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는, 누구나 알지만 주인공만 모르는 호러 문법 ― 낯선 곳에 가면 죽는다 ― 에 관한, 꽤나 신선한 변주다. 이 영화에서의 낯선 곳은 '타락한' 젊은 세대를 질책하는 미친 아버지의 공간도, 불특정 다수에게 복수를 감행하는 돌연변이의 장소도 아니다. 익숙한 살인마 아이콘들을 대신해 <세브란스>의 낯선 공간을 점령한 주체는 이른바 '테러리스트'라 불리는 자들. 따라서 <세브란스>에 등장하는 '숲'은 장르적 관습으로서의 무대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올바름으로 위장한 실제 폭력이 그 양상을 드러냄직한 임의의 장소라고도 할 수 있다.

폭력의 합당성을 부르짖는 정치적 수사들 뒤에 거대자본의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음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내 폭력은 정당하다.'를 외칠 때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내 폭력도 정당하다.'는 동어반복의 메아리일 뿐. 이 오고가는 피의 메아리들을 앞에 두고도 기꺼이 웃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아마도 폭력의 과소비 덕에 소득을 창출하는 자, 이를테면 무기판매상 정도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닐 런지.

이런 현실을 고려할 때, <세브란스>가 세계적인 무기회사를 공포의 한 근원으로 삼은 것은 충분히 타당한 설정으로 보인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자며 마치 공익캠페인처럼 무기 광고를 늘어놓는 그들이지만, 정작 폭력의 연쇄가 끊이지 않기를 가장 바라는 것 또한 그들 몫일 테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에 강력한 정치적 사유를 요구하는 장치나, 무기회사와 폭력 사이의 고리를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담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브란스>는 원인 찾기보다는, 그 결과물로 나타날 법한 지독한 상황을 장르적 공간 안에서 마음껏 비틀고 부풀리는 데 관심을 두는 영화다. '그들을 테러리스트로 규정지을 수 있는가?' 혹은 '무기회사 직원들은 왜 희생당하는가?'와 같은 질문이 끼어들 틈은, 그래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 틈을 대신 메우는 것은, 워크숍에 참가했다가 언제 어떻게 목숨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 개인들과, 그들을 둘러싼 당황스러운 공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아이러니한 웃음들이다. <세브란스>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의 무게를 무리하게 짊어지지 않고, 다소 멀리서나마, 그 현실을 놀릴 줄 아는 재기발랄함 같은 것 말이다. ⓒ erazerh


# 물론 탄환의 소비만을 중시했을 뿐 발사된 탄환이 어디에 꽂힐지에는 무관심했던 사장님한테는, 응당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일종의 프롤로그 같은 <세브란스>의 첫 시퀀스가, 그 역할을 나름대로 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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