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 반 산트 감독, 그의 최고 걸작을 만들다


집안에 거대한 코끼리가 들어앉았다. 어떻게 하긴 해야겠는데 손쓰기가 쉽지 않은 상황. 결국 어쩔 수 없이 코끼리와 함께 살며 그 상황에 점점 익숙해진다. 구스 반 산트는 미국의 고등학교를 서양우화에 나오는 코끼리에 비유한다.

영화 <엘리펀트(Elephant)>는 '어쩔 수 없는 코끼리'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충격의 16분을, 감정이입을 최대한 자제한 채 그야말로 '관조적'으로 뒤쫓는다.

영화 속 아이들은 특별하지 않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에 대해 고민하며 눈물 흘리는가 하면, 학교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사진 찍는 것이 낙인 녀석도 있다. 다이어트 중독에 걸린 세 명의 치어리더나 외모로 인해 고통 받는 여자아이 등 모두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고등학생들의 그렇고 그런 삶의 모습이다.

심지어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알렉스와 에릭조차 평범한 아이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왕따를 당하고, 게임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며, 히틀러의 영상을 보기는 하지만, 영화는 이런 상황을 살인의 동기로 단정 짓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누구나 총을 살 수 있는 환경 역시 하나의 ‘단서’이지 원인은 아니다.

영화는 비극과 그 직전의 ‘아무렇지도 않음’을 그저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나와 당신이 어디에서나 만나고 겪을 수 있는 이 아이들의 일상은 ‘추악하고도 화창한 어느 날’에 일그러진다.

같은 콜럼바인고교 사건을 다루었지만 마이클 무어와 구스 반 산트의 표현기법은 다르다. 마이클 무어가 미국에 내재하는 폭력성을 분석하고 따져 묻는 반면, 구스 반 산트는 그저 아이들을 차분히 응시한다. <볼링 포 콜럼바인>이 잘 짜여진 논설문 또는 거꾸로 읽는 미국사라면, <엘리펀트>는 건조체로 쓰여진 한 편의 시다.

숏들은 평범한 생활을 담담하게 담고, 절제된 카메라와 어우러져,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을 마치 ‘간직’하려는 듯이 각각의 시점에서 교차하고 반복된다. 구스 반 산트는 시간과 공간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하나하나 훑어보면서 그 모든 것들이 일상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야 했음에 주목한다. ‘왜 비극이 발생했는가?’라는 물음은 화면 밖에 남겨둔 채 말이다. 앙드레 바쟁이 살아있었다면 진정한 ‘창조적 다큐멘터리’라고 극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엘리제를 위하여'와 '월광 소나타'의 슬픈 연주는 롱테이크로 반복해보지만 결국은 비극 앞에 멈춰 서야만 하는 아이들에 대한 애도이자 관객이 감정을 소통할 수 있는 입구이다.

집안의 코끼리처럼 어쩌지 못한 채 함께 가야 할, 가끔은 터질 수도 있는 시한폭탄으로 자리 잡은 미국의 고등학교. 구스 반 산트는 한 학교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을 차분하면서도 슬픈 화법으로 재현함으로써, ‘아무렇지도 않게’ 시작된 그 광기의 순간을 고발하고 애도한다.

'월광소나타'가 그토록 슬프게 들리는 이유는, 미국의 코끼리 못지않은 어떤 무언가를 당신과 내가 짊어진 채 살아야 하는 비극 때문이 아닐까? 영화 안에서도 영화 밖에서도, 하늘은 여전히 추악하고 화창하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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