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기억 속으로 들어가다

누구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기억은 각각 에피소드가 되어, 지나온 시간들을 채워 넣고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낸다. 가끔씩 기억의 한 조각을 끌어내고서 그 때 이렇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낄 때가 있다.

자신의 삶에 백 퍼센트 만족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다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이 현실의 불만족스러운 부분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 돌아갈 수는 없으되 머릿속에는 남아있는 기억의 파편들 때문이다.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내는 이 같은 욕망에서 출발하는 영화가 바로 <나비효과(The Butterfly Effect)>다. ‘나비효과’는 중국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에서 허리케인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이론으로, 작은 변화라도 나중에는 커다란 결과를 불러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를 바꾼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J. 마키에 그러버와 에릭 브레스가 공동 각본, 감독한 영화 <나비효과>는, 한 청년이 현재 삶의 잘못된 부분을 바꾸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기억들에 관여하는 이야기를 줄기로 한다. 시, 공간을 초월하는 여정인 셈이다.

<백 투 더 퓨처>에서부터 <레트로엑티브>, 약간 틀리지만 <사랑의 블랙홀>까지 어떤 목적을 위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시간의 흐름에 인위적으로 개입한다는 내용은 꽤나 익숙하면서도 흥미를 주는 소재다.

<나비효과>가 과거로 되돌아가기 위해 설정한 도구가 타임머신과 같은 과학적 기구가 아닌 일기장(혹은 영상물), 즉, 기억의 흔적이라는 점은 위의 다른 영화들과 선을 그을 수 있는 부분이다.

어린 시절의 에반(에쉬튼 커처)은 일기장에 하루하루의 기억을 기록해 놓는다. 어떤 충격적인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순간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병을 앓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된 에반은 자신의 일기를 통해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음을 발견하고 어릴 때 짝사랑했던 캘리(에이미 스마트)의 운명을 바꾸고자 비어있는 시간으로 자신을 돌려보내기 시작한다.


어릴 적 기억하지 못했던 그 텅 빈 시간은 어른인 에반이 돌아와 직접 관여할 수 있는, 또는 이미 관여했던 틈이 된다. <나비효과>는 에반이 과거의 시, 공간으로 들어와 새롭게 개입함으로써 현재의 모습들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에피소드처럼 나열한다. 하지만 뜻하는 바와 달리 캘리와 다른 친구들, 그리고 자신의 삶 등 모든 부분에 균형잡힌 행복을 가져오기가 쉽지만은 않다.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는 긴장감

처음으로 과거를 바꿀 때, 그러니까 에반과 캘리가 아동 포르노를 찍어야 했던 순간을 바로 잡고 현실을 재구성할 때만 해도 영화는 긴박한 흐름을 간직한다. 하지만 바뀐 현실이 다른 불행을 낳고 또 다시 일기장을 찾아 기억을 더듬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면서 에반의 절박함은 긴장의 끈을 놓아버린다.

어린 시절 하나의 경험만으로 네 사람의 삶과 성격이 송두리째 바뀐다는 설정은 후반부에 다다르면서 운명의 재배치가 필연적이라 설득하던 초반의 감을 조금씩 상실한다. 나비효과 이론을 감안하더라도, 개개인 스스로 자신의 삶을 충분히 꾸려나갈 수 있다는 여지에 대해서 영화는 지나치게 침묵한다.


무엇보다도 <나비효과>가 창녀와 대학생, 살인자와 대학생 등 삶을 제한된 이분법의 신분 구조 안에서만 설명, 기억으로부터 상상되는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포함하지 못한 채 과거 개입이라는 흥미 있는 장치를 에반의 선택을 강요하는 극단적 영역 안에서만 활용하는 점은 아쉽다.

에반의 선택은 결국 ‘사랑하는 이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는 관습적 테마를 ‘또 다시’ 불러온다. 그럭저럭 맛은 있을지 몰라도 새로운 것은 없다.

<나비효과>는 다른 엔딩을 가진 두 가지 버전으로 제작되었다. 감독판은 극장판이 버리지 못한 로맨스의 여운에서 약간 비켜나 또 다른 범주로 결말을 끌어낸다. 그렇다고 지금 말한 아쉬운 부분이 모두 채워지진 않지만, 어찌되었든 감독판을 스크린에서 만나지 못하는 현실은 조금 안타깝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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