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만남, 서로의 빈 공간을 들여다보다


남녀관계에 대한 물음은 문학, 연극, 회화 등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한 창작물들이 가장 꾸준하게 다루어온 소재 중 하나다. 영화도 예외는 아니어서 딱히 로맨스나 멜로가 아니더라도 이성관계를 영화의 축으로 삼는 설정은 매우 낯익은 일이다.

이는 아마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모든 인간관계의 중심에 자리 잡은, 가장 근원적으로 욕망되는 소통의 활로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그 모든 문화예술이 여전히 ‘사랑이 무엇인가’에 관해 계속해서 질문해오는 것은 남녀관계가 그만큼 정의내리기 어렵고 본질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증거가 아닐까.

9년 전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사랑에 관해 짧은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줬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는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의 짧지만 열정 가득했던 하룻밤의 만남을 통해, 20대가 가질 만한 삶과 사랑에 대한 개념들을 차근차근 모아 솔직담백한 대화 속에 담았다.

<비포 선라이즈>는 사랑, 인생, 죽음을 결코 무겁지 않게, 그렇다고 가볍지만도 않은 독특한 화법으로 풀어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결론나지 않았지만, 낯설음과 사랑, 절제와 본능 간 경계를 오가며 극중인물과 관객의 감정을 묘하게 엮어내는 대화의 미학은 여전히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다시 대화하다

그리고 9년이 지난 지금, 링클레이터는 <비포 선셋(Before Sunset)>을 가지고 다시 나타났다.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가 함께 각본에 참여했다니 <비포 선라이즈>가 남긴 여운이 관객만의 것은 아니었나 보다.

9년이라는 세월은 두 사람에게 변화를 가져왔다. 꿈 많던 청년 제시는 작가가 되었고 셀린은 환경단체에서 일하며 ‘실천’의 삶을 살고 있다. 9년 전 비엔나를 모티브로 쓴 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제시는 파리에서 아주 우연히(!) 셀린을 다시 만난다. 약간의 서먹함을 뒤로 한 채 그들은 두 번째 만남을 시작한다.

<비포 선셋>은 <비포 선라이즈>와 어떤 면에서는 닮았고 어떤 면에서는 다르다. 대화는 여전히 열정적으로 영화를 끌어 나간다. 대사 한마디 한마디는 서로가 부재했던 9년이라는 시, 공간을 약간이라도 채워넣고 싶은 소통의 욕구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이 대화들은 프레임 밖으로 나와 관객에게 함께 호흡할 것을 요구한다.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 지나온 삶의 여정, 사랑과 섹스에 이르기까지 토론과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제시와 셀린이 동시에 깨닫는 것은 9년 전 비엔나가 각자에게 남긴 상실감이다. 이 상실은 시간이 긁고 지나가면서 생긴 삶의 상처들과 뒤엉켜, 그들의 영혼이 서로의 그림자 안에서 맴돌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한 편의 그림같은

영화는 줄곧 제시와 셀린을 보여준다. 물론 예전처럼 순수하거나 꿈에 젖어있지는 않다. 아마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현실이 그들의 이상을 하나씩 집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롱테이크로 두 사람을 따라다니며 파리 이곳저곳을 보여주지만, 이 역시 예전의 비엔나처럼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하지만 평범하고 차분한, 오후 햇살이 따사로운 파리의 전경은 언제부터 흘렀을지 모를 세느강처럼 여전히 피토레스크(그림의 대상이 될 만큼 아름다움)로서 기능한다. 9년 전 추억을 마음 한구석에 접어둔 채 살아온 두 사람이, 과거를 회상하고 상처를 내보이며 서로의 시간을 포개는 순간, 그림은 어느덧 완성된다.

<비포 선셋>은 인상주의의 감성을 지닌 영화다. 삶의 한 순간을 붙잡고 그 시간과 공간의 감정을 그려내는 점도 그렇지만, 오후의 햇빛이 세느강과 셀린의 머리 위에 뿌리는 빛을 보노라면 <비포 선셋>의 프레임은 마치 모네의 작품처럼 느껴진다.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 사이의 간극은 제시와 셀린만이 가지는 시간이 아니다. 이는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기억이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때로는 추억으로 때로는 파편으로 채워온, 삶의 단면들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듯, <비포 선셋> 역시 사랑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 남녀사이에 어떤 답을 내리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을 전제로 하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링클레이터 또한 어떤 결론이나 철학을 내보일 생각은 없는 듯하다. 영화는 한적한 오후 마냥 그렇게 사랑, 인생, 세상을 이야기한다.

셀린의 ‘Let me sing you a waltz'를 듣고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제시. 은은한 미소가 입가에 퍼지고 나도 모르는 눈물이 살짝 맺힐 때, 비로소 영화는 최고의 맛을 선사한다. <비포 선셋>은 아주 적절한 시기에 우리 곁으로 돌아온, 제대로 된 ’속편‘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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