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믿음은, 모든 걸 왜곡하는 렌즈가 되거나, 나와 세계 사이에 가림막 같은 걸 쳐버린다. 그렇게 인식 불능에 빠진 시대와, 마녀라는 모종의 출구. 이를테면 원인과 결과의 전도(轉倒)에 관한 영화. ⓒ erazerh

 

 

* 중세 배경(!)의 호러물이지만 작금의 정신 나간 맹신들, 그 작동원리가 고스란히 담겼다.

 

 

반응형

'IMAG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상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0) 2020.09.23
단상 [로마]  (0) 2020.09.04
단상 [반교: 디텐션]  (0) 2020.08.14
단상 [스푸트니크]  (0) 2020.08.10

악의 구조가 너무 납작해 전체 형상을 더듬을 필요도 없겠네, 시대 배경이 과거긴 해도 요즘 영화 풍토에 이렇게 뻔뻔한 악이라니, 에이 시시하네, 라고 생각했다가 불현듯 지금 홍콩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떠올라버렸다. 뻔뻔함의 어떤 궁극에서 작동하는 힘, 악(惡). 그래 그거.

 

무릇 현실은 영화보다 무겁다. ⓒ erazerh

 

 

반응형

'IMAG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상 [로마]  (0) 2020.09.04
단상 [더 위치]  (0) 2020.08.19
단상 [스푸트니크]  (0) 2020.08.10
단상 [러브, 데스 + 로봇]  (0) 2020.07.23

- 좀비의 ‘바이블’부터 재기발랄 ‘변주’까지

 

 

영화 ‘부산행’과 시리즈물 ‘킹덤’, 최근의 ‘#살아있다’와 ‘반도’까지 한국산 좀비 콘텐츠도 그 면면이 다양해지고 있는데요. 별로다, 이걸로 모자라다, 더 많은 좀비가 필요해, 라는 이들을 위해 ‘놓쳐선 안 될 급’의 좀비영화 10편을 꼽아봤습니다. (※ 순서는 제작년도)

 

-------
1. 데드 3부작 / 감독 조지 로메로 =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Night Of The Living Dead, 1968) ▲시체들의 새벽 (Dawn Of The Dead, 1978) ▲시체들의 날 (Day Of The Dead, 1985)

 

현대 좀비물의 공식과 관습을 정립한 좀비계의 바이블들. ‘시체들의 새벽’은 평론가 로저 애버트한테 “현존 공포영화 중 최고작”이란 평도 들었지요. 가족주의, 백인우월주의 등 당시 우월하다고 여겨진 가치들의 위선을 들춰내고 꼬집습니다. ‘살아있는 시체의 밤’의 블랙 코미디 버전인 바탈리언(1985), 재해석이 돋보이는 동명의 리메이크작(1990, 톰 사비니 감독)도 추천.

 

좀비계의 바이블들. <시체들의 새벽>

 

 

2. 좀비오 (Re-Animator, 1985) / 감독 스튜어트 고든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케 하는 설정에 메디컬 호러와 SF적 요소를 끼얹은 혼성 장르 공포물입니다. 잔혹하고 기괴한 이미지와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얽히는 데서 오는 부조화의 재미가 도드라집니다. 슬랩스틱 스플래터의 전설과도 같은 작품이지요.

 

부조화의 재미. <좀비오>

 

 

3. 데드 얼라이브 (Braindead / Dead Alive, 1992) / 감독 피터 잭슨

 

거장 피터 잭슨의 초기작으로, 기존 좀비물과 차별화된 전개를 통해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이를테면 좀비를 두려움이 아닌 ‘처리’의 대상으로 다루기. 조악한 면도 있지만 그마저 장점으로 승화시키며 최강의 슬랩스틱 스플래터로 자리 잡습니다. 단, 잔혹성의 강도가 매우 높은 편. 관람에 주의를 요합니다.

 

최강의 슬랩스틱 스플래터. <데드 얼라이브>

 

 

4. 레지던트 이블 (Resident Evil, 2002) / 감독 폴 앤더슨

 

호러게임 바이오하자드가 원작으로, 게임 기반 영화 중 최고작으로 꼽히곤 합니다. 거대한 음모를 파헤치는 탄탄한 스토리에 액션·공포·스릴 3박자가 잘 어우러진, 오락영화로서 완전체에 가깝다는 게 정설. ‘리즈 시절’ 밀라 요보비치의 매력은 덤입니다.

 

액션·공포·스릴의 3중주. <레지던트 이블>

 

 

5. 28일 후 (28 Days Later…, 2002) / 감독 대니 보일

 

‘달리는 좀비’란 설정을 본격 도입, 좀비 스펙터클에 역동성을 첨가했습니다. ‘좀비보다 더 무서운 건 인간’이란 관점에 가장 충실한 작품이기도 하지요. 좀비 창궐로 문명이 붕괴된 세계, 원시성을 되찾은 인간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좀비보다 더 무서운 건 인간. <28일 후>

 

 

6. 새벽의 저주 (Dawn Of The Dead, 2004) / 감독 잭 스나이더

 

앞서 소개한 ‘시체들의 새벽’을 21세기에 맞게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원작처럼 좀비에 둘러싸인 쇼핑센터를 무대로 갖가지 인간 군상을 담아냅니다. 공포와 서스펜스, 묵시록적 세계관을 잘 버무려 좀비 마니아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마니아들의 열렬한(!) 성원. <새벽의 저주>

 

 

7. 새벽의 황당한 저주 (Shaun Of The Dead, 2004) / 감독 에드가 라이트

 

조지 로메로의 3부작 등 다양한 호러물들을 패러디했습니다. 코미디를 기반으로 호러, 로맨스, 액션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지요. 21세기 최고의 좀비영화로도 불리고 있으며, 타란티노 감독이 꼽은 1992년 이후의 베스트 무비 20편에도 들었습니다.

 

21C 최고의 좀비물로 불리는 <새벽의 황당한 저주>

 

 

8. 알.이.씨 ([Rec], 2007) / 감독 하우메 발라게로, 파코 플라자

 

페이크 다큐멘터리와 좀비물의 장르적 특성이 안정적으로 호환된 사례. 흔들리는 카메라에 담긴 히스테릭한 현장감을 좀비영화 고유의 예측 불가능성으로 잘 이어가지요. 무엇보다 ‘공포’라는 기본 정서에 충실, 호러 팬들의 갈채를 끌어냈습니다.

 

페이크 다큐의 정점. <알.이.씨>

 

 

9. 좀비랜드 (Zombieland, 2009) / 감독 루벤 플레셔

 

역시 코미디를 큰 줄기로 좀비물의 관습을 계승하고 또 비틀며 자신만의 재기발랄한 영역을 구축합니다. 실제 본인으로 등장하는 빌 머레이의 능청스러운 연기도 관람 포인트. 엠마 스톤과 제시 아이젠버그의 초창기 매력도 만날 수 있습니다.

 

관습을 계승하고 또 비틀고. <좀비랜드>

 

 

10.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One Cut of the Dead, 2017) / 감독 우에다 신이치로

 

좀비영화인 듯 아닌 듯, 최근 몇 년 간 등장한 변주형 좀비물 중 단연 눈에 띕니다. ‘좀비영화를 찍는다’는 설정에서 시작, 예기치 못한 이야기가 겹겹이 더해지는데요. B무비 특유의 조악함을 전에 없던 방식으로 진화시킨 아이디어는,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변주형 좀비물류 ‘갑’.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이상 좀비를 좋아한다면 놓쳐선 안 될 영화 10편을 꼽아봤는데요. 현대인의 고립감과 생존욕을 최전선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해온 장르가 바로 이들 좀비영화, 중독적 재미가 없을 수 없겠지요?

코로나19의 초장기화로 부쩍 늘어난 듯한 고독감, 좀비영화로 달래보는 건 어떨까요? ⓒ erazerh

 

 

-------

* 이 글은 여기서도.

 

[카드뉴스]‘장르가 좀비’ 놓치면 후회할 올타임 좀비영화 10선

영화 ‘부산행’과 시리즈물 ‘킹덤’, 최근의 ‘#살아있다’와 ‘반도’까지 한국산 좀비 콘텐츠도 그 면면이 다양해지고 있는데요. 별로다, 이걸로 모자라다, 더 많은 좀비가 필요해, 라는 이

www.newsway.co.kr

 

반응형

※ 『최종 S의 비밀』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Sequence), 신(Scene), 숏(Shot)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에 <유전>과 <미드소마>의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

 

-------

우리는 얼굴을 통해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 - 자크 오몽

 

특히 공포의 전도체가 될 때, 얼굴은 유난히 도드라진다. 실제로 관객한테 공포(영화)는 스크린 속 얼굴들이 극단의 표정을 지을 때 완성되고는 한다. 깜짝 놀란, 고통에 찬, 절규하는, 비명의 얼굴. 한 세트로, 흉측한, 광기어린, 무섭게 일그러진, 악마성의 얼굴. 이 과정에서 창조적 솜씨가 빚어낸 얼굴들은 장르의 관습이 돼 지독히도 반복되는데, 대개는 진부하거나 한심한 복사본에 그치고 만다. 아마도 원본 속 얼굴의 맥락을 해석해내지 못한 채 단지 표정 흉내에 급급했기 때문이리라.

 

영화 <13일의 금요일>(2009)

 

그 와중에 여태껏 본 적 없는 얼굴이 등장했다. 아리 에스터 감독의 장편 데뷔작 <유전>(2017)의 마지막 숏. 피터는 말 그대로 넋이 나가버린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럴 만도 한 게 가족들이 악마의 굿판안에서 모두 잔혹하게 희생된 데다, 엄마(애나)는 방금 전 스스로 본인 신체를 훼손했고, 피터 자신의 정신과 육체는 이제 막 악마가 점령할 참이다. 미쳤거나 미치기 직전이거나.

 

그런데 잊지 말자. 이 빙의 행사는 (악마 측 입장에서는) 거룩한 의식이다. 혈통이라는 가족의 근원이 낳은 지옥도인 동시에, ()의 계보가 연속성을 획득하는 경축의 시간이다. 살육과 의전이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인 셈. 추종자들은 그들이 섬기는 악마 파이몬에게 지식이나 좋은 친구따위를 달라고 간청까지 한다. 악의 측면을 모른 체하거나, 악행을 덮어도 될 만큼 파이몬의 명성이 위대하다고 믿는 듯하다. 이때 파이몬은, 누구와 닮았나.

 

 

아리 에스터는 피터의 최종 얼굴을 담는 데 적잖은 러닝 타임을 쓴다. 이제 피터는 더 이상 놀라거나 부르짖지 않는다. 그는 압도된 채 무너져 내리며, 다만 악이 스며드는 시간을 얼굴에 새기는 중이다. 77초간 지속되는 이 숏에서 피터는 눈을 단 한 차례도 깜빡거리지 않는데, 생리현상이 불필요한 어떤 초월의 공간으로 넘어간 듯도 하다.

 

중세 서양 예술에서 얼굴이 주로 신()의 형상이었다고 할 때, -인간으로서 피터의 이 얼굴은 성스럽고 선량한 그 기표들과는 조금 다른 버전으로 보인다. 누군가에게 신성한 의식이()지만 그 개최를 위해 잔혹한 파괴, 그리고 현혹의 기술이 동원되지는 않았냐는 반문. 물론 고결하고 인자하고 번뇌를 짊어진 듯한 표정들은 그 이면을 가리는 데 부족함이 없었을 테다. 따라서 피터의 얼빠진 마지막 표정은 위장 작업이 완수되기 직전 단계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거룩함으로 가공되기 이전의 그 무엇, 이를테면 선택된 자 개인의 멸망에 관한 이미지.

 

전에 본 적 없는 이 얼굴은, 자신이 신인 줄 아는 악마를 맞이하고 있다.

 

<유전>의 최종 얼굴

 

여기 의식이 또 하나 있다. 호르가 마을의 하지제, 그 하이라이트로 9명의 제물이 불에 타는 중이다. 그중 곰 가죽 안에 갇혀 산 채로 타는 이는 대니의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이다. 말 그대로 환장의 카니발. 이 광경에 넋 놓고 울먹이던 대니가, 이윽고 웃는다. 너희들의 이 엔딩이 고소하다는 듯. 영화가 끝난다.

 

아리 에스터의 두 번째 영화 <미드소마>(2019)의 마지막 시퀀스에서도 학살과 의식은 동전의 양면인 양 들러붙어 있다. 이 기괴한 중첩을 떠안는 자, 이번에는 대니다. 그녀의 경우 혈연과의 단절은 이미 서사 초반 경험했고, 애인인 크리스티안과도 이별 중이다. 전자는 내부의 신경쇠약을 견디다 못 해 발 디딜 판 자체를 깨뜨렸고, 후자는 슬픔은커녕 이 괴이한 마을에 대한 의심조차 나누기 힘들 만큼 둔해빠졌다. 감정의 공유가 가능하다는 점에서만 보면 차라리 이 모계-토테미즘 사회가 나아 보일 정도다.

 

 

인류의 역사는 곧 분화의 역사다. 집단은 부피가 늘어나 갈라졌고 또 그 갈래별로 같은 과정을 겪었다. 최초의 단어가 진화 끝에 백과사전의 체계를 갖췄듯, 인간관계의 망은 넓이와 깊이를 더하고 더해 삶의 양식이 됐다. 어쩌면 인생이란 내가 속한 각 층위의 집단들에서 맡은 바 역할극을 잘해내기, 그 자체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교과서도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정의하지 않았나.

 

<미드소마>의 대니는 그 역할극에서 탈락했고 또 탈락하는 중이다. 이를테면 과거와 미래 가족 모두와 이별하기. 사회적 동물이 타자와 관계를 맺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대니를 자꾸만 미토스(mythos)의 영역으로 밀어 넣고, 그녀 또한 그 중력장에 적응해간다. 마치 비극을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이 끝내 종교로 빨려 들어가듯이.

 

<미드소마>의 호르가 마을. Join us?

 

다시 한 번, 대니가 이윽고 웃는다. 너희들의 이 엔딩이 고소하다는 듯. 낯선 마을에서 낯선 공포를 느낀 여성주인공이 되레 애인의 죽음을 선택하고 웃음까지 짓는 아마도 최초의 숏. 여태껏 본 적 없는 또 하나의 얼굴이다.

 

이곳 호르가 마을은 역할놀이가 필요치 않은 세계다. 동일한 믿음과 삶의 리듬 아래 단일 자아로 꿰어져 있기에 관계의 유지나 개선을 위한 어떤 증명이 요구되지 않는다. 대니의 마지막 웃음은 자신에게 울음만 남긴 그 증명의 기록물, 즉 인물들을 활활 태워버렸다는 안도인 셈이다. 따라서 이 웃음은, 비가역적이며 돌이킬 수 없다. 수 년 간 요동쳤을 그녀의 감정은, 그 진폭은, 이 순간부터 가지런하게 정렬된 하나의 선으로 수렴해갈 것이다. 대니는 백과사전 이전의 시간, 몇 가지 음절만 알면 되는 그곳으로 되돌아갔다.

 

 

사물은 그 자리에 있다. 왜 그것을 마음대로 조작하는가?” - 로베르토 로셀리니

 

로셀리니 감독의 말에 빗대어 보자면, 아리 에스터는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즉 실재하는 두려움의 요소를 관습적 표정 안에 억지로 끼워 넣는 데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전에 없던 얼굴들 피터의 흡수와 대니의 변환을 포착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물론 우리는 그 덕에 악의 진영이 갖춰지기 직전의 절망적 시간을 목격했고(유전), ‘맹신나 자신으로 살기가 양립할 수 없음을 지켜볼 수 있었다(미드소마). 무엇보다 대니의 얼굴에서는, 알면서도 가야 하는 퇴행 길에 관한 서글픈 섬뜩함마저 느낀다. 아마도 잠재적으로는 모든 사람한테 열려있을 그 뒷걸음의 문. ‘홈 스위트 홈에는, 사회 곳곳에는, 문손잡이를 돌리도록 만들, 나락으로 통하는 구멍이 너무 많다.

 

믿...?

 

<미드소마>의 최종 숏. 곧 ‘김치’

 

영화관 안과 밖의 공통점, <미드소마>나 현실이나 그토록 잔혹한 사건들은 대낮에() 일어난다는 것. 그럴 수밖에. 그들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걸 해대니까, 떳떳하니까. 신의 이름을 빌려 침략하고 신의 이름을 빌려 목숨을 뺏고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모두 신의 뜻 운운하는 이들은, 추종자는, 악마는, 악을 행하되 악의가 없다. erazerh

 

 

-------

PS 1. <미드소마> 감독판이 이전 버전과 다른 점은 대니와 크리스티안 사이의 감정선 및 그 굴곡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것 정도. 그밖에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몇몇 대사들.

 

PS 2. <유전>의 최종 숏은 사실 77초간의 얼굴 숏이 아니라, 3초 동안 나무집 내부를 디오라마처럼 포착한 장면이다. Hail Paimon.

 

 

※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반응형

+ Recent posts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