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내부의 수직적인 질서가 굳건해야 한다고, 종종 믿긴다. 이 믿음이 강하게 작용할수록 구성원 간 소통이 일방향 일색으로 흐를 가능성은 더 크다. 창조적 사고 따위를 주고받는 것이 흥미로울 리 만무하다. 적자생존. 논의할 줄 아는 사람은 떠나고, 명령을 전달하거나 수행하는 데 충실한 기계적인 개체만이 남겠지.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을 그 안에서 찾는 것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될 테고.

이 즈음 되면, 갈 길을 잃은 채 제 몸집만 불리고 있는 욕망 덩어리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시스템은 이 난폭한 녀석을 낳았지만, 방관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자식을 부정하는 순간 어미도 무너지니까. 그래서 동원되는 것이 '은폐'이고 '위장'이다. 시스템은 굳게 믿는다. 그것만이 메스를 대지 않고도 내 몸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공포의 재생산'은 그 중 가장 효과적이고 유서 깊은 정책이다. 임의의 울타리를 치고 그 바깥 존재들에 '공포'라는 혐의를 씌움으로써, 현재 시스템의 필연성을 역설하는 식이다. 욕망이 선(善)의 실현을 위한 정신으로 포장되고, '다름'이 '우열'로 치환되는 일은 그렇게 해서 벌어진다. 시스템의 생존기는, 종종 이토록 악랄하다.

요컨대 울타리는 늘 임의로 쳐지기 마련이다. 내가 그 바깥에 있는지 안에 있는지 헤아리는 것은 일종의 코미디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내 위치가 아니라 태도다. 이를테면 울타리의 폭력성을 감지하려는, 그래서 시스템의 불투명성을 늘 의심할 줄 아는 태도. 미국의 국가적 폭력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가에 관한 다큐멘터리 <택시 투 더 다크 사이드>는 바로 그 태도의 일환이다. 많은 부조리한 시스템들이 미 국방 시스템을 표본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꽤나 의미심장하다. 울타리에 동의하고 그 안에 속하는 데 만족하는 자체로 당신은 괴물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는 의미. ⓒ erazerh


덧, 대한민국의 비극. 그 같은 시도가 불온할 뿐만 아니라 피곤하다고까지 믿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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