 힘든 여정인지 감우성은 두 영화가 겪은 쉽지 않은 행보를 통해 몸소 터득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 남자의 머릿속에 얽힌 기억과 환상이라는 그리 친근하지 않은 소재를 역시 전혀 친절하지 않은 플롯으로 구성한 <거미숲>은 개봉날짜를 잡는데 애를 먹었을 뿐만 아니라 스크린에 모습을 나타낸 것도 잠시, 소리 소문 없이 쓸쓸하게 퇴장하고 말았다.

<알포인트>는 흥행에서 대중적 성공은 거두지만 촬영일정의 반복적인 수정과 <지옥의 묵시록> 못지않았던 캄보디아 로케이션의 어려움 등 태생적 수난에 몇 번이나 부딪혔고, 감우성은 마치 자신이 한 영화의 탄생을 위해 진통을 감내하려는 듯 간 수치가 죽음 일보 직전까지 올라가는 육체적 한계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는 <거미숲> 촬영 당시, 강민의 뇌수술에 보다 현실감을 주고자 머리의 반을 밀자고 직접 제안했으며 살해 장면을 찍을 때는 자신의 목소리로 표현 수위에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알포인트>에서 관등성명을 대라고 고함치는 장면은 그의 끈질긴 고집이 지켜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 한 편 찍는데 힘들지 않은 배우가 어디 있겠냐마는 감우성이 결코 쉽지 않게, 나름대로의 고민을 가지고 연기에 몰입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지난 주 한해를 결산하는 영화제들이 이어졌지만 그 곳에 감우성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거미숲>과 <알포인트> 역시 몇몇 후보 목록에서 간간히 눈에 띄었을 뿐 별다른 주목은 받지 못했다. 물론 영화제 수상여부가 영화나 배우를 가늠하는 절대적 가치가 될 수는 없다.

약간은 쌀쌀한 지금, 정작 필요한 것은 비단 정신·육체적 고통을 감내한 감우성의 ‘배우되기’나 <거미숲>과 <알포인트>가 현실과 대면하고자 시도했던 치열한 작업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영화들이 공존하고 회자될 수 있을만한, 다양한 목소리의 수렴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

<알포인트>의 공수창 감독은 감우성을 일컬어 “약간의 튜닝 차이에 따라 음색이 미세하게 달라지는 악기 같은 배우"라고 했다. 감우성이 다음 영화로 <간큰 가족>이라는 코미디 장르를 선택했다는 소식이 들리는 요즈음, 그가 코미디에서는 어떤 새로운 음색을 선사할지, 그리고 언제인가 다시 들려줄 심연의 음색은 어떤 얼굴을 그려낼지 자못 궁금해진다. ⓒ erazerh


반응형

'FILM'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룩앳미] 아름다운 클래식 선율에 담긴 잔잔한 이야기  (6) 2004.12.28
[몽상가들]  (12) 2004.12.23
[시티 오브 갓]  (5) 2004.11.27
[나비효과] 현실을 재구성하다  (4) 2004.11.1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