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뛰어올라 벽에 들러붙지도, 순식간에 달려오지도 않는다. 몇 년간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던 돌연변이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다. 좀비는 여전히 느릿느릿하다. 변종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받았다.

좀비의 신화 조지 A. 로메로는 <랜드 오브 데드>에서 다시 한번 세상의 부조리를 영화 안에 축소, 그 질서를 조롱하고 억압된 것들을 귀환시킨다. 피들러 그린의 부자들은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다른 계급의 자본과 노동을 꾸역꾸역 먹어댄다. 화려한 성채 밑에는 아마도 누군가의 피와 눈물이 시멘트 발려져 있으리라. 흑인 노동자 ‘빅 대디’를 중심으로 한 좀비들이 분노를 품고 주상복합빌딩을 유린하는 장면은 그래서 끔찍한 살육이 아니라, 복수와 생존의 본능에 근거한 처절함에 가깝다(그들이 원하는 건 오로지 ‘먹을 것’이었다).

‘불꽃놀이’가 결코 예쁘고 신기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좀비 스스로 깨우치는 모습, 좀비가 동료의 죽음에 울부짖을 줄 알고, 도구 사용법을 하나씩 익혀가는 설정(웃겼다!), 사람들이 스스로 쳐놓은 울타리 안에 갇혀 버리는 상황 등은 로메로 특유의 정치적 은유이면서, 그 자체로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역할도 한다. 먹고 먹히는 긴박한 현장 또한 빈곤층의 폭발하는 분노를 상징하는 동시에 신체훼손을 통한 원초적 스펙터클!을 선사하면서 제 몫을 다 해낸다. 어찌 아니 즐거울 수 있으랴!

제 아무리 치열한 전쟁이라도 생존자는 남기기 마련이다. <랜드 오브 데드>에도 살아남은 자들은 있다. 그들은 무너진 곳에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을 심거나, ‘정상’과는 조금 다른 가족의 형태를 띤 채 어딘가로 떠난다. 어찌 될지 알 수는 없다. 그들의 선택은 구조적 모순의 반복을 불러올 수도, 황량한 로드무비의 길을 따를 수도 있다. 계급 간 화합은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답답한 구조물을 걷어낸 그 순간만큼은 모두들 작은 희망을 간직한 듯 보인다. 비록 좀비의 신분일지라도 말이다. ⓒ erazerh

# 아시아 아르젠토는 여전히 매력적이었지만, 그녀만의 독특한 ‘그 느낌’이 드러난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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