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은 자신이 인간임을 알고 있는 어느 주체의 외양인데, 모든 인간은 죽음을 면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얼굴은 자신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어느 주체의 외양이다. 우리가 얼굴 위에서 찾고 있는 것은 시간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간이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자크 오몽, [영화 속의 얼굴] 中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말은 아무리 들어도 슬프지 않다. '해는 서쪽으로 지더라.' 같은 말처럼 너무도 당연해 그저 무덤덤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종(種)의 입장이 아닌 '나'라는 1인칭의 차원에서 곱씹어 보자면, 죽음에 관한 이 진부한 선언은 꽤나 비극적으로 들리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죽는다.' 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 따위의 명제는, 당신이 그 누구건 간에 비껴갈 수 없는, 인생의 필수코스인 셈이다.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 주인공 앨빈 스트레이트(리차드 판스워스)의 처지는 꽤나 다급하다. 형의 집을 향한 그의 여정 자체는 한가롭기 그지없지만, 생전에 형을 만나야 하는 탓에 속마음은 하루하루 타들어가기 바쁘다(그의 나이 이른 셋, 게다가 몸도 성치 않다). 대체로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죽음에 관해 더 많이 생각해보기 마련인데, 스트레이트가 놓인 지점이 바로 그 비례곡선의 끝자락인 셈이다. 때문에 그는 그의 시간에 끝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무엇인지를 비교적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얼굴은 느긋함으로 가득하다가도 어느새 초조함으로 뒤덮여 버리고는 한다. 요컨대 스트레이트의 이 얼굴은 자신이 죽게 됨을 자각한 어느 주체의 외양임은 물론, 프레임 안팎으로 죽음을 일깨우는 산 경험의 클로즈업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너도 언젠가는 죽을 터. 그런데 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스트레이트가 바에 앉아 지난날의 과오를 고백하며 울먹이는 장면. 그의 얼굴에 패인 수많은 주름에서,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포착할 수 있는가. 이를테면 당신의 죽음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당신은 준비하고 있는가. 물론 이 질문들에 잘 대답했다고 해서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치는 그 모든 비극들이 덜 슬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 옆을 흐르는 시간에 관한 당신의 이해도는, 꽤 정확하게 측정되지 않겠는가. ⓒ erazerh




Rest in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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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린치가 갈 데까지 간 것 같다. 아니 가고야 말았다. 그의 스타일은 이제 스타일을 넘어 어떤 이즘(ism)이 됐다. 영화 <인랜드 엠파이어>는 ‘린치 월드’라 불리던 모든 것들의 총체이자, 이질적인 무엇으로의 분화다.

<로스트 하이웨이>와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그렇듯, <인랜드 엠파이어> 역시 쪼개진 영혼과 흐트러진 사건들에 관한 영화다. 하지만 데이빗 린치는 내러티브에 ‘어떻게’ 균열을 낼 것인가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듯하다. <인랜드 엠파이어>에서 균열은 현실의 갈라진 틈으로서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접근 가능한 독립된 세계다. 따라서 카메라는 더 이상 현실의 벌어진 틈을 찾고 비집고 확장하는 데 쓰이지 않는다. 요컨대 데이빗 린치는 현실을 경유하지 않은 채 균열이라는 시공간 자체로 결국은 몸소 들어왔으며, 카메라는 그저 균열이 또 다른 균열과 만나고 충돌하고 또 융합하는 과정을 좇을 뿐이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몽롱하게, 대체적으로 자유롭게. 물론 여기에는 사건을 논리적으로 재배치할 만한 그 어떤 가능성과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불가해의 집합소 같았던 두 작품 <로스트 하이웨이>와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차라리 친절해 보이는 이유다.

<인랜드 엠파이어>는 해체된 것들을 해체된 플롯으로 엮은 매우 ‘어지러운’ 영화다. 꿈과 꿈이 꿈속에서 뭉쳐진 듯한, 마치 거대한 무의식 덩어리 같은 느낌. 그것이 무엇이든 어지럼증에 잠식당하기 싫다면 일단 뇌를 잠시 내려놓으시라. ‘본다는 것‘에 관한 이 완전하게 새로운 경험은, 그리 만만하지만은 않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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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고 선명한 색상, 평화로운 풍경 뒤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잿빛 욕망. 그리고 광기와 부조리의 관찰자인 동시에 창조자인 인간들. 모호하고 기묘하면서도 뚜렷이 각인되는 이미지. 영화 속 두 세계의 명암, 채도가 더 이상 구분되지 않을 때, 이상하게도 영화와 현실 간 경계도 흐릿해진다. 컬트한 영화에 컬트한 세상. ⓒ erazerh

Welcome to Lynch 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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