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려내는, ‘슬픈 욕망들’의 교차점


우리 모두는 삶이라 불리는 제한된 시간 속에 있다.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몫에 집중하느라 모르는 사람의 삶에까지 일일이 관심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여기,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삶(또는 죽음)에 잠시나마 주목하게 해줄 ‘드라마’ 한 편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들려준다. 벌새 한 마리, 초코바 하나, 5센트 동전 다섯 개, 사람이 죽을 때 빠져나가는 그 무게들이 모두 21그램이라고. 21그램은 과연 어느 정도의 무게일까?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21그램(21Grams)>은 다소 독특한 화법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연하게 발생한 교통사고. 아무런 관계없이 살아가던 세 사람은 이 사건으로 인해 서로 얽히고 원치 않았던 고통이 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다. 영화는 이 아픔들, 그리고 거기에서 빠져 나오고자 몸부림치는 ‘슬픈 욕망들’의 교차점을 그려내며,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영혼'의 무게를 저울질해본다.


누군가와의 ‘관계’는 아픔을 수반한다

<21그램>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의 사고로 여러 가지 상황이 생겨나고 또 이 상황들은 세 사람의 인간관계에 변화를 가져온다. 슬픔과 상처로 가득한 내면은 위로하려는 마음, 위로 받으려는 마음, 또는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 등을 거치면서 스스로를 치유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관계가 생성되거나 기존의 관계가 깨어진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상실해버린(혹은 그 상실로 소중한 것을 얻은) 이들은 결국 또 다른 이들에게 상실을 남긴 채, 그 슬픔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누군가와 소통하며 산다. 이 관계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낳기도 하지만 결국 인간은 그 고통마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으로 끌어들인다. 어쩌면 <21그램>은 슬픔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에서 비롯하는 필연적인 고통을 말하려는 지도 모르겠다.


편집 -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

<21그램>에서 가장 관심거리가 되는 부분은 역시 편집이다. 시간 흐름에 어긋나는 신(scene)들이 배치되면서 영화의 초반, 사건 전개를 따라잡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신과 신을 시간 역순으로 배치하고 나중에 가서야 그 모든 인과관계를 바로 잡는 <메멘토>에 비하면, 이 영화의 시간 배열은 그나마 머리가 덜 아픈 편이다.

<21그램>의 독특한 편집은 관객과 ‘퍼즐’을 해보자고 내놓은 것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편집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툭툭 던져졌던 신들은 중반 즈음해서, 관계의 변화와 이에 따른 갈등의 전개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데 도움을 준다. 영화 초반, 시간 흐름을 방해하던 그 장면들이, 각자의 고통이 어디서 교차하고 어떻게 귀결될 지에 대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관객은 한 장면이 전개될 때 그 과거는 물론, 미래까지 감지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 신마다 나타나는, 감정의 섬세한 흐름이 보다 더 강조된다. 감독은 시간 순서에 따른 원인, 결과가 아닌, 운명의 무게에 짓눌린 인간이 감정을 폭발하고 흐느끼는, 그 순간순간에 벌어지는 관계를 조합함으로써 극을 이끌어 나간다.

<21그램>에서 시간은 쪼개지지만 그 조각난 시간 사이에 있는 삶의 모습은 면밀하게 연결되어 인과관계의 틀을 완성해낸다. 시간 순서가 아니라 감정의 굴곡들이 영화를 전개하는 것이다.

이 같은 편집의 효과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배우의 연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숀 펜, 베니치오 델 토로, 나오미 왓츠 등 모든 배우가 삶과 죽음 앞에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감정을 완벽하게 재현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거쳐 <21그램>에 이른 나오미 왓츠는, 배우로서 최고의 전성기에 접어든 듯 훌륭한 연기를 선보인다. 앞서 말한 두 배우는 물론 말할 것도 없다.


질문을 남기다

영화 <21그램>은 탄탄한 드라마트루기와 이를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편집 등 감독과 배우의 역량이 잘 조화된 작품이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새롭고도 흡입력 있는 플롯으로 삶이라는 무대가 그려내는 갖가지 감정의 분출을 밀도 있게 집어낸다.

21그램이 오가는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여정이 빚어내는 다양한 관계와 감정에 관한 이야기 <21그램>. 영화는 분명 시간, 공간적으로 허구지만 <21그램>의 디제시스는 우리가 현실에서 느끼는 아픔들을 그대로 담아낸다.

싫든 좋든 우리는 삶과 죽음이라는 절대명제 앞에 던져진 존재다. 결국은 끝나야 할, 인생이라는 시간과 공간. 그 안에서 우리가 얻는 것과 잃는 것, 그리고 우리가 지키려고 애쓰는 ‘영혼’이라는 것에 대해 <21그램>은 ‘생각’해볼 것을 권유한다.

21그램이라는 무게는 가벼울 수도, 무거울 수도 있다. 21그램이 무거워진다면, 그것은 아마도 매우 슬픈 순간이 될 것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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