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일기>가 관객과 평단에 외면 받는 이유는?


80억에 달하는 제작비, 5년이라는 총 제작기간, 흥행과 작품성 둘 다 보증할 수 있는 배우들의 출연, 그리고 남극. 상영 전부터 ‘남극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은 영화 <남극일기>가 오랜 작업 끝에 드디어 개봉됐다. 하지만 반응은 ‘의외로’ 꽤나 냉담한 편이다. 물론 호평이 없는 건 아니지만, 관객은 물론 평단에서조차 남극의 추위 못지않은 혹독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300만은 들어야 겨우 손익분기점을 넘어서는 대규모 영화에 100만이 든 시점에서 간판 내려야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니, 돈이 돌아야만 하는 제작계 일각에서는 <남극일기>를 일컬어 ‘재앙’이라고까지 부르는 상황이다. 도대체 ‘왜’ <남극일기>는 영화 안에서도 모자라 영화 밖에서도 이토록 가혹한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일까.


영화로 들어가 보자. 대장 최도형(송강호 분)을 비롯한 6명의 대원은 영하 80도에 낮 혹은 밤이 6개월씩 지속되는 남극, 그 ‘도달불능점’을 향해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그곳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는 질문에 최도형은 “우리 같은 놈들은 아무도 해내지 못할 것 같은 일을 할 때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는 극한의 상황을 넘길 때만 만끽할 수 있는 희열과 그것을 향한 숭고한 도전정신을 찬양하는 말인 동시에, 매우 위험천만한 가능성 또한 내포하는 말이다. 목표 달성을 위해 다른 사람의 고통 따위는 ‘큰일에는 희생이 있기 마련’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는 맹목적인 최면술이 그것이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도달불능점을 향한 의지가 점점 더 후자 쪽으로 기울어지며 처음의 목표는 기능을 상실한 채 비합리적이고 폭압적인, 강요된 헤게모니로 변질된다. 이는 개인의 이기심마저 개발이라는 명분 안에 숨기고서는 낙오자나 비판론자에게는 총칼을 들이댔던 지난 시절과 닮은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듯 <남극일기>가 설명하는 공포는 넘볼 수 없는 자연환경이 아닌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 그 허황된 논리가 몰고 올 파멸에 있다. 주로 인간승리의 무대로만 여겨져 왔던 광활한 남극을 소재로 이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니 꽤나 매력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좋은 재료라고 해서 무조건 맛있는 요리가 나오는 것은 아닌 법. 영화는 스스로 던져놓은 플롯들을 제대로 꿰매지 못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남극의 의미를 그려나가는 데서 결함을 드러내고 만다.

영화의 큰 줄기는 도달불능점을 향한 발걸음이지만, 탐험대를 미치게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치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먼저 왔던 이들과 같은 운명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80년 전 영국탐험대의 일기장 발견, 최도형의 기억이 함께 끌고 왔을 유령, 그리고 그 강박관념이 확장되어 만들어낸 폭압적 가부장 등이다. 살아있는, 혹은 살아있는 것처럼 제시되는 남극은 그것들과 맞물려 나름의 의미를 지녀야 한다.


그러나 <남극일기>는 이 같은 서브플롯들을 무슨 연유에서인지 결국 남극으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아이가 등에 매달린 환영이라든가 일기장, 유령의 목소리, 캠코더에만 비치는 하얀 손 등은 분명 낯익은 도상들이지만 이들 중 어느 것도 남극이라는 특수한 공간으로 상징되는 그 무엇을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한다. 단지 불친절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영화에서 남극은 분명히 탐험대를 관찰하는 시선(혹은 감정까지도)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 시선이 노골적으로 관객의 눈과 겹쳐진다는 데서 발생한다. 관객은 남극과 함께 크레바스처럼 곳곳에 숨어서 대원들을 노려보거나 밑으로 끌어내리며 매머드의 눈을 통해 남극의 존재를 확인하지만, 정작 그 시선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장르적 도상들은 ‘가야한다’는 강박관념과 뒤섞여 최도형을 미치게 하고, 최도형의 광기는 다른 대원에게 전이된다. 그래서 민재(유지태 분)는 “우리의 욕망이 여기를 지옥으로 만들었다.”며 자신들에게 남극은 결국 백색의 거대한 무덤에 다름 아니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시작부터 의도적으로 관객과 시선을 공유하던 그 시점은 끝끝내 정체불명으로 남는다. 장르물이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영화는 분명 장르적 기법에 의존하고 있다). 처음에 응시의 주체로서 등장했던 남극은 대원들의 욕망이 빚어낸 환영을 제 품에 간직했다가 떠나보내고는, 다시 그것들이 몰고 온 파멸의 결과물, 즉 객체가 되어 민재의 입을 통해 말해진다. 관객이 어리둥절한 이유는 같은 곳을 바라보던 남극이 모호한 흔적만 남긴 채 뜬금없이 대원들만의 남극으로 대치되었고, 서브플롯은 이 남극의 분열과 동떨어져서 활용되기 때문이다. 익숙한 장치들이 남극 곳곳에 배치되었음에도 관객의 남극은 자신만의 색깔을 할당받지 못한 채 결국 어둠과 함께 홀연히 사라지고 만다. 탐험대의 광기가 그곳을 미친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면 애초에 관객과 눈을 겹치는 시도는 자제했어야 했고, 이왕 눈을 겹쳤다면 진부하고도 어정쩡한 서브플롯이 아니라 남극 자체에 보다 많은 권한을 주었어야 했다. 원한의 근원을, 베트남이라는 공간이 갖는 역사적 사실에서 적절하게 추려냈던 <알포인트>를 생각해볼 때 아쉬운 부분이다.


막대한 제작비, 길고도 긴 제작기간, 이에 따른 서로 다른 목소리의 개입 등, 영화의 집중도를 흐려놓았을 바깥 환경 때문인지 영화는 가장 중요한 장치였던 남극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한다. 아쉬움을 남기기는 했지만, <남극일기>에는 내레이션 기술과 관계없이 주목해야 할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 모두가 구원을 이야기하는 요즈음이지만, <남극일기>는 보기 드물게도 극단으로 나아가 암전과 같은 허무를 기어코 끄집어내고, 그 파멸의 과정 안에 현대사가 남긴 잔상을 묵직하게 새겨 넣는다. 누군가의 광기어린 집착이 만들어낸 지옥도는 영화 텍스트에서만 존재했던가. <남극일기>의 허무는 어쨌든 진실의 그림자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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