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궁금한 것은 '도대체 왜 그랬느냐'는 점이다. 선우(이병헌)가 파멸로 가는 지름길임을 알면서도, 강사장(김영철)이 자신의 가혹한 명령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리라 예상할 수 있음에도 그 길을 선택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영화 표면에 드러나는 이유는 희수(신민아)라는 여성에서 촉발된 갈등이다. 따라서 <달콤한 인생>이 느와르를 표방한 영화임을 감안할 때, 그녀는 분명 팜므파탈에 위치해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기존의 장르적 도상과는 분명 그 괘를 달리하는 캐릭터다. 그녀는 죽음도 불사하게 할 만큼 성적 매력이 넘치지도, 남성의 이성을 마비시켜 나락으로 떨어뜨릴 만큼 뇌쇄적이지도 않다.

콘트라스트가 빚어내는 음울함, 거기에 걸맞은 차가운 피부와 새빨간 입술이 그녀에게는 없다. 따라서 그녀는 팜므파탈의 자리에 위치한 그것의 또 다른 변주에 가깝다. 붉은 피와 검은 정장으로 상징되는 우울하고 폭력적인 이미지들 속에서 희수는 유일하게 어둠에 물들지 않은 맑은 눈망울을 가진 인물인 셈이다.

결국 선우를 잡아끄는 힘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희수의 이미지 안에서 선우는 지금껏 알지 못했던(혹은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세상의 반대편을 발견한 것이다(아마 강사장도 그런 부분에서 희수에게 끌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영역에 속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 흔들림은 사랑의 밀고 당김이나 삶의 반성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서로를 향하는 총구 속에서 폭력의 광기로서 폭발한다(그들은 소통할 줄 모른다).

마지막 섀도우 복싱 장면은 선우가 죽음을 앞에 두고 나르시스트 마냥 우쭐되던 과거의 잘 나가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모습이라기보다는, 나른한 환상에 젖어있던 자신에게 보내는 씁쓸한 웃음에 가깝다. 달콤한 줄만 알았던 인생이 어긋나는 순간, 자신을 지탱하던 끈이 단단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선우는 파멸한다. 그래서 인생은 고통이며 너무 가혹한 것이 된다.

영화 <달콤한 인생>의 표면은 대단히 폭력적이지만, 그 이면을 채우는 것은 고통에 익숙해져서 인생의 달콤함을 찾을 줄조차 모르는 사람들, 폭력의 순환에 갇혀 소통 활로 자체를 놓쳐버린 사람들에게 보내는 동정(혹은 조소)의 시선에 다름 아니다. 김지운 감독은 분노와 복수에는 익숙하지만 사랑할 줄은 모르는(남은 물론 자신까지) 인간군상들, 그 치명적인 나약함이 몰고오는 필연적 파멸을 장르의 관습 안에서 비극과 희극을 넘나들며 적절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결코 유쾌하거나 친절한 방법으로 전달되지는 않지만, 그는 다시 한번 질문해온다. 과연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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