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3부작의 마지막, 어리석은 본능을 동정하는 박찬욱 감독

(스포일러 有)


금자씨(이영애)가 백선생(최민식)의 입에서 재갈을 빼낸다. 드디어 백선생이 말문을 여는 순간이다. “금자야, 눈화장이 그게 뭐야~”. 13년 동안 칼을 갈아온 복수의 화신을 앞에 두고서 곧 ‘죽어야’ 할 놈이 하는 말이다. 이런 식이다. 인물이 툭툭 던지는 대사는 스크린 속 상황이 보편적으로 담을 듯한 느낌을 슬쩍 뒤튼다. 가뜩이나 세트도 단편실험영화 같은 마당에 웃음조차 건조하고 기괴해진다. 불친절한 감독씨다. 박찬욱 감독은 여전히 이미지와 대사의 부조화(또는 이미지와 이미지)가 낳는 모순의 미학을 즐기는 것 같다. 꿈이 무서워서 깬 것이 아니라 ‘너무 지루해서’ 깨버렸다는 김민종의 고백(<삼인조>)에서부터 언제 죽을지 모르는 백선생이 동화구연투로 친절하게 통역하는 모습까지, ‘정상적’인 플롯을 비껴가는 박찬욱 감독의 장난질은 정말이지 그칠 줄을 모르는 듯하다.


너나 잘하세요. 나는 비틀 테니


복수 시리즈를 종결하는 <친절한 금자씨>는 전작들이라 할 수 있는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보다 비틀기라는 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한편 그동안 아껴두었던 내러티브 교차도 선보인다). 금자씨는 마치 <미션 임파서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그래서 다소 뜬금없게도 보이는 서류 훔치기 액션을 통해 호주로 입양되었던 딸을 데려온다. 다른 모녀상봉 드라마와 다르게 이후에도 모성애 발현이나 ‘피는 물보다 진했다.’로 귀결되는 갈등해소 과정은 강조되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저 어긋나고 끊기는 대화가 오갈 뿐이며, 정작 갈등이 봉합되기 시작하는 때는 복수극이 완료된 직후라고 영화는 암시한다. 내레이션으로 미루어 보아 어머니와 딸로서의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마도 수년이 흐른 뒤의 일이리라. 뒷부분인 폐교씬에 이르면 ‘민주적 학급회의’의 목적이 효율적인 ‘집단살인’이 되어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지는데, 이는 박찬욱 감독의 정상 궤도 벗어나기가 최고조에 달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어긋남은 조금 더 넓은 범위로 다가가 기존의 윤리 기준을 가차 없이 뽑아버리기도 한다. 찬송가를 부르며 금자씨의 출감을 맞는 교인들은 “너나 잘하세요.”라는 배반의 목소리를 듣는가 하면, 준비해온 두부가 으깨어지는 수모도 당한다.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내밀라던 가르침은 실행할 틈도 없다. 금자씨는 복수심을 통제하는 선의의 제도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영화는 제도 자체에도 능력을 부과하지 않는다. 교도소는 교화의 기능은커녕 다시 한번 강자와 약자를 구분 짓는 약육강식 공간으로 자리하며, 금자씨에게는 복수 전주곡으로서의 친절을 연주할 좋은 공연장이 되어준다. 또한 전도사는 주님의 사업 때문에 기꺼이 악인의 하수인임을 자처하고, 진범을 잡는데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았던 경찰은 순조로운 복수극을 위해 친절한 도우미가 되어 등장한다.

이처럼 박찬욱 감독은 상황과 대사의 보편적 결합을 비틀고, 나아가 옳은 일을 한다고 여겨지는 제도나 권력에는 조롱과 냉소가 뒤섞인 묘한 웃음을 보낸다.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경계는 전작들에 이어 다시 한번 무너지며, 이 같은 경계 흐리기의 분위기는 초현실이 가미된 모호한 현실을 거쳐 ‘속죄 받을 수 없는 행동’을 ‘해야만 하는’ 아이러니로 나아간다. 그리고 복수를 둘러싼 역설적 기운의 한 가운데에는 분노를 행동으로 옮기고자 기꺼이 친절녀로 변신했던 복수녀 금자씨가 서 있다. 개의 형상을 한 백선생을 썰매로 끌어다 놓고 “안녕히 가세요.”라는 친절한 멘트와 함께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그녀는 마치 천상에 있는 듯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증오와 사랑, 살인, 구원을 향한 열망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 바로 금자씨의 머릿속이자 ‘복수’라는 테마가 운명적으로 다다르게 되는 딜레마의 지점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영화 <친절한 금자씨>는 개별 플롯들 외에도 그것들을 포함한 전체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에서도 꽤나 불친절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내러티브는 복수를 둘러싼 인과관계나 시간순서가 아니라 금자씨의 심리를 따라 변화무쌍하게 전개된다. 따라서 금자씨가 교도소 동지들을 만날 때마다 그녀들과 관련한 교도소 이야기가 에피소드처럼 삽입된다. 회상 시퀀스는 금자씨가 어떻게 ‘친절한’이란 수식어를 달았는지 설명하면서 현재 상황과 맞물려 그녀의 감정선을 드러낸다. 관객은 한 장면이 전개될 때 그 과거는 물론 미래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다. 물론 그녀 마음 깊은 곳에 드리운 정확한 표정은 읽기 어렵지만, 비교적 단선적인 스토리 라인이 ‘역동성’이라는 면에서 이 같은 지그재그 구성에 빚을 지고 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처럼 박찬욱 감독은 영화의 굴곡을 복수의 진행이 아니라 ‘복수라는 풍경’의 파편을 조합하는 데에서 찾아낸다. <친절한 금자씨>는 그래서 이야기하는 영화보다는 ‘그려나가는’ 영화에 가깝다.

<친절한 금자씨>가 보이지 않는 것들을 형상화하기 위해 이미지, 혹은 사운드의 효과를 가능한 한 최대로 활용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림’이라는 느낌은 두드러진다. 영화가 담고 있는 핵심 개념인 ‘복수’는 물론 한 줄로도 풀이될 수 있는 그리 어렵지 않은 단어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은 표면적인 의미만이 아닌, 내면 어딘가에 큰 흉터로 자리 잡고 있을 증오심, 그리고 그 분노가 어떤 단계를 거쳐 기어코 실천되는 광경(또는 그 이후의 광경)으로서의 복수를 그려내기 위해 끊임없이 프레임에 덧칠을 한다. 세트는 인물이 꾸는 꿈속에서 그 느낌을 빌려온 듯 강렬하고 원초적이며, 적절히 배치된 상징(예를 들면, 두부)은 금자씨의 증오, 혹은 구원을 향한 갈망이 어떤 길로 접어들지 이해하는 데 키워드로서 기능한다. 또한 이미지로 미처 전달되지 못하는 감정의 미묘한 변화는 바로크 음악의 감성적인 선율 위에 살짝 얹혀지기도 한다. 무색, 무취의 복수는 (다소 과잉이라고 여겨질 정도의) 상징과 추상적 이미지들, 사운드가 빚어내는 화려한 수사를 거쳐 비로소 손에 닿을까 말까한 거리까지 다가오게 된다.

정상적인 플롯을 벗어나는 상황과 설정들, 그리고 풍경화와 추상화를 오가는 전개는 필연적으로 ‘복수’라는 목적지로 달려간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또 다시 한 가지 질문과 마주해야 한다. ‘복수란 과연 무엇인가?’ <친절한 금자씨>가 전작들과 분명하게 차별되는 부분은 ‘복수는 과연 속죄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전작들보다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복수 자체가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애초부터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금자씨의 복수극이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진행되는 이유다.

한편 다른 보편적인 영화가 복수를 다루는 방법 -인물의 복수심에 타당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성공하면서 끝맺는- 과 다르게 주제에 접근한다는 점에서는 <친절한 금자씨>도 전작들과 같은 맥락 위에 있다. 따라서 <친절한 금자씨>에는 전작들이 지닌 속성(<복수는 나의 것>의 서늘함, <올드보이>의 뜨거움)이 뒤섞여 있다. 금자씨가 툭툭 내뱉는 말들은 거침없이 복수를 진행하는 그녀에 어울리게 싸늘한 어조로 표현되지만, 처형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일 때면 영화는 복수심으로 후끈 달아오른다. 그러다가도 카메라는 어느덧 냉소어린 시선으로 돌아가 그들의 행동에 회의를 품기도 한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한’ 복수 시스템


<복수는 나의 것>에서 ‘복수’라는 단어는 누군가의 통쾌한 무용담을 뜻하지 않는다. 소중한 것을 상실한 인간들은 지켜주지 못했다는 스스로를 향한 질책과 세상에 대한 무작위의 분노를 하나로 묶는다. 그러고는 그것을 복수라는 이름 아래 누군가를 향한 칼부림으로 표현한다. 이제 신체는 절단되고 장기는 소화된다. 이 같은 폭력은 언뜻 정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행위는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의 복수에도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각각의 폭력은 타당하되, 그 끊어지지 않는 순환고리는 복수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소통할 수 없는 황폐한 세계의 상징일 뿐이다. 클로즈업과 롱테이크로 비춰지는 공장의 괴물 같은 기계처럼, 그리고 그 부속품처럼 인간은 비정하고 차가운 복수 기계로만 작동한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복수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메마른 이 땅에 남은 유일한 대화방법’을 뜻한다. 그것이 좁힐 수 없는 계급 간극 탓이든, 자의 또는 타의로 귀를 닫아버린 인간군상들 탓이든, 상실감과 죄의식은 오로지 분노와 살육의 형태로만 표현 가능하다. 가해자와 피해자, 선과 악의 구분은 없다. 비정한 세상 풍경을 채우는 것은 소통 불능이 남긴 순환하는 복수극과 그 결과물로서의 비릿한 고깃덩어리다. <복수는 나의 것>의 또 다른 제목으로는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복수뿐>이 적절할 듯하다. ‘착한 놈’인 류(신하균) 역시 일단은 죽고 봐야 하는 운명에 처하니 말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 황량하고 단절된 세상풍경을 묘사하는 단서로 복수의 순환을 담아냈다면, <올드보이>는 보다 제한된 범위에서 좀 더 깊게 복수를 설명한다. 초반은 다른 복수영화와 다르지 않게 출발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15년간의 감금으로 원한과 증오를 꾸역꾸역 쌓아 괴물이 된 오대수(최민식)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누군가를 찾아 나선다. 복수할 대상을 좇는 스릴러의 끝에는 그러나 액션이 주는 짜릿한 쾌감 대신 비극적인 결말이 운명처럼 자리를 꿰차고 있다. 오대수가 몸으로 체득한 분노 에너지는 화려하게 폭발할 틈도 없이 결국 또 다른 분노 에너지 앞에 무너지고 만다. 복수의 에너지와 에너지가 충돌하는 지점, <올드보이>는 그곳에서 ‘시작은 미약한 혀끝이었지만 끝은 정말 창대하도록 비참한’ 복수극의 필연적 결말을 보여준다.

‘무거운 돌이든 가벼운 돌이든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라 했던가. 사소한 데서 빚어진 상실은 원한이라는 씨앗을 낳고, 그 씨앗은 복수라 불리는 거대한 톱니바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톱니바퀴들은 상대를 마모시키기 위해 스스로 마모되는 것을 감수한다. 결국 한쪽이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고 부서질 때, 혹은 상대를 부술 때, 복수로써 삶을 꾸리던 개인들은 동시에 무너진다. 복수를 목표로 한 인생은 매우 뜨겁게 달아오르지만, 언젠가는 급격히 식어야 한다. 그것이 ‘올드’해졌어도 여전히 ‘보이’인 자들이 겪을 운명이다.


복수와 속죄의 사회학

증오 밖에 건질 것이 없는 비정한 땅덩어리를 관조하고, 그 에너지에 취해 게임 밖으로 다시는 나올 수 없었던 사나이들을 떠나보낸 후, 박찬욱 감독은 이제 복수를 끝내야 할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다시 <친절한 금자씨>로 돌아와서.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복수의 활극은 예상대로 사적인 차원에서 시작되며, 속죄와 구원을 향한 소망 또한 일단은 개인적 갈등으로 귀속된다. 앞에서도 말했듯, 금자씨는 정의사회구현을 위해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착한 제도들에는 관심이 없다. 복수를 하든, 용서를 하든, 속죄하고자 두부를 먹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금자씨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할 문제다.

이번에도 역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법칙은 흐른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류가 장기밀매업자들의 장기를 씹어 먹고 동진(송강호)이 딸이 빠져죽은 그 물 속에서 카니발을 벌인 것처럼, 남의 목숨을 빼앗은 백선생은 제 목숨을 내놔야 마땅하다. 그래서 <올드보이>의 이우진(유지태)은 말한다. “우리는 알면서도 사랑했다.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

여기까지다. <친절한 금자씨>가 전작들과 공유하는 영역은 여기까지다. 금자씨가 부여잡은 복수의 끈은 전작들과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류와 동진이 가해자이자 피해자로서 복수라는 끈의 양끝을 붙잡았고, <올드보이>에서는 오대수와 이우진이 마찬가지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친절한 금자씨>의 백선생은 그 끈을 잡을 권리가 아예 없는 사람이다. 그는 영락없는 가해자이자 악당이다. 금자씨가 잡은 끈의 반대편에는 또 다른 복수씨 대신 3부작의 완성에 걸맞게 질문 하나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수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호한 경계는 백선생을 제외한 한쪽으로 집중된다. 박찬욱 감독은 좌우동형이던 복수 시스템의 한쪽을 제거한 후, ‘드디어’ 그 빈 곳을 복수와 속죄, 구원에 관한 질문으로 채워 넣는다. <복수는 나의 것>이 다소 거칠게 복수씨들을 스크린으로 데려오고, <올드보이>가 그 위에 화려하면서도 비극적인 수사를 덧붙였다면,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 테마를 마무리하기 위한 종결형 어미의 영화인 셈이다.


이제 남은 것은 복수와 속죄의 사회학이다. 선의의 제도에 거는 기대 따위는 애초에 가질 생각이 없었던 금자씨는 사적 차원에서 처형을 준비한다. 영화 카피인 “받은 만큼 드릴게요.”는 복수심에만 한정된 말이 아니다. 수감생활 중 금자씨의 배려, 또는 친절한 살인으로 은혜를 입은 사람들 역시 받은 만큼 금자씨에게 무엇인가 해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받을 것은 받는 금자씨는 거처와 일자리를 얻고 ‘예쁜 총’으로 백선생을 겨눌 수 있게 된다. 이제 해야 할 일은 집행이다. 이 지점에 이르러 박찬욱 감독은 정말로 ‘받은 만큼 돌려드리는’ 사형식을 선보인다. 금자씨는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해. 하지만 죄를 지었으면 속죄해야 하는 거야. 속죄, 알아? 큰 죄를 지었으면 크게, 작은 죄를 지었으면 작게.” 이 말은 영화 속 백선생 처형식에 논리적 타당성을 얹어준다. 한명을 죽였으면 한명에게, 여러 명을 죽였으면 여러 명에게 당해서 속죄해야 옳다.

복수는 이루어졌다. 자,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달라졌을까. 멋쩍게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보지만, 정작 파티의 주인공이어야 할 아이들은 여전히 그들 앞에 없다. 돌아오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계좌번호로 흘러들어올 의미 없는 몸값이다. 뼛속까지 사무쳤던 원망을 실어 칼을 휘둘러본들 이미 잃어버린 존재는 다시 만날 수 없다. 부재한 자식은 여전히 그들의 삶을 조일 것이고, 그 중 누군가에게는 백선생의 망령이 또 다른 속죄로 가는 길에 걸림돌로 작용할지 모른다. 임무를 완수한 친절한 금자씨의 표정은 어떠한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기쁨과 슬픔의 경계에 서 있는 모습이다. 길고 길었던 복수를 끝냈다는 점에서 후련하게 웃음지어야 하겠지만, 오랫동안 악마에게 지배당해왔다는 서글픔이 컸을까. 혹은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 때문일까. 복수심의 영역과는 또 다른 분노가 그녀 얼굴 위에 스며든다.


저건 저건 내리치는 검은 칼

내레이션이 밝히듯 금자씨는 결국 구원받지 못한다. 한 아이가 죽음에 이르는 데 일조했다는 죄책감과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원망은 누군가를 처단하기 위한 복수극으로 이어졌지만, 죄의식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금자씨의 이 같은 내면은 어느새 훌쩍 커버린 원모(유지태)를 환영으로 불러온다. 무엇인가 말하려는 금자씨의 입에 원모는 재갈을 물려버리고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마치 이우진의 얼굴이 되어“아직도 모르겠어요? 내가 애가 아니었다는 걸?”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유령이 된 원모는 애초부터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다만 금자씨가 과거로부터 들고 온 죄의식과 그 기운 서린 공간이 여전히 아이로 남아 있는 원모를 필요로 했을 뿐.

속죄를 향한 열망이라는 점에서 두부 모양을 한 흰 케이크는 복수와 같은 목적을 띤다. 복수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건만, 금자씨는 케이크에 박은 얼굴을 떼지 못한다. 아마도 영화가 끝나더라도 그녀는 그렇게 쭉 있을 것이다. 구원받고 싶으니까. 슬프고 허무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 박찬욱 감독은 스스로 던진 질문에 ‘복수는 속죄의 수단이 되지 못할뿐더러 그 자체가 또 다른 죄악일 수 있다.’라고 대답하지만, 미워하고 원망하는 감정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아니, 부인하지 못한다가 옳겠다. 소중한 존재를 잃은, 그래서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떨쳐버릴 수 없는 상실감에 시달리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증오를 품는다. 증오심은 원초적이며 에너지로 넘쳐난다. 따라서 삶의 이유를 잃은 자에게 복수는 또 다른 삶의 이유로 다가온다.

“저건 포플러나무가 아니다 / 팽개쳐 일그러진 두 바퀴 / 소리치는 몸뚱이 / 저건 저건 내리치는 검은 칼”


최정례 시인의 ‘창’, 그 마지막 연이다. 아무리 사소하고 연약한 나뭇잎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칼이 될 수 있다. 소중한 것을 잃은 자신에 실망하고 세상에 치를 떤다면, 나뭇잎마저 칼로 느낄 만큼 세상이 두려워진다면, 그 사람은 감추었던 칼을 꺼내들 것이다. 그 칼은 ‘착한 유괴’를 한 류와 ‘나쁜 유괴’를 한 백선생을 가리지 않는다. 잃어버린 자에게 상실은 항상 같은 무게이며 ‘표적’을 겨누는 원한의 크기 또한 동일하다. 때문에 별 생각 없이 던진 말 한마디로 오대수는 결국 혀를 내놓아야 한다. 이렇듯 상실이 남긴 고통 주변에는 광기어린 분노와 또 다른 고통이 들끓는다. 자신이 받은 칼날은 누군가에게는 되돌려주어야 하는 법. 물론 상처는 낫지 않으며, 죽은 이가 돌아올 리는 더더욱 없다. 게다가 복수심에 칼을 들이댈 때, 자신 또한 그 칼에 상처입기 십상이다. 흉터 하나가 더 생길 수도 있다. 나뭇잎이 언제 내 살을 도려낼지 모르는 세상, 그러나 받은 만큼 돌려드리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예술과 산업의 그래프 어딘가에 무수히 찍혀 있을 거라 추측되는 영화의 좌표들, 박찬욱 감독은 복수 3부작을 통해 그 안에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새겨 넣는다. 그 위치는 모호할지언정 점이 존재하는 이유는 명백해 보인다.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순식간에 복수의 화신이 될 수도, 복수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인간은 돌아오지 않을 과거에 얽매이는 어리석은 본능을 드러낸다. 자신을 갉아먹을 줄 알면서도 결코 멈출 수는 없는 인간, <친절한 금자씨>는 그 슬픈 영혼들을 위한 한 편의 ‘위로 메시지’다. 지나치게 차갑고, 지나치게 뜨거웠던 복수 시리즈는 이제 평온한 시선을 찾아 나섰다. 구원은 힘들어도 동정은 가능하다. 그래서 희망한다. 금자씨 머리 위로 하얀 눈이 오래도록 내리기를.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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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하다. 귀신이 나온다 싶은 타이밍이면, 귀신 아가씨는 어김없이 창백한 얼굴을 들이댄다. 시체가 누워있을 것 같은 장면에서는 해골의 형상으로 스크린에 등장하는 귀신 양. 암전 사이로 조금씩 공간이동하는 것에서부터 천장, 자동차, 사다리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스물스물 다가오는 스파이더맨적 활동반경까지, 귀신 양, 어디서 본 건 많은 듯하다.

<셔터>는 이렇듯 동양 호러물의 클리셰로 완전무장한 영화다. 거기에 '사진 속 귀신'이라는 수학여행 괴담성의 설정을 덧붙여 대중의 전형적인 공포심리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진부하기는 해도, 여름극장용 '깜짝깜짝 놀래주기 임무'를 나름대로 충실히 수행한다는 면에서, 제작진의 안전 지향 전략은 그럭저럭 귀엽게 봐줄만하다.

한편 최근 몇 년 간 유행하던 '복잡하고 모호한 이야기로 관객 홀리기'를 과감히 걷어낸 것은 좋았으나, 그로 인해 비어버린 공간을 제대로 메우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주인공 두 명과 귀신 한 명만의 활약으로는 부족했던 걸까. 아니면 텅 비어버린 듯한 플롯 그 자체 때문일까.

아무튼 <셔터>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기본'에 충실한 호러영화다. 그 충실함을 즐기든지 아니면 하품을 하든지는 관객의 영역이겠고. ⓒ erazerh

* 한 가지 더, <셔터>는 진정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 '약자를 짓밟고 그 위에서 썩은 미소를 짓는 인간들'이라는 교훈 설파 또한 잊지 않는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영화와 현실 모두에 뿌리내린 진실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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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일기>가 관객과 평단에 외면 받는 이유는?


80억에 달하는 제작비, 5년이라는 총 제작기간, 흥행과 작품성 둘 다 보증할 수 있는 배우들의 출연, 그리고 남극. 상영 전부터 ‘남극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은 영화 <남극일기>가 오랜 작업 끝에 드디어 개봉됐다. 하지만 반응은 ‘의외로’ 꽤나 냉담한 편이다. 물론 호평이 없는 건 아니지만, 관객은 물론 평단에서조차 남극의 추위 못지않은 혹독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300만은 들어야 겨우 손익분기점을 넘어서는 대규모 영화에 100만이 든 시점에서 간판 내려야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니, 돈이 돌아야만 하는 제작계 일각에서는 <남극일기>를 일컬어 ‘재앙’이라고까지 부르는 상황이다. 도대체 ‘왜’ <남극일기>는 영화 안에서도 모자라 영화 밖에서도 이토록 가혹한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일까.


영화로 들어가 보자. 대장 최도형(송강호 분)을 비롯한 6명의 대원은 영하 80도에 낮 혹은 밤이 6개월씩 지속되는 남극, 그 ‘도달불능점’을 향해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그곳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는 질문에 최도형은 “우리 같은 놈들은 아무도 해내지 못할 것 같은 일을 할 때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는 극한의 상황을 넘길 때만 만끽할 수 있는 희열과 그것을 향한 숭고한 도전정신을 찬양하는 말인 동시에, 매우 위험천만한 가능성 또한 내포하는 말이다. 목표 달성을 위해 다른 사람의 고통 따위는 ‘큰일에는 희생이 있기 마련’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는 맹목적인 최면술이 그것이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도달불능점을 향한 의지가 점점 더 후자 쪽으로 기울어지며 처음의 목표는 기능을 상실한 채 비합리적이고 폭압적인, 강요된 헤게모니로 변질된다. 이는 개인의 이기심마저 개발이라는 명분 안에 숨기고서는 낙오자나 비판론자에게는 총칼을 들이댔던 지난 시절과 닮은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듯 <남극일기>가 설명하는 공포는 넘볼 수 없는 자연환경이 아닌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 그 허황된 논리가 몰고 올 파멸에 있다. 주로 인간승리의 무대로만 여겨져 왔던 광활한 남극을 소재로 이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니 꽤나 매력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좋은 재료라고 해서 무조건 맛있는 요리가 나오는 것은 아닌 법. 영화는 스스로 던져놓은 플롯들을 제대로 꿰매지 못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남극의 의미를 그려나가는 데서 결함을 드러내고 만다.

영화의 큰 줄기는 도달불능점을 향한 발걸음이지만, 탐험대를 미치게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치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먼저 왔던 이들과 같은 운명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80년 전 영국탐험대의 일기장 발견, 최도형의 기억이 함께 끌고 왔을 유령, 그리고 그 강박관념이 확장되어 만들어낸 폭압적 가부장 등이다. 살아있는, 혹은 살아있는 것처럼 제시되는 남극은 그것들과 맞물려 나름의 의미를 지녀야 한다.


그러나 <남극일기>는 이 같은 서브플롯들을 무슨 연유에서인지 결국 남극으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아이가 등에 매달린 환영이라든가 일기장, 유령의 목소리, 캠코더에만 비치는 하얀 손 등은 분명 낯익은 도상들이지만 이들 중 어느 것도 남극이라는 특수한 공간으로 상징되는 그 무엇을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한다. 단지 불친절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영화에서 남극은 분명히 탐험대를 관찰하는 시선(혹은 감정까지도)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 시선이 노골적으로 관객의 눈과 겹쳐진다는 데서 발생한다. 관객은 남극과 함께 크레바스처럼 곳곳에 숨어서 대원들을 노려보거나 밑으로 끌어내리며 매머드의 눈을 통해 남극의 존재를 확인하지만, 정작 그 시선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장르적 도상들은 ‘가야한다’는 강박관념과 뒤섞여 최도형을 미치게 하고, 최도형의 광기는 다른 대원에게 전이된다. 그래서 민재(유지태 분)는 “우리의 욕망이 여기를 지옥으로 만들었다.”며 자신들에게 남극은 결국 백색의 거대한 무덤에 다름 아니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시작부터 의도적으로 관객과 시선을 공유하던 그 시점은 끝끝내 정체불명으로 남는다. 장르물이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영화는 분명 장르적 기법에 의존하고 있다). 처음에 응시의 주체로서 등장했던 남극은 대원들의 욕망이 빚어낸 환영을 제 품에 간직했다가 떠나보내고는, 다시 그것들이 몰고 온 파멸의 결과물, 즉 객체가 되어 민재의 입을 통해 말해진다. 관객이 어리둥절한 이유는 같은 곳을 바라보던 남극이 모호한 흔적만 남긴 채 뜬금없이 대원들만의 남극으로 대치되었고, 서브플롯은 이 남극의 분열과 동떨어져서 활용되기 때문이다. 익숙한 장치들이 남극 곳곳에 배치되었음에도 관객의 남극은 자신만의 색깔을 할당받지 못한 채 결국 어둠과 함께 홀연히 사라지고 만다. 탐험대의 광기가 그곳을 미친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면 애초에 관객과 눈을 겹치는 시도는 자제했어야 했고, 이왕 눈을 겹쳤다면 진부하고도 어정쩡한 서브플롯이 아니라 남극 자체에 보다 많은 권한을 주었어야 했다. 원한의 근원을, 베트남이라는 공간이 갖는 역사적 사실에서 적절하게 추려냈던 <알포인트>를 생각해볼 때 아쉬운 부분이다.


막대한 제작비, 길고도 긴 제작기간, 이에 따른 서로 다른 목소리의 개입 등, 영화의 집중도를 흐려놓았을 바깥 환경 때문인지 영화는 가장 중요한 장치였던 남극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한다. 아쉬움을 남기기는 했지만, <남극일기>에는 내레이션 기술과 관계없이 주목해야 할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 모두가 구원을 이야기하는 요즈음이지만, <남극일기>는 보기 드물게도 극단으로 나아가 암전과 같은 허무를 기어코 끄집어내고, 그 파멸의 과정 안에 현대사가 남긴 잔상을 묵직하게 새겨 넣는다. 누군가의 광기어린 집착이 만들어낸 지옥도는 영화 텍스트에서만 존재했던가. <남극일기>의 허무는 어쨌든 진실의 그림자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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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맞추기 위해 한없이 골치 아파야 하면서도 거기서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일본 호러영화 속 흐릿한 결말이 주는 매력이다. 누가 언제쯤 빙의됐는지, 누가 죽고 누가 살았는지에서부터 영화를 관통하는 진실(귀신의 사람일 적 슬픔, 외로움 등)을 더듬어보는 재미가 그 모호한 마무리 안에 적절히 녹아 있다면 말이다.

미이케 다카시의 <착신아리>는 그런 점에서 일본 호러영화의 전형적인 재미를 간직한 영화였다. 동시에 영화는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휴대전화를 저주의 연결고리로 적절히 풀어냄으로써 다른 <링>의 아류들과 구분케 하는 근거를 제공했다.

츠카모토 렌페이 감독의 <착신아리2>는 전편이 남긴 수수께끼같은 결말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 결말은 새로이 해석되고, 원한의 진원지는 더 깊은 과거로 나간다. 영화적 배경 또한 일본에서 대만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이 같은 설정들에도 불구하고, 아쉽게 <착신아리2>는 속편이 지니는 상투적 한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다.

나름대로 역할을 했던 1편의 모티브 '학대'와 억지로 연결하려는(그러나 연결되지 않는) 시도는 2편에 등장하는 원한에 진부함과 비논리를 더할 뿐이다. 거기에 인물들의 과거사, 사랑, 희생까지 무리하게 얽히면서 영화는 이도 저도 아닌, 이상한 모양새로 돌변한다. '신체가 뒤틀리는 이미지'의 미적지근한 답습에서는, 미안한 말이지만, '대충 찍자'라는 의도마저 느껴진다. 일본 공포물의 특징을 감안, 정상참작하고 싶지만 <착신아리2>는 망가져도 너무 망가져버렸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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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만 고바디 감독의 총대 없는 전쟁

글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내용을 알고 봐도 별 상관은 없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시작, 낭떠러지 끝에 작은 신발 한 켤레가 쓸쓸하게 놓여있다. 그리고 그 밑으로 몸을 던지는 가냘픈 소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카메라가 바라보는 영화 속 세상은 눈을 마주치기조차 두려운, 그러나 도저히 외면할 수는 없는 고통으로 가득하다. 전작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과 <고향의 노래>에서 쿠르드족을 짓누르는 역사의 무게, 삶의 애환을 이야기하던 바흐만 고하디 감독은 그의 세 번째 장편영화 <거북이도 난다(Turtles Can Fly)>에서 다시 한번 그 외로운 현장으로 들어간다. <거북이도 난다>는 이라크 국경지역인 쿠르디스탄에서 살아가는(혹은 죽어가는)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미국이 전쟁을 일으킬 거라는 소문 때문에 쿠르디스탄에 모인 쿠르드족 난민들은 어디서 새로운 소식을 알 수 있을지에 매우 민감하다. 따라서 ‘위성’이라 불리는 아이는 어른을 대신해 사람들의 중심에 서있게 된다. 위성 안테나를 만질 줄 아는 그는 어른들에게 명령하고, 그들과 흥정할 줄도 안다. 어릴 때부터 혼자 살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에 어쩔 수 없지만 나름대로 잘 적응한 예라 할 수 있다. 지뢰 탓에 다리 하나가 없는 파쇼 등 또래 아이들과 함께 위성은 매설된 지뢰(미군이 묻어놓은)를 뽑아 근근이 삶을 꾸려나가며 무기를 사기도 한다.

할루자에서 온 헹고라는 소년은 전쟁통에 두 팔을 잃었다. 그의 여동생 아그린의 얼굴에는 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아물 거라고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라크 군인들에게 집단강간을 당해 낳은 아이 리가(앞을 거의 볼 수 없는)를 향한 애증이 그 증거로서 명명백백히 남아있다. 위성의 소박하고도 서투른 접근에 웃을 수 있는 작은 여유조차 그녀에게는 없다.


이렇듯 <거북이도 난다>는 인간의 눈먼 이기심이 아이들에게 남기고 간 황폐한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영화다. 하늘은 때때로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대지 또한 광활한 멋을 부리지만, 그 자연을 채우는 것은 탱크의 잔존물이나 지뢰 더미 같은 파괴의 흔적들이다. 그리고 흔적들은 무생물의 싸늘한 이미지에만 그치지 않고 아이들의 몸과 머릿속으로까지 그 뿌리를 내린다. 폭력의 잔가지들은 끈끈하게 축적되어 아이들의 팔과 다리를 잘라냈으며(혹은 잘라낼 것이며), 어린 소녀에게 매일 새벽 자신의 눈먼 아이를 죽이고 자살할 것을 강요한다.

영화가 담아낸 환부가 아플 뿐만 아니라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픈 이유는 이 아이들의 살아가기와 죽어가기가 같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냉정한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일찍 어른과 같은 삶의 방법을 익힌 아이나, 과거의 짐을 견딜 수 없어 제 목숨을 끊는 아이가 공유하는 것은 결국 ‘탈출’을 향한 갈망에 다름 아니다.

<거북이도 난다>는 탈출을 꿈꾸어야만 하는 아이들을 통해 현재진행중인 파괴의 역사를 고통스럽게 늘어놓는다. 영화는 카메라라는 매개체, 즉, 감독의 시선이 개입되기 때문에 결국 완전한 현실을 그려낼 수는 없다는 이론은 잠시 접어두자. <거북이도 난다>를 구성하는 것은 픽션이지만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이 실제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자기 자신이 쿠르드족인 바흐만 고하디 감독은 “내 영화들은 정치적이지만 내가 정치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쿠르드족의 삶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영화는 자본을 거머쥐는 수단도, 자아를 발현하는 이미지도, 세계관을 담아내는 거울도 아닌 단지 현실 그 자체일 뿐이다. 카메라는 다른 쿠르드족의 총이며, 영화는 곧 전투인 셈이다.


바흐만 고하디의 스크린 안에는 무슨무슨 척하는 위선 따위가 없다. 모든 플롯은 곧 카메라 밖에서도 존재하며, 실제하는 비극은 카메라로 들어와 서글픈 이야기로 나타난다. 따라서 <거북이도 난다>가 그려내는 가혹한 이미지들은 역사가 남겨놓은 서글프고 가혹한 진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TV, 신문에 뻔뻔하게 나열된 강자의 잣대와 역사책 속 몇몇 글자들의 한계를 넘어 살아 꿈틀거리는 진실과 만나게 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거북이도 난다>가 지닌 힘인 것이다.

영화에는 미국의 침공 명분이 거짓됐다느니, 후세인은 처벌받아 마땅하다느니와 같은 이성적 언어들이 들어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작아서 들리지 않았던, 혹은 의도적으로 듣지 않았던 진실의 순간과 가슴 아프게 마주하는 시간이며, 바흐만 고하디가 외로이 시작한 싸움의 본질 또한 그것이다.

이라크전에 관한 CNN 뉴스 장면들이 한스러운 눈물로서 카메라를 응시하는 헹고와 교차편집될 때, 군인들의 괴물같은 본능에 손을 떨구고 말았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아그린이 절벽 끝에서 서럽게 울 때, 우리는 비로소 절망의 일부나마 가슴 속에 담을 수 있게 된다. 관객의 귓속에 아이들의 슬픈 심장박동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이 장면에서, 감독은 관객과 감정을 공유하는 방법만이 자신의 유일한 대안이었음을 서글프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의 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상낙원을 건설하러 왔습니다.” 미국의 공허한 메시지가 삐라로 뿌려지는 전쟁 직전의 지점에서 영화는 멈춰선다. 그리고는 극단으로 달려간다. 제 자식을 물에 빠뜨려 죽이고 낭떠러지 밑으로 몸을 날리는 아그린. 감독은 질문한다. 여동생과 조카의 시체를 보고서, 팔 없는 헹고는 이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어설픈 영어를 구사하며 미국에 은근한 동경을 가지고 있던 위성이 마지막에 달려가는 곳은 어디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연 거북이는 날 수 있을 것인가?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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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궁금한 것은 '도대체 왜 그랬느냐'는 점이다. 선우(이병헌)가 파멸로 가는 지름길임을 알면서도, 강사장(김영철)이 자신의 가혹한 명령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리라 예상할 수 있음에도 그 길을 선택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영화 표면에 드러나는 이유는 희수(신민아)라는 여성에서 촉발된 갈등이다. 따라서 <달콤한 인생>이 느와르를 표방한 영화임을 감안할 때, 그녀는 분명 팜므파탈에 위치해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기존의 장르적 도상과는 분명 그 괘를 달리하는 캐릭터다. 그녀는 죽음도 불사하게 할 만큼 성적 매력이 넘치지도, 남성의 이성을 마비시켜 나락으로 떨어뜨릴 만큼 뇌쇄적이지도 않다.

콘트라스트가 빚어내는 음울함, 거기에 걸맞은 차가운 피부와 새빨간 입술이 그녀에게는 없다. 따라서 그녀는 팜므파탈의 자리에 위치한 그것의 또 다른 변주에 가깝다. 붉은 피와 검은 정장으로 상징되는 우울하고 폭력적인 이미지들 속에서 희수는 유일하게 어둠에 물들지 않은 맑은 눈망울을 가진 인물인 셈이다.

결국 선우를 잡아끄는 힘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희수의 이미지 안에서 선우는 지금껏 알지 못했던(혹은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세상의 반대편을 발견한 것이다(아마 강사장도 그런 부분에서 희수에게 끌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영역에 속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 흔들림은 사랑의 밀고 당김이나 삶의 반성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서로를 향하는 총구 속에서 폭력의 광기로서 폭발한다(그들은 소통할 줄 모른다).

마지막 섀도우 복싱 장면은 선우가 죽음을 앞에 두고 나르시스트 마냥 우쭐되던 과거의 잘 나가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모습이라기보다는, 나른한 환상에 젖어있던 자신에게 보내는 씁쓸한 웃음에 가깝다. 달콤한 줄만 알았던 인생이 어긋나는 순간, 자신을 지탱하던 끈이 단단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선우는 파멸한다. 그래서 인생은 고통이며 너무 가혹한 것이 된다.

영화 <달콤한 인생>의 표면은 대단히 폭력적이지만, 그 이면을 채우는 것은 고통에 익숙해져서 인생의 달콤함을 찾을 줄조차 모르는 사람들, 폭력의 순환에 갇혀 소통 활로 자체를 놓쳐버린 사람들에게 보내는 동정(혹은 조소)의 시선에 다름 아니다. 김지운 감독은 분노와 복수에는 익숙하지만 사랑할 줄은 모르는(남은 물론 자신까지) 인간군상들, 그 치명적인 나약함이 몰고오는 필연적 파멸을 장르의 관습 안에서 비극과 희극을 넘나들며 적절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결코 유쾌하거나 친절한 방법으로 전달되지는 않지만, 그는 다시 한번 질문해온다. 과연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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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슐리 쥬드, 사뮤엘 L. 잭슨, 앤디 가르시아.. 꽤나 매력적인 조합이다. 그리고 거기에다 필립 카우프만이라는 이름까지 더한다면..? 아마도 결과에 거는 기대치는 훨씬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너무 낙관했을까. <블랙아웃>(Twisted)은 감독과 배우의 명성에 비해 상당히 실망스럽다.

<블랙아웃>은 반전에 힘을 두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 채 시작한다. 제시카(애슐리 쥬드)가 어린 시절의 상처를 지우지 못하고 있음을 부각시키는 초반부터, 범인이 될 수 있는 캐릭터는 매우 좁은 범위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인이 누구냐'가 아닌 제시카의 악몽, 환각, 상처가 영화를 끌어나가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실제로 그렇기는 하다. 그녀는 매일밤 술병을 들이키며 몽롱한 채 잠들고, 악몽에도 시달리니까.(필름마저 끊긴 날에는 어김없이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나 아쉽게도, 슬쩍슬쩍 보이던 히치콕의 흔적들이 전면에 드러나면서부터 영화의 흐름은 조금씩 엇나간다. 주변 남성들의 (거세 공포에 따른) 지배욕, 질투, 혹은 관음적 시선이 지나치게 개입된다 싶을 즈음, 내러티브 상 중요하지 않았던,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요?'라는 질문놀이가 갑작스레 표면으로 떠오르고야 만다. 답은 이미 흘려 놓은 상태. 거기에 잡다한 장치들이 '나도 맥거핀'임을 자처하면서, 영화의 호흡은 점점 더 부자연스러워진다. 가장 큰 단서가 애초에 드러났던 초반 설정을 감안할 때, 무리한 전개가 아니었나 싶다.

안타깝게도 <블랙아웃>에는 히치콕의 흔적만 있을 뿐 히치콕은 없다, 어처구니없지만, 당연히 카우프만도 없다. 남은 건 그저 그런 스릴러 한편과 매력을 맘껏 발산하는 애슐리 쥬드뿐.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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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랑, 시대를 향한 베르톨루치의 오마쥬


(마치 태아처럼) 웅크린 채 죽어가는 폴을 뒤로 하고 잔느는 되뇐다. “난 저 사람 몰라. 거리에서부터 쫓아와서 날 겁탈하려 했어. 미친 사람이야. 난 저 사람 이름도 모르는걸.”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마지막 대사다. 계급, 이름을 불문하고 오로지 상대의 육체만을 허무하게 탐닉하던 관계는 그렇게 끝났다.

68혁명이 품었던 꿈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고 프라하의 봄이 총칼에 짓밟혔을 때,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만드는 것이었다. 한바탕 축제가 끝난 허탈감 속에 남은 건 오로지 슬픈 육신뿐. 미래에 대한 68세대의 절망, 혁명의 기운이 단절되는 데서 오는 상실감은 존재를 찾는데 실패한 덧없는 몸부림으로 투영되었다.


이 후 <마지막 황제>, <리틀 붓다> 등을 만들며 동양적 세계관을 탐구하는 데 주력해오던 베르톨루치 감독은 길버트 아데어의 소설 ‘Holly Innocents’를 바탕으로 다시 한번 68년의 정체성으로 돌아간다. 시네마테크 관장이던 앙리 랑글루와가 정부의 부당한 간섭에 의해 해고되고 사람들이 서서히 거리로 쏟아져 나오던 때, 혁명의 씨앗이 뿌려지던 그 지점에서 영화 <몽상가들>은 시작한다.


그들의 소통 방법, 대중문화와 성적 유희

카메라가 향하는 곳은 민중의 물결이 아니라 세 젊은이의 미묘한 동거 공간이다. 베르톨루치 감독은 쌍둥이 남매인 이자벨과 테오, 미국인 매튜가 공유하는 독특한 소통 방법을 토대로 당시의 미숙했지만 순수했던 열정을 추억한다. 세 사람만의 공간, 그들의 일상을 채우는 것은 영화(또는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표현, 그리고 오르가즘이 없는 성적 유희다.

쌍둥이 남매와 매튜가 가까워진 원인은 영화다. 그들은 영화의 숏을 몸소 재연하면서 퀴즈를 내고 <이방인들>의 주인공을 따라 루브르 박물관을 가로지른다. 지미 핸드릭스와 에릭 크립튼에 관해 논쟁하며 버스터 키튼과 찰리 채플린의 연기를 놓고 토론한다. 대중문화를 말하는 것이 곧 세상과 소통하는 활로인 셈이다. 군데군데 배치된 걸작들의 숏이나 지미 핸드릭스의 연주 등 명곡의 삽입은 영화적 시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제 역할을 다한다.

베르톨루치는 세 청춘의 영화사랑을 통해 문화가 비로소 인간 의지의 영역으로 들어왔던 그 시절을 추억한다. 계급 재생산으로서의 일방적 헤게모니를 거부하던 시기, 대중문화 속에 무한한 가능성이 꿈틀대던 그 때, 문화는 곧 세상과 소통하는 기호였고 대중을 실천의 장으로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몽상가들>이 보여주는 당대 문화의 매력적인 향연은 같은 ‘감정의 구조’를 누렸던 동시대 사람들에게 바치는 베르톨루치의 오마쥬에 다름 아니다.

세 젊음이 소통하는 또 다른 방법은 성적 유희다. 그들은 영화퀴즈의 벌칙으로 자위나 성행위를 시도한다. 또한, 벌거벗고 돌아다니거나 성기를 노출한 채 장난을 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창피함이 없다. 오르가즘을 충족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웃고 즐기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 욕조에서 몸을 맞대고 있는 그들은 같이 씻어도 아무 거리낌이 없는 어린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마치 태초를 보는듯한 이 같은 성적 자유를 통해 영화는 쌍둥이 남매의 연결고리를 설명해낸다. 테오와 이자벨이 함께 잠을 청하는 방은 외부와 단절된 어머니의 자궁을 연상시킨다. 이미 성장해버린 육체와 상관없이, 쌍둥이의 정신은 여전히 자궁 안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벌거벗은 채 같이 누워있는 기괴한 풍경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당연히 섹스가 없다. 테오와 이자벨은 소중한 장소를 공유하는 ‘또 다른 나’로서 서로를 바라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의 나체는 세상으로 나갈 날만을 설렌 마음으로 기다리는 태아의 그것에 가깝다.

베르톨루치는 테오와 이자벨의 이 같은 설렘을 ‘몽상’이라고 일컫는다. 자신들만의 사랑법을 향한 이 낙관적 믿음은 두려움이라고는 없었던, 그러기에 미숙했지만 열정적이었던 68년의 감성과 닮았다. 도덕적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미묘한 동거 속에는 정점으로 달린 적이 없기에 한계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던 당시의 순수했던 상상력이 스며있다.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웠던 역동의 기운

노동자의 계급투쟁이나 혁명이라는 단어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그 시절의 분위기, 베루톨루치 감독이 ‘몽상가들’의 유희로 들어간 것은 바로 그 비어있는 의미를 다시 찾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테오와 이자벨 그리고 잠시였지만 매튜까지, 그들의 알몸에는 은밀함이 없다. 대중문화를 말하는 대화 속에는 순간순간의 감성이 살아 꿈틀거린다. 경계를 넘나드는 데 아무런 수줍음 없는 그들이지만 가치전복 자체에 목적을 두지는 않는다. 세 청춘은 단지 좋아하는 것-문화, 서로의 몸-을 향유하고 즐길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적절히 어우러지며 일종의 카니발적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리고 그 기운의 의미, 즉, ‘자유로운 상상력이 넘실거리던 한바탕 축제’가 68년의 기의로서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시대는 완성된다. <몽상가들>은 오랫동안 68년의 혼돈과 정체성을 고민해온 노감독이 마침내 완성해낸 역사의 기록이자, 그 속에서 숨쉬었던 모든 몽상가들에게 바치는 헌사인 셈이다.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몽상가들은 거리로 뛰쳐나간다. 이자벨과 테오가 자궁 밖으로 나오고 대중의 투쟁(이자 축제)이 현실과 부딪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상과 현실의 격차를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매튜는 결국 쌍둥이 남매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 지점에서 베루톨루치 감독은 테오와 이자벨의 관계가 결국은 외부세계와 충돌하고 좌절하게 될 것임을 매튜의 슬픈 눈을 빌려 이야기한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허무와 절망이 말해주듯, 순수한 감수성이 상처받을 날이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가 그 어느 때보다도 슬프게 들리는 이유다.

그러나 영화 <몽상가들>의 가치는 실패한 역사를 우울하게 되새김질하는 데 있지 않다. 베르톨루치의 자의식은 이미 반성과 후회, 절망을 겪을 만큼 겪었다. 어느덧 환갑을 넘긴 노감독이 선택한 길은 부러져버린 혁명의 깃발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역동적 기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며 그 시간을 수줍게 회고하는 것이다.

“탄원서가 시고, 시가 곧 탄원서다.” 테오와 이자벨, 그 시대의 몽상가들이 꿈꾸던 명제다. 베르톨루치는 거기에 한마디 덧붙인다. 결국 탄원서가 되지는 못했지만, 시는 이미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고.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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