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맑고 햇살은 따갑다. 가끔 속눈썹이 떨어지는 걸 제외하면 표면적으로는 어떠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붕 떠 있는 듯한 한 여자, 그리고 조각난 그녀의 기억들이 평범한 일상 위를 부유할 뿐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엄청난 투쟁이 진행중이다. 그녀는 매일 심연의 공포에 맞서 싸운다. 자꾸만 얼굴을 들이미는 괴물. 이제는 끝내고 싶다.

낯선 사람과 모텔로 향하는 그녀. 그리고는 흐느끼는 그를 자신의 품으로 감싸 안는다. 상처 입은 남성을 끌어안는 여성. 진부한 설정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놀랍게도! 남성이 만들어낸 모성 신화가 없다. 슬퍼할 수도 없는, 그래서 낯선 사람과의 낯선 동화를 통해서만 슬퍼할 수 있는 한 인간의 가련한 눈물이 흐를 뿐이다. 상처는 자기 자신의 고백과 마음 놓고 소통할 여유마저 앗아갔다.

매미소리가 머리를 어지럽힌다. 여기서 끝을 낼까? 끝을 내면 진정 끝나는 걸까? 매미소리가 멈춘 후 그녀는 거울 속 또 다른 자신과 마주한다. 그리고 운다. 그제야 서럽게 운다. 다시 적막이 흐르고. 그녀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싶어 한다. 그래서 허겁지겁 고양이를 불러본다. 그 때 어디선가 들리는 작은 목소리, "정혜씨". 잊었던 그 이름. 그녀의 이름은 정혜였다. 우리는 알 수 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야 정혜의 이야기는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을.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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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꿈꾸는 가족, 그리고 소통


사각의 링이 있다. 또한 스승과 제자가 있다. 뻔한 설정이다. 진부한 이야기가 그려지지 않는가. 밑바닥까지 떨어진 제자가 역시 좌절한 경험이 있는 스승을 만나 권투에 눈을 뜨고 인생도 배워나간다. 그리고 링에서 투혼을 불사른다. 물론 중간에 갈등, 실패도 간간히 섞여 있고. 적당한 감동의 스포츠 드라마 한 편이 나올 듯하다.

하지만 감독이 누군가에 따라 결과는 바뀌는 것.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저 그런 감동 일대기를 허락할 만큼 한가롭게 필모그래피를 채워온 사람이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삶의 본질을 고민해왔고 그 안에는 늘 그늘진 곳을 향한 시선이 들어있었다. 일흔 다섯에 접어든 노(老)감독은 평범한 재료에서도 인생의 진국을 걸쭉하게 뽑아낼 줄 안다.

그는 전작 <미스틱 리버>를 통해 불확실한 세상에 던져진, 소통하지 못하는 개인들을 그려냈다. 미처 꿰매지 못한 치명적 상처는 세월을 머금고 점점 곪아 영혼마저 잠식하는 법. 치유의 기능을 상실한 인간관계는 친구, 가족이라는 이름표만을 위태롭게 붙잡은 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미스틱 강과 더불어 유유히 흘러갔다. <미스틱 리버>가 그의 최고 걸작이라 불리는 것이 못마땅했을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2년이 채 안 되어 최고작을 다시 한번 갱신한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모호한 세계, 냉혹한 운명에 갇힌 영혼들에게 작은 해독제를 선사하는 영화다. 이를 위해 노감독은 그다지 새로운 소잿거리가 아닌 권투를 타인과 소통하는 데 서투른 자들을 교감시키기 위한 모티브로 활용한다. 링에 대한 열정과 공감대가 서로의 빈 자리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관계가 더욱 공고해지는 때는 그들이 온 정성을 쏟았던 링에 오르지 않는 시점에 이르러서다. 따라서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링에서 모든 것을 뿜어내는 <록키>류와 같은 출발선에 서지만 전혀 다른 지점을 지향하는 영화가 된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궁극적으로 내딛는 곳, 서로에게 빈 자리를 내주었던 영혼들이 꿈꾸는 곳은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다. 불확실한 세계를 견디게 해 줄 버팀목으로서 가족의 의미와 역할을 꾸준하게 탐구해온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번에는 유사 부녀 관계라는 내러티브를 활용, 그 고민을 이어간다.

그리고 그는 회한으로 가득한 눈빛을 지닌, 상처 입은 아버지 프랭키로 분한다. 프랭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가족과 단절되어 있다. 딸에게 꾸준히 쓰는 편지는 어김없이 반송되어 귀갓길에 쓸쓸함만 더할 뿐이다.


매기(힐러리 스웽크)의 가족들은 저열한 속물적 근성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의 인간관계에는 정작 인간에 대한 고려가 없다. 심지어 매기의 어머니는 상처 입은 혈육에게서조차 돈을 갈취할 궁리를 한다. 부재한 아버지를 향한 매기의 그리움은 가족과 정서적으로 교류하지 못하는 현실을 잊기 위한 자기최면일 뿐이다.

가족구조의 해체, 단절로 세상에 홀로 남겨진 프랭키와 매기는 권투라는 열정을 통해, 그리고 서로의 빈 자리를 안타깝게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연대를 맺어간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 고귀한 만남을 향한 예찬은 자연스레 진정한 가족의 정의, 사람 간 교감의 본질에 대한 해답으로 연결된다.

노감독은 인간을 연결시키는 첫 고리가 무엇이든간에 정신적 교감, 사람 자체를 읽으려는 노력이 관계의 핵심으로 자리 잡을 때 인생의 동반자로서 진정한 가족의 의미는 완성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삶이라는 치열한 무대에서 버틸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되는 것이다.

후반부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절제의 미학에 관한 한 최고의 경지로 내닫는다. 영화는 울부짖어야 마땅한 곳에 멈춰선 채 감정을 터뜨리지 않는다. 아니,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한다. 프랭키와 매기에게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 상처 받아 쓰러진 영혼들은 간신히 발견했던 소중한 만남을 영원히 기억하려 한다. 추억을 새기려는 간절한 마음은 운명의 비정함을 탓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두 사람을 연결해주는 보이지 않는 끈 ‘모쿠슈라’의 의미가 프랭키의 입에서 나직하게 새어나올 때, 매기가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을 지어보일 때, 그들의 연대는 드디어 깊은 울림에 도달한다. 절제되고 응축되었던 슬픈 감정이, 인간이 소통하면서 엮어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페이소스로 승화되는 기적적 순간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모든 것을 전달하는 데 아무런 수사도 쓰지 않는다.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이야기로 전달하는 법. 그는 정통 드라마의 묵직한 힘과 평범하지만 생명력 넘치는 캐릭터만으로 갖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지점, 슬픈 영혼들의 정신이 진정으로 소통하는 그곳으로 차분하게 달려간다. 물론 모건 프리먼의 삶을 관조할 줄 아는 내레이션과 힐러리 스웽크의 명연기에 그 공을 어느 정도 떼 주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카메라는 희미한 창문 너머로 프랭키를 비춘다. 그는 여전히 모호한 세상에 던져진 외롭고 쓸쓸한 노인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꿈꿀 수 있다.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씁쓸하게,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퍼펙트 월드’를 꿈꾼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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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부시가 집권 2기를 맞아 '자유의 확산'을 부르짖는 연설을 했다. 물론 그것을 진심이라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지만... 권력을 손에 쥐려는 자들, 또는 한번 잡은 힘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자들, 그들의 입에 공통적으로 걸리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자유, 민주, 평등'이다.

이 얼마나 멋진 어휘들인가. 아마 근대화가 남긴 말 중 가장 아름다운 단어들일 것이다. 그러나 사전에 정의된 의미가 아닌, 권력 있는 자들의 사리사욕을 위한 추잡한 명분이 그 기의로 자리 잡을 때, 자유, 민주, 평등은 곧 폭력, 광기와 동일어가 된다. 가까운 근현대사가, 그리고 지금의 만행이 그것의 방증이다.

침략전쟁은 자유민주주의를 뿌리 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둔갑했고, 대량학살로 희생된 넋들은 마땅히 죽었어야 할 테러리스트로 이름 지워질 뿐이다. 문명 전파의 밑거름이라 포장되었던 제국주의 광기는, 가해자는 게워낸 채 피해자의 고통과 악몽만을 그 흔적으로 남겨 놓았다. 권력의 폭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유와 민주의 이름으로 역사 안에 체현되는 중이다.

영화 <멘츄리안 켄디데이트>는 미국 권력층의 허황된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세계 대통령을 향한 야욕, 혹은 일그러진 집착은 자본과 은밀히 결탁, 위험요소를 조작하며 미국식 자유 실현이라는 명목 뒤로 숨는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선전용 상품으로 개조되거나 유효기간 지난 소모품으로서 폐기처분된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광기와 폭력은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 삼은 채 개인의 영달을 위한 음모를 차근차근 진행시킨다.

<멘츄리안 켄디데이트>는 상업적 고려 때문인지, 이라크전 등 최근 정책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제3국 피해자에 대한 반성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뱃속 채우는 일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 없는 세력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척 개거품을 무는 꼴이 연일 비춰지는 TV에 비교하면, 이 정도 영화는 그나마 축복이 아닐까 싶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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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용이 드러납니다. 스포일러에 민감한 분들은 그냥 지나쳐 주세요~

멍청한 아카데미가 선택한 영화답지 않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판타지도, 진부한 감동 일대기도 아니다. 영화는 사실적인 꿈과 고민을 담고 있으며, 현상에 대해서도 솔직하다. 아니, 꽤나 비정하다. 감정은 절제되고 시선은 담담하게 흐른다. 그리고서는 울부짖어야 할 곳에 멈춰선 채 울지도, 아픔을 터뜨리지도 않는다.

극한의 고통은 감정을 표출할 기운마저 앗아가는 것. 감동 따위는 없다. 운명의 거대한 무게는 초라한 인간들에게 많은 시간을 허락할 만큼 관대하지 않다. 죽는 자와 남는 자 모두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정말 슬프지만 슬픈 척하지 못한다. 그래서 더욱 슬프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삶에 대한 작은 철학, 그리고 운명에 갇힌 인간들의 슬픈 소통을 아무런 수사 없이 스토리와 캐릭터만으로 오롯이 전달해낸다. 물론 깊은 울림과 차분함을 오가는 모건 프리먼의 내레이션과 힐러리 스웽크의 명연기에 그 공을 어느 정도 떼 주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 erazerh

* 영화를 다 본 후, 불현듯 Pyramid Song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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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허구의 존재'라는 플롯은 솔직히 진부하다. 이 진부함에서 신선한 충격을 뽑아낸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비슷한 효과를 노린 다른 영화들이 '결승선으로 너무 급박하게 달려온 나머지 결승선에 다 와서 넘어지고 마는' 안타까움을 남겼다면 <숨바꼭질>은 그 반대의 지점에서 아쉬운 경우다. 결말이 적절히 수렴해야 할 여타의 상황을 영화는 애초에 만들어 놓지 않는다. 그래서 '낯선 곳, 낯선 외부인'이라는 곁다리 공식과의 연결 또한 허술하다. '찰리'가 누구인지 쯤은 대부분이 금새 알아맞춘다. '찰리'를 놓고 관객과 숨바꼭질하느라 머리 굴렸다면, 미안한 말이지만, 헛수고했다. 물론 결말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있긴 하다. 하지만 추리를 멋지게 늘어놓고는 그 다음에 이리 저리 증거를 짜맞추는 꼴과 다를 바 없기에 그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기로 했다.

2. 로버트 드니로를 보면서 왜 자꾸 로빈 윌리암스가 떠오르는지... 보는 내내 거슬렸다.

3. 어렸을 때 주목받다가 정작 어른이 되고서는 영화와 거리가 멀어진 몇몇 배우들의 전철을 다코타 패닝만큼은 밟지 않았으면 한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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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페인 감독, 삶의 굴곡에서 따뜻함을 찾아내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 불리는 큰 길 위를 달려간다. 하지만 매끄럽게 닦이고 곧을 줄만 알았던 그 길에는 우리의 순탄한 행보를 방해하는 것들, 이를테면 슬픔, 좌절, 절망 등과 같은 삶의 무게들이 암초처럼 곳곳에 자리 잡고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내가 왜 이 길을 가고 있는지’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도 하며, 길 위에 놓여진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그 때마다 우리는 내 손을 잡고 다시 나를 일으켜 세워줄 누군가를 찾거나 다시 한번 내달릴 수 있을 만한 어떤 원천, 즉 살아가는 의미를 건져 올리고자 절박하게 애쓴다.



두 중년의 여정 다룬 로드무비

<사이드웨이>는 인생의 중간 지점을 살짝 넘긴, 주름이 살짝 패인 두 남자의 짧은 여행을 다룬 영화다. 물론 이 로드무비 안에서 10대, 20대의 모험에서나 엿볼 수 있는 새로움에 대한 설렘과 두근거림을 찾기는 힘들다.

대신 영화는 결혼을 앞두고도 성욕을 강변하며 마지막 자유를 불사르고자 하는 능청스러움이나, 잠시 떠난 중에도 재혼한 전처와 일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모습 등, 지독히도 현실적인 단면들로 이들의 여정을 채운다.

와인 애호가 마일스(폴 지아마티)는 결혼을 앞둔 플레이보이 친구 잭(토마스 헤이든 처치)과 함께 와인 농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잭은 와인보다는 총각으로서의 마지막 해방감을 위해 길을 나섰고 마일스는 마음 한구석에 소설이 출판될지 안 될지에 대한 초조함을 담아두고 있다. 두 사람의 모험이 순탄하지 못할 것쯤은 애당초 예견되는 스토리다.

게다가 잭에게서 전처가 재혼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마일스가 한층 더 신경질적으로 변함에 따라 조용히 출발했던 여정은 점점 더 불확실하게 흘러간다. 잭이 결혼 이야기는 숨긴 채 우연히 만나게 된 ‘화끈한 여자’ 스테파니(산드라 오)와 밤낮없이 몸을 사르는 동안에도 마일스는 책의 출판 문제와 전처에 대한 여운이 한데 뒤섞인 복잡한 심경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에게 약간의 관심을 비춘 마야(버지니아 매드슨)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앞으로 나갈만한 확신을 갖기가 두렵다. 게다가 잭이 이미 소설은 나오기로 결정됐다고 태연하게 거짓말해놓은 통에 그녀에게 솔직하지도 못한 상황이다. 그들의 와인 기행, 새로운 만남은 그렇게 무엇인가 조금씩 어긋나 있다.


그 중 공들였던 일에서는 허무하게도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고 인간관계에서는 하릴없는 상실감만 좇아야 하는 마일스의 불운은 특히나 우리 삶의 단면과 너무도 닮았다. “우리 나이에 돈 없으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마찬가지”라는 대사에 한숨 내쉴 수밖에 없는, 소박함에서 씁쓸함을 전달받는 우리들 말이다. 

삶의 큰 길에서 어떤 목표를 잃었을 때, 내 보잘것없음이 쓰라리게 다가올 때 마일스가 그랬듯, 우리는 다시 나를 길 위에 바로 세워줄 그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찾게 된다. 알렉산더 패인 감독은 이처럼 쉽지 않은 상황에서 다소 한가롭게도 쉬어갈 것을 제안한다.


황량한 뒤안길에서 한적한 샛길로

전작 <어바웃 슈미트>를 통해 인생의 황량한 뒤안길에서 씁쓸하게 웃음 짓던 감독은 <사이드웨이>에서는 한결 밝은 어조로 잠시 한적한 샛길로 가서 다시 돌아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권유해온다. 바빠서 어디 두었는지도 잊어버린 이정표는 잠시 놔두고서 말이다.

영화는 좌절하고 우울해야 마땅할 상황에서도 웃음만은 놓지 않는다. 웃음은 물 흐르듯 흘러가는 꾸밈없는 에피소드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온다. 그리고 이 같은 솔직한 전개들은 <사이드웨이>의 모든 플롯을 아우르는 화법, 즉 ‘당신 삶은 여전히 따뜻하다’를 말하는 시선 속으로 차분하게 편입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담긴, 인상주의 화폭을 보는 듯한 와인의 본고장 산타네즈 밸리의 전경은 영화가 그리는 여유로운 시선과 닮아 있기도 하다. 감독은 또한, 인생을 와인이 숙성되는 과정에 빗대면서 삶의 굴곡이 궁극적으로는 완결된 페이소스로 가기 위한 일종의 숙성 단계임을 은유한다.


“오랜 세월 동안 숙성을 거쳐 최고의 맛을 선사한 후 생을 마감한다.”라는 마야의 와인에 대한 단상은 결국 길 위에 쓸쓸히 남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따뜻한 조언이자 그들의 고단한 영혼에 고결함을 불어넣는 예찬인 것이다.

영화 내내 샛길로 돌아왔건만 마일스는 다시 힘차게 달릴 어떤 계기도 찾지 못한다. 그 많은 소동을 피우고도 결혼에 골인하는 잭과 달리, 그는 좌절된 소설에 대한 꿈과 전처를 향한 부질없는 미련이 엉켜 여전히 씁쓸한 마음을 달래지 못한다.

<사이드웨이>는 그 지점에 이르러서야 고이 숨겨두었던 샛길의 선물을 살짝 공개한다. 마지막 장면, 마야의 집 문으로 다가가는 마일스의 손길은 우리에게 미묘하게 떨리는 설렘을 전달한다. 영화가 끝난 후에야 마일스는 최고의 맛을 내기위한 발걸음을 비로소 내딛기 시작할 것이다. 희망의 작은 심장박동은 그렇게 잔잔하게 울린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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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적2] 강철중, 검사로 둔갑하다  (12) 2005.01.30

장르적 재미를 살려가다가 스스로 장르적 함정에 함몰되는 영화.

<큐브>처럼 '왜 내가 여기에 있는거지?'로 시작, 잔혹하게 당한 희생자들과 형사의 추적을 보여주고, 그것과 갇힌 자들의 과거가 맞물려 점점 더 의문이 증폭되는 순간 .. 엉뚱한 지점에 가서는 '내가 범인이다! 놀랬냐?'를 외치는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나 <디 아더스>가 뛰어난 이유는 결말로 인해 영화 내내 이어지던 내러티브가 붕괴되고 또 다른 내러티브가 창조되는, 구성력의 치밀함 때문이다. 대사를 비롯, 플롯들은 마지막에 이르러 얼굴을 바꾼 채 숨기고 있던 또 다른 의미들을 쏟아낸다. 정확한 계산력, 혹은 심리전의 승리다(조금 다르지만 <야곱의 사다리>의 결말도 뛰어나다).

반면 <쏘우>의 결말은 매우 뜬금 없으며, 결말로 인해 뒤바뀌는 상대적 상황이 애초에 설정되지 않았으므로 놀라고 싶어도 놀랄 수가 없다. 범인의 동기 또한 어이 없는 수준이다. '유주얼 서스펙트의 범인은 절름발이다. 브루스 윌리스는 귀신이다. 쏘우의 범인은~?'이라며 매너없는 마케팅으로써 궁금증을 유발하려 들지만, 정작 남는 건 범인의 썰렁한 커밍아웃 뿐.

어이없는 카피에 속았다고 탄식하는 순간.. 결국 반전은 이루어진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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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그레이드 된 공공의 적, 업그레이드 되지 못한 통쾌함


전편 <공공의 적>이 ‘재미있었던’ 이유로는 개성 넘치는 조연들의 걸쭉한 욕지거리나 에피소드들 속 자잘한 유머 등을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캐릭터와 캐릭터 간 충돌, 선 굵은 남성적 대립 구도가 갖는 흡입력을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공공의 적>의 강철중 형사(설경구)는 <투캅스>시리즈에 등장한 안성기, 박중훈, 김보성의 얼굴을 동시에 지닌 캐릭터다. 부패에 적당히 빠져있지만 정작 불의라 생각되는 것은 참지 못하며 성격 제어와 조직 섭리에 익숙하지 않은 다혈질이다. 또한 그는 “형이 오늘은 기분이 괜찮거든?”이라는 멘트로 동네 깡패들에게 묵직한 주먹을 선사하는, 서민적 우직스러움에 근거한 반영웅의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분노가 조규환(이성재)을 내려칠 때, 세련미와 도시적 이미지로 치장된 근친살해범은 서민적 정서에 의해 통렬한 최후를 맞는 셈이다. 관객의 카타르시스는 강철중의 주먹 끝에서 그 정점에 다다르며 거기에서 <공공의 적>은 매력을 발산한다. 영화는 강철중과 마찬가지로 거칠고 투박하지만 관객이 대리만족할 수 있는 지점을 명확하게 제시할 줄 안다.

<공공의 적>은 마초적 남성들의 갖가지 허영이 난무하던 조폭영화 계보 옆에 서서는 그것에 종지부를 찍는 영화다. 지겹도록 동어반복되던 조폭의 잡설과, 결투라는 내러티브가 갖는 이분법적 구도를 뭉뚱그려 관객 보편의 심리에 통쾌하게 화답하는 것, 그것이 강우석 감독이 의도한 전략이었다.


강우석 감독은 <공공의 적2>를 통해서는 사회 전반적인, 보다 ‘공공의 적’에 걸맞은 캐릭터를 창조하고자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병패인 정경유착을 그 소재로 채택한다. 따라서 강철중은 좌충우돌 형사에서 말쑥한 정장을 빼입은 꽤 유능한 검사로 업그레이드되어 돌아온다.

1편과 마찬가지로 강철중이라는 캐릭터가 갖는 힘은 강렬하다. 그는 여전히 악랄함에 분노할 줄 알며 자신의 신념에 모든 것을 걸 만큼 용기 또한 간직하고 있다. 외부 압력에 흔들리는 조직에 “나쁜놈 잡지 못하는 검사가 무슨 소용이냐”며 소신론을 설파, 주변인들의 각성을 끌어내기도 한다.

전편의 강철중은 여기까지다. 2편의 강철중은 강력한 주먹을 내세우지도, 화려한 미사어구가 동반된 걸쭉한 욕을 구사하지도 않는다. 호화롭게 펼쳐지는 동창회에 가서 ‘삼겹살에 소주’를 그리워하며 소시민적 대사를 읊기는 하지만 대한민국 검사의 직업적 윤리관을 줄곧 입에 담고 정의사회 구현에 온 몸을 내던지는 그는 어디까지나 ‘검사’ 강철중이다.

물론 좀 더 커다란, 배후가 든든한 공공의 적 한상우(정준호)와 대면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깡패를 후박하게 어루만지고 조규환에게 무자비한 주먹을 선사하던 형사 강철중과는 달리 검사 강철중은 그리 속 시원한 결정타를 날려주지는 못한다.

이는 강우석 감독은 대리만족보다는 수년간 뉴스를 장식해온 보다 강력한 공공의 적, 정경유착의 비리를 법이라는 이름으로 접근하는 데 주목하기 때문이다. 나사 몇 개 빠진 듯한 동네 형사의 좌충우돌 활약상 대신 국민이 바라마지 않는 소신 있는 검사 강철중,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이 전면에 등장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전략인 셈이다.


영화는 1편과 마찬가지로 그리 매끈하지는 못하다. 플롯의 개연성과 응집력은 떨어지며, 평면적이고 전형적인 캐릭터들과 그들의 관습적인 대사가 태연하게 화면을 수놓는다. 전편이 마치 잡초에서 생명력을 발견하듯 그 세련되지 못함을, 작위적인 인물 설정을 관객의 분노를 결집하는 에너지로 사용했다면 <공공의 적2>는 정제되지 못한 플롯들을 주로 ‘바람직한 검사상’을 제시하는 차원에서 활용한다.

따라서 길에 담배꽁초 버리지 말라고 웃으며 충고하는 환경미화원 할아버지를 차로 받는 것도 모자라 “천하면 분수라도 알아야지, 영감”이라며 패륜적 멘트마저 남겨 놓는, 그 천인공노할 면상에 사정없는 펀치를 날려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애초에 요원한 것이 된다. <공공의 적2>는 전편처럼 강력한 직격탄 한방은 날리지 못하지만 어쨌든 ‘이 시대 대중이 원하는 검사’를 그려내는 데는 성공한다.

만약 극장문을 나서면서도 개운한 기분을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기대했던 통쾌한 한방 대신 저열한 거대자본 시스템을 앞에 두고도 껍데기만 벗기고 마는, 밋밋한 마무리를 구경하고 온 탓일 것이다. 영화보다도 몇 배는 시시한 현실 속 검사님들의 초라한 활약상이 슬쩍 오버랩될 때 느껴지는 씁쓸함은 그 다음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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