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 살인마네 뻔하겠네 마릴린 맨슨 닮았네했다가, 소름끼치는 표정 연기와 한 방 세게 치고 들어오는 고어에 화들짝. 물론 개연성은 쌈 싸먹는 수준이지만, 청출어람 광대 살인마 덕에 평타는 치는 슬래셔. ⓒ erazerh

 

* 눈알 막음 그런 수위인데 올레TV15금 무료영화로 올라와 있음. 도랏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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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더페이스가 생긴 건 레더페이스인데 하는 짓은 제이슨 부히스에 가깝다. 단체로 모였네? 이래저래 죽이니 씐나이래 버리는데, 이건 차라리 13일의 금요일 십몇 편 같은 감성이 아니냐 말이지.

 

텍사스 쪽은 고기, 도축, 산송장급 낡음, 뭐 이런 디자인이 나와줘야 맛이 사는데 쩝. #넷플릭스 씨, 명맥을 잇는 건 좋지만 신경을 좀 더 써줘요. ‘텍사스 전기톱, 따지자면 이쪽 계보에선 명품 브랜드 비슷한 거잖아.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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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호러물. 매체 테이스트 오브 시네마 선정 너무 무서워 끝까지 보기 힘들다는 공포영화 10(https://bit.ly/2Y03PwY)3위에 오르기도 했는데, 순위에 걸맞게 프레임을 도화지 삼아 러닝타임 내내 뻘건 칠을 해댄다.

 

슬래셔든 고어든 뭐든 눈살이 찌푸려지고 마음이 쪼그라드는 불쾌한 피칠갑 장르를 좋아한다면 필견. ⓒ erazerh

 

 

* 90년대 '커피숍' 포스터계의 레전설 베아트리체 달은, 이번에도 정신이 나갔으며, 그래서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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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영화 매체 테이스트 오브 시네마10 Great Horror Movies Too Scary To Finish기반(순위 및 멘트 발췌·번역)

 

 

10. 휴먼 센티피드 2 (The Human Centipede 2, 2011) / 감독 톰 식스 = 휴먼 센티피드 1을 본 마틴, 이를 따라하기로 결심하는데

 

“1편보다 폭력의 강도가 세졌고, 살인사건은 확 늘어난데다 더 기괴해져 마지막까지 보기 힘든 영화 중 한 편이 됐다.”

 

 

 

9. 카니지 파크 (Carnage Park, 2016) / 감독 미키 키팅 = 은행을 털고 여성을 납치한 두 남자 이야기.

 

“모든 사람을 압도하는 살인마의 존재 때문에 상영시간 내내 끔찍하고 소름이 끼친다.

 

 

 

8. 컨저링 (The Conjuring, 2013) / 감독 제임스 완 = 페론 가족은 꿈에 그리던 새 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만…

 

“극도의 긴장감을 조성하는 강렬한 장면들.” “공들여 만든 사전 작업을 거친 ‘갑톡튀’ 공포.

 

 

 

7. 디센트 (The Descent, 2005) / 감독 닐 마샬 = 지도에도 없는 낯선 동굴, 사라와 친구들에게 무슨 일이?

 

“숨어있던 괴물의 첫 등장과 공격이 매우 잘 연출된데다 끔찍하기까지. 당신은 (영화를 멈추고) 누군가에게 다른 밝은 날 같이 보자고 할지도…

 

 

 

6. 주온 (Ju-On, 2002) / 감독 시미즈 다카시 = 한 대학생 자원봉사자가 노파를 간병하기 위해 ‘그 집’에 왔다.

 

“으스스한 장면과 섬뜩한 아이 등은 지나치게 무서워 보기 힘들 정도.” “필견의 호러.

 

 

 

5. 베로니카 (Veronica, 2017) / 감독 파코 플라자 = 베로니카는 아버지의 영혼을 부르고자 하필 위자보드를 꺼내는데…

 

“영화 ‘알이씨’의 파코 플라자 감독이 그간 곳곳에서 남용된 위자보드 플롯을 차용, 신선하면서도 소름끼치는 뭔가를 창조했다.

 

 

 

4. 멕시코 바바로 (Barbarous Mexico, 2014) = 멕시코에 전해 내려오는 가장 끔찍한 이야기들 by 8인의 감독

 

“단편 중 일부 작품들이 현실감 넘치는 무시무시한 시나리오를 선보이는데, 이에 적잖은 사람들은 영화 감상을 일찌감치 포기할 것.

 

 

 

3. 인사이드 (Inside, 2007) / 감독 알렉상드르 뷔스티요, 줄리엔 모리 = 임신 중인 사라는 운전 중 사고로 남편을 잃고 마는데…

 

“공포영화가 지녀야 할 모든 요소를 갖춘 작품.” “사실적 묘사와 그 안에 담긴 잔혹한 폭력성으로 공포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2. 오디션 (Audition, 1999) / 감독 미이케 다카시 = 재혼을 위해 ‘아내 오디션’을 진행한 아오야마에게 무슨 일이?

 

“영화 전반에 걸쳐 쌓아올린 긴장이 끝내 끔찍한 내용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클라이맥스.

 

 

 

1. 엑소시스트 (The Exorcist, 1973) / 감독 윌리엄 프리드킨 = 한 노신부가 고분 발굴 중 괴이한 형상의 조각을 발견하는데…

 

“역사상 가장 유명한 호러영화 중 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 무서운 건 아니다.” “속임수는 없고, 그저 공포로 직진.”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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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여기서도.

 

너무 무서워 끝까지 보기 힘들다는 공포영화 10선

[BY 뉴스웨이] 이 리스트는 2018년 10월에 나온 버전입니다. 이후에 등장한 호러영화 중에서는 어떤 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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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이 모양인 것과 비대칭 오컬트에 관해

 

 

※ 영화 <곡성>과 <랑종>의 내용이 일부 드러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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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까운 가족이 죽지 않아야 할 상황인데 죽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어떤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과거 나홍진 감독은 영화 <곡성>(2016)을 만든 동기에 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요컨대 ‘왜 착한 사람이 불행한 일을 겪어야 하는가?’에 대한 추론 또는 상상.

 

2. 흔히들 한탄한다. 신은 대체 뭘 하고 있길래 선한 사람들의 억울함이 반복되냐고. <곡성>은 이 불가해를 이해하고자 비이성의 경로를 택한 영화다. 방법은 소거법. 첫 번째 세부 질문 ‘신은 있는가? 없는가’에서는 부재(不在)를 지우고 존재(存在)를 남긴다. 그렇게 이 영화에는 초월자가 ‘있’게 된다. 아무렴.

3. 두 번째 질문은 ‘그렇다면 신은 영향력을 행사했는가? 혹은 놀았는가’ 정도 되겠다. 다시 말하지만 나홍진은 지금 한 손엔 카메라, 다른 한 손엔 부적 비슷한 걸 쥐고 있다. 비이성이라는 어질어질 외길. 그렇게 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소거되고 ‘영향력을 충분히 행사했다’가 남는다.

4. 이제 신이 ①존재하고 ②액션도 취했는데 ‘세상은 왜 이 모양인가? 왜 착한 종구 가족이 몰살돼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필연이다. 이 지점에서, 선택 가능한 답지는 하나밖에 없지 않나요, 라며 나홍진이 고개를 홱 180도 돌려 관객을 본다.(물론 실제가 아니고 영화의 태도에 관한 은유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 신은, 그 신이 아니었습니다. 낄낄낄, 와타시와 와타시다, 나는 나다. <곡성>에서 넘버원 초월자의 정체는 ③재앙을 빚는 악(惡)이었던 것. ‘귀신’ 신(神)은 결코 직무를 유기한 적이 없다. 애석하게도.

 

악마를 보았다. <곡성>


5. 1선발 초월자라면 당연히 거룩하고 선하리라는 믿음은 <곡성>에서 구겨졌다. 그리고 5년, <랑종>(2021)이 그 세계관을 장착한 채 또 다른 극한으로 내달린다. 이번에도 초월적인 무언가는 모두가 멸망할 때까지 폭주한다.(나홍진의 날인) 게다가 한두 놈이 아닌 듯하다.

6. 이 귀‘신’들을 <엑소시스트>나 <컨저링> 같은 정통 오컬트 속 대립 구도, 이를테면 적그리스도로서의 대항마 계보 안에 넣기는 어렵다. 그들처럼 선(善)이 구축한 팽팽한 질서를 따고 들어와 균열을 내는 등의 목적성을 띠지 않으니까. 왜? 안 그래도 되므로. 미안하지만 <랑종>에는 그런 노력을 기울이게 만들 법한 절대 선, 시스템의 창조자, 친인류적 초월자 등 그게 무엇이든 비슷한 것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무당인 님도 끝내 털어놓지 않았나. 신내림을 받았지만 진짜로 신을 느낀 적은 없었다고.

7. <곡성>과 달리 <랑종>은 현혹되지 말기를 바라는 선한 성질의 기운마저 제거했다.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무당 몸을 빌린 수호신이든, 공포에 벌벌 떠는 인간들에게 가호를 내려줄 이는 없다. 좋은 초월자는 꼭꼭 숨었거나 모든 초월자는 나쁘거나. <곡성>이 신의 가면을 벗겨 그 악의(惡意)로 가득한 얼굴을 봤다면, <랑종>은 악의의 운동능력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괜히 모큐멘터리 형식을 취한 게 아니다.

8. 악의 증폭과 선이라 믿어진 것들의 부재. 억울함과 억울함이 쌓이고 쌓여 짓뭉개졌을 인간의 비극사, 까지 안 가도 포털 뉴스 사회면을 하루만 들여다보자. 현실 세계를 오컬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랑종>의 이 궤멸적 신화보다 어울리는 콘텐츠가 있겠나 싶다.

궤멸적 신화. <랑종>


9. 악마한테 이기든 지든, 선악 대칭 구조를 가진 주류 오컬트는 창조자나 창조자가 빛은 질서의 선의와 안전성을 여전히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반면 <더 위치>, <곡성>, <유전>, <랑종> 등 특정 힘에 압도되는 비대칭 호러들이 있다. 현혹되지 말자. 이 계보의 영화들은 지금 악에 들뜬 상태가 아니라, ‘악’밖에 남지 않은 실재를 도식화하고 있다. 이를테면 ‘구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0. 이 모든 영화적 상상은 불우하고 불공평한 세계를 납득하기 위한, 차라리 가장 합리적인 접근일지도 모르겠다. 비이성의 중심에서 외치는 이성. 그렇게 원형으로서의 신은 죽었다. 다만 그럴수록 더욱 절통한 어떤 현실들. 다시, 신이시여. ⓒ erazerh

 

 

※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곡성]에서 [랑종]까지 - 신은 대체 뭘 하고 있길래

세상이 이 모양인 것과 비대칭 오컬트에 관해 | ※ 영화 <곡성>과 <랑종>의 내용이 일부 드러납니다. :) 1. “가까운 가족이 죽지 않아야 할 상황인데 죽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어떤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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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안 믿는 나지만, 그래도 아주아주 조금은 믿는 소식통에 따르면, 뒈지게 무섭다고. , 안 그래도 코로나 이후 가장 기대작 이었는데, 이러면 매일매일 설레서 잠도 못 잠ㅜㅜ 개봉은 아직 멀었고.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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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의 여정으로 보는 원초적 공포

 

 

※ 영화 <라이트하우스>의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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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에서 공포는 주로 어떻게오는가. 우선 어제와 다른 오늘, 익숙한 시공간에 금이 가고 그 틈으로 괴물 또는 괴이한 무언가가 스며들겠지. 가족과 친구들, 주인공의 미래가 그것들에 갉아 먹혀갈 때 공포영화는 그 상황과 괴물을 공포의 근원으로 삼을 터.

 

이때 공포감의 운동성은 의 움직임과 닮았다. 평온의 막을 베고 침투해서는 난도질, 그러다 훅, 관객의 영역까지 찌르는 모양새.

 

물론 이 물리적 흐름으로 설명되지 않는 영화들은 있다.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두 번째 장편 <라이트하우스>(2019)도 그중 하나. 이 영화에는 침입, 침투, 그 무엇이든 쳐들어와 헤집는 운동성이 없다. 일상과 비일상 간 대조도, 공포의 제작 및 전달자도 부재하다. 그럼에도 국내외 영화 소개 페이지들은 이 작품을 호러로 분류 중. 실제로 제법 무시무시하다. 공포 전달용 일반 회로가 장착되지는 않았지만 무섭다는 말, 이 공포감의 정체는 뭘까?

 

본 적 없는 판타지-호러. <라이트하우스>

 

 

# 욕망과 욕망의 오디세이아

 

흑백으로 촬영된 <라이트하우스>20세기 초반의 두 등대지기, ‘고참토마스 웨이크(윌렘 대포)신참에프라임 윈슬로(로버트 패틴슨)에 관한 이야기다. 에프라임은 등대 불빛을 교대로 관리하길 바라지만 토마스는 이를 완강히 거부한 채 불빛을 독차지한다. 두 남자, 억누름과 밀어올림. 무슨 일이 일어날까.

 

영화 중간의 짧은 숏 하나, 거꾸로 보이는 등대가 화면이 뒤집히면서 바로 선다. 이를테면 발기하는 페니스. 실제로 로버트 에거스는 여기다 진짜 페니스를 찍어 붙이려 했으나 무산됐다고 한다. 다시 ’, ‘남자임을 떠올리자. 그러니까 <라이트하우스>는 발기된 두 개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외부 침입보다는 서로 간 경합이 어울릴 듯하다.

 

욕망은 둘인데 탐할 수 있는 실체적 대상, 즉 등대 불빛은 하나인 상황. 영화는 주로 욕구불만인 에프라임의 의식 흐름을 좇는다. 훔쳐보기는 수순일까. 그는 등대 불빛 칸에서 토마스가 인어인지 거대 촉수인지 모를 무언가와 교미비슷한 것을 하는 걸 보고, 자신을 대입시키고, 분출하고, 분노한다. 이런 식이다. , 경험 없는 상상은 결핍을 키우기 마련. 욕망은 끝내 해소돼야 한다. 어떻게? 나를 가로막는 토마스를 없애서라도.

 

욕망 vs 욕망. <라이트하우스>

 

애초에 이럴 운명이기는 했다. 이 등대섬은 그러라고 장만된 무대 같다. 폭풍우는 멈출 기미가 없으며 교대팀의 배는 오지 않는다. 고립은, 공간 감각은 물론 시간 경과에 대한 인식마저 도려낸다. 며칠 혹은 몇 주가 흘렀는지 시간적 배경을 그들도 관객도 모를 지경. 게다가 각자 과거의 고백과 의심이 뒤섞여 두 사람의 정체성마저 뭉개졌다. 에프라임의 욕구 불만족과 토마스의 수호 의지만이, 이 우주를 통틀어 남은 유이한 키워드인 것 같다.

 

이때 토마스는 누구인가?’

 

토마스는 해독 불가한 모종의 구전 신화를 읊는 등 무언가에 홀린 듯하면서도, 일이 느리고 게으르다며 에프라임을 구박하고 말대꾸 시 급여를 안 주겠노라 협박까지 한다. 원시성과 현실성을 두루 갖춘 억압. 말은 안 통하는데 위협은 실재적이다. 익숙하지 않은가. 이를테면 누구나 한 번은 겪()을 폭압적 부모, 스승, 선배, 상사, 또는 그 비슷한 무엇들. 안타깝게도 이 토마스은 특정한 마법으로 소환된 게 아니라 그냥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다. 우리, 그리고 우리의 욕망이 그렇듯.

 

두 욕망의 역학관계상 나중 것에 의한 전복은 필연이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에프라임은 마침내 등대 불빛을 오롯이 향유한다. 결과는? 그는 불빛을 보며 쾌락인지 고통인지 모를 표정으로 산화하듯 절규하다가 밑으로 굴러 떨어진다. 아마도 죽겠지. 불빛의 정체와 그 순간의 감정은 영영 알 수 없게 됐다.

 

등대 불빛과의 조우. <라이트하우스>

 

 

# ‘현타(현실 자각 타임)’와 ‘죽음’, 언제나 참

 

결자해지의 의지일까. 로버트 에거스 감독은 여기다 최종 숏을 붙임으로써 이 등대 치정극의 장르는 규정 지어준다. 바로 눈 하나를 잃은 알몸의 에프라임이 바닷가에 널브러져 죽어 가면, 갈매기가 그의 내장을 뜯어먹는 숏. 이때의 에프라임은 제우스의 불을 훔쳐 인간한테 전해줬다가 날마다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게 된 프로메테우스와 노골적으로 닮았다. 이를테면 ‘신화’로 박제된 ‘소멸’의 엔딩. 왜? 에프라임이 욕망했기 때문에. 오르가즘은 태생적으로 증발하는 것 아니던가. 거 ‘현타’ 한번 오지다.

 

한걸음 더. 욕망의 카테고리 중 가장 큰 것은 의 지속, 즉 생()에의 의지다. 이렇게 보면 증발하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이요 기다리는 건 죽음이 된다. 선점자인 토마스도, 후발주자인 에프라임도 모두 죽었다. 쾌락이든 목숨이든 일단 점유한 자들은 길게 머무를 수 없다. <라이트하우스>에서 공포란, 곧 소멸할 쾌락을 좇도록 디자인된 우리의 방향성,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의 너머에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인 셈이다.

 

이 정도로 근원적인 공포감이 기존 호러영화들의 운동성을 짜잔, 두르기란 어렵다. 보다 날-공포인 만큼 그 성질에 대한 힌트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찾아야 한다. 날것, 태초그렇게 인류의 출현부터 먼 미래까지를 꿰어버린 영화로 가보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이 걸작 SF를 꺼내든 건 이 영화에 인류사를 유인원 시절부터 촉발시켜온 검은 돌기둥 모노리스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색이 입혀지기 전부터 우리 생을 운용했을, 절대적 배후 같은 물질. ‘증발소멸’, ‘죽음따위의 <라이트하우스>적 공포는 바로 이 영험한 유물에 새겨진 지침처럼 존재한다. 애초에 운동성을 띨 필요가 없었던 것. 가라사대, 침투하지 않아도 그저 기다리면 인간들이 도착하리니. 공포계에 짜라투스트라가 있다면 이렇게 말했을 거다.

 

<라이트하우스>의 최종 숏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모노리스’

 

 

# 이보다 선명한 미래는 없다

 

로버트 에거스는 장편 데뷔작 <더 위치>(2016)에서 마녀를 공포감의 근원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선택되는 모종의 출구로 다뤘다. 무서운 건 모든 걸 왜곡하는 렌즈, 즉 인식 불능에 빠진 맹신의 시대였다. 그리고 <라이트하우스>에서는 비율 1.19:1의 흑백 프레임에다 소멸론을 인류의 기원신화인 양 보존해놨다.

 

말로 옮기자면 인생은 고통이야, 몰랐어?’ 정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고? 욕망하고 살아가는 우리 앞에, ‘현타죽음보다 선명한 미래가 또 있을까? erazerh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현타’보다 선명한 미래는 없다

[라이트하우스] 욕망의 여정으로 보는 원초적 공포 | ※ 영화 <라이트하우스>의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 공포영화에서 공포는 주로 ‘어떻게’ 오는가. 우선 어제와 다른 오늘, 익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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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이라는 것들은 비극적이게도 대개 도달 즉시 소멸한다. 딱 그 지점, 예정된 몰락의 시간을, 추적추적 더듬어가는 영화. 쉽게 말해 인류의 불가피한 경험으로서의 ‘현타’를, 신화적으로 고찰하기. ⓒ erazerh

 

 

* <더 위치>에 이어 이 작품까지 굿. 이렇게 로버트 에거스는 아리 에스터(유전, 미드소마)와 더불어 2010년대 이후 이 분야에서 유이하게 날 기대하게 만드는 감독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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