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기억 속으로 들어가다

누구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기억은 각각 에피소드가 되어, 지나온 시간들을 채워 넣고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낸다. 가끔씩 기억의 한 조각을 끌어내고서 그 때 이렇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낄 때가 있다.

자신의 삶에 백 퍼센트 만족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다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이 현실의 불만족스러운 부분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 돌아갈 수는 없으되 머릿속에는 남아있는 기억의 파편들 때문이다.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내는 이 같은 욕망에서 출발하는 영화가 바로 <나비효과(The Butterfly Effect)>다. ‘나비효과’는 중국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에서 허리케인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이론으로, 작은 변화라도 나중에는 커다란 결과를 불러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를 바꾼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J. 마키에 그러버와 에릭 브레스가 공동 각본, 감독한 영화 <나비효과>는, 한 청년이 현재 삶의 잘못된 부분을 바꾸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기억들에 관여하는 이야기를 줄기로 한다. 시, 공간을 초월하는 여정인 셈이다.

<백 투 더 퓨처>에서부터 <레트로엑티브>, 약간 틀리지만 <사랑의 블랙홀>까지 어떤 목적을 위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시간의 흐름에 인위적으로 개입한다는 내용은 꽤나 익숙하면서도 흥미를 주는 소재다.

<나비효과>가 과거로 되돌아가기 위해 설정한 도구가 타임머신과 같은 과학적 기구가 아닌 일기장(혹은 영상물), 즉, 기억의 흔적이라는 점은 위의 다른 영화들과 선을 그을 수 있는 부분이다.

어린 시절의 에반(에쉬튼 커처)은 일기장에 하루하루의 기억을 기록해 놓는다. 어떤 충격적인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순간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병을 앓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된 에반은 자신의 일기를 통해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음을 발견하고 어릴 때 짝사랑했던 캘리(에이미 스마트)의 운명을 바꾸고자 비어있는 시간으로 자신을 돌려보내기 시작한다.


어릴 적 기억하지 못했던 그 텅 빈 시간은 어른인 에반이 돌아와 직접 관여할 수 있는, 또는 이미 관여했던 틈이 된다. <나비효과>는 에반이 과거의 시, 공간으로 들어와 새롭게 개입함으로써 현재의 모습들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에피소드처럼 나열한다. 하지만 뜻하는 바와 달리 캘리와 다른 친구들, 그리고 자신의 삶 등 모든 부분에 균형잡힌 행복을 가져오기가 쉽지만은 않다.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는 긴장감

처음으로 과거를 바꿀 때, 그러니까 에반과 캘리가 아동 포르노를 찍어야 했던 순간을 바로 잡고 현실을 재구성할 때만 해도 영화는 긴박한 흐름을 간직한다. 하지만 바뀐 현실이 다른 불행을 낳고 또 다시 일기장을 찾아 기억을 더듬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면서 에반의 절박함은 긴장의 끈을 놓아버린다.

어린 시절 하나의 경험만으로 네 사람의 삶과 성격이 송두리째 바뀐다는 설정은 후반부에 다다르면서 운명의 재배치가 필연적이라 설득하던 초반의 감을 조금씩 상실한다. 나비효과 이론을 감안하더라도, 개개인 스스로 자신의 삶을 충분히 꾸려나갈 수 있다는 여지에 대해서 영화는 지나치게 침묵한다.


무엇보다도 <나비효과>가 창녀와 대학생, 살인자와 대학생 등 삶을 제한된 이분법의 신분 구조 안에서만 설명, 기억으로부터 상상되는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포함하지 못한 채 과거 개입이라는 흥미 있는 장치를 에반의 선택을 강요하는 극단적 영역 안에서만 활용하는 점은 아쉽다.

에반의 선택은 결국 ‘사랑하는 이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는 관습적 테마를 ‘또 다시’ 불러온다. 그럭저럭 맛은 있을지 몰라도 새로운 것은 없다.

<나비효과>는 다른 엔딩을 가진 두 가지 버전으로 제작되었다. 감독판은 극장판이 버리지 못한 로맨스의 여운에서 약간 비켜나 또 다른 범주로 결말을 끌어낸다. 그렇다고 지금 말한 아쉬운 부분이 모두 채워지진 않지만, 어찌되었든 감독판을 스크린에서 만나지 못하는 현실은 조금 안타깝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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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트 이블 2...

할 말 별로 없는 영화...

1편이 그립다...

그림은.. 잘 나온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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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려내는, ‘슬픈 욕망들’의 교차점


우리 모두는 삶이라 불리는 제한된 시간 속에 있다.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몫에 집중하느라 모르는 사람의 삶에까지 일일이 관심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여기,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삶(또는 죽음)에 잠시나마 주목하게 해줄 ‘드라마’ 한 편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들려준다. 벌새 한 마리, 초코바 하나, 5센트 동전 다섯 개, 사람이 죽을 때 빠져나가는 그 무게들이 모두 21그램이라고. 21그램은 과연 어느 정도의 무게일까?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21그램(21Grams)>은 다소 독특한 화법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연하게 발생한 교통사고. 아무런 관계없이 살아가던 세 사람은 이 사건으로 인해 서로 얽히고 원치 않았던 고통이 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다. 영화는 이 아픔들, 그리고 거기에서 빠져 나오고자 몸부림치는 ‘슬픈 욕망들’의 교차점을 그려내며,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영혼'의 무게를 저울질해본다.


누군가와의 ‘관계’는 아픔을 수반한다

<21그램>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의 사고로 여러 가지 상황이 생겨나고 또 이 상황들은 세 사람의 인간관계에 변화를 가져온다. 슬픔과 상처로 가득한 내면은 위로하려는 마음, 위로 받으려는 마음, 또는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 등을 거치면서 스스로를 치유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관계가 생성되거나 기존의 관계가 깨어진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상실해버린(혹은 그 상실로 소중한 것을 얻은) 이들은 결국 또 다른 이들에게 상실을 남긴 채, 그 슬픔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누군가와 소통하며 산다. 이 관계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낳기도 하지만 결국 인간은 그 고통마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으로 끌어들인다. 어쩌면 <21그램>은 슬픔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에서 비롯하는 필연적인 고통을 말하려는 지도 모르겠다.


편집 -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

<21그램>에서 가장 관심거리가 되는 부분은 역시 편집이다. 시간 흐름에 어긋나는 신(scene)들이 배치되면서 영화의 초반, 사건 전개를 따라잡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신과 신을 시간 역순으로 배치하고 나중에 가서야 그 모든 인과관계를 바로 잡는 <메멘토>에 비하면, 이 영화의 시간 배열은 그나마 머리가 덜 아픈 편이다.

<21그램>의 독특한 편집은 관객과 ‘퍼즐’을 해보자고 내놓은 것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편집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툭툭 던져졌던 신들은 중반 즈음해서, 관계의 변화와 이에 따른 갈등의 전개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데 도움을 준다. 영화 초반, 시간 흐름을 방해하던 그 장면들이, 각자의 고통이 어디서 교차하고 어떻게 귀결될 지에 대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관객은 한 장면이 전개될 때 그 과거는 물론, 미래까지 감지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 신마다 나타나는, 감정의 섬세한 흐름이 보다 더 강조된다. 감독은 시간 순서에 따른 원인, 결과가 아닌, 운명의 무게에 짓눌린 인간이 감정을 폭발하고 흐느끼는, 그 순간순간에 벌어지는 관계를 조합함으로써 극을 이끌어 나간다.

<21그램>에서 시간은 쪼개지지만 그 조각난 시간 사이에 있는 삶의 모습은 면밀하게 연결되어 인과관계의 틀을 완성해낸다. 시간 순서가 아니라 감정의 굴곡들이 영화를 전개하는 것이다.

이 같은 편집의 효과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배우의 연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숀 펜, 베니치오 델 토로, 나오미 왓츠 등 모든 배우가 삶과 죽음 앞에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감정을 완벽하게 재현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거쳐 <21그램>에 이른 나오미 왓츠는, 배우로서 최고의 전성기에 접어든 듯 훌륭한 연기를 선보인다. 앞서 말한 두 배우는 물론 말할 것도 없다.


질문을 남기다

영화 <21그램>은 탄탄한 드라마트루기와 이를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편집 등 감독과 배우의 역량이 잘 조화된 작품이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새롭고도 흡입력 있는 플롯으로 삶이라는 무대가 그려내는 갖가지 감정의 분출을 밀도 있게 집어낸다.

21그램이 오가는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여정이 빚어내는 다양한 관계와 감정에 관한 이야기 <21그램>. 영화는 분명 시간, 공간적으로 허구지만 <21그램>의 디제시스는 우리가 현실에서 느끼는 아픔들을 그대로 담아낸다.

싫든 좋든 우리는 삶과 죽음이라는 절대명제 앞에 던져진 존재다. 결국은 끝나야 할, 인생이라는 시간과 공간. 그 안에서 우리가 얻는 것과 잃는 것, 그리고 우리가 지키려고 애쓰는 ‘영혼’이라는 것에 대해 <21그램>은 ‘생각’해볼 것을 권유한다.

21그램이라는 무게는 가벼울 수도, 무거울 수도 있다. 21그램이 무거워진다면, 그것은 아마도 매우 슬픈 순간이 될 것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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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 반 산트 감독, 그의 최고 걸작을 만들다


집안에 거대한 코끼리가 들어앉았다. 어떻게 하긴 해야겠는데 손쓰기가 쉽지 않은 상황. 결국 어쩔 수 없이 코끼리와 함께 살며 그 상황에 점점 익숙해진다. 구스 반 산트는 미국의 고등학교를 서양우화에 나오는 코끼리에 비유한다.

영화 <엘리펀트(Elephant)>는 '어쩔 수 없는 코끼리'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충격의 16분을, 감정이입을 최대한 자제한 채 그야말로 '관조적'으로 뒤쫓는다.

영화 속 아이들은 특별하지 않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에 대해 고민하며 눈물 흘리는가 하면, 학교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사진 찍는 것이 낙인 녀석도 있다. 다이어트 중독에 걸린 세 명의 치어리더나 외모로 인해 고통 받는 여자아이 등 모두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고등학생들의 그렇고 그런 삶의 모습이다.

심지어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알렉스와 에릭조차 평범한 아이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왕따를 당하고, 게임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며, 히틀러의 영상을 보기는 하지만, 영화는 이런 상황을 살인의 동기로 단정 짓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누구나 총을 살 수 있는 환경 역시 하나의 ‘단서’이지 원인은 아니다.

영화는 비극과 그 직전의 ‘아무렇지도 않음’을 그저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나와 당신이 어디에서나 만나고 겪을 수 있는 이 아이들의 일상은 ‘추악하고도 화창한 어느 날’에 일그러진다.

같은 콜럼바인고교 사건을 다루었지만 마이클 무어와 구스 반 산트의 표현기법은 다르다. 마이클 무어가 미국에 내재하는 폭력성을 분석하고 따져 묻는 반면, 구스 반 산트는 그저 아이들을 차분히 응시한다. <볼링 포 콜럼바인>이 잘 짜여진 논설문 또는 거꾸로 읽는 미국사라면, <엘리펀트>는 건조체로 쓰여진 한 편의 시다.

숏들은 평범한 생활을 담담하게 담고, 절제된 카메라와 어우러져,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을 마치 ‘간직’하려는 듯이 각각의 시점에서 교차하고 반복된다. 구스 반 산트는 시간과 공간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하나하나 훑어보면서 그 모든 것들이 일상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야 했음에 주목한다. ‘왜 비극이 발생했는가?’라는 물음은 화면 밖에 남겨둔 채 말이다. 앙드레 바쟁이 살아있었다면 진정한 ‘창조적 다큐멘터리’라고 극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엘리제를 위하여'와 '월광 소나타'의 슬픈 연주는 롱테이크로 반복해보지만 결국은 비극 앞에 멈춰 서야만 하는 아이들에 대한 애도이자 관객이 감정을 소통할 수 있는 입구이다.

집안의 코끼리처럼 어쩌지 못한 채 함께 가야 할, 가끔은 터질 수도 있는 시한폭탄으로 자리 잡은 미국의 고등학교. 구스 반 산트는 한 학교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을 차분하면서도 슬픈 화법으로 재현함으로써, ‘아무렇지도 않게’ 시작된 그 광기의 순간을 고발하고 애도한다.

'월광소나타'가 그토록 슬프게 들리는 이유는, 미국의 코끼리 못지않은 어떤 무언가를 당신과 내가 짊어진 채 살아야 하는 비극 때문이 아닐까? 영화 안에서도 영화 밖에서도, 하늘은 여전히 추악하고 화창하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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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만남, 서로의 빈 공간을 들여다보다


남녀관계에 대한 물음은 문학, 연극, 회화 등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한 창작물들이 가장 꾸준하게 다루어온 소재 중 하나다. 영화도 예외는 아니어서 딱히 로맨스나 멜로가 아니더라도 이성관계를 영화의 축으로 삼는 설정은 매우 낯익은 일이다.

이는 아마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모든 인간관계의 중심에 자리 잡은, 가장 근원적으로 욕망되는 소통의 활로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그 모든 문화예술이 여전히 ‘사랑이 무엇인가’에 관해 계속해서 질문해오는 것은 남녀관계가 그만큼 정의내리기 어렵고 본질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증거가 아닐까.

9년 전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사랑에 관해 짧은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줬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는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의 짧지만 열정 가득했던 하룻밤의 만남을 통해, 20대가 가질 만한 삶과 사랑에 대한 개념들을 차근차근 모아 솔직담백한 대화 속에 담았다.

<비포 선라이즈>는 사랑, 인생, 죽음을 결코 무겁지 않게, 그렇다고 가볍지만도 않은 독특한 화법으로 풀어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결론나지 않았지만, 낯설음과 사랑, 절제와 본능 간 경계를 오가며 극중인물과 관객의 감정을 묘하게 엮어내는 대화의 미학은 여전히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다시 대화하다

그리고 9년이 지난 지금, 링클레이터는 <비포 선셋(Before Sunset)>을 가지고 다시 나타났다.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가 함께 각본에 참여했다니 <비포 선라이즈>가 남긴 여운이 관객만의 것은 아니었나 보다.

9년이라는 세월은 두 사람에게 변화를 가져왔다. 꿈 많던 청년 제시는 작가가 되었고 셀린은 환경단체에서 일하며 ‘실천’의 삶을 살고 있다. 9년 전 비엔나를 모티브로 쓴 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제시는 파리에서 아주 우연히(!) 셀린을 다시 만난다. 약간의 서먹함을 뒤로 한 채 그들은 두 번째 만남을 시작한다.

<비포 선셋>은 <비포 선라이즈>와 어떤 면에서는 닮았고 어떤 면에서는 다르다. 대화는 여전히 열정적으로 영화를 끌어 나간다. 대사 한마디 한마디는 서로가 부재했던 9년이라는 시, 공간을 약간이라도 채워넣고 싶은 소통의 욕구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이 대화들은 프레임 밖으로 나와 관객에게 함께 호흡할 것을 요구한다.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 지나온 삶의 여정, 사랑과 섹스에 이르기까지 토론과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제시와 셀린이 동시에 깨닫는 것은 9년 전 비엔나가 각자에게 남긴 상실감이다. 이 상실은 시간이 긁고 지나가면서 생긴 삶의 상처들과 뒤엉켜, 그들의 영혼이 서로의 그림자 안에서 맴돌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한 편의 그림같은

영화는 줄곧 제시와 셀린을 보여준다. 물론 예전처럼 순수하거나 꿈에 젖어있지는 않다. 아마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현실이 그들의 이상을 하나씩 집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롱테이크로 두 사람을 따라다니며 파리 이곳저곳을 보여주지만, 이 역시 예전의 비엔나처럼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하지만 평범하고 차분한, 오후 햇살이 따사로운 파리의 전경은 언제부터 흘렀을지 모를 세느강처럼 여전히 피토레스크(그림의 대상이 될 만큼 아름다움)로서 기능한다. 9년 전 추억을 마음 한구석에 접어둔 채 살아온 두 사람이, 과거를 회상하고 상처를 내보이며 서로의 시간을 포개는 순간, 그림은 어느덧 완성된다.

<비포 선셋>은 인상주의의 감성을 지닌 영화다. 삶의 한 순간을 붙잡고 그 시간과 공간의 감정을 그려내는 점도 그렇지만, 오후의 햇빛이 세느강과 셀린의 머리 위에 뿌리는 빛을 보노라면 <비포 선셋>의 프레임은 마치 모네의 작품처럼 느껴진다.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 사이의 간극은 제시와 셀린만이 가지는 시간이 아니다. 이는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기억이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때로는 추억으로 때로는 파편으로 채워온, 삶의 단면들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듯, <비포 선셋> 역시 사랑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 남녀사이에 어떤 답을 내리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을 전제로 하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링클레이터 또한 어떤 결론이나 철학을 내보일 생각은 없는 듯하다. 영화는 한적한 오후 마냥 그렇게 사랑, 인생, 세상을 이야기한다.

셀린의 ‘Let me sing you a waltz'를 듣고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제시. 은은한 미소가 입가에 퍼지고 나도 모르는 눈물이 살짝 맺힐 때, 비로소 영화는 최고의 맛을 선사한다. <비포 선셋>은 아주 적절한 시기에 우리 곁으로 돌아온, 제대로 된 ’속편‘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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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외인간 (Rabid, 1977)
감독 : 데이빗 크로넨버그
출연 : 마릴린 챔버스


10여년 전, '숨은 영화'찾기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매니아로서 임무라 생각했기에 하나하나 발견할 때마다 일종의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다.-_- 물론 그런 혼자만의 착각(?)은 전적으로 '키노'때문이었다.

뻔한 얘기지만, 그런 영화에는 '호러'가 빠지지 않는다. <네크로맨틱> 등을 어렵사리 구입했던 기억도 난다. 어찌해서 알게된 많은 호러작가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단연 '데이빗 크로넨버그'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신체와 기계를 미묘하게 엮어 그 경계로서 인간관계에 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영화들로 구성된다.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인간과 기계문명, 시스템의 모순을 가장 잘 파고드는 감독 중 한 명일 것이다.

다른 많은 호러영화와는 달리, <열외인간>은 아주 쉽게 구했다. 이상한 제목으로나마 이미 출시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주 구린 화질에도 나름대로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재발매했으니 보다 마음껏 즐길 수 있겠지만...

<열외인간>은 그 자체보다는, 전형적인 크로넨버그식 신체변형이 자리잡은 영화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물론 이 영화 역시 어느 정도의 '의미'는 보여준다. 남녀의 성기를 합한 것처럼 생긴 촉수가 불특정다수를 공격하고 지하철, 극장 등 일상적 장소는 순간 오염의 공간으로 바뀐다. 크로넨버그는 에로티시즘적 신체변형을 통해 대중의 이성을 불신하고 도시를 통제불능의 공간으로 묘사한다.

요즈음 관객이 보기에는 고어적인 면도 약하고 시시할 수도 있겠지만, 크로넨버그에 관심이 있다면 꼭 봐야할 영화다. (하긴 관심있는 사람은 벌써 봤을 듯...) ⓒ erazerh

* 크로넨버그의 최고 걸작 <비디오드롬>, <데드링거>는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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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순환고리에 갇힌 네 남자


누군가는 <무간도>를 일컬어 홍콩영화계를 무덤에서 건져 올린 작품이라 불렀다. 80년대와 9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는 물론 전아시아적인 지지를 받던 홍콩영화의 몰락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속도와 소비만을 절대적으로 강요하는 자본논리와 이에 따른 무차별적 자기복제는 중국반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맞물려 홍콩영화를 침체의 나락으로 몰아넣었다.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던 홍콩영화계가 다시 한번 산업적 활로를 모색할 수 있는 계기된 것은 바로 <무간도>시리즈였다.

<무간도>시리즈는 기존 홍콩느와르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결별로써 마무리되었다. 공동연출을 맡은 유위강과 맥조휘는 홍콩의 아이콘이기도 했던 느와르의 영웅들을 비장미 대신 공허함과 허무의 구조로 몰아넣고, 홍콩 또는 홍콩영화계의 정체성에 대해 혼돈의 물음표를 던졌다.

황정보 감독의 <강호(江湖)>는 ‘당연히’ <무간도>를 등에 업는다. 느와르를 표방하는 것 외에도 유덕화, 여문락, 진관희 등 배우들까지 고스란히 <무간도>와 닮아 있다. 영화 <강호>는 무림강호들의 무공대결을 현시대로 옮겨놓는다. 무공대결은 조직세계의 섭리를 몸소 터득한 두 남자가 생존과 의리를 놓고 벌이는 심리전의 공간으로 대체된다.

<강호>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공간에서 일어나면서도 서로를 닮은, 두 이야기의 교차가 내러티브의 핵심이라는 점이다. 그 하나는 홍(유덕화)과 레프티(장학우)가 엮어내는 미묘한 감정대립이고, 다른 하나는 말단 조직원인 윅(여문락)과 터보(진관희)가 꿈꾸는 신분상승의 욕망이다.

홍과 레프티는 삼합회를 이끌어가는 이른바 넘버 원/투의 자리에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전형적인 홍콩느와르적 관습을 따른다. 그들을 연결하는 ‘의리’라는 고리는, 여전히 폭력집단의 남성들이 연대할 수 있는 최우선의 법칙으로 기능한다. 비록 두 사람의 가치가 충돌하고 무엇이 진실인지 모를 신경전이 오가지만, 약육강식의 ‘비열한 거리’에서도 둘은 의리라는 끈을 놓지 않는다.

윅과 터보는 홍과 레프티처럼 되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단 한번의 기회에 목숨을 건다. 그들은 비틀거리면서도 하나의 욕망으로 힘을 결집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장치 역시 둘을 이어주는 끈끈한 의리의 관계다.

이 같은 두 가지의 이야기 축은 교차편집되다가 종국에는 하나로 합쳐진다. 감독은 두 세계가 만나는 그 순간에 이르러 네 사람을 묶고 있던 운명에 관해 이야기한다. 폭력의 순환고리를 맴도는 영혼들에게 다시 한번 ‘게임의 법칙’을 알려주면서 말이다. 좀 진부한 면이 없지 않다.


황정보는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강호>에는 감각적인 비주얼과 사운드가 가득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반복되는 슬로우/스톱/패스트 모션이나 생뚱맞기까지한 시점의 변화들은 내러티브나 주제와 어울리지 못한 채 단지 포장지 역할에만 그친다. 이미 과잉으로 흘러온 이미지들이 정작 필요한 순간에 그 효과를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감각적 이미지를 볼거리의 스펙타클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어떠한 이론이나 옳고 그름의 입장과는 상관없다. 말 그대로 ‘취향’ 차이가 드러나는 영역이다. 하지만 왕가위의 일련의 이미지들이 플롯의 정점에 위치한 채 영화의 다른 모든 부분과 창조적으로 교류한다는 점이나 과잉의 비주얼을 절묘하게 활용했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같은 선례를 떠올려보면, <강호>가 놓친 부분은 분명해진다. 황정보 감독의 영상미는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

<무간도>가 기존 홍콩느와르와 결별, 새로운 세계관을 그려낸 반면, <강호>는 <무간도>와 예전 느와르를 모두 표방하려다 길을 잃고 만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시도는 힘을 잃은 이미지들과 더불어 영화를 산만하게 만든다. 과유불급이다. <무간도>와 바통터치에 성공하는 영화를 기다려본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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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룡은 나오지만 '성룡표'는 아니다


성룡은 어느 정도의 고정 관객을 보유한 배우 중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성룡표 영화'를 기대하며 찾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영화가 지닌 '유쾌함' 때문일 것이다. 그 흔한 키스신이나 사랑얘기 한 번 안 나오지만 성룡의 영화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즐겁고 매력적이다. 기발한 세트에서 재기발랄하게 펼쳐지는, 위험천만하면서도 코믹한 액션은 성룡표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공식이 되었다.

하지만 프랭크 코라시 감독의 <80일간의 세계일주(Around The World in 80Days)>는 성룡 고유의 '사물 이용 액션'보다는 과장된 유머나 곳곳에 등장하는 카메오의 공세에 의존한다. 따라서 이전의 성룡 영화를 기준으로 본다면 다소 실망스러운 면도 없지 않다.

쥘 베른의 유명한 소설에서 제목과 등장인물을 빌려 왔지만 원작의 은근한 유머와는 다르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웃기려고 정신없이 노력한다. 코믹영화다운 대사가 반복되고, 필리어스 포그(스티브 쿠건)와 파스파투(성룡), 여기에 모니끄 라로슈(세실 드 프랑스)가 연합해 세계 각국의 카메오를 만나 좌충우돌해보지만 폭발적인 웃음은 끌어내지 못한다.


각 에피소드는 80일 안에 세계를 여행하는 데에 ‘올-인’한 포그의 마음처럼 급박하게 진전되다가, 파스파투의 고향인 중국 마을에서 갑자기 느슨해진다. 시장에서 싸게 살 수 있을 것처럼 생긴 ‘옥부처’와 이것을 기어이 고향까지 가져온 파스파투에 시간을 조금 허락해보지만, 큰 보람은 없다.

머뭇거리던 이야기는 중국을 벗어나자 다시 빨라지고 급기야 포그는 라이트 형제보다 조금 앞서 ‘날틀’(파스파투의 노가다로 움직이는)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세 사람의 80일간의 세계일주가 달성되는 순간, 가장 기쁜 사람은 어쩌면 관객 중 한 명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우리가 바라던 ‘아기자기 조마조마한’ 성룡표 코믹액션을 줄이는 대신 슬랩스틱과 캐릭터의 물량공세에 의존한다. 그러나 1억 달러가 넘는 제작비에 비하면 볼거리가 빈약한 편. <80일간의 세계일주>라는 다국적 프로젝트는 ‘성룡표’와 ‘과장된 유머’ 사이를 정신없이 오가다가, 결국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진보 과학에 승리를 선언, 어줍게 19세기 유럽을 끌어안는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이후 홍콩 출신 배우들의 영화 속 이미지는 반환 이전과 분명히 달라졌다. 활동 무대가 반환 이전의 홍콩, 아시아에서 세계로 변했기 때문이다. 성룡은 이들 중에서도 할리우드 자본력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적절하게 결합한, 꽤나 높은 경쟁력을 유지해온 배우다.

<턱시도>에서는 그의 액션이 테크놀로지에 묻혀 빛을 바랬지만, <러시아워>나 <상하이 눈/나이츠>는 성룡 특유의 액션과 재치를 기본으로, 버디 무디의 재미를 잘 버무린 분명한 성룡표 영화였다. 이에 비해 <80일간의 세계일주>는 다소 아쉽다. 성룡은 나오지만 그의 장기는 별로 발휘되지 않았으며, 왁자지껄한 코미디는 요란스러울 뿐, 성룡의 몸사림으로 인해 생긴 빈틈을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성룡의 팬으로서, 그도 어느새 쉰이라는 점을 인정하기 싫어서 일까. 다음에는 그가 몸은 사릴지언정(사실 54년생인 성룡이 여전히 이 정도의 액션이라도 보여주는 것에는 감탄할 따름이다) 특유의 재치만은 잊지 않기를 기대해본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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