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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라스 폰 트리에의 <백치들>(1998)을 다시 봤는데, 전보다 뭐랄까. 슬펐다. 예전 감상 때 느낀 너무 팔딱거려 감독의 통제 범위마저 넘어버린 듯한(혹은 그렇게 보이려는) 전복적 에너지보다, 그 변칙을 부여잡고 결국 바닥을 뚫고 내려간, 카렌의 붕괴가 더 강렬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분명 비윤리적이지만 더는 윤리 따위 통용되지 않게 된 세계, 카렌의 퇴행은 탈주든 회피든 뭐라 불리든 유니크하다. 그녀는 '백치 그룹'에서 탈영토화 상태에 놓인 유일한 인물이며 백치 행동의 유일한 실천적 계승자다.
백치화를 거친 깊은 절망과 고독감은, 엔딩에서 괴기하게 '내뱉어'진다. '나'라는 외피를 기어이 벌려 비집고 나가려는, 가족 앞에서의 기묘한 서커스. 카렌은 고통에서 도주하고자 그렇게 수치심조차 들러붙지 않을 무중력의 세계를 향한다. 누구 것인지 모를 서글픔으로 엔딩이 꽉 찼다.
영화도, 나도, 나이를 먹었나 보다. ⓒ erazerh
* 지금 보니 '알면서도 퇴행'이란 면에서, 비슷한 방향성의 영화들로 <미드소마>와 <셔터 아일랜드>가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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