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喪失). “어떤 사람과 관계가 끊어지거나 헤어지게 됨. 또는 어떤 것이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짐.”


‘상실’은 도처에 널려있다. 처음이 있으면 끝도 반드시 있다는 우주 불변의 진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사라지는 것들의 출현은 필연이기 마련이다. 사람 사이에 있어 상실은 어떤 관계가 실제적으로 더 이상 지속되지 않게 됨을 뜻한다. 그러니까 ‘당신과 나’라는 고리가 ‘떠난 자와 남은 자’로 바뀌어버리는 것. 결코 유쾌하지 않은 이 경험은, 특히나 그 원인이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한 것일 때 보다 비극적이다. 죽음의 도래는 그 필연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관계를 기억 속에 봉인해버린다는 점에서 무자비하기 때문이다. 남은 자가 ‘영원한 상실’이라는 거역 불가한 명령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슬픔을 삼키는 것뿐이리라.

물론 죽음의 일방적 통보를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때도 있을 테다. 이를테면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닥친 불의의 죽음 같은 것. 삶의 불확실성이 최악의 상태로 표면화된 그런 경우, 극에 달한 고통과 절망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기 십상이다. 요컨대 어떤 상실은, 남은 자의 남은 생마저 송두리째 상실케 한다.

영화 <기담>은 그처럼 수용 불가한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기담>에서 인물들은 죽음이 내린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명령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명령 불복종은 떠난 자들을 ‘지금 여기’에 복원시키고픈 욕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불가능에서 가능을 찾으려는 눈물 서린 그 욕망은, 마침내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기에 이른다. 떠난 자의 귀환을 둘러싼, 말 그대로 ‘기이한 이야기.’

이처럼 <기담>은 상실이 남긴 쓰디쓴 흔적에 뿌리를 두는 영화다. 공포를 담되 단지 공포로만 수렴되지 않는 중층의 정서가 필요한 셈. <기담>이 나름대로 구축한 서스펜스적 요소는 아마도 그 정서들을 효과적으로 엮기 위한 고민의 산물일 테다. 결과적인 말이지만 그 고민이야말로 이런 장르의 영화에서 ‘흐름’을 장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실천적 지표가 아닐까 싶다.

사실 ‘다양한 감정의 충실한 전달’이라는 과제가 비단 <기담> 앞에만 놓였던 것은 아니다. 근래 한국 공포영화들이 주로 다뤘던 내러티브 ―원혼의 복수, 그 원인으로서의 아픈 과거 등― 또한 공포감을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만으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하지만 그들 영화 대부분은 개별 이미지의 표정을 동위의 디제시스 시공간 안에 녹여 넣는 데 실패하지 않았던가. 군데군데 놀람의 장치를 향한 지독한 집착 탓인지는 몰라도, 공포와 그 근원 사이의 감정적 거리는 한없이 멀어져갈 뿐이었다(이른바 뜬금없는 ‘사다코의 망령’은 이제 영화용어사전에 등재해도 좋을 판이다).

<기담>이 반가운 까닭은 그런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기담>은 상실의 아픔과 그 확산으로서의 공포 사이의 정서적 간격이 지극히 좁은 영화다. 간격이 좁다는 말은 서로 어긋날 수도 있는 감정들이 한 덩어리로 적절하게 묶여있음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공포를 상실의 무게에 짓눌린 검붉은 자국 같은 것으로, 상실을 공포의 전이를 부르는 악성종양 따위로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는 정도.

정서 간 이뤄지는 이런 무리 없는 전환은 <기담>이 ‘흐름’을 통제하는 데 능숙한 영화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기담>은 개별 숏들 자체로 무언가를 전달하기보다는, 숏들을 동일 선상에 놓고는 일종의 리듬에 맞춰 흘려보낸다. 그 리듬을 지정하는 명령은 놀랍게도 ‘정교한 서사를 구축하라’가 아니라 ‘과장된 묘사를 응용하라’이다. <기담>에서의 이미지들은 누군가가 ‘말을 하지 못했기에’ 존재한다. 소중한 사람을 불의에 잃어버린 고통은 모든 할 말조차 앗아가기 마련. <기담>은 타인과의 나눔이 불가능했을 최초의 상실감을 직접 언급하는 대신, 상실감이 초래한 파국의 세계를 다양한 악몽의 형태로 과장되게 묘사하는 쪽을 택한다.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과거의 심리적 고통이 절절히 피부에 와 닿는 이유는, 그 과장이 끊기는 부분, 그러니까 묘사와 묘사 사이에서 찾을 수 있다. 긴장과 이완을 오가며 공포를 증폭시키던 리듬은 어느 지점에 이르러 호흡을 멈추고는, 극도의 외로움이 몰고 온 구슬프고도 애잔한 리듬에 마침내 자리를 내어준다. 꿈에서 깨는 순간이자, 상실의 애통함이 현실에서 다시금 환기되는 지점이다. ‘쓸쓸하구나’라는 마지막 대사는, 꿈에서 깼을 때 읊조릴 수 있는, 아마도 유일한 말일 테다.

시대 자체가 ‘상실의 시대’인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삼고도 그것을 잘 활용하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 아쉽지만, 어쨌거나 순수 공포라는 관념에 상당히 근접했다는 점에서 <기담>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스크린에 ‘비정상’을 전시하고 놀래고 타자화하며 무섭다고 호들갑 떠는 영화들과 달리, <기담>은 상실이 낳은 비극의 입체화를 통해 평범한 일상에도 공포의 씨앗은 늘 잠재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삶과 죽음, 또는 기쁨과 슬픔 사이에 경계는 사실상 없으며, 확실한 것은 삶의 불확실성뿐이라는 역설. 무서움을 경유해 안타까움으로 접어들었던 <기담>이, 언제든 다시 무서운 얼굴로 돌아올 수 있는 이유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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