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곳, 내 방 한쪽 벽에는 언제부터 거기에 존재했는지 모를 액자 하나가 걸려 있다. 검푸른 색채로 넓게 펼쳐진 우주공간과 그 구석구석을 누비는 사이좋은 나비 한 쌍, 그리고 위쪽으로 무수히 박힌 반짝거리는 작은 별들이 그려진 그림. 나비들은 어두운 공간에 놓여 있지만, 그들을 향해 꾸준히 내려오는 별빛 덕에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듯하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빛의 입자를 잔뜩 머금은 채 그 푸르름을 과시중인 날개가 있지 않은가. 둘이 함께하니 외롭지 않아 좋을 것이고, 노닐기 알맞은 조명이 비춰주니 지루할 틈도 없을 테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막 그림으로부터 어떤 강렬한 시선이 내게 건네지기 시작했다. 그림이 제 몸을 하나둘 액자 너머로 흘려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기체가 된 듯 내 방 곳곳으로 스며들어오는, 그림의 색깔과 형체들. 내 몸을 살짝 보듬은 별빛이 바닥으로 유유히 떨어지고, 춤추던 나비들은 속삭이듯 내게 말을 건네고는 이내 다시 자유로운 궤적을 그린다. 액자와 방 사이의 물리적 경계는 그렇게 지워졌다. 나는 지금, 그림이 쳐놓은 어떤 마법적 자장 안에 놓인 셈이다.

때마침 나비 한 마리가 내려와 내 어깨 위에 살며시 앉는다. 그러더니 이 녀석,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나도 따라 고개를 돌려 녀석을 쳐다보기로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나비의 얼굴이 어쩐지 낯익다. 녀석의 얼굴, 내 얼굴과 닮았다. 아니 얼굴만이 아닌 모든 부분이 나와 같지 않은가. 이 나비는 지금, 곧 나다. 그렇다면 내가 바로, 나비였던가. 앗! 눈이 떠진다. 방금 전의 마법 같은 공간이, 나비가, 별빛이, 스르르 사라진다. 벽에 걸린 그림은 묵묵함으로 일관한다. 나는 그저 낮잠을 즐기고 있었을 뿐이다. 모든 게 꿈이었나 보다. 그런데 등은 왜 이리 시근대는 거지. 날개라도 돋으려나. 풋. 하지만 꿈치고는, 너무도 선명한 꿈.

이상. <별빛 속으로>를 본 후 몹시도 ‘꾸고 싶어진’ 꿈.



이야기 속 이야기, 그리고 그 속이야기 속 이야기. 또 다시 그 속으로의 이야기. 그렇다. <별빛 속으로>는 명백히 중층의 액자구조로 이루어진 영화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액자 안 그림들(각 이야기들, 또는 꿈, 초현실)은 방 한쪽에 걸린 채 감상되기만을 기다리는 그런 종류의 그림이 아니라는 것. 대신에 <별빛 속으로>는 ‘감상되기’라는 경로를 거스르는 역동적 차원에서 그림들을 이해하려 한다. 자체적인 시선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깥으로 자유롭게 흩날릴 줄도 아는, 일종의 살아있는 존재로 말이다.

이를 통해 <별빛 속으로>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초현실과 현실 사이의 쌍방향적 소통 가능성이다. 물론 관건은 소통을 대하는 개인의 태도에 있다. 가상세계가 침투할 만한 공간을 내 안에 마련하면 할수록, 이른바 ‘꿈과의 대화’가 실현될 가능성은 더욱 커지는 셈이다. 초현실적 상상과의 부단한 만남이 삶 속에서 어떤 유연한 리듬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렇다면 내 몸에 ‘틈’을 열어두는 데 보다 관대해지자. <별빛 속으로>에서처럼, 꿈은 스며들만한 틈이 있는 곳을 향하기 마련이니까.

꿈과 나와의 은밀하되 즐거운 동거. 기적을 피워 올리기 위한 첫 단추는 거기서부터 꿰인다. 예컨대 죽음마저 함께한 사랑이야기가 한 남자의 잠재된 정념을 흔들어 깨우고, 그 깨워진 정념이 시와 사랑의 긍정적 역량을 믿게끔 해주며, 이 일련의 과정이 나아가 실재적 구원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별빛 속으로>의 마법들처럼 말이다. 자, 이제 이 모든 것을 ‘영화’라는 액자 안에 담아두게 된 당신에게 기적이 찾아올 차례다. 시멘트를 비집고 땅 위로 기어이 올라선 한 송이 꽃의 힘을, 당신이 믿는다면.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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