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초현실이 뒤범벅됐을 때의 어리둥절함. 데이빗 린치의 영화에서나 느낄 법한 그 혼미함을 놀랍게도 지금 여기 2008년 대한민국을 통해 느낀다면, 거짓말일까. 이 모든 해괴망측한 현상들이 결코 영화가 아니라는 데서 한번, 그리고 그것을 접하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욕설을 뱉고 있는 내 입 때문에 또 한번 놀라는, 바야흐로 아주 '어메이징하게' 오싹한 겨울이다.


따지자면 이는 모두 우리의 착각에서 비롯됐다. 지난겨울을 휩쓸던 '무능한 정권보다는 차라리 부패한 정권이 낫다.'는 논리. 이 이상한 명제는 두 가지 착각을 불러왔다. 하나는 '부패'와 '무능' 사이에는 교집합이 없을 거라는, 그래서 '부패했어도 유능은 할 것'이라는 착각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의 입에 걸린 '유능'이 약자에 대한 고민을 어느 정도는 포함하고 있을 거라는 착각이다. 전략적 단어인 '실용'이 애매함을 딛고 21세기 대한민국의 기치인 양 떠올랐을 때, 아마도 이 착각들의 절정은 그 때였을 것이다.


물론 이는 말이 착각일 뿐이지 사실상 우리의 '선택'에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성공이라는 지상과제를 향하는 중에 윤리 따위를 들여다볼 겨를은 없더라.'는 경험명제에 암묵적인 동의를 보낸 주체는 결국 우리 시대의 패러다임이었다. 시스템의 부조리를 토로하는 누군가보다 토익공부 한 자 더하는 당신이 훨씬 더 현명하고도 아름다울 수 있었던 이유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 유의 광고카피가 증명했듯, 성공이 지향하는바 또한 명확했다.


富라는, 눈에 띄는 결과를 향한 이 뜨거운 관심들은 그 자체로 매우 충성스럽기는 했지만, 성공의 '주어'에 관한 질문은 최대한 삼갔다. '일단 나는' 성공의 반열에 올라야 한다는 강박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불합리한 구조를 바꾸려 드느니 차라리 그 꼭대기로 향하겠다는, 그것이 그나마 덜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만성적인 절망과 박탈감 따위 아랑곳 않을 수 있는 '부자'가, 그야말로 전지전능함의 표상이 된 것이다. 자본으로 서열을 매기는 시스템은 그렇게 영원히 부서지지 않을, 차라리 폼 나게 편입하고픈 대상이 됐다. 바야흐로 '살아남은 놈이 곧 윤리적인 놈'인 세상의 도래였다.


그 결과, 우리는 수직적 사고로 가득 찬 야심만만한 CEO를 대한민국의 수뇌 자리에 들어앉혔다. 예상대로 그의 원칙은 확고했다. 그에게 '다름'과 '차이'는 '변명'의 동의어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가난한데다 '좌파'이기까지 하다면, 안타깝지만 그것은 순전히 당신이 남들보다 덜 열심히 살았고 또 덜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신은 스스로의 위치에 대해 죄스러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말도 안 된다. 그러나 이 말 같지 않은 논리가 현행태로 횡행하는 곳이 바로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모든 분야에 '경쟁력'을 갖다 붙이고 그 결과를 세로로 나열하고픈 천박한 소망이 제대로 작동 중인 셈이다.

MB는 이른바 '불도저'로 불린다. 불도저는 묵직하게 밀어붙여 눈에 띄는 성과물을 만들 줄 안다(물론 게 중에는 오직 쓰레기 생산에만 힘쏟는 것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 깔아뭉갰을 벌레나 잡초 등의 생명체들에, 불도저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는 성급했다. 모두가, 아니 일단 나는 불도저에 탑승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적어도 그 밑에 깔릴 벌레나 잡초는 아닐 줄 알았다. 아니면 그 존재 자체를 묵인했거나. 주지해야 할 한 가지 사실. 지금의 시스템이 계속되는 한 깔아뭉개지는 생명체의 수가 줄어드는 일은 결코 없을 것라는 점. 늘 그랬듯이 우리의 실수를 바로잡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물론, 4년 후에도 심판할 나라가 남아있다면.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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